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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5/02/14 12:50:30
Name kama
Subject [연재소설]Romance - 1. Boy meet Girl
  ^^; 말대로 연재를 할 계획으로 쓰는 워3 관련 소설입니다. 실력도 실력인데다 끈기가 부족해 연재한 것 중에 제대로 끝난 것이 없어서 걱정이긴 합니다만 어쨌든 기왕 쓴 거 재주껏 써볼 작정으로 올립니다. 재밌을지는 모르지만ㅡㅡ;;;; 아, 그리고 이 글은 집에서 워3가 잘 안돌아가는 이유로 방송만 즐겨보는 워3 초하수의 글이라는 것을 염두해 주세요~



1. Boy meet Girl


  “쿵” “깍!”

  일정 이상의 무게를 가진 두 개의 물체가 맞닿으면서 나는 둔탁한 소리. 그리고 톤이 높으며 날카로운, 여성으로 추정되는 누군가의 비명소리. 그리고 내가 느끼는 약간의 충격과 비틀거림. 이런 것들로 추정을 하건데 아마 난 어떤 여자와 부딪친 모양이다. 그것도 나의 실수로 말이지. 흠, 좋지 않은 걸. 연애게임과 같은 부류에서는 이런 식으로 히로인과의 관계가 시작되기도 한다지만 나의 나이는 이미 그런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엇인지 명확히 구별할 수 있을 정도. 이럴 경우, 싫은 소리 듣지 않으면 그것만으로도 행운일 것이다.  

  “아, 괜찮으세요?”

  나는 반은 의식적인, 그리고 반은 진심어린 말을 꺼내며 손을 내밀었다. 나야 약간 비틀거리는 정도로 끝이 났지만 체중차이 때문인지 상대는 아예 주저앉은 상태였던 것이다. 아마 부딪친 것 자체보다는 엉덩방아를 찧었을 때의 충격이 더 컸을 듯한 모습. 역시나 게임이나 만화였다면 아슬아슬한 서비스신이 나타났을 듯한 시츄에이션이기도 하지만 아직 한국 여고생들의 치마는 긴 편이라 그런 불상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어라, 그러고 보니 우리 학교 학생이네. 넥타이는 풀었는지, 아예 메지를 않았는지 보이지 않아 학년 구별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다행일지, 불행일지 그 여학생은 내민 내 손을 완전히 무시하고선 그대로 엉덩이를 털면서 일어났다. 그리고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모습으로 요란스러운 PC들 사이로 사라져버렸다. 무시당했다고 화를 내야 할 지, 아니면 별 소리 안 들었다고 만족해야하는지 약간 헛갈렸지만 어차피 그런 것 오래 생각할 처지는 아니었는지라 그대로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나는 컴퓨터를 켰다.

  “이거 아주 고전적인 방법을 쓰셨구만.”

  같이 PC방에 놀러온 자칭 친구라고 주장하는 어떤 인간이 옆 자리에 앉으면서 한다는 소리다. 아마 이 녀석은 나와 달리 아직 환상과 현실의 구별이 명확하지 않은 인간일 것이다. 아니면 내가 아직 대인관계의 심오함을 깨우치지 못한 것 일까나.

  “우연히 부딪쳤을 뿐이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수작 걸 일도 있냐.”

  “왜? 얼굴은 그런대로 괜찮던데. 그나저나 저런 애가 우리 학교에 있었나? 저 정도 수준이면 내가 모를 리가 없을텐데.”

  “그러니까 그런 원초적인 관찰은 혼자서 조용히 하고 나는 관심 없으니까 말 걸지 말라. 정신집중 해야 하니까.”

  그렇지. 난 지금 중요한 결전을 앞두고 마음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는 상황이다. 친구 녀석의 시시껄렁한 농담에 일일이 반응해줄 시간 따윈 없단 말이다. 컴퓨터가 켜지자마자 마우스를 움직여 흉악범들도 꼬리를 말고 도망갈 험상궂게 생긴 백발 아저씨의 얼굴을 두 번 눌러준다. 그리고 한 번의 한숨을 통한 안정감 회복. 배틀넷에 들어가 멋진 사자 얼굴을 한 번 스캐닝 해주고 친구 찾기로 들어간다. 녀석이 있기를 바라면서.
  있다. 아이디 paran_hanle. 그동안 나에게 수많은 패배의 쓴맛을 보게 해줬던 바로 그 아이디가 현재 베틀넷 상에 존재한다. 나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워밍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그 여자는 PC방에 왜 왔을까나.”

