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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4/04/28 22:56:19
Name 계층방정
Subject [일반] 시흥의 열두 딸들 - 아낌없이 주는 시흥의 역사 (9) 시흥의 열한째 딸, 시흥 (수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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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의 열두 딸들 - 아낌없이 주는 시흥의 역사 (1)
 서문. 작은 세 고을에서 시흥이 시작되다
 1. 시흥의 맏딸, 영등포
 2. 그때 그랬다면? - 영등포부 승격
 3. 시흥의 둘째 딸, 안양
 4. 시흥의 셋재 딸, 관악
 5. 시흥의 넷째 딸, 구로
 6. 시흥의 다섯째 딸, 동작
 7. 시흥의 여섯째 딸, 광명
 8. 그때 그랬다면? - 시흥 있는 시흥
 9. 시흥의 일곱째 딸, 안산
10. 시흥의 여덟째 딸, 과천
11. 시흥의 아홉째 딸, 서초
12. 시흥의 열째 딸, 군포

13. 시흥의 열한째 딸, 시흥

1963년 서울 대확장

1973년 안양시 분리독립

1981년 광명시 분리독립

1986년 안산시 분리독립

1986년 과천시 분리독립


아낌없이 내주는 시흥군에 끝까지 남은 것은 1914년 당시 과천군에서 넘어온 군포읍, 안산군에서 넘어온 수암면과 군자면이었다. 여기에 중간에 끼어든 소래읍과 의왕읍까지, 총 3읍 2면이 있었다. 그러나 군포읍과 의왕읍의 인구가 8만을 넘었고 소래읍의 인구도 6만을 넘겨, 더는 군으로 남아 있을 수 없게 되었다.

같은 시흥군이라고는 해도 한때는 같은 식구인 주변 도시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지역마다 행정 서비스를 관할하는 기관이 제각각이어서 한 군이라는 동질성은 없었다. 그나마도 의왕읍은 시흥군에 들어오기는 늦게 들어왔어도 예전부터 시흥군과 교류가 많았기 때문에 일제시기에 한때 군포와 의왕을 통합해 달라는 건의를 하는 등 시흥군의 일원이라는 의식이 있는 편이었으나, 그 전까지는 인천, 부천에 속하다가 1970년에야 시흥군에 들어온 소래읍은 시흥군 내에서도 같은 가족이라기보다는 객식구 취급을 받고 있었다. 시흥군에 들어온 것도 시흥과 동질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부천군 소사읍을 부천시로 승격할 때 남은 부천군의 농촌 지역을 재고처리(?)하면서 넘어온 것이었다.

1988년 5월 30일에 경기도에서 군포, 의왕, 소래, 미금, 오산읍 등 인구 5만 명 이상의 읍들을 연내 시로 승격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시흥군 처리 방안을 놓고 수많은 말들이 오갔다. 가장 먼저 대외적으로 입을 연 것은 안양시로, 1988년 7월 16일 안양상공회의소에서 군포와 의왕읍을 안양시에 편입해 줄 것을 건의하면서 여론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662e51d15305f.png?imgSeq=22315안양시의 주장. '군포, 의왕 나 줘!'

군포시 편에서도 살펴본 대로 군포의 발전은 안양의 발전에 뒤이은 것으로, 이는 의왕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둘 다 시로 독립하고서도 8년이 지난 1997년에서야 안양시 도시계획지구에서 분리된 만큼 도시로 발전하는 과정에서는 안양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지금도 간간이 안양·군포·의왕 통합운동이 일어나는 형국이다. 군포와 의왕의 시가지는 안양과 쭉 이어져 있고, 특히 의왕시는 지금도 청계·내손, 고천·오전, 부곡 세 동네가 서로 이어져 있다기보다는 개발제한구역으로 분리되어서 군포와 안양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어져 있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군포읍·의왕읍은 안양시의 흡수 통합 제의에 반발하고, 일제시대에 한때 제안했으나 좌절된 군포·의왕 통합운동을 다시 일으켜 군포읍과 의왕읍을 합쳐 시흥시로 승격하는 것을 제안했다. 7월 21일, 시흥시(가칭)승격추진대회를 결의하고 8월 5일에는 군포읍과 의왕읍 주민 350명이 시흥시(가칭)승격추진위원회를 세웠다. 신학대학(군포시와 의왕시 경계에 있는 한세대학교로 추측) 근방에 새 시청을 세우는 등 시 승격방안에 합의를 한 위원회는 청원서를 제출해 시 승격을 촉구했다.

