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8/02/11 22:45:38
Name 자몽쥬스
Subject 지금 갑니다, 당신의 주치의. (5)

-오늘도 NICU에 출근 도장을 찍었다. 수술한 아기와 수술해야 할 아기들을 보기 위해. 스테이션에는 이리저리 구겨진 당직복과 떡진 머리의 1년차 2년차 3년차가 나란히 앉아 졸고 있다. 가장 힘든 기간이라고 했다. 일주일에 단 하루 이틀 집에 가서 겨우 씻고만 올 수 있는 아주 짧은 오프를 제외하고는 24시간 인큐베이터 옆에 킵 해야 하는 듀티. 아주 작은 계산 실수도 엄청난 결과를 불러오는 곳이기에 미모사처럼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그들의 눈은 하나같이 붉었다. 저들 중 누군가는 이미 또 다른 누군가의 부모지만, 맡고 있는 아이가 오늘은 체중이 얼마 늘고 오늘은 밥을 어제보다 얼마나 더 먹었고 하는 것들은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꿰고 있어도 정작 본인의 아이가 뒤집었는지 기기 시작했는지 엄마 아빠 소릴 하는지 하는 것들은 알지 못하겠지.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니. 나도 어제 밤 샜는데.

-우리 병원에서 간이식수술은 아주 자주 하는 수술은 아니다. 특히 생체간이식(살아있는 기증자의 오른쪽 간을 떼어내어 수혜자의 전체 간을 제거한 자리에 이식하는 수술)은 더더욱. 굉장히 큰 수술이고 그만큼 수술전후 신경써야 할 문제가 많지만 아직 올해는 단 한 케이스도 잘못된 적이 없어서 마음이 풀어져있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날의 이식도 아무 문제 없이 평균적인 시간에 마쳤고 환자는 안전하게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바로 이어진 응급수술 때문에 3시간정도 수술방에 들어와 있었으나 환자상태가 이상하다면 반드시 울리도록 되어 있는 전화기는 한 번도 울리지 않았다. 수술을 마치고 바로 중환자실로 향해 하루 종일 고된 수술을 견디고 약기운에 푹 자고 있는 환자를 보았다. 상태는 수술을 마친 직후와 별 차이 없이 안정적이었고, 의례처럼 교수님께 전화를 드려 환자상태를 보고하고 나니 시간은 어느덧 자정을 넘어서고 있었다. 물에 젖은 솜처럼 온 몸이 무거워 당장이라도 당직실 침대에 쓰러지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가 없었다. 당직 교대 시간까지는 앞으로 6-7시간 정도가 남았다. 그 시간동안만 아무 일 없다면 나는 병원 바로 옆의 집으로 돌아가 따뜻한 물로 씻고 나서 푹 잘 수 있을 예정이었다.  별일이야 있겠어. 이 환자도 루틴(Routine)이겠지. 그렇게 침대 위로 꺼지듯이 몸을 뉘인 지 10여 분만에 요란하게 울리는 벨소리가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명멸하는 정신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자몽쌤, 엘티 환자요. 지금 혈압이 70에 40이에요.