  ......윽 긴장된 순간에 이런 딴 소리라니. 정말이지 그동안 쌓아온 인연의 무게 때문에 미처 내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난들 아냐. 보나마나 화상채팅이나 카트라이더 정도 하러 왔겠지. 그리고 정신 사납게 말 걸지 좀 말라고.”

  “네네, 알았네, 알았어. 이번에는 이기기나 하셔.”

  두 말하면 잔소리. 나는 당연히 기필코 반드시 이길 예정이다. 내가 오늘 이 시간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해왔는지는 하늘이 알고 땅이 알며 수업시간에 내 머리를 향해 광속 칠판지우개를 집어던진 선생님도 알고 있다. 학생의 신분에 얽매인 인간인지라 하루 10시간 맹연습 같은 것은 불가능했지만 내가 이 결전을 위해 전략을 연구하고 가상 시뮬레이터를 머릿속으로 돌린 시간을 합하면 그 정도는 충분히 넘어버릴 정도. 가끔 꿈에서도 데스나이트의 동선이 붉은 줄로 그어지는 것을 봤을 정도란 말이다. 나는 그 엄청난 연습량을 되내기면서 자신감 있게 paran_hanle을 향해 도전의 메시지를 날렸다.
  그리고 화면에 뜨는 ok 메시지. 훗, 그동안 많이 이겼다고 우습게 보는 것이더냐. 하지만 오늘의 나는 더 이상 너에게 연패의 수모를 당하던 그 사람이 아니다. 만만하게 본다면 좌절감을 느끼는 것은 네가 될 것이다. 아니, 내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줄 것이다! 각오해라, 멍하게 앉아 풀린 두 눈으로 천장만을 하염없이 바라보게 해주마! 마음속으로 힘차게 외치며 나는 알타 오브 킹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확히 15분 후, 나는 축 처진 몸을 의자에 파묻힌 상태로 멍하니 천장의 체크무늬의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아직, 아직이다! 내가 이렇게 포기해 버리면 어떡한다는 말이냐! 언제나 역전이란 포기할 상황에서 나오는 것! 이대로 물러서면 결국 다시 패배의 탑을 쌓을 뿐이다.’

  하지만 역시나 현실은 냉혹했다. 의지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벽이 존재하는 법. 아크메이지와 마운틴 킹은 좁디좁은 알타 속에 웅크리고 앉아서 세상을 부정하고 있으며 그 앞에서는 어보미들이 덩실덩실 4분의 4박자 봉산탈춤을 춘다. 몸에 힘이 없어서일지 자연스럽게 그 동작을 따라할 것만 같을 지경이다. 결국 난 손을 들어 키보드의 g자 위에 맥없이 떨구고 말았다.

  “네, 이로서 19연패 기록 달성이군요. 축하드립니다~”

  ......아마 친구라는 허명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달려들어 멱살을 잡고 부모님이 들으면 기절을 할 용어들을 거침없이 내뱉었을지도 모른다.  

  “......스타 3:3 무한하다 엘리미 당해서 할 일이 없나보구나.”

  “가스통 하나 남아있다고.”

  “그거나 저거나.”

  “쳇, 이 비겁한 놈들이 무한의 로망도 모르고 초반 3색 러쉬를 해버리잖아. 무한 히드라의 무서움을 보여주려고 했는데. 그나저나 상대가 정말 대단한 인간인가보다. 네가 이렇게 비참하게 무너지는 것은 보기 힘든 광경인데 말이지.”

  “그러니까, 세상은 넓다......겠지.”

  정말이지, 세상은 넓다. 저런 고수가 알려지지 않은 체 배틀넷 상을 돌아다니고 있었다니. 스스로 말하기에는 좀 뭐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내 실력은 어디가도 떨어질 것 없다는 자부심 정도는 가질만한 수준이었다. 단순히 배틀넷 상의 성적만으로 그렇게 판단하는 것은 아니다. 명망 있는 길드에도 여기저기 얼굴을 들이 내밀면서 고렙의 길드원들과의 대전에서도 일정 이상의 승수를 쌓기도 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내가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저 인터넷 선 너머의 누군가에게 비참할 정도로 연패를 하고 의자 속에 드러누워 있는 것이다.

  “혹시 프로게이머나 유명한 길드원들 아니야? 왜 세컨 아이디나 서드 아이디로 노는 것일 수도 있잖아.”

