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3/09/09 01:50:10
Name 요슈아
Subject [일반] 9개월의 이야기
아주 가벼운 일기장 같은 이야기라 어체가 두서없을거에요.
근데 한번 꼭 정리하고 싶더라구요.
반말?존댓말?? 휴먼만취체는 아닙니다.
-----------------------------------------------------

올해 초였을 겁니다.
평소처럼 게임이 안 되서 집안이 떠나가라 악을 쓰는데 내가 사는 층도 아닌 윗층에서 문을 쾅 여는 소리와 함께 어떤 XXX야!!!! 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의 뒷목이 얼어붙는 공포란.

그와 함께 생각난 1개월 텀을 두고 두 번 박살나 버린 휴대폰 액정.

이건 안되겠다 싶어서 정신과에 방문.
보통 '분노조절장애' 라고 알고 있는 이 병명은 정확하게는 [간헐적 폭발 장애] 입니다.

그래도 전 그나마(?)얌전한 축 이라고 해야 되나.
심하면 분노에 접어드는 순간 이성을 잃어버리고 단기기억상실이 오기도 한다죠.
다행히 전 사람 앞에선 거의 티를 낸 적이 없었고 확실한 트리거-내가 하는 하려는 게임이나 일이나 작업이 어쨌든 계속 막혀서 진전이 없을 때- 아니면 발동이 안 되다 보니 저렇게 혼자 푼다고 했는데 방음이 안 되다 보니.....

초반엔 많이 괜찮아 졌다가 곧 다시 살아나긴 했습니다.
단지 빈도와 강도가 확연하게 줄어들었죠.

이제 옆집이나 윗집에서 벽을 두들기지도 않고 휴대폰 액정도 아직 멀쩡하고 화가 나도 금방 사그라 들게 되었죠.
비유하자면 물이 점점 차오르는 냄비가 있는데 옛날에는 냄비 용량도 작았고 차오르는 속도도 빠르고 차오르면 막 넘쳐나오고 어디 풀지도 못 하고 방황하고 사그라 든 이후에는 엄청난 죄책감이 몰려오고.....
지금은 냄비 용량도 늘어났고 물 빠지는 구멍도 하나 만들어졌고 적절한 속도로 차오르며 넘치는 일이 많이 줄었고.

물론 억제를 억제하는 알콜 이라는 존재가 추가되면 살짝 발동되긴 하지만 그래도 옛날보단 훨씬 덜 한 강도.
오늘 갑자기 느꼈습니다. 갑자기 큰 문제가 생겨서 그걸 급하게 해결해야 했어요.

옛날 같았으면 두세번 반복하는 와중에 그거 못 참아서 화가 머리 끝까지 올라왔을 거에요.

하지만 이번에는 계속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이유를 차분하게 생각할 수 있었고 이유를 찾아냈죠. 멍청한 짓을 해서 그만 크크크.
해결해 놓고도 그냥 아 잘 넘겼네 어휴 다행이다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나중에 찬찬히 떠올려보니 어느새 이만큼 발전 했습니다?!

-----------------------------------------------------


치료 와중 2개월 지났을 때에 휴대폰에 과몰입해서 주변을 아예 확인하지 못 해서 회사에서 크게 혼난 적이 있어요.
완전 멘탈이 박살이 나서 1주일 정도 식사도 하기 싫어지고 불안감이 미친듯이 올라오고....

이걸 말씀드렸더니 2주치의 약을 하나 추가해줬고 극적으로.............라고밖에 할 수가 없음.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180도 뒤집히는 느낌이라고 해야 되려나.

ADHD 약이었음. 증상중의 하나가 오히려 하나에 과몰입해서 주변을 아예 신경을 안 쓰는 거라네요. 보통 생각하던 ADHD 와는 완전 반대죠?

그 2주간의 희열과 고양감이란 안 겪어 본 사람은 모를거에요.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도파민의 강제자극이 몰려오는 와중에 지금까지 잘못 되었던 행동들이 싸그리 다 교정되는 놀라운 효과란.
옛날에도 게임중독이라고 생각하면서 다른 정신과에 갔다가 효과가 딱히 없어서 슬그머니 그만 갔던 기억이 있었는데 이번엔 달라요.