70이라는 숫자에서 몸을 일으켜 40이라는 숫자에 크록스를 꿰어 신고 미친듯이 달려 중환자실 격리방까지 도착하는 데는 2분이 좀 안 걸렸던 것 같다. 가장 먼저 풀 랩(full lab)을 나갈 것을 지시하고 배액관 색부터 확인한다. 수술하고 나서 생기는 저혈압의 가장 큰 원인은 출혈이니까. 배액관 세 군데의 색은 모두 혈장액성, 15분 전에 보고 간 것과 큰 차이가 없다. 일단은 환자 몸에 물이 얼마나 돌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수술을 시작한 순간부터 들어간 물의 양과 소변 출혈 기타등등으로 빠져나온 물의 양은 빠짐없이 체크되지만 열 시간 넘게 배를 열어놓은 동안 증발한 물의 양은 잴 수 없으니까, 차트에 기록된 숫자들도 전부 믿을 수는 없다. 측정해 보니 생각보다 탈수가 심하지 않다. 그럼 뭐지. 쇽(Shock)이 갑자기 올 만한 원인이 뭐지. 모니터상에 지나가는 심전도 리듬은 Sinus tachycardia. 그래도 혹시 모르니 12유도 심전도를 찍는다. 원래는 주로 인턴이 하는 일이지만 지금은 인턴을 부를 시간이 없어 직접 기계를 끌고 와 찍어보니 이상리듬은 보이지 않는다. Septic shock과 Neurogenic shock은 가능성이 거의 없는 답이다. 원래는 혈액검사가 어느정도 나와야 그걸 보고 교수님과 상의하는데 그걸 기다릴 시간이 없어 일단 수액을 때려붓고 승압제를 써서 겨우 혈압을 올려놓고 교수님께 전화를 드려 치료방향을 상의했다. 전화하는 도중에 피검사 결과가 나왔고 예측한대로 헤모글로빈 수치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교수님은 근처에 대기하고 계셨는지 바로 병원에 나와 환자상태를 살핀 뒤 몇 가지를 지시하고 가셨고, 다행히 환자상태는 안정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다시 당직실로 돌아갈 수 없다. 하루종일 수술하고 또 다시 한바탕 전쟁을 치룬 뒤라 몸은 아까보다도 훨씬 더 말을 듣지 않는다. 이대로 침대에 눕는다면 누가 와서 뺨이라도 치지 않는 이상 깨지 못할 테니까. 꼼짝없이 여기서 밤을 보내야 할 판인데, 중환자실 안에 있는 전공의 당직실은 이미 다른 환자를 보고 있는 내과 주치의가 차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중환자실의 맹점은 보호자가 상주하지 않는 공간이기 때문에 보호자 침대가 없다는 거다. 나는 모니터가 잘 보이는 곳 땅바닥에 몸을 구겨앉은 채로 벽에 등을 기대 눈을 붙이기로 했다. 담당간호사가 측은한 눈으로 나를 잠시 쳐다보더니 푸른 빛의 보풀이 많이 일어난 모포 두세 개를 가져다 던져주었다. 몇 겹으로 겹쳐서 깔아보니 바닥의 한기를 완벽히 막아주진 못하지만 그럭저럭 등이 배기지는 않을 정도의 잠자리가 완성되었다. 이를 다행이라 불러도 될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격리실 안은 이런저런 처치기구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넓어서 내몸 하나 누일 공간은 만들 수 있었다. 누우니 바로 몸이 땅으로 빨려들어가는 것 같고 평소같으면 꽤 시끄럽다 여겼을 모니터와 인공호흡기에서 나는 소리들은 신경조차 쓰이지 않았다.
거기서 보낸 다섯 시간 중 나는 총 여덟 번 깨어나야 했지만 환자의 혈압은 아침까지 안정된 상태로 유지될 수 있었다.
다음 날의 당직 주치의에게 환자를 인계하고 병원을 나서자 아직 해가 다 뜨지 않아 어둑어둑한 골목에 켜진 가로등 아래 소복하게 눈이 쌓여 있었다. 일요일 아침,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에 발자국을 아로새기며 나는 취한 듯 비틀비틀 걸어가 술을 마시지 않고도 취한 것 같은 이 상태가 왠지 억울해 시원한 맥주 한 캔을 따서 들이키고는 그자리에서 쓰러져 푹, 아주 달게 잘 잤다.
이 지독한 피로감도 달콤한 휴식도 모두 내가 하고 있는 일 때문에 받게 되는 벌이자 상 같은 기분이 자주 든다.
아주 쓴 보약인지 사탕같은 독약일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 항상 감사합니다! 전국적으로 눈이 많이 오는 모양인데 모두 월요일 출근길 안전운전하시길 바랄게요.





