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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0/12/19 23:42:31
Name aura
Subject [일반] [단편] 새벽녀 - 8
늦어서 죄송합니다.
일이 바빴네요.
기다리고 계신 분들이 있으실까요?


- - -


나의 물음에 하윤이는 어떻게 대답해야할 지 고민하는 듯 하다가, 이내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는... 은하윤이에요."
"장난 하지마. 이름을 묻는 게 아니잖아."


두 번의 무섭고, 불쾌했던 꿈. 그 꿈이 혹시 하윤이와 관계있는 것은 아닐까?


"말해줘. 도대체 넌 누구야? 그리고 그 꿈은 뭐였지? 또, 어떻게 내 꿈에 나타난 거야?"


나는 내게 벌어진 비현실적인 일들 앞에 평정심을 잃었다.
초조한 마음에 하윤이의 양 어깨를 감싸쥐고 그녀를 흔들었다.


"...아파요. 아저씨."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많이 들어갔는 지, 하윤이의 고운 아미가 살짝 찌푸려졌다.
괴로워하는 하윤이의 모습을 보고나니 퍼뜩 제정신이 들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미안해."


나는 황급히 잡고 있던 그녀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어깨에서 느껴지던 악력이 사라지자 하윤이는 금세 찌푸렸던 인상을 펴고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어쩐지 그 맑고 투명한 눈을 들여다 보기가 부끄러워져 고개를 떨궜다.


천천히 풀어가면 될 일이었다. 나는 무엇이 급해 하윤이를 다그친 걸까.
허탈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괜찮아요. 이해해요. 아저씨."


하윤이는 축 늘어진 나에게 다가와, 하얗고 가느다란 손으로 내 볼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손길이 닿은 양 뺨에 시원하고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천천히 얘기해요."


선명하고, 깨끗한 음성이 나를 진정시켰다.
요동치던 마음이 잔잔한 호수처럼 잦아들었다.


"같이... 걸을까요?"
"응."


우리는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습하고 사나운 새벽 겨울 바람이 얼굴을 두드렸다.
춥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찬바람을 쐬니 머리가 차갑게 식고,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하윤이의 보폭을 맞춰 걸으며, 슬쩍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도 안색이 지난 번보다 훨씬 나아보였다.
어느덧 평정심을 온전히 되찾은 나는 하윤이를 보채지 않고, 묵묵히 그녀의 입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저는 은하윤이에요."
"응."


그녀는 다시금 했던 말을 반복했다.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하윤이가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아저씨는요?"
"나?"
"네. 생각해보니까, 아저씨만 제 이름을 알고 있잖아요. 불공평해!"


그랬던가? 미간을 좁히고,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정말이었다.
하윤이에게 내 이름을 가르쳐 준 적이 없었다.
반 쪽짜리 통성명으로 잘도 만나왔구나 싶다.
이제야 내 이름을 알려주는 상황이 재밌고, 웃기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고 싶어?"


하윤이가 내게 이름을 알려주었던 날의 기억이 떠올라, 나는 장난끼 가득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뭐에요. 그게... 어?... 앗!"


하윤이는 처음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자신도 그 날의 기억이 떠올랐는 지,
양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앗하고 소리쳤다.
나는 당황한 하윤이와 거리를 좁히고 그녀의 귀에 나즈막이 속삭였다.


"혹시 나한테 반했어? 나한테 반하면 안 되는데, 하윤이 너 힘들어질 걸?"


그러나, 하윤이는 잠시 당황할 뿐 이내 나와 똑같이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이며 대꾸했다.


"아니 뭔 개소리에요?"


순간, 하윤이와 상스러운 말은 정말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개소리라니... 말이 너무 심하네. 흑."


그 날의 하윤이처럼 눈물을 닦는 시늉을 해보였다.


"미안해요. 아저씨. 상처 받았어요?"


어느새 하윤이가 걸음을 멈추고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나는 이어지는 대사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얼굴이 붉어졌다.
나 지금 10살 쯤은 차이 날 법한 여자에게 부끄러워하고 있는건가?


'아저씨 저한테 반하면 안 되는데? 아저씨 힘들어져요.'


갑자기 그 날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처음 들었을 때는 정말 개소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머릿 속에서 다시 떠오른 말을 상기하니 어쩌면 정말 큰일날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7살 차이나는 여자애와 사귄다며 자랑하던 친구에게 했던 말도 떠올랐다.


'7살? 와 이거 완전 도둑이네. 아니 강도네 강도. 7살? 7살이요? 경찰 아저씨 이 놈 좀 잡아가세요.'


외관상으로 추측컨대, 아마 나와 하윤이는 7살보다도 나이차이가 더 날 것이다. 어쩌면 10살까지 날지도 몰랐다.
나는 마음 속에 퍼지는 찌릿한 감각을 애써 억누르며 대답했다.


"아, 아니. 어, 어쨌거나 내 이름은 하, 한 세건이야."


이런 병신새끼. 꼭 이럴 때만 왜 말을 더듬는 거야?
나는 스스로의 한심함에 한탄하며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이 와중에 심장이 콩콩 뛰는 것이 더 짜증났다. 나대지마 심장아.


"아저씨가 졌다. 아하하."


내 반응에 하윤이가 기분 좋다는 듯이 실실 거렸다.
같은 대사로 이어나간 대화이지만, 그 날과는 결말이 또 다르다.
그래도 졌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하윤이가 기분좋게 웃어보이니 내 기분도 절로 좋아졌다.


"한세건... 한세건..."


하윤이는 마치 중요한 것을 알았다는 듯이 내 이름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흐응, 한세건 아저씨였구나."