이 청원서에서는 1안으로는 군포읍과 의왕읍을 통합하고, 2안으로는 군포읍과 의왕읍 통합에 인근 반월면 북부 5개 리(대야미·속달·도마교·건건·둔대리)를 편입하는 것을 건의했다. 그리고 통합 시의 이름으로는 시흥시를 택했는데, 당시 시흥군의 3읍 2면 중 가장 시흥군에 오래 남아 있었고 번화한 군포읍이 있기 때문에 시흥의 정통성을 잇기에 가장 적합하다는 주장이었다. 그리고 군포읍이 공업도시로서 타 지역에 비해 제1로 손꼽히는 재정자립도를 자랑하고 도시로서 자족하기에 부족함 없는 기반시설을 갖추고 있다는 점을 역설했다. 한편 이 청원서에서는 소래읍을 시흥시에서 제외하고 있는데, 시흥군에 들어온 역사가 비교적 짧은 소래읍을 나머지 지역에서 같은 한 고을의 일원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는 배타적인 인식을 엿볼 수 있다.
662e51e35bfa5.png?imgSeq=22316군포·의왕읍의 연합, '우리가 정통 시흥이다!'

그러나 이 청원서에 대해 시흥군은 8월 30일 회신해 주민들의 의견을 수용하기 어렵다고 했다. 시흥군은 시 승격은 시흥군 단독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고 정부의 방침과 시책을 감안해 심도 있게 추진해야 한다고 완곡하게 거절했으나, 당시 시흥군은 ‘시흥시승격기본계획’을 마련해 군포읍과 의왕읍과는 다른 방안을 고려하고 있었다. 그 골자는 시흥군 중 가장 면적이 넓은 소래읍을 중심으로 시를 구성하고 과거 시흥군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시흥군에서 소래읍·수암면·군자면의 의견을 조사한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우선 소래읍은 전원도시로 발전하고 있으나 행정기관 및 유관기관이 다원화되어 불편하므로 인접 면인 수암·군자를 받아 시로 승격하기를 원했다. 이 지역 주민들은 신 시흥시에서 소래읍이 중심지로 될 것을 확신하고 희망하고 있었다. 수암면은 단독시가 되기는 어려우니 소래읍에 편입되어 시로 승격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군자면은 생활권이 사실상 안산시와 하나가 되어 있어 소래읍의 희망과는 달리 인접시인 안산시로 편입할 것을 원했다.

이와 같은 각 읍면의 희망사항 위주로 시흥군을 분할하면 디음과 같이 될 것이다. 곧, 소래읍과 수암면이 시흥시로 승격하고 군자면은 안산시에 편입되며, 시흥시에서 밀려난 군포읍과 의왕읍은 자연스럽게 각자 시로 승격하게 된다.

662e52b071c41.png?imgSeq=22319소래, 수암만 시흥시로 승격하고 군자면이 안산에 편입되는 경우

소래읍은 독자적인 소래시 승격이나 수암면·군자면을 흡수한 시흥시 계승이 중론이었으나 이곳에서도 동조하지 않는 일부 지역이 있었다. 소래읍에서도 부천과 교통이 편리한 계수1·3리는 부천시 편입을 요구했다. 이곳은 부천과 고작 0.5km 떨어진 곳으로, 전화국과 소방서는 부천시, 교육은 안산시, 경찰서와 세무서는 광명시 시설을 이용하고 있었다. 버스도 부천으로는 하루 36차례 다니고 있었으나 소래읍에 들어서는 새 시청으로 이동하려면 부천시를 지나서 가야 하는 형국이었다.

