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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0/06 18:12
'거꾸로 읽는 삼국지'였던가. . .그 책에 왜 중국인들이 유비를 띄우고 조조를 덮으려 했는지 나름 충실하게 분석이 되어 있더군요.
뭐, 근데 굳이 유비는 띄우지 않더라도 이미 먼치킨이죠. 기반도 없는 평범한 동네 청년이 칼 하나 차고나와 결국 황제(좀 어색하지만)가 되어버리니.. . .
09/10/06 18:14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삼국지는 삼국지연의를 말하는 것이죠.
이는 역사서라기보단 나관중이 쓴 소설이라 보는게 더 정확합니다. 즉, 소설이기 때문에...대의를 가진 유비같은 경우가 좀 더 선역? 같은 느낌을 주는것이죠. 실제 삼국지를 많이 좋아하는 사람들은 연의 외에 기타 다른 정말 역사서 같은 책도 많이보고 평가합니다. 그리고 평가라는게 사람마다 결국 다르게 판단되는 것이기 때문에...(예를 들면 유명한 이문열 삼국지에서 관우와 제갈량의 관계 같은 부분...) 그렇게 되면 인물에 대한 평가는 달라지게 되죠. 따라서 나관중이 쓴 삼국지연의에서의 유비는 주인공 같은 느낌을 주는 겁니다. 다른 책들은 또 달라요~ 삼국지에 관련된 되도록 많은, 다양한 책들을 비교해 보시면 등장 인물들에 대한 다양한 평가를 느끼실 수 있습니다. 또 그 맛에 삼국지가 더 재미있는 거 같아요~
09/10/06 18:14
삼국지연의의 탓이 크다고 봅니다.
정사와는 다르게 삼국지연의는 철저히 유비 위주로 쓰여져 있다고 봐야 할 테니까요. 조조의 경우 워낙 파격적인 인물이고 유교에서 좋아할 수 없는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드네요. 여담이지만 전 창천항로가 무척 재밌더군요 ^^
09/10/06 18:15
촉한정통론의 분위기 + 나관중의 희대의 드립 덕분이죠
그리고 제갈량과 관우에 대한 평가는 그렇게 오바스럽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촉(유비)의 시선이나 위(조조)의 시선으로 봤을 때도 오나라는 뭐 이뻐할래야 할 수가 없네요. 걔네들은 처음부터 멸망할 때 까지 장강이남에서 살다 이익을 위해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에휴....
09/10/06 18:53
통일한 사마염은 '위정통론'입니다. 그래서 나온게 정말 '역사'로 인정받는 '삼국지정사' 죠.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는 촉한정통론의 '소설'로 익히들 많이 읽은 유비주인공의 동양최고의 베스트셀러 무협지(?).. + 정사에 대해 좀더 설명하자면 정사는 사마천의 사기처럼 /누구는 몇년출생 어떤인물로 이런저런/ 인물별로 적어놨습니다.(기전체) 위정통론이다보니 위나라 인물들 보면 진전투는 그럭저럭.. 이긴전투는 대승 이렇게 씁니다. 하지만 촉,오나라 인물들 내용보면 위 하고는 조금 다릅니다. 사실대로 적어놨죠. 그래서 삼국지 인물들 내용찾을땐 정사 하후연전 에서 이러니까 하후연이 최고다. 이러면 안되고 그전투에 나오는 상대측 인물찾아서 그 전투에 대한 내용비교해보며 알아야죠. 참고로 진수의아버지는 촉나라 마속의 부하로 가정전투의 패배덕분에 형벌을 받게되어 제갈량을 비판하면 적었다는 그런 말을 예전에 들은것도 같고 아닌것도 같고;; 이부분은 헤깔리네요. 또 창천항로 읽어보면 삼국지에 대한 애정이 한층 강해지시고 34권부터 관우에 대한 호감도가 한없이 증가합니다. 삼국지연의가 왜 촉한정통론인지도 설명하려고했는데 사랑합니다님이 퍼팩트하게 적어주셨네요;;
09/10/06 18:56
우선 삼국지 연의의 영향이 크지만 그전 시대에 정통론이란게 있는데요.