  그럴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했다. 저 녀석도 떠올리는 생각인데 나라고 안 해봤겠냐. 워3는 아니라 스타였지만 언젠가 프로팀의 연습생과도 우연히 만나서 몇 판 해본 적도 있었고. 하지만 그런 속편한 결론을 내리면 나야 편하겠지만 그러기에는 약간의 걸림돌들이 존재한다. 일단 꽤나 이름난 길드원 중에서도 저 paran_hanle이란 아이디를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아니, 두 명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아이디의 주인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처럼 가볍게 생각하고 붙었다가 낭패를 봤다는 식으로.

  “그리고 배틀넷 상에 들어오는 시간도 매일 비슷해. 그렇다고 전적이 많은 것도 아니고. 내가 도전 신청하는 것을 꼬박꼬박 받아주는 것도 그렇고......”

  “아무튼 특이한 인간이라는 말이군. 말 걸어서 한 번 물어보지 그래? 뭐하시는 분인데 이렇게 잘하시냐고. 이미 몇 번 말 걸어봤으니 어색할 것도 없잖아.”

  “흠.”

  “하긴 나 같으면 하도 져서 열 받아 리얼 파이트로 덤비는 줄 알고 안 알려주겠지만 말이야.”

  “여기가 무슨 80년대 오락실인줄 아냐. 온라인게임하다 사기 당한 것도 아니고. 하여튼, 아직 끝나지 않았어! 이제 탐색전이 끝났을 뿐이지.”
  
  “19번이나 탐색전을 하면 본 싸움은 몇 판이나 할 거냐.”

  ......위험했다. 정말로 멱살을 부여잡을 뻔 했다. 자, 침착해야지. 흥분하면 이길 게임도 져버린다. 차분하게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리매치를 신청했다. 역시나 이번에도 별 주저함 없이 받아들인다. 방금 전은 너무 흥분해 있어서 제 실력을 발휘 못했을 뿐이라고(아니, 그 전 19번 전부!) 이제 제 실력을 보여주지. 이번 판은 기대해도 좋다고.  

  “아, 이 놈들 2명 가지고 질기게 버티네. 난 화장실이나 갔다오마.”

  아무래도 내가 저 사람에게 계속 지는 것은 마음 다잡고 게임에 집중할 때마다 초를 치는 녀석이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미신에 가까운 믿음이 마음속에서 모락모락 피어난다. 인연이라는 것은 정말 무서운 것이다. 하여튼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중에 모니터 화면에 위풍당당한 마킹의 모습이 나타난다. 저 무식한 도끼와 망치를 보고 있자니 이번 판은 정말 뭔가 잘 풀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좋아, 이런 기분이다.

  하, 하아아아아......불태웠어......하얗게 불태워버렸어. 정확히는 불태우고 있는 중이지만. 타워고 배럭이고 생텀이고 뭐고 간에 정말 잘~탄다. 더불어서 내 머리와 속까지 신나게 활활 타오른다. 화면속의 디스트로이어의 공격이 마치 기름을 퍼붓는 것처럼 보인다. 워터 엘리멘탈로 건물 강제 공격이라도 시키면 불이 꺼지려나, 블리자드라도 쏟아 부으면 저 불들이 꺼지려나. 난 결국 20연패라는 새로운 기록을 세웠고 곧이어 들려올 친구 녀석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서 귀를 막았다.
  ......음, 이어지는 침묵이 약간 당황스럽다. 뭔가가 이상하다 싶었더니 실제로 불난 집에 기름 끼얹기를 좋아하는 친구의 반응이 없기 때문인가. 녀석의 비꼬는 말투에 찹찹한 마음 한 번 크게 불 지르는 것이 일반적인 패턴이었는데. 설마 오랜 게임으로 인한 체력 소모 및 심신 쇠약처럼 화장실에서 일보다 탈진으로 쓰러져 버린 것은 아니겠지? 이제 믿을 것은 튼튼한 신체 밖에 없는 녀석이니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아마 뭔가 재밌는 것을 발견했으니까......아, PC방 주변을 여기저기 살피다보니 역시나 녀석의 얼굴이 보인다. 시선의 각도를 봐서는 누군가의 모니터에 집중을 하고 있는 모양. 어디선가 3:3무한헌터라도 하고 있는 것 일까나. 그런데 어째 녀석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다. 정말로 심상치가 않다. 단순히 몰입하고 있는 얼굴이 아니다. 평소에도 멍하고 초점 흐린 인간이기는 했지만 지금은 마치 호웅간에 조종당하는 좀비의 그것과 흡사하다. 뭐랄까, 아무 생각 없이 길 가다가 외계인의 머리를 밟은 듯한 얼굴이랄까.(실제로 그런 얼굴을 봤냐고는 묻지 말자. 세상은 편하게 사는 거다) 경악과 어이없음이 서로 뒤엉켜 뒹굴고 있는 형상. 음, 저 얼굴을 보니 20연패의 좌절감마저도 한 순간에 날아가 버리는 느낌이다.
  
