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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2/23 04:36
96년도에 자살하신걸로 알고 있습니다.
유서한장 없이 갑작스레 가신거라 부인과의 불화설, 가족과의 불화설, 치정관계설, 우울증설, 음모론 등 분분이 말은 많았습닏다만, 아직까지는 딱히 뭐다 하고 밝혀진 이유는 없습니다. 90년대 초반에 '사랑했지만'으로 일약 유명세를 타면서 자신만의 음악적 색깔을 정립해 나가기 시작했지만, 사실 그전 노찾사시절부터 이미 1000회 이상의 소극장 콘서트를통해 대중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지다 시피한 소극장 라이브 콘서트의 마지막 불씨를 태운 사람이었지요.. 생을 마감하기 며칠전까지도 무대에 섰었다고 합니다..ㅠ 그때 당시 어떤위치에 있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음유시인'이란 단어가 그토록 어울리는 사람은 그전에도 앞으로도 없을꺼라 믿습니다. 비록 짧은 생이었지만, 그 목소리 만큼은 사람들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있을 위대한 예술가였지요. 쓰고 나니깐 왠지 소주한잔 하고 싶어지네요..
10/02/23 07:44
유재하는 1집 앨범내고 몇달 뒤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죠. 그전까지는 여러 밴드에서 세션으로 활동했던 것으로 알고 있고요.
가수로서 첫 앨범을 내고 활동하려는 찰나에 운명을 달리하신 거죠. 유재하에 대한 세간의 훌륭한 평가도 그의 사후에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맞겠네요. 유재하가 자신의 이 앨범 하나로 대중음악계에 끼친 영향은 이루 말할수가 없죠. 90년대 이후의 대중음악은 모두 유재하의 영향력 하에 있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니까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음악이었고 화성이나 코드 진행과 같은 부분에 있어서 천재적인 능력이 발휘되었다고 하네요.
10/02/23 08:11
돌아가시기 1달전에 공연봤습니다. 유학생을 위한 무료 자선 공연이어서 무대 장치는 마이크 하나와 의자뿐이었는데.
기타와 목소리 만으로 천명 넘는 사람을 30분만에 울렸습니다. 아직도 사망소식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10/02/23 09:23
당시 신문기사 내용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기사 내용에서는 아내와 술을 마시다가 싸웠고, 그 후 아내는 자러 들어갔는데 깨서 보니 자살해 있더라.. 라고 짤막하게 나와 있었습니다.
10/02/23 10:37
김광석씨는 대학축제에서 자주 초대되는 가수였습니다. 솔직히 녹음된 목소리는 그 진가를 제대로 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중학생때 초까지 이승환씨를 너무 좋아해서 창법이 완전히 이승환씨와 동일했는데, 김광석씨의 목소리를 듣고 그 창법을 따라하기 위해서 고등학교때까지 무단히 노력했던 것이 기억나네요.(이승환씨가 노래를 못부른다는 뜻은 아닙니다. 단지, 이승환씨의 창법은 일반인들이 소화하기 힘들다는 뜻이지요.) 직접들었던 그 목소리는... 전율이었습니다.
유재하씨는 얼마전 라디오스타에 봄여름가을겨울이 나와서 이야기했었죠. 당시 작곡가로서, 세션으로서 유명했는데, 김현식씨가 한곡씩 작곡해 온 곡으로 앨범을 만들려고하자, 당시 초보였던 김종진씨도 한곡, 이미 유명작곡가였던 유재하씨도 한곡만 뽑은 것에 반발해 그 때 작곡해 갔었던 곡으로 앨범을 발표했다는 이야기요. 그 앨범이 그 1집앨범이라고 하더군요.
10/02/23 10:40
유재하 씨에 대한 평가는 한국발라드라는 장르의 시작이 유재하로 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을만큼 한국 대중음악사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작년인가 재작년에 음악인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대한민국 100대 명반중 2번째에 위치한 음반이 유재하 1집입니다. 현세대에 남아있는 유재하의 유산은 신승훈, 이승환, 봄여름가을겨울, 토이, 윤종신 등등 수많은 발라드 가수에게 남아있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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