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Date 2005/02/16 18:33:29
Name kama
Subject [연재소설]Romance - 2. Boy meet Guy?
  네, 2편입니다^^; 가뜩이나 요즘 복학 문제 때문에 골치 아프고 속까지 쓰린데 이 놈의 수강신청이 아주 사람 미치게 만드네요ㅡㅡ;(적어도 전공과목은 들을 수 있게 하란 말이닷!!!) 아마 대학 복학 때문에 이번 20일 정도에 서울로 올라가서 지낼 듯 합니다. 코엑스 가기 쉬워졌다는 것은 좋지만(어이~) 아무래도 비싼 돈 들여서 대학 다니는 거라 이제 슬슬 제대로 공부를 시작해야 겠네요. 군대도 다녀왔고. 어쨌든 그래서 가능한 서울 가기전에 빨리 연재를 할려고 합니다. 대략 총 7-8편 정도로 예상하는데 다 올리는 것은 무리겠지만(글 쓰는 속도가 상당히 느리죠ㅡㅡ;) 가능한 많이 올리고 갈 생각입니다. 문제는 그러다 보니 검토를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생길 것 같다는 거죠. 워낙 정신없이 쓰는 것이니 넓은 아량을 베풀어 주길 바랍니다^^;;;  



  2. Boy meet Guy?


  “확실히 센스는 좋아. 워크급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그런데 전술이 너무 굳어있어. 유연성이 없다고 할까? 그래서 오히려 상대하는 나로서는 더 편리하지. 언제 어떤 병력을 가지고 어떻게 플레이할지가 눈에 보이니까.”

  “마킹은 확실히 좋은 영웅이야. 특히 체력이 약한 휴먼의 병력에선 핵심이 되는 영웅이기도 하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데스나이트처럼 사용하는 것은 무리라고. 속도가 너무 느리니까. 아템과 레벨이 받쳐주지 않으면 차라리 후방에서 스킬 지원으로 사용하는 편이 더 도움이 될 거야.”

  “휴먼이 패멀을 하지 않으면 후반에 가서 난감한 것은 사실. 하지만 그렇다고 패멀에 너무 집착하는 것도 좋지 않아. 이래 봐도 캐리어가 꽤 있는 몸이라고. 패멀하는 휴먼이 약한 부분 정도는 훤히 보인다는 말이지.”

  “날카롭게 갈고 닦은 타이밍은 양날의 검이야. 날카로운 검일수록 쉽게 부러질 수 있는 것이니까. 한 번의 올인 플레이에 사활을 거는 것보다는 후반을 노리는 조금은 안정감 있고 침착한 경기 운영을 몸에 익히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

  ......사람의 운명이라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놈이다. 아마 그때 난 처음으로 1승을 따낸 후에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다면 처음 보는 여자에게-물론 배틀넷에서는 몇 번 만났었지만-그런 말을 꺼냈을 리가 없을 것이다. 나도 참 용감했지.

  ‘워3를 가르쳐 줄래요?’

  처음에는 당황해 하던 그녀도 우연의 장난 같은 만남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같이 워3를 하는 사람끼리의 동지감 때문이었는지 결국은 승낙을 했다. 물론 친구 녀석이 ‘이번에도 정말 고전적인 방법을 쓰는 구나.’ 라면서 까불거렸던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겠지.(더불어 내가 결국 녀석에게 길로틴 쵸크를 먹인 것도.)    

  “무엇보다 게임 중에 집중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점이지.”

  “......아아, 미안.”

  어쨌든 그리하여 내가 그녀와 같이 워3를 하게 된지도 어연 한 달이 다 되간다. 여전히 성적은 좋지 못했지만 그래도 처음보다는 확실히 승률이 올랐다. 이제는 한 5-6연패 정도 하고선 1승 정도는 거두는 정도는 되었다. 나아.....진 것이겠지? 나는 잠시 짬을 내서 옆에 앉아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문가연. ㄴ받침이 두 번이나 들어가서 발음하기 불편하다고 스스로 평하는 이름. 나이는 나와 동일. 당연히 학년도 나와 동일. 알고 보니 바로 옆 반이었다는 사실. 하긴, 같은 반 사람도 누가 누군지 모르는 형편에서 옆 반 학생의 얼굴을 기억했을 리 없다.
  어쨌든 그녀는 비슷한 연배의 여고생들과 별 다를 바가 없다.(뭐, 내가 그 연배의 여고생들을 잘 모르기는 하지만) 학교 나오기를 귀찮아하고 수업시간에 가끔 졸기도 하고 쉬는 시간이면 친구들과 떠들던지 엎드려 자던지 하고, 외모에 신경을 쓰며 거울을 바라보는 모습도 종종 보이며 어여쁜 장식품을 보면 매우 좋아하기도 한다. 다만 그런 그녀가 같은 나이의 다른 여자들과 조금 특출 난 점이 있다면 주 관심 소재가 멋진 연예인이나 가수들이 아닌 게임, 그것도 워크래프트3라는 것 정도일 뿐이다. 그것도 아주 매니아 적으로.  

