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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2/28 17:20
글쎄요... 제 생각은 솔직히 "받아들이기 나름"이라고 봅니다.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여러 가지 방법이 있죠... 세계사 첫 시간에 배우는 것으로 압니다마는, 크로체는 "역사란 역사가의 의견이 혼합된다"고 말했다죠. 그 말을 염두에 두면 될 것 같습니다. 즉 판단은 질문하신 분 나름이라는 말이죠.
08/12/28 17:41
정확하게 알수없는일이죠.. 기록에는 남아있어도 그것은 보통 어떤세력에 의해서 작성된거기때문에 객관적사실이라고 보기힘들죠.. 그나마 기록에 남아있고 많은 역사가들이 충신이었을꺼라는 가설에 좀더 무게가 실렷기때문에 그것을 우리가 쉽게 접할수있는 사실로 받아들이고있는것이죠.. 질문에 대답하자면 진정한진실은 정몽주만 알것이고 지금시대에서 우리가 할수있는건 맘에드는 가설을 믿고사는거뿐이죠..
08/12/28 17:48
인간의 행동은 정치적일 수 밖에 없고,따라서 (특히 정계에 있는 사람의 행동은)정치투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정치투쟁의 목적에 대해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든 개인적 욕심으로 이름짓든 그것은 아무런 차이가 없지요.동전의 양면일 뿐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 권력욕구라고 말해버리는 것은 모든 사회현상을 그런식으로 축소하고 폄하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봅니다.소위 말하는 조선일보식 역사관이라고나 할까요? 전두환정권도 개인적 권력형비리로,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몰아가려 합니다.따라서 인간의 행동자체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의 해석자체가 지극히 정치적 목적에 따라 개인적인 것으로 보는것인가 아닌가가 더 문제의 쟁점같습니다. 정몽주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저는 이시대의 성리학에 대해 굉장히 놀라운 점들을 발견하곤 합니다.고려시대는 힘의 논리가 사회깊숙하게 뿌리박힌 시대입니다.인간의 존엄성은 그야말로 무시되던 시대였고요.원나라의 지배는 이런 모순들을 더욱 깊게 만들었지요. 이런 시대에 성리학만이 '고려인의 존엄성을 지켜내고, 나라를 실질적으로 독립시켜낼 복음'으로 여긴 것은 지극히 재평가받아야 한다고 봅니다.그런 선구적인 노력을 한 인물로 가정 이곡선생을 들고 싶습니다.그는 원나라에 유학하면서 '공녀제도'가 비인간적이라는 이유로 폐지하는데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고려의 미래를 '문명화'에서 봤습니다. 이계보가 이색-정몽주로 내려옵니다.이런 성리학을 우리나라에 토착화시키고 완성해낸 것이 정몽주입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연산군시절 새롭게 등장한 사림파들은 정몽주를 '성인'의 반열에 올려놓았는데 다 그런 이유때문입니다. 이성계는 무장입니다.이방원은 성리학을 공부한 사람입니다만 이성계는 구시대의 힘의 논리에 입각한 사람입니다.아마 정도전을 비롯한 젊은 성리학자들이 이성계를 끌어들였던 것은 고려시대의 귀족정치의 한계(특히 토지제도)때문이라고 봅니다.이런 식의 힘의 논리에 대해 기존의 성리학자들,특히 이색,정몽주와 같은 공민왕시대에 등용된 성리학자들이 반대한 것은 정치노선상의 차이가 컸겠지만 이색정몽주는 '선군에 의한 왕도정치'를 '신하들의 의견에 의한 귀족정치'를 지향한 정도전과 궤를 달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정몽주가 개인적으로 얼마나 야심이 컸는지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문제라고 봅니다.그리고 그의 판단이 옳았느냐 아니냐도 역사에 만약이 없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다만,왜 그랬는지는 물어보고 따져볼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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