갑, 을, 병, 정, 무, 기, 경, 신, 이제는 북방 임(壬)과 천간 계(癸)만 남았다. 북방 임(壬)의 자원과 파생된 한자들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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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壬의 갑골문 1, 2, 금문 1, 2, 진(晉) 문자, 초 문자, 소전, 후한 예서. 출처: 小學堂
갑골문과 금문 1은 마치 지금의 장인 공(工)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고, 갑골문과 금문 2는 工과 구별을 위해 가운데에 점이 찍혀 있다. 진(晉) 문자는 이 점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고, 초 문자에서는 이 점이 가로줄로 죽 길어져 임금 왕(王)과 같은 모양이 되었다. 소전에서는 王과 구별하기 위해 가운데 가로 획을 위아래 가로 획보다 길게 뺐으나, 예서의 모양은 王과 같은 형태가 되었다. 결국 해서는 王과 구분하기 위해 소전에서 위 가로 획을 기울이는 변화를 주었다.
工과 구분하기 위해 점을 찍었더니 그 점이 길어져서 王과 같은 형태가 되었고, 결국은 工과 王에 치여서 壬은 자기 형태를 이래저래 바꿔가며 살아남았다.
壬이 무엇을 본뜬 것인지는 정설이 없다. 린 이광(林義光)은 방직 도구의 일종으로 잉아 승(榺)의 고문으로 보았고, 리 쉐친도 《자원》에서 비슷한 추측을 했다. 그러나 이 한자도 여러 간지 글자가 그렇듯이 갑골문부터 이미 천간 글자로만 쓰이고 있어 원 뜻을 추측할 실마리가 없다. 《시경·소아·빈지초연》에서는 “갖가지 예가 갖추어졌으니, 크고도 많구나”(百禮旣至, 有壬有林)라는 구가 있는데, 여기에서는 壬이 '크다'라는 뜻으로 쓰였다. 《자원》에서는 壬이 아홉째 천간으로, 9가 가장 큰 수이기 때문에 성대하다는 뜻이 인신되었다고 했다. 위키사전에서는 어깨에 메는 멜대를 90도 돌린 모습을 본뜬 것이라 했고, 이에서 맡길 임(任)·아이밸 임(妊) 등이 나왔다고 보았다.
《설문해자》에서는 “북방 자리를 뜻한다. 음이 지극하니 양이 태어난다. 그러므로 《역경》에서는 '용이 들에서 싸운다.'라고 했는데 싸운다[戰]는 곧 교접한다[接]는 뜻이다. 사람이 회임한 것을 나타낸다. 해(亥) 다음을 이어 아들을 임신하는 것이므로, 태어남의 순서다. 무당 무(巫)와 같은 구조다. 壬은 辛의 뒤를 이어 사람의 정강이를 나타내는데, 정강이는 몸이 기대는[任] 것이다.”라고 풀이했다. 아이밸 임(妊)과 맡길 임(任)을 토대로 壬을 설명하려고 한 시도가 보인다.
壬이 들어가는 간지는 임자(壬子), 임인(壬寅), 임진(壬辰), 임오(壬午), 임신(壬申), 임술(壬戌)이 있다. 이 중 한국인이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 없는 간지가 임진이다. 1592년 임진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통치하는 일본이 조선을 침공한 임진왜란 때문이다. 일본은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어 전군 퇴각을 명령하기 전까지 조선을 유린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사로잡아 갔다. 조선은 비록 단 한 뼘의 땅도 일본에 허락하지 않았으나, 만 6년하고도 일곱 달 동안 나라가 전장이 되어 받은 상처는 지금까지도 잊을 수가 없다. 이 외에도 1882년 임오년에 일어난 임오군란, 1862년 임술년에 일어난 임술민란 등의 사건 등이 천간이 壬인 임년(壬年)에 일어났다.