  “응? 내 얼굴에 뭐가 묻었어?”

  “아, 아니.”

  ......그것만으로도 평범한 여고생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려나. 그녀와 같이 워3를 연습하기 시작한 후로 내가 가장 놀란 것은 그녀의 컨트롤도, 운영도, 생산력도 아닌 집중력이었다. 그녀는 게임을 할 때 완전히 몰입한다. 가끔은 옆에서 지켜보는 것이 즐거울 정도로 반응을 보이기도 하고. 지금도 내 불쌍한 마킹을 때려잡고선 기뻐하는 모습을 보자면 당한 나조차도 즐거워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고민에 빠진다......아, 또 졌군.

  “왜 언데드야?”

  “응?”

  “왜 언데드를 선택했냐고. 보통 여자애들이라면 나엘이나 적어도 휴먼을 생각하지 않아?”

  “잠깐, 그 말은 내가 보통 여자애가 아니라는 소리로 들리는데?”

  “뭐, 게임에서 잘나간다던 남자를 수도 없이 때려잡은 여자에겐 보통이라는 말은 잘 안 쓰이지 않아?”

  “어허, 그런 남녀차별적인 단어를 입에 올리면 아니 돼지.”

  두 눈을 부릅뜨고 검지손가락을 절래절래 흔든다. 이렇게 보면 나름대로 귀엽단.....말이지.

  “하여튼 그게 궁금해서 그래. 언데드를 보면 징그럽다거나 그러지 않아?”

  “뭐, 나도 처음에는 휴먼을 하려고 했거든. 왠지 반지의 제왕 필 나잖아?”

  반지의 제왕이라, 인간과 드워프, 그리고 엘프의 연합이라서 그런가.

  “근데 나에게 워3를 가르쳐준 사람이 언데드 유저였거든. 그래서 언데드로 기초를 배우고 그랬더니 자연스럽게 언데드 유저 쪽으로 가더라. 하다보니 정이 든다고나 할까? 나름대로 귀엽잖아? 만세삼창 어콜라이트도 그렇고 구울도 잘 보면 저글링처럼 팔짝 팔짝 뛰어다니는 것 같고.”

  흐음. 하긴 스타의 저그를 보고 귀엽다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으니까 언데드를 보고도 그럴 수는 있겠다. 물론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는 말이지 공감이 간다는 말은 아니다. 특히나 나처럼 언데드만 봐도 치가 떨리는 인간에겐 더욱.

  “그러는 넌? 왜 휴먼을 선택 한거야? 성격만 놓고 보자면 오크가 적성처럼 보이는데.”

  “아아, 처음에는 고민 좀 많이 했지. 휴먼도 재밌고, 오크도 재밌으니까. 더욱이 난 워크래프트 1탄부터 쭉 해온 유저라 그 두 종족이 친숙하기도 했고. 그래서 초반에는 둘 다 했는데 이런 생각이 들더라. 남자라면 역시 마킹! 이라고.”

  “아마 네가 오크 유저였다면 남자라면 역시 블마! 혹은 칩짱! 이라고 했겠지.”

  “그런가? 하긴 실제로 그렇게 말하는 인간들도 꽤나 많이 봤지.”

  “후후, 취향 차이겠지. 같이 키가 작은 사람끼리의 동질감 같은 거 아니야?”

  악, 그렇게 아픈 곳을 정확히 찌르는 것은 사람의 예의상 할 일이 아니잖아!

  “그, 그래도 너보다는 크다고.”