  “야, 뭘 그렇게 보고 있는 거냐?”

  바로 뒤에서 물어봤는데도 별 반응이 없다. 유체이탈 경험 중인가. 난 녀석을 더 보채는 대신 그 시선을 따라 내 눈을 옮겼다. 별 다를 것 없는 광경이다. 장시간 게임을 해도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게 최대한 푹신하고 최대한 넓게 구성된 검은 색 의자, 컴퓨터 수납용으로 만들어진 매끈한 느낌의 하얀 데스크와 그 공간 안에 놓여진 최신식 컴퓨터의 종합 세트. 키보드에 모니터, 마우스까지 별 다를 바 없는 PC방의 한 공간일 뿐이다. 조금 특별한 것이 있다면......그 앞에 앉아있는 사람의 성별이 XX염색체라는 것 정도일까......나?!
  으음......아니야. 이 녀석이 아무리 인기가 없고 앞으로 독신 가능성이 풍부한 인간이라 해도 단순히 여자를 보고 저렇게 얼어붙을 리는 없다. PC방에 출입하는 성비율을 봤을 때 남성이 여성보다 압도적으로 높다고 해도 아예 없거나 보기 힘든 정도는 아니다. 한 번 보면 시선을 뗄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미인? 글쎄, 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면으로 쳐다보기에 부담스러운 외모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넋 놓고 바라볼만한 얼굴도 아니다. 응? 왠지 익숙한 얼굴이네. 아는 여자가 없으니 그럴 리가 없는데. 아, 아까 부딪쳤던 여자잖아. 그렇지, 그렇지 않고야 내가 여자 얼굴을 기억하고 있을 리는 없지......잠깐, 얼굴을 바라보았다고?

  “무슨 용무라도 있나요?”

  우와앗, 그녀가 뭔가 의심쩍은 표정으로 나를 째려보고 있다. 하긴 등 뒤에 남자 둘이 가만히 서있으면 당연히 신경이 쓰이겠지. 더군다나 한 녀석은 완전히 맛 간 얼굴을 하고 있고 말이야. 음,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여자라는 생물과 부드러운 대화를 나누기는 스킬이 아직 부족하다고. 그냥 이 녀석을 붙잡고 ‘죄송합니다!’라고 한 마디만 하고선 사라져 버릴까?
  충분히 매력적인 의견이다. 맞부딪치는 것보다는 피해가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 하지만 내가 막 그 생각을 실행에 옮기려는 순간, 친구 녀석의 몸이 한 발짝 먼저 움직였다. 손끝으로 내 허리를 찔려버리는 형식으로. 의외의 일격을 맞은 나는 봄날 개구리처럼 기괴하고 타인, 특히나 여성에게는 보이기 싫은 포즈를 취하며 팔짝 뛰어올랐다. 아, 눈물까지 나오네.

  “이상한 쇼하지 말고 모니터를 봐봐.”

  좋은 타이밍이야. 조금만 늦었어도 아마 난 형사입건 됐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다행히(?)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모니터라고? 난 웃어야 하는지(윽!) 화를 내야 하는지 선택의 기로에 서있는 미묘한 표정의 여학생을 살며시 외면해주면서 나는 시선을 그 어깨 너머로 옮겼다. 평범한 모니터. 그 안에 펼쳐지는 광경은, 워3? 호오, 여자가 워3를 즐겨하다니. 그것도 PC방까지 혼자 찾아와서. 대단한 열정이야. 이건 확실히 신기한 일이기는 한데 단지 그뿐? 종족이 언데드라는 것도 특이하긴 하군. 배넷 아이디가......paran_hanle인 것도.......응? 뭐라고? 난 사회의 관습에 따라 일반화된 행동, 즉 두 눈을 비비는 행동을 취했다. 하지만 모니터 속의 활자는 달라지지 않았다.