662e5225d605c.png?imgSeq=22317우리는 소래가 싫어요! 1 - 소래읍의 과림·무지내·계수

한편 광명시와 맞닿은 과림리와 무지내리는 1986년부터 광명시 편입을 주장했고, 1988년 시흥시 승격 계획이 발표되자 8월 31일에 ‘광명시 행정구역 편입조정 결의대회’를 열어 자신들의 요구를 행정관청과 언론에 공포했다. 이곳은 전화는 서울시, 소방서는 부천시, 교육은 안산시, 경찰서와 세무서는 광명시 시설을 사용하는 등 어느 한 곳이라고 콕 찝어 말하기 어려울 만큼 여러 곳을 출입해야 하는 지역민의 고충이 컸고, 따라서 주민들의 생활권인 광명시 지역으로 행정 서비스를 일원화해 줄 것을 요구한 것이다.

독자적인 세력이 약해 (가칭) 소래시나 안산시 편입을 고려하고 있는 군자면과 수암면도 상황은 비슷했다.

662e5252dd64f.png?imgSeq=22318우리는 소래가 싫어요! 2 - 군자·수암면의 거모·장상·장하·수암·화점·목감·조남

군자면의 거모1·2·5리에서는 ‘안산시편입 추진결의대회’를 열어 안산시 편입을 요구했다. 이미 반월출장소가 생길 당시 거모리 일부가 안산으로 넘어갔고, 주민의 80%가 안산시 반월공단에서 일하고 있었다. 교육, 통신, 체신, 전력, 수도, 소방 등도 안산에서 해결하고 있었다.

수암면의 장상리·장하리·수암리와 화정리는 ‘시흥군 수암면 안산시 편입 추진위원회’에서 1988년 9월 안산시에 편입할 것을 청원했다. 수암면은 교육, 통신, 전력, 수도, 세무, 치안, 소방 등에서 안산과 일치하며 안산상고 졸업생 70% 이상이 안산의 반월공단에 취직하는 등의 이유를 들었다. 역사적으로도 수암면은 안산시와 마찬가지로 안산군 소속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수암리는 안산향교와 안산군 관아가 있던 본래 안산군의 중심지였다. 특이한 점은 이런 이유로 수암면 전체를 안산에 편입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 지역만을 편입해 달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수암면 내에서도 생활권에 따라 서로 같은 지역사회 소속민이 아니라고 느끼는 것이다.

또 1988년 10월에는 안양 생활권인 목감리와 조남리 주민들이 안양시 편입을 요구했다. 이들은 이 지역의 농수산물이 안양시장에 내다 팔리는 것, 중·고등학교가 모두 안양시 학군에 소속된 것을 이유로 들었다.

소래·수암·군자 일부 리에서 제각각 생활권과 행정편의를 위해 시흥시가 아닌 인근 도시 편입을 주장하는 동안, 군포·의왕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경기도 당정협의회는 군포읍과 의왕읍의 면적이 좁아 향후 발전이 미흡할 것이고, 소래읍은 부천에서 넘어온 지역이므로 시흥의 정통성이 있는 군포읍에 시흥시의 명칭을 부여하는 것이 옳다는 의견을 냈는데 이는 군포·의왕에서 일어난 시흥시(가칭)승격추진위원회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의왕 주민들 중 일부가 군포·의왕 통합안을 군포 중심의 시 승격으로 받아들여 반대했고, 결국 군포와 의왕이 따로 시로 승격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군포 사람들은 새 시청 예정지가 군포 안이긴 해도 군포 읍내보다는 의왕에 더 가까운 곳이라면서 설득했으나 허사였다.

이렇게 군포와 의왕이 따로 시로 승격하면서 시흥의 이름은 소래읍을 중심으로 시로 승격하는 서시흥이 가져가게 되었다. 군자면이 안산시로 편입되고 나머지가 시흥시로 승격하는 안은 이미 앞에서 살펴봤고, 군자면과 수암면이 모두 소래읍과 함께 시흥시를 이루되 리 단위의 주변 시 편입 제안을 모두 받아주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662e530db0b44.png?imgSeq=22321원하는 대로 시흥을 쪼개 가져보세요!