  “헤, 여자보다 키 큰 것도 자랑이냐~”

  “아니, 그것도 남녀차별 적인 발언이라고 생각되는데.”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운명이란 참으로 기묘하고 신기한 물건이다. 고교생활에서 여자와 같이 이렇게 친숙하게, 그것도 게임을 주제로 떠들 수 있으리라고는 짐작도 못했었지.

  “자, 그럼 한 게임 더 하자고”

  “응? 시간이 너무 늦지 않았어? 나야 이미 집에서 버린 자식이니까 상관없다지만 너는 집에서 걱정할거 아니야.”

  “아아, 그건 걱정 마. 오늘까지는 괜찮으니까.”

  “오늘까지는?”

  “정확히 말하자면 오늘이 마지막이겠지만.”

  응? 마지막?

  “......무슨 일이라도 있어?”

  잠시 뭔가가 잘못된 듯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그녀가 갑자기 키득 키득 웃는다. 뭐야, 남은 기껏 걱정해주는데 그렇게 웃어버리면 내가 무지하게 무안해지잖아.  
  
  “너 정말 집에서 버린 자식인가 보구나.”

  “갑자기 그 이야기가 왜 나오는 것인데.”

  “2주 후에 중간고사가 시작하잖아. 엄마와 약속한 것 때문에 난 이제 슬슬 시험공부 준비해야 하거든. 그것도 모르고 있었지?”

  중간고사라, 음 그렇군. 확실히 그런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하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는 했지만. 그거야 그때는 너를 이기는데 모든 정신을 집중하고 있어서 그런 것이었다고. 나도 시험공부 정도는......하지 않는군. 하늘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선 뒤를 돌아보지 않고서 그저 전진할 뿐이지. 앞에 함정이 있건, 가시밭길이 있건, 매를 든 아버지가 있건 간에.

  “난 집하고 약속했거든. 게임이던 뭐건 말썽 일으키지 않는 범위에선 맘대로 해라. 다만 성적만큼은 꾸준하게 유지해라.”

  “참으로 귀찮은 약속이로구만.”

  “......학생의 본분은 공부라는 말은 들어보셨나요.”

  “그런 속설이 있다고는 들어봤지.”

  결국 그녀는 한심한 눈초리로 날 바라보더니 한 숨을 푹 내쉰다. 하지만 그런 것도 잠시, 곧 활기찬 몸놀림으로 기지개를 쭉 피고선 기운차게 외친다. 암암, 이게 평상시 가연의 페이스지. 괜히 늙은 척 해봤자 어울리지 않는다니까.

  “어쨌든 다시 한 판!”

  좋아, 이번에는 이겨주지. 그동안 가연의 특훈(?)덕분으로 격차가 많이 줄어든 탓인지 마음속에서는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활활 불타올랐다. 물론 자신감만으로 어찌어찌 이겨볼 상대가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런데 어라? 왜 배틀넷으로 들어가는고? 날 상대로 승수 올릴 계략?

  “뭐야, 배틀넷에서 붙자고?”

  “아니. 너와 1:1은 지겹도록 해 왔잖아. 마지막인데 한 번 색다르게 해보자고. 2:2 어때?”

  “2:2? 너랑 나랑 같은 팀?”

  “왜? 나랑 같은 편이라는 게 맘에 안 들어? 미덥지 못하다는 거야 뭐야?”

  살며시 눈 부분을 찌푸리고 노려본다. 저런 것도 나름대로 귀엽다. 물론 게임 상에서는 전혀 귀엽지 않다는 것이 문제긴 하지만.

  “아니. 왠지 상대가 불쌍해서.”

  “후후. 곱게 모셔드려야지.”

  단순히 배틀넷에서 떠돌아다니는 양민들 정도라면 아마 가연이가 혼자 상대해도 충분히 상대를 할 것이다. 이것이 내 예상이었고 첫 경기에서 나는 이러다 TV에 출연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아찔한 만족감을 느꼈다. 그녀는 전문 조합이 아닌 어설프게 끼어들어온 팀플로는 도저히 손을 댈 수 없는 수준의 견제를 보여주었다. 데스나이트가 홀로 뛰어나가 상대 두 영웅을 애정 어린 손길로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더라. 너무 다정했는지 상대의 두 영웅은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고.

  “너무 싱겁잖아?”  

