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이야기는 100%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이야기로 각색없이 구성하였습니다.>
때는 조선 최고의 태평성대 시절로 알려진 성종 시대.
13살 어린 나이에 왕에 올라 이제 왕으로서의 모습을 제대로 갖춘 성종 9년 1월 11일
급박한 보고 하나가 올라옵니다.
황산수의 문이 와서 말하기를,
그의 집이 모화관(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곳. 서대문구 현저동에 위치) 동쪽에 있는데,
집 북쪽에 두개골이 상하고 깨어진 여자 시체가 버려져 있었다는 겁니다.
이에 성종은 속히 검시하고 조사하라 명합니다.
그리고 1월 13일 삼사(형조, 사헌부, 한성부)에서 함께 조사하라 명하지요.
여자 노비로 보이는 시체 하나로 이렇게 엄청난 부서가 한 번에 투입된 것은,
그 가해자가 상당한 권세가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시체가 발견되고 열흘이 조금 지난 1월 13일.
성종은 그 일대의 모든 집을 다 뒤지게 하는데,
문제는 그 사이에 왕족이었던 세조의 서자 창원군의 집이 끼어있었다는 거지요.
형조 좌랑 박처륜이 창원군 이성의 집을 수색하려하니,
창원군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어찌 내 집을 수색하려 하느냐?' 하므로, '전지(왕의 명)를 받았다.' 하였습니다.
그러자 창원군이 자신의 신분을 앞세워 전지를 받았더라도
수색함의 부당함을 언급하며 집으로 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수색하러 간 사람들을
잡으려고까지 해 수색에 실패했으니 다시 전지를 받아 수색하기를 성종에 청하였습니다.
이에 분노한 성종은
'이 여자를 죽인 자는 반드시 잡아야 하기 때문에 집주인의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수색하라고 명하였는데,
창원군이 거절하니 매우 옳지 않다. 국문하여 아뢰라' 라고 전교합니다.
사실 창원군은 평소 그 행실이 좋지 못해 많은 대신들로부터 죄를 주어야한다는 상소가 빗발쳤으나,
왕족이라는 이유로 보호받고 있는 그런 인물이었죠.
다음 날 1월 21일. 성종은 이 사건이 쉽사리 해결되지 않을 거라 생각하곤 일종의 상격을 세워
현상체포해야한다 판단합니다.
이에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것은 임금의 큰 권한이다. 그러나 만일 사람마다 꺼림없이 임의로 (살인을)한다면
그 폐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최근 돈의문 밖에 버린 시체를 검사하니,
얼굴과 목 사이에 칼자국이 낭자하여 거의 완전한 살을 차마 볼 수 없었다고 한다.
도성에서 이런 일이 생겼으니 내가 심히 통탄하다.
삼사(형조, 사헌부, 한성부)를 동원해도 죄인을 잡지 못하니, 마땅히 상격을 세워 현상 체포해야한다.
그 여자의 시체를 고하는 자는,
양인은 세 품계 올려주고 관직을 내리며, 천인은 양인으로 올려주고,
만약 사노비이면, 자신은 노비 신분을 면할 것이고 사촌 이상 친족은 공노비로 속하게 할 것이다.
또한, 진실을 고한 모두에게 면포 2백 필을 주라.
그러나 반대로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고하지 않다 발각되면,
양인은 천인에 속하게 하고 천인 및 사노비는 변두리 외각 지역의 공노비로 평생 머물게 하라.'고
의금부와 형조에 명하며 범인을 잡기 위한 자신의 의지를 확고히 합니다.
자.. 그런데 이 말은 범인을 잡기 위해서 노비가 자신의 주인을 고발하라는 말입니다.
당시 시대상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요. 다음 날 신하들은 난리가 납니다.
영돈령 노사신은
노비와 주인의 사이는 신하와 임금의 그것과 같은데,
설사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서로 숨겨야지 서로 고소할 수 없다 말하며,
여자 시체 사건으로 노비가 상전을 고발하도록 하는 것은 절대 불가하다며 이야기 합니다.
