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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3/08/20 01:04:13
Name Altair~★
Subject [詩]만두집
만두집
                안도현


세상 가득 은행잎이 흐득흐득 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늦가을이었다
교복을 만두속같이 가방에 쑤셔 넣고
까까머리 나는 너를 보고 싶었다
하얀 김이 왈칵 안경을 감싸는 만두집에
그날도 너는 앉아 있었다

통만두가 나올 때까지
주머니 속 가랑잎 같은 동전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무슨 대륙 냄새가 나는
차를 몇 잔이고 마셨다
가슴을 적시는 뜨거운 그 무엇이
나를 지나가고 잔을 비울 때마다
배꼽 큰 주전자를 힘겹게 들고 오던
수학 시간에 공책에 수없이 그린
너의 얼굴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귀 밑에 밤알만한 검은 점이 있는
만두집 아저씨 중국 사람과
웃으면 덧니가 처녀 같은
만두집 아줌마 조선 사람 사이에
태어난 화교학교에 다닌다는 그 딸
너는 계산대 앞에 여우같이 앉아 있었다
한번도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지 않고
미운 단발머리 너는
창밖 은행잎 지는 것만 보고 있었다

나는 그날 만두값도 내지 않고 나와버렸다
네가 뒤쫓아오기를 바라면서
왜 그냥 가느냐고 이대로는 못 간다고
꼭 그 말이라도 듣고 싶었는데
너는 지금까지도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
나는 그 이후로 네가 보고 싶어도
매일 가던 너의 만두집에 갈 수 없었다


================================================================================

1991년 안도현 시인이 발표한 3번째 시집 "그대에게 가고 싶다"에 수록된 詩 입니다.


비가 제법 내립니다.
첫사랑 그녀 생각이 나기도 하고, 갑작스레 울적해지기도 합니다.
문득 책꽂이에 꽂힌 책을 보고 생각이 나서 소개드리고자 적어봅니다.

가끔씩 머릿속에 추억할 것들이 하나도 없었으면 좋겠다는 무서운 생각을 해봅니다.
결국 우울함이라는 녀석이 만들어낸 말도 안되는 미친 짓이라는 것을 알고
이내 어리석었던 자신을 탓하며 마음을 추스리곤 합니다.

저는 왜 비만 오면 굉장히 감성적으로 변할까요?
게다가 밤이네요. 술이라도 한잔해야 잠이 오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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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Binary
03/08/20 01:24
수정 아이콘
아...저도 그 시집 굉장히 좋아합니다. 안도현님의 그맘때 시집들이 가장 좋았던 것 같네요, 기억에. 여전히 따뜻한 시를 쓰시는 분이지만...최근에는 예전에 받았던 느낌이 많이 무뎌진 것 같습니다.
비가 오는 밤에는 누구나 감성적으로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기할 정도로요. 잠 못 드는 밤에는 술 한잔도 좋지요. 멋진 꿈이라도 덤으로 붙어 준다면 더더욱이요..^^
온리시청
03/08/20 01:27
수정 아이콘
집에 마당이 있어서 나무가 있는 집에 사시는 분이라면 이런 비가 올때(특히 낮에) 빗소리와 함께 풍겨오는 나무냄새가 어떤지 잘 아실겁니다...
코가 아닌 몸으로 느껴지는 향기와 그 순간의 나른함은...
아~~ 지금은 그 냄새를 맡을 수 없어서 너무 아쉽네요...
몽땅패하는랜
03/08/20 01:39
수정 아이콘
대학시절. 학교앞은 좁고 바늘같은 골목길이었습니다.
그녀의 자취집은 초등학교 앞 담벼락 낮은 허름한 집.
언제나 밤 열시쯤이면
어느때엔 적당히 술에 취해
그리고 대부분은 그녀를 향한 사랑에 취해
발간 얼굴을 담벼락 위에 올려놓고 그녀를 불렀지요
그녀는 늘 묻곤 했습니다.
"또 술마셨군요? 유(You)"

그럴때면 전 히죽히죽 웃었습니다.
하고픈 이야기는 많았지만 그냥 백지처럼 히죽히죽 웃기만 했습니다

그러다. 그녀의 얼굴이 사라지고
커튼이 닫히고
제 얼굴에 다시 어둠이 담길 때 쯤에야
겨우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차마
여기서 이야기할 수는 없군요