드디어 일하는 중엔 너무나도 심심해서 무조건 달고 살던 휴대폰을 완전히 떼어 놓을 수 있게 되었고
인터넷 휴대폰을 보면서도 주변을 보는 멀티태스킹이 가능하게 되었고
일에 대한 마음가짐이 매우 긍정적으로 바뀌었고
사실 내가 놓친게 맞는데 꼭 잘 보고 있을 때는 안 오다가 내가 다른거 하면 와서 놓치게 한다 같은 피해망상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고. 내가 문제였으니까.
소소한 행복에 감사하게 되었고. 우울증도 약간 있었던 것 같지만 이제 없을거에요.
자는 것 보다 게임 못 하는게 너무 아까워서 항상 새벽2~3시까지 어거지로 붙잡고 있던것도 이제 자연스럽게 졸리면 바로 욕망을 떨쳐버리고 잠을 청할 수 있게 되었고. 불면증은 없어서 매우 다행이야.
옛날에는 될대로 되라 하면서 살았다면 이제 집에서 쉬면서도 주변을 돌아 볼 수 있게 되었어요.
저번주에는 정말 오랜만에 대청소를 한 번 했어요. 1년 동안 묵어있던 안 쓰던 공간의 먼지도 제거하고 머리카락도 다 치우고 쌓여있던 쓰레기도 이제 재깍재깍 치우고 등등.

술만 좀 줄이면 되는데 위스키 사놓은게 너무 많아서 어쩔 수 없다....1주일에 2일씩만 마셔야 한다.
의사쌤도 술 줄여야 한다고 말씀은 하시지만요 크크크.
알중으로 인생 조진 케이스를 아주 길~~게 지켜 본 덕분에 그래도 최대한 조절이 되고 있다고요!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장애만 제 마음가짐으로 줄이면 더욱 괜찮아질 거라고 말씀해주심.


좀 많이 늦긴 했지만 인생의 방향추를 드디어 제자리로 돌려놓은 느낌.
저는 아직 살 날이 조금이라도 더 많이 남아 있을 겁니다.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자신의 불편함을 자신만의 강점으로 바꿔 55세에 데뷔하여 이름을 남긴 가수도 있는걸요.
주말 2일간의 휴일이 항상 기다려져요. 노래를 양껏 부르고 먹고싶은 걸 먹고 술도 마시면서 편하게 마음 놓고 잘 수 있으니까요.

소(련의) 확(장주의적) 행(보) 라는거죠!
여러분 작은 소련이 있었어요!

맺음 - 지금까지 인생을 지배했던 습관들이라는게 이 9개월만에 다 바뀌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의사쌤도 그랬고요. 1년만에 이걸 치료 할 수 있다면 그 병원으로 보내주겠다고요 흐흐. 평생 안고 가야 할 수도 있죠.
그래도 내일 더 한뼘이라도 더 성장하는 저를 기대하며 오늘도 행복감을 적절하게 충전하며 잠에 듭니....빨래 언제 되냐.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닉네임을바꾸다
23/09/09 02:15
수정 아이콘
뭔가 호이에서나 볼거같은 소확행...
23/09/09 10:28
수정 아이콘
자 잠시 소련이 있었어요~
EurobeatMIX
23/09/09 16:55
수정 아이콘
크크크킄크
디쿠아스점안액
23/09/09 10:38
수정 아이콘
차도가 있으셔서 다행이고 꼭 완쾌되시길 빕니다.
23/09/09 11:47
수정 아이콘
다행이네요.. 근데 어떤 게임이었는지 여쭤봐도 되나요?
요슈아
23/09/09 11:58
수정 아이콘
그냥 다요.
싱글이든 멀티든 상관이 없었습니다.
하다가 진행 막히면 화가 쑤욱 차오르는거에요 하하하....

옛날엔 그냥 다른 사람도 다 그렇게 열내면서 하지 싶었는데 이 행동으로 피해입는 사람들을 직접적으로 느끼게 되니까 어느날 불현듯 아 이건 자연적으로는 안되겠다 싶어서 말이죠.
Janzisuka
23/09/09 13:38
수정 아이콘
창..세..기전.이라고...아주 좋은 게임이 있습니다....버그 패치버전만 구하면 행복하게 겜 하실수 있어욤!
요슈아
23/09/09 14:37
수정 아이콘
진작에 다 해본지 오랩니다
서풍의광시곡이 최애임.