《자원》에서는 壬이 음이 비슷한 아첨할 녕(佞)과 상통해 아첨하다는 뜻으로도 쓰인다고 나오며, 국어사전에서도 이 뜻으로 壬이 쓰인, 아첨 잘 하는 소인을 가리키는 임인(壬人)이란 말이 있다.
壬(북방 임, 임진왜란(壬辰倭亂), 병좌임향(丙坐壬向: 터가 병방을 등지고 임방을 향한 형태), 어문회 준3급)에서 파생된 한자들은 다음과 같다.
壬+人(사람 인)=任(맡길 임): 임무(任務), 책임(責任) 등. 어문회 준5급
壬+女(계집 녀)=妊(아이밸 임): 임신(妊娠/姙娠), 피임(避妊/避姙) 등. 어문회 2급
壬+糸(가는실 멱)=紝(짤 임): 직임(織紝: 길쌈하는 일, 또는 그런 사람) 등. 급수 외 한자
壬+衣(옷 의)=衽(옷깃 임): 임석(衽席: 요, 또는 부부가 동침하는 잠자리), 좌임(左衽/左袵: 미개한 상태. 한족이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북방의 비한족을 미개하다고 여긴 데서 나온 말) 등. 어문회 특급
壬+言(말씀 언)=䚾(생각할 임): 인명용 한자
壬+食(밥 식)=飪(익힐 임): 임부(飪夫: 조선 때, 사옹원에 속한 정구품 잡직), 팽임(烹飪: 삶고 지져서 음식을 만듦) 등. 인명용 한자
任에서 파생된 한자들은 다음과 같다.
任+女(계집 녀)=姙(아이밸 임): 임신(妊娠/姙娠), 피임(避妊/避姙) 등. 어문회 준특급(妊과 동자)
任+心(마음 심)=恁(생각할 임): 윤행임(尹行恁: 정조 때의 문신으로 신유박해 때 투옥돼 죽음) 등. 어문회 준특급
任+衣(옷 의)=袵(옷깃 임): 우임(右衽/右袵: 저고리의 오른쪽으로 덮은 섶, 또는 그런 저고리), 좌임(左衽/左袵) 등. 어문회 특급(衽과 동자)
任+艸(풀 초)=荏(들깨 임): 임자(荏子: 들깨), 흑임자(黑荏子) 등. 어문회 준특급
任+糸(가는실 멱)=絍(짤 임): 인명용 한자(紝과 동자)
任+言(말씀 언)=䛘(믿을 임): 인명용 한자
任+貝(조개 패)=賃(품삯 임): 임금(賃金), 운임(運賃) 등. 어문회 준3급
任+金(쇠 금)=銋(젖을 임): 인명용 한자
任+鳥(새 조)=鵀(대임 임): 대임(戴鵀: 후투티) 등. 급수 외 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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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에서 파생된 한자들.
壬에서 파생된 한자들은 대부분 같은 뜻 부분에 壬 대신 任을 소리 부분으로 결합한 한자가 있으며, 이 둘은 같은 한자가 된다(妊=姙같이). 예외는 생각할 임(䚾)과 믿을 임(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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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任의 갑골문, 금문, 진(晉) 문자, 초 문자, 소전. 출처: 小學堂
壬에 사람 인(人)이 결합하면 맡긴다는 뜻의 任이 된다. 갑골문에서부터 등장하며, 조개 패(貝)가 더 들어가 품삯 임(賃)의 형태가 된 진 문자를 제외하면 갑골문부터 소전까지 항상 人과 壬이 결합한 구조이고 任에서 壬 부분의 변화도 독립적인 글자 壬의 변화를 따라가고 있다. 《시경》과 《국어》 등 옛 문헌의 주석에서는 任을 안을 포(抱)로 풀이하기 때문에, 《자원》에서는 이를 따라 任의 원 뜻을 '안다'로 제시한다. 《설문해자》에서는 任을 맡다[符]는 뜻으로 풀이하는데, 《자원》에서는 이를 안다에서 인신된 뜻으로 보았다. 쉬슬러는 任을 아이밸 임(妊), 티베트어에서 잡다를 뜻하는 སྣོམ་པ (snom pa)와 동원어로 보았다.
