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전술 보드게임을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게 됐는지 공유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글을 게시하고 생각보다 피지알에 보드게이머가 많다는 사실에 놀랐고, 또 반갑기도 했습니다.
다른 분이 댓글에 남겨주시기도 했지만, 이번 주말에 보드게임페스타라는 행사가 있고 제가 거기서 게임 시연도 하는데요. (판매는 하지 않습니다)
혹시 축구 게임을 실제로 살펴보고 싶으시다면 방문하셔서 편하게 인사 건네주세요 :)
축구 보드게임 제작기 ③ 아이디어 빌드업 下축구 선수 카드를 그럴듯하게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진짜 고민의 시작은 그 카드들을 가지고 뭘 하느냐다.
축구 감독은 선수들을 데리고 전술을 짠다.
먼저 4-4-2나 3-4-3처럼 포메이션을 정하고 공격적으로 할 것인가, 수비적으로 할 것인가 중앙을 노릴 것인가, 측면으로 침투할 것인가 등 전반적인 경기 컨셉을 정한다.
그렇다면 역시 보드게임에서도 필드 위에 선수 포메이션을 배치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까?
일단 나의 선택은 NO였다.
그렇게 하는 게 틀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선수 카드' 중심으로 만들어나가는 현재 개발 방향성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보드게임에서는 이러한 방식을 Card Driven 게임 시스템이라고 부른다.)
경기 전체 컨셉을 정해놓고 거기에 따라 선수들이 알아서 플레이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풋볼 매니저와 같은 '시뮬레이션' 게임에서 채택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는 보드게임에서는 구현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자칫 지루해질 가능성이 컸다.
그보다는 전체 경기를 몇 개의 단위로 쪼갠 뒤, (예컨대 '라운드' 같은 개념) 각 라운드별로 어떤 선수들이 전술의 '핵심'이 되어 플레이할지 선택하고, 그 선택 값들이 서로 부딪히며 특정 결과를 도출해내는 방식이 나아보였다.
그래서 처음에 내가 시도한 방식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플레이어가 선택할 수 있는 전술 컨셉 5개 정도를 설정한다.
예컨대 그 중엔 아주 공격적인 전술도, 수비 후 역습하는 전술도, 그 중간쯤 되는 안정적인 전술도 있다.
각 플레이어는 원하는 전술을 하나 선택한 뒤, 그 전술을 '핵심적으로 수행할' 선수 카드 2장을 정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택한 전술의 특성에 따라, 활용되는 선수 능력치가 달라진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전진' 전술을 선택했다면, 선수의 능력 중에서 '공격'과 '드리블'만 활용된다.
따라서 위 사진에서의 '전술값' 총합은 '18(6+4+4+4)'이 된다.
이런 식으로 각 플레이어가 동시에 카드를 내서 전술값을 비교한다.
전술값이 더 높은 쪽에게 '공격권'이 주어지고, 그 이후에는 또 다른 판정 규칙에 따라(주사위 등) 슛이 들어갔는지 노골인지가 결정되는 식이다.
이렇게 대강 개념을 잡고 머리 속으로 시뮬레이션 해봤을 때는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하지만 지인을 불러 직접 플레이 테스트를 해보니, 생각과는 달랐다.
전술 + 선수 카드 선택 -> 동시 공개 -> 총합 비교 -> 득점 판정
게임은 결국 위 과정의 반복이었는데, 이게 초반에는 흥미있게 진행되다가도 갈 수록 지나치게 반복적인 느낌을 줘서 쉽게 루즈해졌다.
어떤 지점에서는 그저 가위바위보 싸움처럼 느껴지는 경향도 있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 고민을 해봤다.
실제 축구는 45분동안 실시간으로 이어지면서 여러 상황이 쌓인다.
슈퍼 플레이 하나에 기세가 오르기도 하고, 부상이나 퇴장 같은 뜻밖의 변수로 흐름이 급변한다.
단단한 빗장 수비를 끊임없는 '닥공'으로 뚫어내기도 한다.
그런데 이 게임은 축구를 너무 '분절화'시켜버린 것 같았다.
만들어나가는 느낌, 즉 '빌드업'해나가면서 전체 그림을 완성해나가는 재미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만들고 싶은 게임은 '가위바위보를 총 10판 해서 더 많이 이기는 사람이 승리하는 게임' 같은 건 아니었다.
그러려면 굳이 '축구'라는 테마를 선택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축구라는 '팀 스포츠'의 특성을 잘 살리면서도 너무 복잡하지 않은, (그리고 당연히) 재미있는 보드게임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지금과는 아예 다른 방향으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해보였다.
축구 보드게임 제작기 ④ 방향 전환
'양궁 단체전'은 팀 스포츠일까 개인 스포츠일까?
