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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0/12/17 22:30:32
Name 판을흔들어라
Subject [일반] 5년 동안 일기쓰고 6년 째도 일기 쓰는 이야기 (수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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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는 대체 어떻게 써야하는 걸까?

초등학생 시절 절 가장 괴롭혔던 것 중 하나는 바로 방학 숙제인 일기였습니다. 매일매일이 다채로워서 어느 날은 미술관 어느 날은 박물관 또 어느 날은 놀이공원에 갔으면 모를까 그저 집에 있다가 바깥에 가서 놀고 학원 다녀온 일상이 다반사였기 때문에 무얼 써야 할지 몰랐습니다. ‘어제도 밥 먹고 놀이터에서 놀다가 학원 갔다’ 라고 쓰고 오늘도 밥 먹고 자다가 학원 갔다’ 라고 쓰고 내일도 피자 먹고 놀이터에서 놀다가 학원 갔다’ 라고 쓰고. 이런 식으로 일기를 써도 되나 했고 무엇보다 숙제는 밀리는 법이니 비슷한 일상이 밀리다 보면 도무지 일기에 무슨 내용을 써야하는 지가 골치거리였지요.

중학생이 되면서 일기에는 해방이 되고 시간이 흘렀습니다. 나이가 들어 성인이 되다 보니 ‘다이어리’란 것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스케쥴이 빡빡하지 않지만 계획적이고 싶은 마음에 연말에는 인터넷 서점 다이어리 란을 살펴보곤 했습니다. 제 몫을 다한 다이어리는 없었지만요. 그러다 어느 해인가 친구에게 다이어리 하나를 선물 받았습니다. 친구도 회사에서 받은 다이어리였는데 그것이 바로 위 사진에 있는 ‘양지다이어리 25A’입니다.

L6Wz2rj.jpg

처음에는 맨 앞 월별 캘린더로 사용만 했다가 1면1일 구성으로 되어있어서 그냥 그날 일을 적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나쁘지 않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해에는 제가 직접 25A 다이어리를 사서 하루 일기를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렸을 적 뭘 써야할 지 몰랐던 것과 마찬가지로 초기에는 정말 시간 순으로 밥 먹었다 롤 했다 잤다 식으로 쓰기도 하고 또 어느 딴에는 그날 있었던 일을 쓰기도 했습니다. 시간 순으로 쓰되 사건이 있을 때 그때의 감정이나 감상을 같이 적기도 하고, 시간 순으로 쓴 뒤 따로 사건들의 감상을 쓰기도 했습니다. 원래 일기의 의도대로 적힌 시간상 스케쥴 란에다가는 그냥 그날 수입과 지출을 적었습니다.

그렇게 일기를 쓰기 시작해 어느 날은 그냥 안 쓰고 자기도 하고, 언제는 놀러갔다가 며칠치가 쌓여서 그냥 빈 공간으로 남겨두거나 ‘여수여행’만 적기도 하다가 이제는 정착이 되어서 밀린 일기까지 꼬박꼬박 쓰기 시작했습니다. 색깔별로 있던 양지다이어리25A기에 모아보면 괜찮겠다 싶어서 양지다이어리25A만 샀고 한 세 권쯤 모이니 있어보이더군요. 덕분에 내년 6년 째 다이어리까지 구매를 완료했습니다.
그리고 다음은 어언 5년간 일기를 쓰면서 느낀 것들입니다.

TlGtPym.jpg
내용을 숨기기 위해 노트10+ 에 있는 스타일 기능으로 편집을 좀 가했습니다.



1. 그닥 돌아보지 않는다.
일기를 그래도 5년 썼지만 그 전에 썼던 일기들을 자주 읽지는 않습니다. 정말 어쩌다 한 번? 반년에 한 번?


2. 그닥 반성하지 않는다.
일기를 쓰면 그날을 반성하고 나아갈 거 같지만 아니었습니다. 제 일기에 자책하거나 자아비판 하는 내용들이 똑같이 매일 매월 매년 반복됩니다. 혹은 제가 그냥 안 바뀌는 것일 수도요.