아저씨란 말은 빼면 좋을텐데.
그래도 양심상 오빠라고 부르라는 말은 못하겠다.
아무렴 호칭이야 뭘로 하든 그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이제야 이름을 알았네요.."
"그러게."


온전한 통성명을 끝낸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마주친 눈을 그대로 두자니, 발 끝이며 손 끝이 간질거리는 것 같아 눈을 피했다.
하윤이는 아랑곳 않고 슬쩍 몸을 움직여 내 시선을 따라왔다. 그리고 말했다.


"이제서야 비로소 제 안에 뭔가가 움직이는 걸 느껴요."


하윤이는 어느새 입가에 어린 웃음기를 지우고,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뻐보이기도 하고, 어쩐지 슬퍼보이기도 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되물었다.
하윤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저런 말을 했더라면, 중2병 취급을 하고 무시했을 것이다.


"아저씨가 물었죠? 저는 누구냐고, 뭐냐고."
"..."


갑작스럽게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하지만 내심 궁금했고, 기다리고 있었던 말이었기 때문에 나는 잠자코 그녀가 이어 말하길 기다렸다.


"저도 솔직하게 아저씨 질문에 대답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런데..."


하윤이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처럼, 눈망울이 그렁그렁해졌다.
말을 차마 잇지 못하는 하윤이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다 떨리는 그녀의 두 손을 꼭 쥐었다.


"고마워요. 후아."


작게 심호흡하고, 다시 말을 잇는다.


"저도 모르겠어요. 저는 은하윤이에요. 그리고 저에 대해서 제가 알고 있는 건 그게 전부에요."


순간, 무슨 소리인가 싶어 눈을 가늘게 떨었다.
하지만 이런 내 태도가 오히려 하윤이를 더 불안하게 할까 싶어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하게 받아 넘겼다.


"기억.. 상실증 같은 건가?"


내가 나즈막이 묻자 하윤이는 슬프게 웃어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모르겠어요."


이거 참... 난감하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그럼... 혹시 내 꿈에 나타났던 것 말야... 그건 어떻게 된 거야?"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두운 터널이었어요. 그리고 아저씨가 보였어요. 지금보다 훨씬 어려보이는 아저씨가. 한 10살 쯤?
그리고, 그냥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어쩌면 이건 아저씨의 꿈 속일지도 모르겠다고."


하윤이의 말은 쉽게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하윤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냥... 그녀가 거짓말을 입에 담는 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냥이라... 허탈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녀가 그냥 내 꿈속임을 알았듯이 나 역시 그냥, 그녀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누군가를 믿기보다는 의심하는 데 익숙했던 나로서는 낯선 감각이었다.
그제야 나는 하윤이와 마찬가지로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이미 엮여 있음을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이상하지 않은 것은 없었는데.
무엇도 의심하지 않았다. 당연하게 기다리다 보면 하윤이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만났다.


갑작스럽게 내 앞에 나타난 하윤이.
그리고 하윤이를 기다리는 나.
당연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위화감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고삐 풀린 의심을 실타레를 쫓아보기로 했다.


"집은 어디야...?"
"..."


내 질문에 하윤이가 곤혹스럽다는 듯이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제가 이상하고 어쩌면 미친년이라고 생각하실 수 있겠지만... 모르겠어요. 그냥,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 순간 익숙한 곳에 제가 있고,
정신을 잃으면 캄캄한 어둠 속이에요. 이런 말... 못 믿겠죠? 저라도 그럴 거에요."
"믿어."
"네?"
"믿는다고."
"왜요?"


하윤이가 도리어 왜 믿냐는 듯이 내가 반문했다.
자신을 못 믿을까 좌불안석이던 녀석이 믿는 다는 말에 오히려 어안이 벙벙한 모습을 보여주니 타이밍 안 맞게 웃음이 나왔다.


"그냥."
"그냥이군요..."


하윤이는 울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어쩌면 이제서야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을 만났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우리가 느끼는 그냥은, 하늘에 먹구름이 끼면 비가 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설명하지 않아도 그럴 것이라는 당연함.


우리 둘 사이에 고요한 적막이 흘렀다.
도무지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기현상 앞에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게 있어요."


적막을 깨고 하윤이가 말했다.


"뭔데?"
"저와 아저씨가 계속 만나야만 한다는 거에요."
"그것도... 그냥 인가?"
"아저씨의 이름을 들었을 때, 깨달았어요. 아저씨에 대해 알아갈 수록 멈춰있던 뭔가가 움직인다는 사실을.
어쩌면 신의 계시 같은 걸까요?"


나는 사람을 잘 믿지 않는다. 그리고 신은 더더욱 믿지 않았다.
어쨌거나 뭐라고 답해야 할까.


"글쎄, 그건 잘 모르겠지만 어쨋거나 지금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네가 말한 그것 뿐이겠지."


지금으로서는 속시원하게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다만, 내게도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면 이 의문의 만남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만남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잘... 모르겠어요."


매번 모른다는 답만하기가 미안한 지 하윤이가 고개를 푹 떨궜다.
나는 하윤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반대로 내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윤이의 눈이 커졌다.


"언제든 괜찮아. 기다릴게."


은하윤, 이 새벽녀와의 만남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9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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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정은준아빠
20/12/20 00:05
수정 아이콘
본격적으로 스토리가 진행되나 봐요~
20/12/20 00:09
수정 아이콘
네. 단편이라는 말이 조금 머쓱해지네요...
길게 갈지 압축해서 갈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노둣돌
20/12/21 16:31
수정 아이콘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가 이 소설의 핵심이군요.
앞으로 어떻게 이야기가 풀리게 될 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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