실제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한 마디로, 소래읍의 승리였다. 소래읍은 물론이요 수암면과 군자면 일부 리의 요구는 전부 묵살되었고 소래·수암·군자 1읍 2면이 하나로 묶여 시흥시로 승격했다. 새 시청 역시 소래읍사무소를 그대로 썼으니, 이대로 갔으면 새 시흥시는 시흥의 열두 딸에서 제외되었을 것이다.

662e53453a594.png?imgSeq=223221989년, 시흥의 딸이 되기 싫었던 시흥시와 시흥의 열한 딸들, 그리고 곁식구 의왕시.

결과적으로 소래읍이 수암면과 군자면을 모두 합친 것은 과욕이었다. 지금의 시흥시청은 구 소래읍이 아니라 구 군자면의 장현동에 있다. 그 이유는 시화공업단지 때문이리라.


시흥의 옛날, 천일염 기술의 도입

조선 중기·말기부터 안산군의 수많은 갯벌들은 간척되어 농촌과 염전이 되었다. 이때의 염전에서는 염전에 물을 가두어 농축하고 그 농축된 바닷물이 배어든 흙을 끓여서 만드는 자염을 생산했다. 이 자염이 진짜 한국의 전통 소금이다. 지금 한국인이 흔히 전통 소금으로 아는 천일염은 구한말-일제시대 중국에서 수입한 기술이다. 자염에 비해 맛은 조금 떨어지나 생산 비용이 절반 정도로 매우 저렴했기 때문에 한국과 일본의 전통 자염과 전오염을 밀어내고 시장을 휘어잡았다.

일제는 중국산 천일염이 가격을 무기로 들어오자 천일염 기술을 이제 곧 식민지가 될 조선에도 들여와 전통 자염을 대신하게 했다. 맨 처음에는 인천 주안에 주안천일염제염시험장을 만들었는데 그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1907년부터는 시험장을 닫고 본격적으로 주안염전을 만들어 천일염을 생산했다. 이렇게 먼저 인천에 들어온 천일염 염전은 평안도와 황해도에도 들어섰고, 이후 인근 시흥군 갯벌에도 들어와 1925년에는 군자염전을, 1934년에는 소래염전을 세웠다. 그러나 이 신식 천일염 염전은 조선총독부에서 직접 운영하는 관영 염전이었다. 염전을 세우기 위해 염전 건축기술이 있는 중국인들도 시흥에 왔으나 이들은 건축 이후 본국으로 돌아갔고, 대신 염전을 운영하기 위해 이전에 이미 천일염 염전이 들어선 평안도에서 사람들이 시흥으로 이주했다. 지금 정왕역, 당시 수인선 군자역 주변에는 평안도 사람들이 몰려 산다 해 피양촌, 평양촌이라는 마을이 들어설 정도였다.


수인선의 호황과 영업중지

소금 생산이 활발해지면서 일제는 인천과 시흥에서 생산한 소금을 실어나르기 위해 수원과 시흥, 인천을 잇는 수인선 철로를 1937년에 부설했다. 이 수인선은 1995년 폐선될 때까지 선로 근방의 인적·물적 교류에 기여했다. 수인선 건설의 시초는 1926년 인천상업회의소에서 조선총독부에 제출한 철도 건설 요망서인데, 이 글에서 경부선과 경의선만으로는 호경기에는 물자 수송에 지장이 있어 소금값이 폭등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 수인선의 사업성에 주목한 경동철도사는 1930년 수여선을 착공·개통하면서 잠시 수인선 추진을 중단했으나, 수여선이 본격적으로 수익을 내기 시작하자 1932년부터 다시 수인선 계획을 검토했고 1935년 총독부에서 수인선 건설 허가를 받아냈다. 철도 터 매수에 어려움을 겪어 1936년 6월 1일에 기공했고, 1937년 7월 19일 여러 난항을 뚫고 마침내 개통식을 열었다. 정식 운영은 8월 6일부터 시작해 수원-인천 간에 17개의 역을 두고 1시간 40분 만에 주파했다.