물론 3-파2 도 엔딩 3번씩은 봤죠!
Janzisuka
23/09/09 14:42
수정 아이콘
배우신분
작은대바구니만두
23/09/09 14:06
수정 아이콘
the witness 같은 게임 추천드려 봅니다
힐링게임 위주로 하시는거 추천
요슈아
23/09/09 14:38
수정 아이콘
작혼 하는데 옛날처럼 화가 막 차오르진 않더라구요.
마작 재미썽....
열혈둥이
23/09/10 06:32
수정 아이콘
모쪼록 힘든일 잘 해결되시길.
저도 지금 술만 끊으면 대부분의 문제가 해결된다는데
도저히 못끊겠어요 크크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01352 [일반] 5년 전, 그리고 5년 뒤의 나를 상상하며 [6] Kaestro5306 24/04/27 5306 4
101248 [일반] 뉴욕타임스 2.25. 일자 기사 번역(화성탐사 모의 실험) [4] 오후2시5074 24/04/08 5074 5
100400 [일반] 뉴욕타임스 11.26. 일자 기사 번역(군인 보호에 미온적인 미군) 오후2시5574 23/12/04 5574 3
100323 [일반] 제 봉안당 자리를 샀습니다. [43] 사계10007 23/11/25 10007 38
100264 [일반] 뉴욕타임스 11. 6. 일자 기사 번역(전쟁으로 파괴된 군인들) [12] 오후2시6533 23/11/15 6533 8
100124 [일반] 나만 없어 고양이, 고양이를 키우고 싶어요. _ 고양이 사육의 장점 [82] realwealth9690 23/10/24 9690 7
99780 [일반] [2023여름] 내가 살아가기에 충분할 이유 [8] 글곰5196 23/09/12 5196 27
99758 [일반] 9개월의 이야기 [12] 요슈아7497 23/09/09 7497 15
99480 [일반] 그녀가 울면서 말했다. [27] ItTakesTwo10162 23/08/10 10162 155
99395 [일반] 서현역 사건이 사회구조적 문제라면, 사회구조적으로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252] 마스터충달16670 23/08/04 16670 22
99298 [일반] 서이초 교사 사건 유족의 글 - 누가 죄인인가? [143] 일신15015 23/07/25 15015 21
99247 [일반] 교권 문제는 법(원)이 원흉이네요. [43] O8969 23/07/20 8969 5
98855 [일반] 아이 부모의 숙명, 수면부족 [57] 흰둥10870 23/05/25 10870 13
98800 [일반] GPT4와의 대화 — 니체 초인사상 (40,000자 토크) [22] 번개맞은씨앗8282 23/05/17 8282 10
98560 [일반] 정신재활중인 이야기 [8] 요슈아8160 23/04/24 8160 27
98258 [일반] 범죄자 이야기 [27] 쩜삼이11087 23/03/24 11087 25
98234 [일반] Z세대의 위기와 해결책: 조너선 하이트 교수의 주장에 공감하는 이유 [31] 딸기거품10581 23/03/22 10581 7
98163 [일반] [잡담] 20년을 일했는데, 좀 쉬어도 괜찮아 [39] 엘케인10040 23/03/14 10040 33
98118 [일반] 단돈 10만원으로 오랜 우정 마무리한 썰 [33] 톤업선크림9739 23/03/10 9739 15
97646 [일반] 나의 전두엽을 살펴보고 싶은 요즘 [8] 사람되고싶다9562 23/01/06 9562 12
97497 [일반] [넋두리] 심각한 슬럼프가 왔습니다. [57] 카즈하12663 22/12/22 12663 31
97368 [일반] 38년 돌본 뇌병변 딸 살해…"난 나쁜 엄마" 법정서 오열 [103] will16029 22/12/09 16029 11
97341 [일반] 아, 일기 그렇게 쓰는거 아닌데 [26] Fig.19607 22/12/07 9607 2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