  “레벨 차이가 났었으니까. 고렙 사람들을 만나면 이렇게 쉽게는 안 풀리겠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전문적으로 팀플 호흡을 맞춰온 고수급 플레이어들이 아닌 이상 이 조합을 깨기는 무리라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가연 씨. 당신이 그동안 그 순진한 얼굴로 박살내온 인간들이 누구였는지 한 번 생각해본 적이나 있나요? 학교에 잘 다니면서, 그렇게 성적 챙기면서 그런 실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거의 치트에 가까운 것이라고요. 나만 봐도 학교 성적을 하늘과 땅에 맡기고서 정진을 하는 몸인데.

  “그럼 다시 방 만든......어?”

  “왜?”

  “누가 메시지를 보냈어. qwe_as_zxc? 아까 우리랑 같이 했던 사람이 저런 ID였나?"

  아니다. 적어도 저렇게 성의 없이 만든 ID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저 ID는 일단 전적도 하나 없지 않은가. 분명 누군가가 아무런 생각 없이 손 가는대로 새로 만든 것이 틀림없다.

  “짐작 가는 사람.”

  “나도 없어.”

  지정을 해서 메시지를 보냈다는 것은 저쪽은 paran_hanle이란 ID를 알고 있다는 이야기겠지. 뭐, 나처럼 멋도 모르고 덤볐다가 당한 사람이 꽤 있었으니까 그건 특히 이상할 것은 아닌데, 굳이 새 계정을 만들어서 덤비는 속셈은 뭘 까나. 가연의 실력은 잘 알고 있으니 주로 쓰는 ID의 패수를 조정하기 위해서일까? 그렇다면 이해가 가기는 한데 그 정도로 소극적인 성격이라면 아예 덤비지를 말았어야지.

  “뭐라고 보냈는데? 한 판 붙자고 하는 거야?”

  “응, 붙긴 붙자는데......2:2로 붙자는데?”
  
  “응?”

  어라, 그렇다면 그녀에게(그녀일지는 생각도 못하겠지만) 복수의 칼을 갈아온 피해자일거라는 예측은 빗나가는 셈이다. 아니면.....무슨 든든한 후원자를 등에 없고 온 걸지도. 훗, 하지만 나를 무시하면 그 결과는 역시나 참담하게 될 거라고.
  이런 예상은 얼추 맞아 떨어졌다. 가연과 나는 그런 도전을 받아들였고, 그 쪽에서 만든 방으로 들어가자 승패 없는 그 성의 없는 ID의 언데드와 함께 꽤나 전적이 쌓여있는 다른 한 명이 대기하고 있던 것이다. red_earth[K.d]. 레벨이....38. 흐음, 나쁘지 않군. 종족은 나엘. 하지만 그녀는 물론 나까지 우습게보면 결국 땅을 치며 후회할 것이다. 가연에게 무지하게 당한 ID가 아닌 세컨 ID로 들어와서 레벨은 보잘것없지만 말이지. 내 머릿속에서 대략 시나리오가 펼쳐졌다. 일단 저 나엘이 가연의 언데드를 담당하고 저쪽 언데드가 나를 견제한다. 아마 그런 작전이었겠지. 하지만 가연이 나엘을 상대하는 사이에 내가 역으로 저쪽 언데드를 묶어버려 2:1 분위기로 만들어 버린다. 가연도 버거워할 나엘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남은 언데드를 차분히 요리. 이러면 만사 ok.
  하지만 게임에 들어가면서 내 생각들은 어긋나기 시작했다. 그 기본부터.

  언데드가 언데드를 상대하고 나와 나엘이 서로 상대하게 되었다. 위치 때문? 아니다. 그런 건 처음부터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것처럼 철저하게 계획된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나엘 쪽도 적극적인 내 아크메이지 견제가 아닌 그저 자유로운 활동을 방해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어 결과적으로 이 팀플은 데스나이트 대 데스나이트의 싸움으로 되어버렸다.
  
  ‘이상한데.’

  정말로 이상하다. 선 데몬헌터, 선 데스나이트라면 내 아크메이지를 잡는다던지 풋맨이나 일꾼을 잡을 각오로 덤벼드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그런 기미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철저한 맨 마크 전술. 같은 편의 실력을 그만큼 믿는다는 것일까? 아니면......
  원래 1:1을 할 생각이었다던가.