수인선은 화물 운송으로 성황을 이루어, 1년 만에 협궤로 놓은 선로를 광궤로 개궤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때문에 결실을 보지는 못했다. 수인선은 해방 이후에도 본연의 기능을 지속했으나, 1973년 7월 13일에는 남인천-송도 구간이 인천시 도시계획으로 폐쇄되었고 1977년 42번 국도의 포장을 계기로 인천과 수원을 오가는 화물들이 수인선에서 도로로 옮겨가면서 수인선의 화물수송은 1977년 9월 1일부터 중단되었다. 여객수송도 반월국가산업단지 등의 건설로 인천과 수원 간 왕래보다 인천, 안산, 수원과 서울 간 왕래가 더 활발해지면서 쇠퇴해 마침내 1995년 12월 31일 수인선은 완전 영업 중단을 맞게 된다. 수인선이 다시 개통하는 것은 개궤와 복선전철화를 거친 2012년 6월 30일이고, 모든 노선의 부활은 2020년 9월 12일이다.

이렇게 쇠퇴해 가는 구 시흥군 군자면 일대를 다시 일으킨 것은 시화국가산업단지다.


시화국가산업단지

시화국가산업단지가 들어선 시화지구는 원래는 공단이 들어설 곳이 아니었다. 1976년 농업진흥공사가 농경지를 조성하고자 만든 간척지였다. 건설부가 1985년 3저호황을 맞이해 시화지구를 이전의 농경지 조성에서 공업단지 조성과 도시개발로 바꿔, 지금의 시화공단을 만들었다. 실제적인 이유는 인근 반월국가산업단지가 포화 단계에 들어섰기 때문에 공업단지를 더 확장할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이에는 반월공단과 가까운 광활한 갯벌과 염전을 갖춘 시흥군 군자면의 해안 땅이 적격이었다. 해외진출 건설업체들이 중동건설 붐이 퇴조하면서 겪은 불황을 타개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또 서울의 심각한 인구집중과 과밀화를 해소하기 위해 서울의 중소 공장들을 서울 밖으로 옮길 필요도 있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시화지구는 원래의 농경지에서 공단으로 변모했다.

시화지구는 안산시 신길동, 시흥군 군자면, 옹진군 대부면, 화성군 서신면에 걸쳐 46.07㎢에 약 1,770개 공장을 유치하는 것으로 계획되었고, 1987년 4월 29일 시화지구개발 제1단계 사업의 기공식을 치러 본격적으로 개발을 시작했다.

그러나 급조된 계획이었기 때문에 중간에 여러 차례 차질을 빚었고, 1989년 수도권정비기본계획으로 개발범위가 돌연 축소되면서 일부가 주거단지로 바뀌었다. 이 지역은 공단의 환경오염을 받아 주거지역으로는 적합하지 못하다는 반발을 받았으나 묵살되었다.

시화공단은 1989년부터 1992년까지 4차에 걸쳐 분양신청을 받았는데, 1차에는 지나치게 입주기업에 불리한 조건이어서 부진했고 4차에는 경기침체로 인해 부진했으나 1990년, 1991년 합쳐서 약 1,000개 기업이 들어서 4차 입주가 끝났을 때에는 1,451개 기업이 들어섰는데 그래도 목표인 1,770개에는 미치지 못했다. 시화공단은 IMF를 겪으면서 오히려 경기가 호전되어 2,296개 기업으로 크게 증가했고 2003년에는 3,554개소로 증가했다.

1992년까지 입주한 1,284개사 중 서울에서 옮겨온 기업은 476개사로 경기도 및 인천에서 이전한 업체에 비해 적었다. 마침 경기침체를 맞으면서 원래 목적인 서울 기업의 이전을 밀어붙이기에는 무리였다. 또 인근 반월공단에 비해 중소기업이 대거 입주한 편이었다. 업종은 조립금속·기계계통이 60% 이상으로 절대적으로 많으며 그 다음은 화학이 15~20%로 이 두 업종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정왕, 시흥시를 시흥의 딸로 끌어들이다

시 승격 이후 구 소래읍 권역인 신천·은행동도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 대규모 택지개발사업을 일으켜 1990년 60,134명에 불과한 인구를 111,815명으로 2배 가까이 끌어올렸다. 그러나 대야·신천·은행동 구시가지 인구가 시흥시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90년 56.1%에서 2003년 29.5%로 오히려 절반 가까이 감소했다.