* 라벤더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8-07-06 17:35)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아이지스
18/02/11 22:57
수정 아이콘
GS 선생님들 정말 수고 많으십니다.
홍승식
18/02/11 22:59
수정 아이콘
고생하셨습니다.
18/02/11 23:06
수정 아이콘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지나고나면 좋은 추억으로 기억될 거에요 전공의시절이 ^^
작별의온도
18/02/11 23:24
수정 아이콘
수고 많으세요 !
괄하이드
18/02/12 00:15
수정 아이콘
자몽쌤 글은 늘 너무 좋습니다 크크
마니에르
18/02/12 01:58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제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글입니다..
세바준
18/02/12 03:21
수정 아이콘
자몽쌤님 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항상 응원합니다 자몽쌤~~
무가당
18/02/12 06:11
수정 아이콘
대단하십니다. 저라면 공짜로 의사 시켜준데도 못할것 같아요....
18/02/12 08:02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TheLasid
18/02/12 08:42
수정 아이콘
자몽님 글은 참 좋아요. 덕분에 기분 좋은 아침이 되었습니다. 부디 자몽님과 자몽님이 맡으신 환자분들이 오래오래 건강하셨으면 좋겠네요 :)
제랄드
18/02/12 10:45
수정 아이콘
중간에 전문 용어도 그렇고 쉬이 읽히지 않는 글이라 생각해서 스킵하려 했는데 응원 댓글이 많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역시 좋은 글은 가독성이고 뭐고 좋은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18/02/12 10:58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보고 있습니다
18/02/12 11:15
수정 아이콘
여전히 반가운 자몽쥬스님의 글이군요. 늘 응원합니다. 몸 잘 챙기시구요.
-안군-
18/02/12 12:16
수정 아이콘
아이고... 저러다가 오히려 자몽쥬스님이 몸 상하실까 걱정되네요...;; 힘내세요!!
은때까치
18/02/12 13:28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매번 감사합니다.
WhenyouinRome...
18/02/12 14:34
수정 아이콘
눈물이 왈칵.. 날 것 같네요.. 수고가 많습니다.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데 몇 명의 생명을 갈고 있는지... 아이러니 하네요..
18/02/12 17:29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선생님은 좋은 의사샘이 되실 거에요.
BibGourmand
18/02/13 04:10
수정 아이콘
언제나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혹시나 싶어 용어설명 덧붙입니다. 제가 의사는 아닌지라 혹 틀린 점이 있다면 정정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혈압이 70-40: 정상 범위는 120-80 mmHg. 즉 혈압이 모종의 이유로 떨어진 상태를 의미한다.
* 풀 랩(full lab): 검사를 싸그리 돌리는 것을 의미. 이 경우에는 피검사 풀세트를 오더한 것으로 이해하면 될 듯.
* 배액관: 수술한 자리에 체액, 혈액 등이 고일 수 있는데, 이를 외부로 배출시키기 위해 꽂아두는 관. 피가 나오면 색이 달라지니까 쉽게 알 수 있다.
혈장액성이라고 하는 것은 피가 나지 않았다고 이해하면 OK.
(하안거탑 수술신에서 장준혁이 "아직 수술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췌장과 소장 쪽 배액관이 미세하게 탁합니다" 할 때 나왔던 그 배액관입니다.)
* Sinus tachycardia: 심장이 빨리 뛰지만 (>100회/분, 정상은 약 60~100회/분), 그래프 모양(=심장 기능)은 정상적인 상태 (sinus).
만약 그래프 모양이 무너져 있으면 심각한 상황이므로 자몽님 이 글 못 쓰셨을 듯. 이 대목에서 일단 한 숨 돌렸다고 이해하면 OK.
* Septic shock: 패혈증으로 인한 쇼크 증세. 패혈증이란 균이 피를 타고 온몸을 도는 상황을 의미. 매우 심각한 상황임.