3. 당일 일기를 쓰는 것과 그 다음에 쓰는 것은 다르다.
되도록이면 오늘 일기는 오늘 쓰는 게 좋습니다. 가끔 귀찮거나 피곤하거나 까먹어서 일기를 다음날 혹은 다다음날 몰아 쓰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렇게 되면 당시 느꼈던 감정을 보존할 수가 없습니다. 친구와 싸웠을 경우 친구와 싸운 얘기가 빠지거나 그 다음날 화해했을 경우 싸웠을 당시 감정이 어땠는지 까먹게 됩니다.


4. 편집하게 된다
자료를 모아 다가 일기를 쓰는 것은 아니지만 일기를 오래 많이 쓰다 보면 자연적으로 편집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자주 반복되는 것은 생략하게 됩니다. 그날의 일에 대해 중요성을 따져 쓰지 않기도 합니다. 또한 쓰기 거북한 내용의 경우 에둘러 표현하거나 합니다. (이건 제 성향일 수도 있습니다.)


5. 여전히 뭘 쓰지 한다.
일기를 몇 년 썼다고 해서 일기 쓰는 게 쉬워지진 않았습니다. 물론 여러 일이 많았다하면 쓰기 쉬운데 최근처럼 약속을 안 잡고, 따로 외출한지 이주가 다 되어가니 내용이 그게 그거가 됩니다. ‘꼭 특별한 걸 써야하는 건 아니다’가 일기 쓰는 마음가짐 인데도 여느 때와 비슷한 내용이 되면 손가락이 잘 안 움직입니다.(pgr에서 키배 오래 뜬 걸 과연 일기에 써야하나.... 싶은 고민들)  


막상 생각을 해보니 다섯 가지 정도 밖에 없군요.
4번을 조금 더 자세히 써보겠습니다. 일기를 쓰던 도중 생각했던 것이 ‘내 일기가 미래의 누군가들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다.’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현대의 우리가 옛날 사람들이 쓴 일기들을 보고 그 시대를 추정하듯이 말이죠. 이런 생각을 하게 되니 일기 쓰는 게 살짝 더 재밌어지긴 했습니다. 친구들과 만나 노는 것을 적는 것인데 이것이 미래에선 현재시대를 추정할 수 있는 ‘사료’가 되는 것이니까요.

그렇게 역사 기록이 될 수도 있겠다 하고 일기를 쓰다 보니 조선왕조실록에 대해 듣던 것과 제가 일기 쓰는 것에서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공통점보다는 실록을 왜 그렇게 썼는지 이해했다고 봐야겠습니다. ‘편집’ 측면에서 말이죠. 인터넷에선 밈으로 조선에 대해 기록 덕후라고 말 하는데 그 밈처럼 철두철미하게 기록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편집을 한 것이지요. 다 아는 얘기 이거나 별로 중요치 않은 이야기(“전하 고기를 드십시오”  탈상하라는 이야기) 악용될 소지가 있는 것(이시애의 난 진압 때 민가를 헐어서(역사학자의 추정) 목책을 구함)은 뺐다고 합니다.

이런 것처럼 제 일기에도 에둘러서 표현을 하여 나중에 보는 사람들이 추정만 할 수 있게 해 놓았다거나, 子가 공자를 뜻하듯 이름은 없고 그냥 ‘형’만 써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건 일기를 쭉 읽다보면 그냥 ‘형’이라고 썼을 때 누군지는 충분히 추정 가능하지요. 이렇게 제가 직접 겪어보니 역사 속 한 줄을 그냥 곧이곧대로 믿기 어렵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후대 왕들에게도 신하들이 고기 좀 드십시오 했지만 나중에는 ‘뭐 이런 것 까지 쓰냐’고 해서 편집해 빼버리면 모범이 되는 왕이라 기록이 많이 남은 세종이 고기 중독자가 되는 것이겠지요. 이렇듯 일기를 쓰다 보니 나름의 역사 공부가 되었습니다.