어렸을 적에 처음으로 초등학교에서 한자를 배울 때, 선생님의 님을 任으로 쓰도록 배운 기억이 난다. 본디 님은 순수 한국어라 한자로 표기하지 않지만, 가끔 이렇게 순수 한국어를 비슷한 한자로 대신 쓰는 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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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妊의 갑골문, 금문, 춘추 금문, 소전. 출처: 小學堂
아이밸 임(妊)은 《설문해자》에서는 “아이를 밴다[孕]는 뜻이다. 계집 녀(女)와 壬이 뜻을 나타내며, 壬은 또 소리도 나타낸다.”라고 풀이했다. 壬의 풀이에서 任과 妊을 모두 고려했으나 任은 순수 형성자로 보고 이 妊만을 회의 겸 형성자로 풀이했다. 妊은 동자인 姙으로도 많이 쓰는데, 한국어문회의 한자 급수 시험에서는 쓰기 한자에 나오지 않는 준특급에 姙을 배정해 전통적으로 정자로 여겨져 온 妊의 사용을 권장하고 있다. 소학당 사이트에서도 妊의 옛 형태만 나올 뿐 姙의 옛 형태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姙 역시 전통적으로 쓰여 왔는데, 중국철학서전자학계획 사이트(ctext.org)에 따르면 姙의 최초 출전은 진수의 정사 《삼국지》다. 정확히는 본문은 아니고 배송지 주에서 인용한 《종회모전》으로, 종회(鍾會, 225-264)가 쓴 자기 어머니 장창포(張昌蒲, 199-257)의 전기다. 종회는 그 전까지는 임신(妊娠)이라고만 쓰던 낱말에 姙娠이라는 표기를 처음으로 썼다. 종회는 지금 시대에는 어지간히 삼국지를 읽은 사람이 아니면 기억하지 않을 인물이지만, 자신이 활약한 삼국지 위나라의 후기 시대에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일화를 남긴 당대 정계의 거물이었는데, 뜻밖에 지금까지도 우리 주변에 종회의 영향이 남아 있는 것이다.
종회의 어머니 장창포는 젊은 나이에 노년의 위나라 대신 종요(鍾繇, 151-230)의 첩이 되어 세는나이로 27세에 종회를 낳았으니, 그때 종요의 나이가 75세였다. 이렇게 아버지의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종회는 겨우 5살에 아버지를 잃었고 15세에 태학에 가기까지는 장창포가 홀로 종회를 키워야 했다. 장창포는 어린 종회에게 차근차근 수많은 유교 경전을 배우게 했고, 아들이 장성한 후에도 여러 현명한 조언을 해주었다. 종회는 이런 어머니를 존경했는지 그를 기려서 전기를 남겼고, 배송지도 그 글을 종회의 전에 주로 달아 지금까지 남게 했다. 고대 중국사에서 이름을 남긴 여성이 몇 없는데, 장창포도 그 중의 한 명으로 남게 되었다. 비록 시대의 한계는 벗어날 수 없어, 본인보다는 종회의 어머니로 주목을 받은 것이 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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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賃의 진(晉) 금문 1, 2, 초 금문, 초 문자, 소전, 후한 예서. 출처: 小學堂
賃은 전국시대부터 출현하며, 진 금문 1이나 초 금문처럼 소리를 나타내는 부분이 任이 되기도 하고 진 금문 2나 초 문자처럼 壬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소전에서는 任이 들어간 賃만을 제시했고, 다른 任·壬에서 파생된 한자들과는 달리 壬이 들어간 한자가 사라지면서 賃만 남아 현대까지 전해지고 있다. 글자를 자세히 보면, 현대 해서에서는 任 전체가 貝 위로 올라가 있는데 옛 형태들에서는 예서까지 사람인변(亻)이 아래까지 내려와 왼쪽 전체를 차지하고 있어 값 가(價)와 비슷한 구성을 하고 있다.