   ‘그거였군.’

  저쪽은 처음부터 2:2를 할 생각이 없던 것이다. 다만 우리가, 아니 정확히는 paran_hanle, 문가연이 2:2팀플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 맞춰주려고 2:2를 신청한 것이다. 지금 그녀에게는 1:1을 신청해도 나를 생각해서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니까. 하지만 이 가설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의 조건이 성립되어야 한다. 즉, 상대 쪽이 그녀가 2:2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 소리는......아마 저 성의 없는 ID의 주인이 여기 이 PC방에 있겠다는 말이겠지. 흐음, 누굴까나. 나는 살며시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보려 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 보이는 시야는 한계가 있었고 그 안에서 나는 워3를 하는 다른 유저를 발견하지 못했다. 일어나서 돌아다니면은 누군가를 발견할 수도 있겠지만, 비록 1:1을 위해 같이 들어온 정도의 역할이라고 해도 저 나엘은 녹녹하지 않았다. 아니, 무지하게 강했다.

  새삼 느끼게 된다. 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다는 사실을. 나를 가연이 만큼 짓누르고 있는 나엘이나 그녀를 상대로 계속 우위를 지켜나가고 있는 저 언데드나. 같은 영웅, 같은 체제의 싸움. 위치상 유불리도 존재하지 않는 완전히 동등한 상황. 그런 상황에서 차이가 진정한 실력 차이라고 본다면 확실히 상대 언데드의 실력은 그녀를 뛰어넘고 있다. 작은 차이, 그렇게 눈에 띄는 차이는 아니었지만 확실히 존재했다. 왠지 저 상대의 퍼스트 ID를 보고 싶을 정도로.
  더욱이 이상한 것은 가연의 반응. 분명 자기가 몰리고 있는 상황임에도 분해하거나 당황해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살며시 웃으면서 상대의 실력을 즐기는 듯한 모습. 음, 자기보다 강한 상대는 얼마든지 환영한다는 그런 열린 정신의 소유자라서 그런 것일까.

  “아, 졌네.”

  결국 내가 먼저 휴먼이 나엘에 무난히 쓸리는 전형적인 표본을 보여주면서 전장에서 사라졌고 그 약간의 차이를 결국 넘지 못한 그녀 역시 조금 더 버티다가 gg를 치고 나왔다. 하지만 방에서 나오면서 중얼거리는 그녀의 목소리에선 만족감까지 흘러나왔다. 마치 상대가 누군지를 알고 있는 듯한 반응이다.
  
  [실력이 많이 늘었어]

  메시지가 그녀에게 날아 왔다. ID는 qwe_as_zxc. 나는 재빨리 가연의 뒤로 가서 모니터에 집중을 했다.

  [뭐, 그쪽만 하려고]

  역시나 그녀는 상대가 누군지 알고 있는 모양이다.

  [아니, 정말이야. 간담이 서늘하던데? 여기서도 너 정도의 언데드는 흔치 않다고]

  [^^V]

  ......그러고 보니 좀 전에 그녀가 그랬지. 자기에게 워3를 가르쳐준 사람이 언데드라서 자기도 언데드를 선택하게 된 것이라고. 그럼 저 무성의한 ID의 주인이 그녀의 스승인 것 일까? 그렇다면 그 실력도, 경기 중의 아연의 반응도 이해가 간다만.

  [그나저나 시간이 남는가 보지. 연습 중에 노는 거 아니야?]

  [무슨 소리. 너와 게임하는 것도 충분히 연습이 된다고. 게다가 지금은 연습시간도 아닌걸. 정확히 말하자면 자유 시간 정도라고 할까]

  연습이라. 설마 프로게이머인 것일까. 나는 내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는 수많은 언데드 프로게이머들의 이름을 나열했다. 그래봤자 상대의 정체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 친구랑 놀기라도 할 것이지]

  [너도 마찬가지잖아. 우리에게 노는 것이 워3하는 것이지]

  [나처럼 취미로 하는 사람하고 오빠처럼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하고 같나]

  오빠라, 왠지 부러운 칭호로군. 음......아무래도 동갑인 가연이에게는 평생 가도 듣지 못할 단어이기도 하니.