  20연패. 언데드와 휴먼의 밸런스를 생각해도 어지간히 실력차가 아니면 나오지 않는 기록이다. 길드원들 사이에서도 잘 나간다고 자부하던 나에게 그런 수모를 안긴 사람이 바로 배틀넷 저편에 존재하는 paran_hanle이라는 정체 모를 한 인간. 그리고 이 순간 나는 그 사람의 정체를 알고 말았다. 그건 조금 전 PC방에 들어올 당시 나와 부딪쳤던 같은 학교에 다니는 여고생. 오, 마이, 갓? 마킹이 아서스 왕자처럼 배반을 때렸나보다. 그렇지 않다면 스톤 볼트가 내 뒤통수를 정확히 때려버리지는 않았겠지. 스턴이 오는지 정신이 멍해진다. 아마 나도 길가다 넘어진 외계인의 머리를 밟은 사람처럼 되어 있을 듯 싶다. 하지만 나는 그런 충격 속에서도 의지의 힘을 다해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렇게 지구인과의 교신을 하려는 E.T의 자세를 취하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파란 하늘?”

  아직도 갈등하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급변한다. 그리고 그녀도 맥 빠진 목소리로 말을 꺼내었다.

  “블랙 라이언?”

  블랙 라이언. 내가 어떤 소설을 매우 감명 깊게 보고 주인공의 이름을 따서 쓴 아이디긴 한데 녀석이 얼마나 유치하면 평범한 영어 단어인데도 사용하는 사람이 없겠냐며 핀잔을 줬던 아이디기도 하다.

  “세상에......”

  정말 세상에, 란 넋두리가 나올만한 상황이 아닌가. 며칠 동안 계속해서 대전하고 있는 상대가 같은 학교 학생이며 동시에 같은 PC방에서 게임을 하고 있었던 사람이었다니. 오히려 너무 유치해서 만화나 영화 스토리로도 쓰지 못할 내용이 아닌가. 이런 기가 막힌 우연, 혹은 인연에 나와 그녀는 전부 뒷말을 잇지 못했다. 무거운 침묵. 분명 주변에는 여러 게임의 BGM과 효과음이 터져 나오고 그에 리듬을 맞추는 플레이어들의 환호와 탄식, 중얼거림이 무수하게 쏟아지고 있었지만 우리들은 그 동작으로 멈춰 선 채 그저 서로를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내 PC방 요금에 일정 금액이 더 부가된 후에 그녀가 그 침묵을 깨트렸다. 아마 그녀도 아무런 생각 없이 말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나온 것일 거다.

  “한 게임 더 하실래요?”

  나 역시 아무런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고개를 끄떡였고, 그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내용의 게임 끝에 나는 드디어 승리를 추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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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2/14 13:04
수정 아이콘
와~재밌어요. 솔로부대들의 가슴에 염장을 지를 커플 소설을 쓰시려는 건가요?^^ 앞으로도 건필 부탁드려요.
05/02/14 13:33
수정 아이콘
왜 하필이면.... 2월 14일날 이런 만행을T_T
....다음글이 빨리 올라오면 봐드리죠 크흑T_T
농담이고 정말 재밌네요^^;
hi~마린
05/02/14 14:45
수정 아이콘
속편이 굉장히 기대됩니다..
워3계의 명소설이 되었음 합니다..
지금 워3계 분위기는 예전의 스타 뜰때의 분위기와 너무 비슷합니다...
현장의 열기.. 달필의 등장(mw의 팬텀님, 이제 카마님도 포함되겠죠?), 명경기 속출..
워3 화이팅 입니다.
아케미
05/02/14 20:43
수정 아이콘
너무 재미있습니다T_Tb 갑작스런 달필 분들의 대거 등장으로 리뷰 쓰는 손이 바빠지네요. (kama님 한 가지만 부탁드리자면… 남녀가 부딪친 부분에서 '메지를 앉았는지'를 '매지를 않았는지'로 고쳐주세요^^;)
정말 요즘 워3 부흥기가 온 것 같네요. 워3 파이팅! kama님의 소설도 파이팅입니다!
05/02/15 14:05
수정 아이콘
이 글에 딱 한가지 불만이라면 왜 조회수가 184밖에 안되는 것입니까!
워게분들 나빠요~!
~Checky입니다욧~
05/02/16 10:53
수정 아이콘
제목을 Romance가 아니라 Romeo로 봐서 왜 오크가 안나오는지에 대해 심각히 고민을 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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