현재 계획으로는 25A의 색을 내년 21년 파란색으로 한 바퀴를 다 돌면 25B로 갔다가 다시 25A를 한 바퀴 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별로 해낸것은 없지만 한 10년 넘게 쓴 일기가 책장에 쭉 서있으면 꽤 멋있을 거 같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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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아저씨
20/12/17 22:35
수정 아이콘
꾸준히 써 내려가는 것만 하더라도 존경합니다. 10년 20년 채우실 것 같네요.
판을흔들어라
20/12/17 23:49
수정 아이콘
오늘도 일기 쓰기 귀찮습니다.... 오늘 일기 글 쓴 걸 일기에 쓸지 말지 고민해야하고...
불대가리
20/12/17 23:45
수정 아이콘
대단하십니다
영어일기 한 6개월쓰다가 때려쳤는데
다시 끄적여봐야겠네요
판을흔들어라
20/12/17 23:49
수정 아이콘
그것은 영어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을까요? 한글 일기 쓰시면 1년은 거뜬히 넘기실겁니다.
20/12/18 01:21
수정 아이콘
초등학교 졸업하고 난 뒤로 일기는 써 보려 할 때마다 1주일도 못 가더군요... 5년간 꾸준히 쓰신 건 존경스러운 일이 맞습니다.
판을흔들어라
20/12/18 10:33
수정 아이콘
부끄럽사옵니다... 어느 정도 기간 쓰다보면 꾸준히 쓰는게 어렵지 않아지는 거 같고, 쓰기 위한 방법 중에 일기를 눈 앞에 두는 방법이 있습니다. 저도 도저히 오늘 일기 못 쓰겠다 싶으면 책상 위에 일기랑 펜 올려 놓고 잡니다. 그 다음날 일어나서 바로 눈에 보이게요
오지키
20/12/18 00:22
수정 아이콘
어릴때는 다이어리에 일기를 끄적였는데 가방이 무거워지니까 집에 두고 다니기 시작했고 결국 그대로 책꽂이행이더군요.
그 이후로 48절 수첩을 사용하다가 가끔 몰스킨으로 외도하다가 결국 48절로 돌아온지 12년된 되었네요.
저는 일기란 각잡고 쓰는 것이 아니고 쓰고 싶을 때 바로 꺼내쓰는 거라고 생각해서 언제나 몸에 지닐 수 있는 사이즈로 정착된 것 같습니다만 내년에는 더 작은 사이즈에 필요시 분량을 늘리거나 줄여서 사용할 계획입니다.
내년에는 좀 더 밝고 즐거운 기록이 많이 쌓이길 기원합니다!
판을흔들어라
20/12/18 00:37
수정 아이콘
어느 때고 쓰고 싶을 때 쓰는 일기라니 그것 또한 멋집니다. 오지키 님도 좋은 일 많이 적으시길
커티삭
20/12/18 00:27
수정 아이콘
저는 몇년 다이어리에 적다가 관리가 어려워서 올해부터는 블로그에 적습니다. 원하시는대로 쭉 이어나가셨으면좋겠습니다.
판을흔들어라
20/12/18 00:39
수정 아이콘
블로그는 당연히 비공개? 겠죠? 전자책이 나와서 편해도 종이책만의 맛이 있듯이 왠지 일기 같은 것은 실물로 남겨두고 싶었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이어나가기 위해 일기 쓰러 가보겠습니다.
20/12/18 01:25
수정 아이콘
부럽고 멋있습니다.