그러자 성종은
사람을 죽인 것은 가벼운 일이 아니므로 죄인을 반드시 잡아햐하는데,
사람들이 모두 숨기기에 급급한 게 지금 실정이다.
그렇다고 의심가는 자 모두를 매질해 때리어 심문하면 한 사람의 범한 죄 때문에,
그 피해가 죄없는 사람들에게 미치게 되니 안 될 일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임시적인 법을 세운 것이다.
라고 말하며 주위에 의견을 물었습니다.
이에 파천부원군 유사흔, 예조판서 이승소, 집의 이칙, 정언 성담년이 모두 말하기를,
이미 임금의 명이 시행되었고, 이로 인해 노비 아무개가 와서 우리 주인이 죽였다고 고발하면,
국가에서 공을 상주어 천인을 면하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를 듣는 자들이 '아무개는 주인을 고발하여 양인이 되었다.' 할 것이고
노비들은 모두 두 마음을 품을 것이니, 이런 버릇을 자라게 할 수 없다며 반대합니다.
그러자 빡친 성종이 대답하기를
'내가 그러한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살리고 죽이는 것은 임금의 권한인데,
사람마다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임의로 살육을 행한다면 이것은 임금을 업신여기는 것이니,
이것을 징계하지 않으면 나라에 기강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경 등은 이 사건에 마땅히 각각 분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품어야하는데,
오히려 나더러 잘못됐다 하는 것은 대체 무슨 소리인가.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고 합니다.
그러자 이칙이
'이 여자 시체 사건은 죄가 크기에 밀봉(익명으로 봉한 고발)을 이미 허가한 것입니다.
이것 역시 노비로 하여금 주인을 고하게 하는 것이고 충분히 불편한 상황인데,
아예 드러내놓고 신분을 면해주겠다하며 주인을 고발하게 하는 건 마땅치 못합니다.
밀봉과 면포를 상으로 내리는 것만 허가하시고 기다리면 죄인을 잡을 수 있을 겁니다.'
하니 더 빡친 성종이 말하기를
'이 사건은 분명히 거실(높은 문벌의 집안)이 한 짓이다. 사건에 대해 동네 사람도 알지 못하는데,
어찌 밀봉이나 상따위로 잡을 수 있겠는가. 그댄 어찌 그런 말을 하는가?
지금 권세 있는 신하가 위엄을 믿고 사람을 죽였으니 법에 있어 마땅히 다스려야할 터인데,
그대들의 비호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이칙이 다시 말하기를,
'신이 반복하여 생각해 보아도 의혹이 오히려 풀리지 않습니다. 군신과 노주(노비와 주인) 사이는
크고 작은 것은 비록 다르나 분수는 한 가지입니다. 설령 중국 조정에서 우리 신료를 꾀기를,
'그대가 그대 임금의 일을 말하면 반드시 중한 상을 주겠다.' 하면 우리 신료가 된 자가 차마 말하겠습니까?
하였다.
성종이 다시 말하기를,
'황제가 물음이 있으면 내가 마땅히 사실대로 대답하겠다. 어찌 그대들에게 묻기를 기다리겠는가.'
하니 이칙이 다시 반문하기를
'성상께서야 당연히 그러겠지만, 가령 임금이 스스로 고하지 않으면, 신하가 차마 고소할 수 있겠습니까?"
합니다.
이 논의에서 우부승지 김승경과 동부승지 이경동만 빼고는 모두가 성종에 뜻에 반대합니다.
국가의 법과 기강을 잡기 위한 성종의 노력과 신분의 질서를 중요시하는 신하들의 대립이 팽팽한 상황입니다.
사실 두 의견 다 상당히 설득력이 있긴 합니다.
현대적인 시각으론 신하들의 이야기가 말도 안 되는 소리이긴 하지만,
당시는 왕조 시대였고 신하가 임금을 고발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노비가 주인을 고발한다는 것 역시 비슷한 개념으로 적용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러나 성종은 도성 안에서 이렇게 끔찍한 살인을 일삼는 범인이 누구더라도 반드시 잡겠다라는 의지를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