첫번째로 정통론을 들수 있습니다. 정통론에서 동진시대에 습착지 가 쓴 한진춘추라는 책에서 부터 위한정통론이 아닌 촉한정통론이 나오게 됩니다. (습착지는 촉한정통론을 들고나온 이유가 당대 실력가인 환온이 동진을 넘보는것을 막기 위한 배경입니다.) 후에 사마광이 다시 위한정통론 이 맞다는 식의 주장을 자치통감에서 합니다. 하지만 남송시대에 주자가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비판하고 자치통감강목을 저술하면서 강력하게 촉한정통론을 주장하게 됩니다. 중국은 한 무제 이후 유교의 영향 아래 있었고, 이러한 유교가 남송의 주희에 의해 크게 발전 되고 주희가 신유학을 완성하고, 대학자로 존경을 받게 되었음을 볼 때, 주자의 촉한정통론은 후대에 큰 영향을 주었죠. 두번째로 한족 중심의 중화사상을 들 수 있습니다. 주희가 삼국지의 정통을 촉으로 본 것은 그의 성리학적 관점에 비추어 보았을 때 적합하였기도 하였지만 주희가 살았던 시기는 남송시대로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는 시기였습니다. 당시 송나라는 금나라와 요나라에 줄곧 시달리고 있어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민족 최대의 시련을 맞이하여 가장 중국적인 것, 가장 문화적인 전통과 역사를 지켜야 하는데 주희는 우선 정신적으로 중국인들이 일체성을 회복해야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하나의 방편으로 제시한 것이 촉한정통론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것은 조조의 위나라를 마치 북방유목민으로 비유함으로써 민족적 위기를 돌파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일종의 역사 프로젝트라고 볼 수 있겠는데, 즉 촉한공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삼국지연의』를 만든 나관중 역시 원나라가 지배하던 시대를 겪었기 때문에 한족의 민족의식을 고양하기 위한 저술의도가 있었습니다. 어느 나라든 자기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사람들은 역사 속에서 민족을 구한 위인을 찾기 마련인데 예로 우리나라가 일제침략기에 을지문덕이나 광개토대왕, 이순신장군의 평전을 만든 것도 그러한 예이죠. 끝으로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앞으로 오나라가 주목 받을것 같습니다. 그 이유를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한(漢)까지 주목 받지 못하던 장강 이남 지역을 오가 건설되면서 차츰 부의 원천으로 돌려놓기 시작했고, 이런 경제력은 어느 국가도 따라올 수 없었고, 그 경제력을 바탕으로 국가를 운영해 가기 시작했죠 이것은 현대 중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고, 현대 중국의 가장 큰 경제력을 가지고 있는 곳이 바로 장강 이남 지역이죠. 그렇기 때문에 유교선양의 촉도 아닌 경제력의 근원을 찾는다는 의미에서 본다면 오나라가 이제까지의 촉나라만큼은 아닐지라도 어느정도의 관심을 받을 것 같습니다.
09/10/06 19:03
아 그리고 관우가 유비의 부각으로 인해 가장 큰 효과를 얻은 인물 중 하나죠. 우리나라에도 몇군데 관우를 모시는 사당이 있는걸로 알고 있습니다..후덜덜하죠.. 그런데 중국이 타민족의 침입을 받았을때 영웅화 신격화 된 인물 중의 하나죠. 몇백년 천년동안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며... 그러한 말들이 전해져 오다가 나관중이 삼국지연의에 첨가시켜서 쓴것이죠. 장비 역시 마찬가지죠. 민중들의 의식 같은거나 소망 같은 것이 반영되어 그렇게 미화되었죠.
09/10/06 19:22
관우는 외국나가서 (굳이 중국이 아니여도) 왠만한 중국식당 가보면 청룡도를든 긴수염의 남자의 모형을 볼수있답니다
중국사람들이 정말로 신으로 모시더군요
09/10/07 01:49
도달자님// 정사 삼국지의 저자 인 진수의 아버지는 촉의 마속의 참군이었는데 마속이 처형되면서 같이 처형당했다고 나와있습니다.
진수는 촉나라에서 문서를 관리하는 일에 몰두하였는데 모두들 환관인 누구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사람에게 다 아부를 했지만 진수는 아부를 안하여 많이 쫒겨났다고 합니다. 그러다 촉이 위에 망하고 위가 천하를 통일하였을때 위에서 관리를 하다가 그만하였고, 조정에서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고 죽었다고 합니다. 진수는 자신의 아버지가 제갈량에 의해 처형당했음에도 사적인 감정보다는 제갈량에 대해 최대한 객관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글을 썻던것 같습니다. 제갈량의 정치적 식견과 능력에 관해 훌륭하다고 평가했습니다. (물론 천명은 위나라이기에 한 개인으로서는 어쩔수 없다고도 했다고 기억합니다.) 그리고 또 기억나는건 진수가 정말로 위를 정통으로 보았냐는 게 논란이 된다는 점입니다. 사실 위서 촉서 오서 이렇게 세나라의 역사를 쓰면서 위의 조조나 조비는 이름을 쓰지 않고 태조, 제 뭐 이러한 호칭들로 적었지만 유비나 손권은 그냥 이름을 적었습니다. 유비와 손권이 황제를 칭한 사실도 기록하지 않았지만 문제가 되는게 진수가 유비를 표현하는게 손권과 달랐다는게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정확히 기억은 안나는데.. 유비가 죽었을때 붕이라고 표현했나??...이것 뿐만 아니라 많이 그렇다고 합니다. 아무튼 손권과는 달리 어느정도 표현상에 격을 달리했습니다. 그래서 몇몇 사람들은 진수는 촉한정통론을 주장하고 싶었지만 자신의 나라가 위나라여서 어쩔수 없이 위를 정통으로 보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또 관우에 대해 덧붙이자면 관우가 중국에서는 무신 뿐만 아니라 재신과 같이 다른 류의 신도 다 포함하고 있는 상징적 존재가 되었는데, 재신이라고 상징되게끔 만든 것은 관우가 출생했던 지역의 상인들이 만들어냈다고 합니다. 또 어느 지역인지 기억이 잘안나는데... 그 지역 사람들이 상업의 활성화를 위해 관우를 끌어들였답니다. 아 그리고 관우를 신격화하기 위해서 송나라 이래로 많은 나라들이 신격화 했는데 명나라 주원장부터 관우를 제 라는 위치까지 올렸답니다. 청나라때는 피휘까지 됩니다..(황제의 이름을 피해 글을 쓰는 것을 피휘라고 합니다.) 그리고 관우를 상징하는 청룡언월도 그것도 허구라고 하네요. 그 청룡언월도의 무게를 생각했을때 사람이 들고 휘두를 수 없다고 합니다. 아마 후대에 사람들 입에서 나온 생각이라고 보는게 맞을꺼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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