전 매 년 스벅 다이어리를 받을 때마다 기록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한지가 10년 된 것 같아요...
그래도 열심히 프리퀀시를 수집하면서 다짐합니다. 내년엔 기필코!
판을흔들어라
20/12/18 10:37
수정 아이콘
스벅 다이어리가 집안 어딘가에 10년치 쫙 나란히 장식되있는 것을 상상해보십시오. 그 멋진 전경을! 그리고 이게 정말 기록의 다이어리인지 개인 스케쥴 관리의 다이어리인지도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전 전자였어요.
위 오지키님처럼 쓰고 싶거나 생각날 때마다 쓰는 것부터 시작해보세요. 저도 초기엔 한 줄 쓰고 만 것도 많습니다. 그냥 빈 공간이나 X자 죽 그어놓거나 욕 하나 쓰고 만 적도 있죠. 어느 정도 연차 생기니 그런일은 없지만요.
답이머얌
20/12/18 11:40
수정 아이콘
예전에 주부의 가계부 또는 일기를 소개하는 기사도 본 적이 있어요.

물가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당시 이슈가 된 사회문제가 가정주부의 시각에서는 별것도 아닌걸로 난리람 하는 가치관이라던지.

혹시 일기에 요즘의 집값 얘기가 기록된다면 민초들이 겪는 삶의 무게가 1억, 10억의 단순한 숫자가 아닌 생생한 삶의 현장 기록이 될 수도 있겠죠.

부디 후일 역사학자들이 참고하는(성격상 주된 사료는 될수 없겠지만) 좋은 텍스트로 남으면 좋겠군요!
판을흔들어라
20/12/18 14:18
수정 아이콘
그런 생각을 하니 일기 쓰는데 한결 편해졌었습니다. 내 일기도 언젠가는 쓰이겠지. 가끔 의식해서 큰 일들은 적어놓곤 합니다. 예를들어 '코로나19 확진자가 며칠째 천명대다. 큰일이다' 이런 식으로요.
답이머얌님의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나 손녀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 씁니다.
다마스커스
20/12/18 12:21
수정 아이콘
개인의 기록을 꾸준히 남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도 개인적인 감상을 가끔 블로그나 페북에 적기는 하지만, 종이에 수기로 직접 쓰는 만큼의 글의 밀도는 절대로 나오지가 않거든요.
그런 면에서는 참 멋지고, 낭만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판을흔들어라
20/12/18 14:21
수정 아이콘
뭔가 오프라인(?) 만의 감성이 있는 거 같습니다. 일기는 거의 제트스트림이 편해서 샀는데 그외 다른 거 쓰기위해 프레피 만년필(4000원) 산 거처럼요. 이 낭만 계속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20/12/18 13:24
수정 아이콘
저도 한 5년 썼는데, 영점을 잡아준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중심이 흔들리지 않게 유지해주는...
하지만 아직 한번도 다시 읽어본 적은 없습니다.
판을흔들어라
20/12/18 14:27
수정 아이콘
영점을 잡아준다는 의미를 좀 더 쉽게 풀어주신다면? 전 일단 일기를 쓰면서 무언갈 고치는 건 잘 안되더라구요. 매년 자기자신에게 욕하며 이러지 마라해도 하는 어리석은.... 진짜 자기가 쓴 일기는 웬만해선 안 읽게 되죠
운운이
20/12/18 15:55
수정 아이콘
내년부터 아이패드에 쓰려구 합니다.
굿노트 짱짱앱
판을흔들어라
20/12/18 16:15
수정 아이콘
내년 얼마 안 남은거 아시죠? 바로바로 시작입니다
Arcturus
20/12/30 08:20
수정 아이콘
일기를 쓴지 1년 밖에 안됐지만 정말 공감이 많이 되네요; 특히 제가 자체적으로 편집해서 쓴다는 부분은 진짜 맞는거 같습니다.
이걸 써야하나 말아야하나 그런 고민도 많이 해봐서..

1년 쓰는것도 힘든데 5년이 쓰시다니 대단하네요
판을흔들어라
20/12/30 12:16
수정 아이콘
저도 그 1년이 있었는 걸요.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에 연연하지 않는 것이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에 다가가는 거 같습니다. Arcturus님의 언젠가의 일기 후기를 기대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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