선수 3명의 경기 내용이 합산되고, 그 결과 역시 함께 책임진다는 점에서 팀 스포츠라고 할 수 있지만,
'한 팀으로서' 경기 내적으로 주고 받는 티키타카는 없다.
오로지 지금 화살을 쏘는 선수 그 자신이 집중해서 최선의 퍼포먼스를 내는 수밖에 없다.
축구는 다르다.
아무리 뛰어난 공격수도 우리 편 수비수가 상대방 공을 빼앗고, 그 공을 미드필더가 배급해주지 않는다면
공격 능력을 발휘할 기회조차 가질 수 없다.
그 뿐만이 아니다. 선수의 '성향'이나 '스타일'에 따라 선수간 조합에 '시너지'가 생길 수도, '역효과'가 생길 수도 있다.
1+1이 0이 되느냐, 3이 되느냐는 전적으로 '팀 단위 운용'을 어떻게 하느냐 따라 결정된다.
말 그대로 팀 스포츠 그 자체인 것이다.
이전 버전의 프로토타입에서는 특정 선수들의 능력치를 합산한 뒤, 그 총합을 상대와 비교했다.
이러한 방식은 어쩌면 축구보단 '양궁 단체전'에 더 가까운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축구답게 만들기 위해서는 단순한 산술적 합산 이상의, 선수와 선수가 '팀'으로서 만들어내는 '시너지'를 구현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면 선수와 선수의 조합을 어떻게 표현할까.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실제로 선수와 선수를 물리적으로 연결시켜보기로 했다.
선수 카드 양 옆에 '반쪽짜리 아이콘'을 그려넣어서 두 선수 카드를 붙여놓으면 하나의 완성된 아이콘이 형성되도록 한다.
그리고 완성된 아이콘의 종류에 따라 다양한 시너지 효과가 생긴다는 것이 기본 아이디어였다.
(이 과정에서 선수의 세부적인 '능력치' 개념은 삭제했다.)
일단 아이콘은 세 종류 정도로 설정하고 (공격, 수비, 연계 등) 각 포지션에 맞게 아이콘들을 분배해줬다.
공격수에게는 공격 아이콘이 많고, 수비수에게는 수비 아이콘이 많은 식이다.
플레이어는 선수 카드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붙여나가고, 이는 팀의 빌드업 루트를 상징한다.
골키퍼에서 수비수, 미드필더를 거치며 차근차근 빌드업할 수도 있고
원한다면 바로 공격수에게 한번에 전개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골키퍼 카드를 낸 뒤 바로 공격수 카드를 내면 굉장히 빠른 타이밍에 슈팅을 시도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경우 슈팅의 성공 확률은 낮아진다.
그림과 같이 골키퍼 카드와 공격수 카드를 바로 연결했을 때 시너지 아이콘이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이 좋다면 골을 넣을 수는 있다.)
반면 아래 그림같이 선수간 최적의 시너지(아이콘)를 만들어가며 차근차근 전개해나갈 경우,
경기를 보다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진다.
(공격 및 수비시 +1 보너스를 받는다거나 선수 카드를 한 장 추가로 낸다거나)
이 때의 단점은, 너무 안정을 추구하다가 먼저 불의의 일격을 맞고, 준비해왔던 것이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어느 한 쪽이 골을 넣었을 경우, 모든 카드는 리셋되고 다시 처음부터 빌드업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결국 축구는 골을 잘 넣는 팀이 이기는 거지 빌드업을 잘 하는 팀이 이기는 건 아니다.)
이 정도의 개념을 잡아놓고, 간단히 플레이 테스트를 해봤다.
축구에는 1도 관심이 없는 아내랑 플레이해봤는데, 예상과 달리 뭔가 게임처럼 전개가 됐다.
나름 기뻐하고 있는데, 아내가 (비보드게이머 특유의) 나이브하지만 본질적인 질문을 던졌다.
"근데 왜 카드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만 연결해야 돼? 양쪽으로 붙이면 안돼? 위 아래로 연결해도 재밌겠다."
이 얘기를 듣고 (보드게이머 특유의) "아, 이건 이래서 문제가 되고 저건 전체 밸런스상 어떻고.." 식의 방어적 핑계를 데려고 하는 찰나,
뭔가 머리를 탁 치는 느낌이 왔다.
'상하좌우'로 선수 카드를 연결할 수 있게 만들면, 선수간 '시너지'뿐만 아니라 '라인'의 개념도 구현할 수 있지 않을까?
수비수를 전진시켜서 공격적으로 빌드업을 한다거나, 공격수가 볼을 받으러 내려와서 중원의 우위를 가져간다거나.. 뭐 그런 개념들이 가능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도 나름 힘들게(?) 디자인했던 프로토타입을 또 한쪽 구석으로 치우고 다시 설계를 시작했다.
X축만 있던 세계에 Y축 선을 그어보았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