반면 시화공단에 힘입어 1990년 고작 4,142명에 불과한 정왕동 인구는 2003년 147,751명으로 15만 명에 육박했으며 시흥시 인구의 38.9%를 차지해 구시가지를 넘어서는 규모의 도회지로 탈바꿈했다. 2003년 행정동 중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곳은 구시가지의 신천동(12,916명/㎢)이지만, 2위와 3위는 모두 정왕권의 정왕1동(9,716명/㎢)과 정왕2동(8,075명/㎢)이었다. 2023년 기준으로는 기어이 정왕4동(22,329명/㎢)이 신천동(10,262명/㎢)을 능가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정왕권의 인구가 소래권을 능가하게 되면서, 본디 소래권에 있던 시흥시청도 정왕동과 신천동 사이의 장현동(행정동 연성동)으로 옮겨와 소래권과 정왕권, 목감 일대를 잇고 시흥시를 하나의 도시로 만들기 위해 힘쓰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이 장현동은 구 군자면의 북동쪽에 있는 동네였다. 정왕이 발전하지 않았으면 시청이 연성으로 옮겨올 일이 있었을까? 시흥의 딸에서 떨어져나간 시흥시를 다시 시흥의 딸로 끌어들인 것은 시화공단이 있는 정왕동이었다.


※ 이 글은 밀리로드의 “시흥의 열두 딸들” 연재글을 묶은 것입니다.


참고 문헌

소래염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주혁, 군자염전 – 디지털시흥문화대전

이동화, [인천은 왜 해양도시인가] 9. 천일염의 원조 '주안염전' -끝, 인천일보, 2017-11-23, 2024-04-28 확인

지수걸, 제염업 – 디지털서산문화대전

수인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삐사쩰, (스압) '경기도 시흥군'의 기구한 역사 (feat. 시흥시의 무근본성) - 미스터리/공포 – 에펨코리아, 2020-05-10, 2024-04-28 확인

군포시사편찬위원회, 《군포시사 3》, 2010-07-15

시흥시사편찬위원회, 《시흥시사 4》, 2007-02-28

시흥시사편찬위원회, 《시흥시사 6》, 2007-02-28

시흥시사편찬위원회, 《시흥시사 7》, 2007-02-28

시흥시사편찬위원회, 《시흥시사 8》, 2007-02-28


특히 이 글은 구성에서 삐사쩰님의 에펨코리아 게시글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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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wnTeamisDown
24/04/28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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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권만으로 보면 시흥군은 아예 없는게 나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결국 이 모든 문제의 근본은 자체적으로 시가되기엔 너무 작고 그렇다고 어디에 넣어주기 힘들았던 소래읍에서 부터 모든게 시작된다고 봐서요.
만약 소래읍이 자체적으로 소래시가 가능했다면 군자와 수암을 인근지자체로 보냈을텐데 문제는 소래읍 자체가 그러기엔 좀 작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긴합니다.
지금도 정왕-배곶은 소래하고는 확실히따로놀고 연성도 그닥 편한동네는 아니라는게...
계층방정
24/04/29 09:22
수정 아이콘
이래저래 소래읍이 시흥군에 넘어온 게 문제의 근원인 것 같습니다. 지금은 서해선, 경강선(월곶판교선), 신안산선으로 시내 연결망을 촘촘히 갖추려는 게 시흥시의 의도인 것 같은데 다 개통되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요?
DownTeamisDown
24/04/29 13:04
수정 아이콘
나아져봐야 정왕은 시화공단덕에 안산과 공동운명체고 안산하고 같은 과제를 안고 있겠죠.
교통이 좋아져봐야 안산보다 좋기 힘들고 도시가 발전해봐야 안산하고 공통점이 많을거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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