  [그건 그렇고 그런 이상한 ID로 들어온 이유는 뭐야? 내가 도전 안 받았으면 어떻게 했으려고]

  [아아, 그거야 내 ID가 워낙 유명하니까^^ 거기에 놀라게 해줄 생각도 있었고]

  [그거야 실력이나 스타일보면 딱 인데 놀랄 것도 없지]

  [그럼 이건 어떨까?]

  [응?]

  “가연아, 오랜만이네.”

  역시 내 예측이 맞았다. 그 상대편은 우리와 같은 PC방에 있던 것이다. 거참 실없는 사람일세. 여자 하나 놀라게 하려고 그런 쇼를 다하다니. 하지만 그런 노력이 효과가 있기는 했는지 가연은 엄청나게 놀란 얼굴로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녀와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놀란 듯한 표정이다. 저러다 심장 멈추는 것은 아니겠지?

  “오빠?!”

  “정말 많이 컸네. 하긴 그 나이 때는 하루 만에 못 알아볼 정도로 자라는 게 정상 일려나.”

  “언제 귀국한거야?”

  귀국? 가연의 말을 들어보니 원래는 외국에 나가 있어야 하는 모양이다. 하긴 그 정도면 충분히 놀랄 만 하겠군. 나는 일단 그 외국에서 남몰래 귀국해서 동생을 놀라게 하는 황당한 짓을 태연하게 실현한 그 남자를 쳐다보았다. 나이는 대략 20대 초중반 정도 됐을 것 같다. 전체적인 인상을 보면 부드러운 웃음을 자연스럽게 지을 사람처럼 보인다. 묘하게 휘어진 눈매가 그런 생각을 들게 하는 것인 듯. 하지만 전체적인 얼굴 윤곽은 선이 강한 편으로 쉽게 잊혀지지는 않는다. 음......그 때문 일까나, 왠지 낯설어 보이지 않는 것은. 한 달 전, 가연의 얼굴을 처음 봤을 때 이런 느낌이 들었던 것은 PC방에 들어설 때 그녀와 부딪쳤기 때문이었지만 저 남자와는 처음 만난 것이 분명한데 왜 그럴까.

  “오늘 아침 쯤에 도착했어. 숙소 한 번 둘러보고 집으로 갔는데 어머니가 너라면 여기 있을 거라고 말씀하시더군. 그래서 찾아왔더니 열심히 팀플을 하고 있어서 몰래 자리 잡고 배틀넷에 들어 간 거지.”

  정말이지 수고가 많으십니다.

  “그런데 왜 한국에 온 거야?”  

  “WEGL 때문에. 이번에 초대받았거든.”

  “WEGL? 정말? 그런데 왜 알려주지 않았어?”

  “그냥. 왠지 자랑처럼 보이잖아. 어차피 기사가 나가면 알 것이기도 했고.”

  자랑일 것까지야......가 아니라 잠깐, 뭐라고 했나요? WEGL? 설마 그 월드 E-스포츠 게임즈 리그(World E-sports Games League)를 말하는 것인가요? 세계의 유명 워3게이머들을 초청하여 16강 리그전을 치르는 그 대회? 나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다시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맙소사, 이제야 왜 그가 눈에 익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는 순간, 나 역시 가연과 처음 만났을 때 이상으로 놀라고 얼빠진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그때와 비슷했던 것은 그런 와중에서도 입을 열었다는 것 정도......일까나.

  “라이센 신?”

  남자는 나를 바라보고선 살짝 웃음을 머금었다.

  “그런 이름이긴 하지만 한국에 왔으니 한국식 이름인 신의식으로 불러 준다면 고맙겠어.”

  맙소사, 저번 ESWCS(E-Sports World Champion-Ship) 워3부분 준우승자가 여기는 왜 나타난 것이지?



  P.s) 짐작하시겠지만 WEGL은 WEG, ESWCS는 ESWC를 가지고 장난친 것입니다^^;;;(뒤에 단어 덧붙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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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마린
05/02/17 10:31
수정 아이콘
수고하십니다. 재미있습니다. 다음편 기대됩니다.
아케미
05/02/17 11:29
수정 아이콘
정말 너무 재미있는데요^^ 표현에서 픽픽 웃게 되기도 하구요. 다음 편도 여전히 기대합니다.
05/02/19 12:10
수정 아이콘
1편 시작은 H2 를 떠올리게 했는데, 읽을 수록 흥미진진해지네요.
재미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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