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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1/07 17:20
베트남전은 미국이 정치적인 이유로 남베트남에서만 전투를 했으니 패했다고 보기는 애매하죠.
애초에 북베트남에 진군을 하지 않았으니까요.
11/11/07 16:48
자칫 잘못하면 3차 세계대전으로 번지게 되니까요. 그리고 중공군도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으로 단련된 정예병이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오합지졸과는 거리가 매우 먼 병력이었습니다.
11/11/07 17:02
그때 맥아더가 중공군의 개입 이후 만주에다가 항공 폭격을 하자고 주장했고, 미 정부는 반대했죠. 사실 맥아더 말대로 했으면 세계 3차대전이 벌어졌을 지도-_-;;;;
위키백과 中 만주 폭격 주장 1951년 3월 10일 그는 한국 전선의 제12차 시찰을 마치고 성명을 발표했다.[11] 그는 국제적 결정이 없으면 한국은 침체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라고 지적하였다.[11] 이날 성명에서 그는 만주 폭격을 해도 군사기지 시설에 한판 폭격이며 민간인 피해는 없을 것[11]이라고 언명하였다. ...중략... 트루먼과의 불화와 해임 그러나 그는 전쟁에서 독단적인 행동에 대한 당시 대통령 해리 S. 트루먼의 불신으로 인해, 한국 전쟁 후 미국에서 매카시스트 즉, 극단적 반공주의인 매카시즘 추종자로 낙인찍힌다. 또한 중화인민공화국 정규군(중국인민지원군)의 개입을 무시하다가 중국이 전쟁에 수십 개 사단급 병력을 보내어 개입하자 만주에 원자폭탄 투하와 장개석총통 지휘하의 대만군 동원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맥아더는 "공산주의의 뿌리를 뽑겠다"는게 목표였던 반면, 트루먼은 정치가인지라 "제한전쟁"으로써 전쟁은 시작한 곳에서 끝나야 하고, 얼른 전쟁을 종결지어야 정치적으로 안전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런 의견차로 결국 맥아더는 해임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중공군의 참전 이후, 맥아더는 보급/충원의 근거지가 되는 만주에 항공폭격을 허가해 달라고 본국에 요청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소련에 참전빌미를 줘 확전되는 것을 우려하여 불허했다. 중공군 참전 이전에 대만을 연합군에 편입시키지 않은 것도 중공에 대한 자극을 피해보려는 이유에서였다.
11/11/07 17:02
서울 수복 후 휴전선 전투 고착지점이 남북휴전협정에 막 들어갈 시기 아니었나요? 그 3년동안 강력한 중화력을 퍼붓기엔 소련이나 중국과의 관계같은게 문제가 있었을거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전선에 중화기 지원폭격등을 해 주었지만, 미군을 투입시키기에는(한국전은 지형특성이나 당시 무기수준상 중화기만큼이나 군인이 중요했죠) 인명피해가 너무 심할거라 생각했을지도 모르지요..
11/11/07 18:16
일단 소련참전과 확전을 염려해서 휴전선쯤에서 막으면 된다고 생각했던게 가장 크고 투입병력도 부족했죠.30만이하였던가..
불과 5년전 2차대전때 1천만이 넘는 미군을 투입했던것에 비하면 정말 작은 규모죠.
11/11/07 18:40
저는 시각이 조금 다릅니다..
중공군은 되면 한반도 반쪽은 내꺼, 안되면 말고 정도의 느낌이라고 생각했고, 소련 같은 경우는 아마 참전하지 않았을 겁니다. 핵이 떨어졌으면, 3차 대전 보다는 아마 바로 GG 나오면서 전쟁 끝 민주주의 시작이었을 것 같은데, 트루먼 이 양반이 다 이렇게 만든거죠..
11/11/08 01:44
북진을 안한것이 아니라 못한겁니다.
제공권을 장악했다고는 하지만 지금처럼 정밀폭격이 가능한 것도 아니었고 수송기로 나르는 공수부대는 꿈도 못꾸던 때였습니다. 결국 보병이 거점확보하는 식의 전투로 땅따먹기를 해야하는 상황이었으나 소련의 장비와 중공의 병력을 지원받은 북한은 만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유엔군이라지만 결국 미군이 대부분이었고 몇천키로를 날아와야했지만 중공군은 마른땅을 밟고 들어온 것부터 차이가 있었죠. 중국은 공산주의 진영내에서 열등한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 북한이라는 완충지대를 사수하고자 전폭적인 지원을 하였습니다. 6.25때 실제 참전했던 백선엽, 채명신장군 회고록을 보면 지금 설악산 등산도 감사해야 한다는 걸 느낄 수 있죠. 결론은 한뼘이라도 더 북진하려했으나 못했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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