賃은 《설문해자》에서는 “고용되다[傭]는 뜻이다. 조개 패(貝)가 뜻을 나타내고 任이 소리를 나타낸다.”라고 풀이해 任처럼 순수 형성자로 보고 있다. 그러나 貝가 재물을 상징하므로, 맡은 바 일을 수행하고 받는 돈이라고 해석할 수 있고, 이러면 회의 겸 형성자가 된다.
賃은 지금은 크게 두 가지 뜻이 있는데, 하나는 위에서 말한 일을 하고 받는 돈, 곧 품삯, 임금(賃金)이란 뜻이고, 또 다른 뜻으로는 물건을 빌린다는 뜻이 있다. 이 빌린다는 뜻으로는 빌릴 대(貸)나 빌 차(借)와 짝지어 임대(賃貸)나 임차(賃借)라는 낱말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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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荏의 소전, 전한 예서, 한나라 도장 문자. 출처: 小學堂
들깨 임(荏)은 《설문해자》·《광아》·《방언》 등에서 차조기를 뜻하는 되살아날 소(蘇)와 서로 통하는 글자로 풀이하고 있다. 실제로 차조기와 들깨는 현대 생물학에서는 같은 종의 다른 품종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들깨의 잎인 깻잎은 한국에서만 먹고, 외국에서는 한국에서는 잘 안 먹는 차조기 잎을 많이 먹는다고 한다. 한편 검은깨 곧 흑임자는 참깨의 다른 품종인데 이 荏을 쓰고 있고, 참깨의 한자 이름 중에는 진임(眞荏)도 있다. 한국에서는 참깨와 들깨를 같은 종류로 취급해서 참깨를 가리킬 때도 이 荏을 사용한 것 같다. 중국어에서는 참깨는 지마(芝麻)나 호마(胡麻)라고 해 들깨와는 전혀 다르게 부르고 있고, 현대 생물학에서도 참깨는 참깻과, 들깨는 꿀풀과로 다른 종류로 보고 있다. 영어로는 참깨는 sesame, 들깨·차조기는 perilla로 불러 구별이 되는데, 한국인들은 깻잎을 영어로 설명할 때 참깨와 헷갈려서 perilla leaf이 아니라 sesame leaf로 잘못 알려 주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또 荏은 유약하다는 뜻으로도 쓰여서, 《논어·양화》에 색려이내임(色厲而內荏)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낯빛은 위엄이 있지만 마음은 유약하다는 뜻이다.
壬은 任에서 비롯해 안다, 맡다는 뜻을 파생자들에 부여한다.
妊은 女(계집 녀)가 뜻을 나타내고 壬이 소리를 나타내며, 任의 뜻에 따라 여자가 아기를 몸 안에 안는 것, 곧 아이를 배는 것을 뜻한다.
䛘은 言(말씀 언)이 뜻을 나타내고 任이 소리를 나타내며, 任의 뜻에 따라 말을 맡길 만한 것, 곧 믿는 것을 뜻한다.
賃은 貝(조개 패)가 뜻을 나타내고 任이 소리를 나타내며, 任의 뜻에 따라 일을 맡고 받는 돈, 곧 품삯을 뜻한다.
이상의 관계를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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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에서 파생된 한자들의 의미 관계도.
요약
壬은 무엇을 본뜬 것인지 정설이 없으며, 잉아, 멜대 등의 설이 있다.
壬에서 任(맡길 임)·妊(아이밸 임)·紝(짤 임)·衽(옷깃 임)·䚾(생각할 임)·飪(익힐 임)이 파생되었고, 任에서 姙(아이밸 임)·恁(생각할 임)·袵(옷깃 임)·荏(들깨 임)·絍(짤 임)·䛘(믿을 임)·賃(품삯 임)·銋(젖을 임)·鵀(대임 임)이 파생되었다.
壬은 파생된 한자들에 任에서 비롯한 안다, 맡기다는 뜻을 부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