* Neurogenic shock: 뇌나 척수를 다쳤을 경우 일어날 수 있는 쇼크 현상. 혈압이 떨어지는 증상을 보임.
자몽쥬스
18/02/13 07:32
수정 아이콘
와 의사가 아니시라는 게 충격적이네요... 불친절한 글에 이런 친절한 분께서 나타나실 줄은ㅠ ㅠ 다음부터는 더 신경쓸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BibGourmand
18/02/13 07:57
수정 아이콘
바이오 포닭이라 의학 쪽 용어는 대충 알아먹습니다 크크. 현재 근무중인 연구소가 병원에 붙어 있다보니 주워들은 풍월도 좀 있고요. 환자 샘플 돌리는 것도 아닌데 왜 거기다 붙여놨는지는 의문입니다만... 1층에 식당 많은 건 땡큐, 비싸기만 하고 맛이 없는 건 안 땡큐지요;;
가끔 병원 가서 '이게 한글로 뭐였더라' 하시는 분 만나면 '병명만 빼고 다른 건 용어 쓰셔도 알아먹어요'라고 하면 다들 좋아하시더군요.
좋은 글 자주 부탁드리겠습니다!
YORDLE ONE
18/02/13 09:31
수정 아이콘
응원해요.
18/07/12 08:36
수정 아이콘
의사분들...정말 고생이 많으십니다. 감사합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2946 독일 이주시, 준비해야 할 일 [25] 타츠야15001 18/03/30 15001
2945 내가 얘기하긴 좀 그런 이야기 [41] Secundo14424 18/03/27 14424
2944 태조 왕건 알바 체험기 [24] Secundo12803 18/03/27 12803
2943 요즘 중학생들이란... [27] VrynsProgidy16801 18/03/26 16801
2942 부정적인 감정 다루기 [14] Right10744 18/03/25 10744
2941 세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28] 삭제됨16427 18/03/11 16427
2940 고기의 모든 것, 구이학개론 #13 [44] BibGourmand12785 18/03/10 12785
2939 일본은 왜 한반도 평화를 싫어할까? <재팬패싱>이란? [57] 키무도도19657 18/03/10 19657
2938 더 늦기 전에, 이미 늦어버린 은혜를 갚아야지. [10] 헥스밤12575 18/03/04 12575
2937 우울의 역사 [57] 삭제됨11816 18/03/02 11816
2936 억울할 때만 눈물을 흘리는 누나였다. [32] 현직백수19813 18/02/21 19813
2935 올림픽의 영향들 [50] 한종화16942 18/02/19 16942
2934 지금 갑니다, 당신의 주치의. (5) [22] 자몽쥬스8492 18/02/11 8492
2933 세상의 끝, 남극으로 떠나는 여정.01 [데이터 주의] [41] 로각좁9131 18/01/31 9131
2932 [알아둬도 쓸데없는 언어학 지식] 왜 미스터 '킴'이지? [43] 조이스틱11292 18/01/24 11292
2931 무쇠팬 vs 스테인레스팬 vs 코팅팬 [94] 육식매니아23571 18/01/22 23571
2930 역사를 보게 되는 내 자신의 관점 [38] 신불해15854 18/01/20 15854
2929 CPU 취약점 분석 - 멜트다운 [49] 나일레나일레14204 18/01/10 14204
2928 황금빛 내인생을 보다가 [14] 파란토마토10832 18/01/07 10832
2927 나는 왜 신파에도 불구하고 <1987>을 칭찬하는가? [76] 마스터충달10759 18/01/04 10759
2926 조기 축구회 포메이션 이야기 [93] 목화씨내놔17232 18/01/04 17232
2925 마지막 수업 [385] 쌀이없어요22691 17/12/18 22691
2924 삼국지 잊혀진 전쟁 - 하북 최강자전 [41] 신불해19347 17/12/15 19347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