제 스무살 시절, 첫사랑이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추태랍니까 ㅠ.ㅠ
알테어님/SaintBinary님/온리시청님의 글을 읽다가 문득 떠올라 적어봅니다.
(내리는 비에 떠내려갈까 전전긍긍모드입니다ㅜ.ㅜ)
미소가득
03/08/20 01:39
수정 아이콘
졸린데 지금 잘까 좀 있다 잘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던 밤이 이 글을 읽고는 순식간에 상념이 가득한 밤으로 바껴 버리네요.
아.. 정말 너무 좋은 시네요. 이렇게 좋은 시 소개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비가 오는 밤이면 누구나 감성이 예민해지고 첫사랑 생각도 나고 그런 거라면, 정말 누구나 다 그런 거라면 그 애도 이런 밤엔 제 생각 한 번쯤 떠올려주길 바래봅니다. 할까? .. 안할까?..^^;
안전제일
03/08/20 01:40
수정 아이콘
맛있는 만두집을 알고있습니다.^_^
만두는 준수하고 무엇보다 그집의 강점은 단무지!랍니다.^_^
분명 사오는 단무지임이 틀림없는데 왜그리 아삭아삭하던지.^^;;
아련한 첫사랑의 기억이 없으니 말초적인 즐거움이 떠오르는군요.
본능적인 인간입니다 꾸벅-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네로울프
03/08/20 02:55
수정 아이콘
만두 쏘세요...--;;;
03/08/20 11:50
수정 아이콘
전 '만두'...에서 풍기는 어감이 참 좋습니다,..그 허름한 분식집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하얀 정내미가 좋습니다..아버지가 퇴근길에 사오셨던 만두는 적당히 식어서 그 맛이 일품이었져,,갯수에 맞춰 아버지둘 어머니 둘 나 하나 동생 하나...그런 어머니는 저희에게 당신의 만두를 주셨더랬져,,, '만두' 그 어감이 저에겐 참 좋게 기억되네여,,따스한 기억들과 함께여서일까요? 아님 만두에서 풍기는 그 훈훈함이 정으로 느껴져서일까요,,?
김효경
03/08/20 12:00
수정 아이콘
안도현 씨 너무나 좋습니다... 참 따뜻한 느낌이죠... 전 개인적으로 안도현 씨가 쓰신 '짜장면"이란 소설을 참 좋아합니다
03/08/20 12:08
수정 아이콘
Altair라는 별이름을 닉으로 쓰시는 분이 별(star)에 관한 전적을 수집하시고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아름다운 시를 적어주시고 빛나는 별만큼 반짝이는 마음을 가진 듯 하네요. 호호.. 이렇게 적은 이유는 Altair~★ 님께 잘보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시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입니다.. ^^; (사실 잘보이고 싶은 마음도... -_-; 헉)
Altair~★
03/08/20 12:31
수정 아이콘
안도현 시인은 제 중학교 은사님 이십니다. 중학교 3년동안 국어를 가르치셨고 3학년때 담임이셨습니다.
시집이 새로 발간되면 안쪽 여백에 사인을 해서 주시곤 하셨는데 어느날 보니
시인이 아니라 어른들을 위한 동화작가로 더 유명해지셨더군요^^

해원 님 / 잘 보이고 싶으시다니 잘 봐드릴께요^^ 언제한번 얼굴을 보여주시면 정말 잘 봐드리겠습니다.
(앗, 이건 또 무슨 소리죠 -_-)
03/08/20 13:14
수정 아이콘
제가 너무 좋아하는 안도현 시인 작품이군요. 그분의 아침엽서는 아마 제가 서른권은 족히 샀을겁니다 , 좋아하는 사람들한테 선물로 뿌렸다나 어쨌다나 ^^;
Altair~★님//너무 부럽네요...안도현 시인이 은사셨다니....
혹시 지금의 그 엄청난 전적관리 능력도 혹시 그때 그분을 통해 익히신 풍부한 감성의 한 부분이 극대화된 결과 아닐까요?
(으...약먹을 시간이 지났는데 안먹었더니 헛소리가...ㅡㅡ;)
여하간, 좋은시 잘 읽었습니다 ^^
몽당패하는랜덤님// ^_________^
박기남
03/08/20 16:23
수정 아이콘
저...혹시 Altair님....이리 출신인가요?
혹시...김성철이라고 아세요?.....
에구....넘 개인적인 질문인가?.....나이가 저랑 같아서
떠오르는 친구가 있습니다
Altair~★
03/08/20 18:21
수정 아이콘
박기남 님 / 김성철이라...중학교 동창 가운데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기억하는데 그 친구(?)가 절 기억할런지는 모르겠습니다^^
이리(지금은 익산이죠^^)에서 태어나진 않았지만 국민학교 3학년때부터
고등학교 졸업직전까지 살았으니 이리출신이라고 해도 맞을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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