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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0/07/17 10:41:58
Name aurelius
Subject [일반] [역사] 중국의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수정됨)

일반적으로 중국역사에 대한 이미지는 계속 순환하는 왕조의 역사입니다. 통합했다가 분열했다가 다시 통합하는 순환. 원래 하나였던 것이 나누어지고, 나누어졌던 것이 다시 하나가 되는 과정의 연속입니다. 그리고 진나라와 한나라 때 형성된 [하나의 중국][자연상태]인 것으로 간주합니다. 또한 우리는 중국을 [주나라의 예법]을 지키고, [한자]를 사용하며, [유교적 문화]를 숭상하는 문명이라고 인식합니다. 그런데 일본에서 발간되는 역사책에서는 꽤나 다른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중화세계를 내재화한 우리나라 측 시각과 중화세계 밖에 있었던 일본의 시각 차이인 것으로 보이는데, 사실에 가까운 묘사를 하는 것은 아마 일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최근 일본인 교수가 2004년 집필한 [중국문명의 역사(아쉽게도 한글번역이 없습니다)]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내용이 꽤나 참신해서 상당히 인상깊었습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중국이라는 지리적 공간에 많은 민족들이 패권을 잡기 위해 투쟁하였고, 서로 반드시 통일을 해야 하는 같은 [문명]이라고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통일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후세대가 만든 개념이고, 당시에는 중국과 한국이 서로를 보듯이, 또는 일본과 한국이 서로를 보듯이 남남이었다는 것이죠. 로마멸망 이후 프랑스와 잉글랜드, 독일과 스페인 등은 유럽통일이라는 이상을 (가끔) 추구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가 되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중국지역에 할거했던 나라들도 마찬가지. 

중국문명은 어떻게 보면 중원을 중심으로 했던 "한족문명"과 북방에서 끊임없이 중국내부를 침투했던 "흉노/몽골문명"의 투쟁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족의 왕국은 스스로 천하의 주인이라고 선전했지만, 북방민족에 대해서는 거의 힘을 행사하지 못했고, 북방민족은 계속 자원이 풍부한 중원을 침공하여 남하했지만, 결코 한족과 동화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게르만문명과 로마(라틴)문명의 관계와도 유사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기독교문명(로마문명)이 게르마니아 전역으로 확대된 이후에도 게르만족이 [라틴화]되지 않았던 것을 보면 말이죠. 

한편 당나라가 무너진 이후, 화북은 명나라가 발흥하기 전까지 무려 500년 가까이 사실상 한족의 통제 밖에 있었습니다. 북방민족이 화북을 점거하였고, 거란족과 여진족 등이 화북의 패자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한족유민들은 대거 남하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강남의 본격적 개발]이라고 합니다. 오늘날에도 북방중국어[보통화]와 남방중국어[광동어]는 언어 및 발음이 매우 다른데, 이는 광동어가 고대 중국어 발음에 더 가깝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실 한국(및 일본)의 한자발음도 보통화보다는 오히려 광동어에 가깝죠. 

천하에 황제는 단 한 명밖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게 [천하사상], [중화사상]의 기본적 원칙인데, [한족]은 당나라 멸망 이후 황제가 병존하는 상황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가적 이상향을 추구했던 한족의 나라 송나라는 거란족을 마찬가지로 [황제국]이라고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더욱 굴욕적이게도 거란에 계속 조공을 바쳐야 했죠. [중국문명의 역사]의 저자인 일본인 교수는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중화사상] 이 굴욕 속에서 탄생했다고 주장합니다. 송나라 시대 때 집필된 [자치통감]은 열등감을 나타내면서, 화북의 왕조를 모두 [主]라고 표시하고, 이들을 [帝]라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황제국이면서 거란에 조공을 바치는 송나라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일이었지만, 어쨌든 [정통성]은 오직 한족의 나라에만 있다는 개념(혹은 환상)을 구체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듯 당 멸망 이후 몽골세계제국의 출현까지 동아시아를 규율했던 것은 [천하질서]가 아니라 오히려 유럽과 유사한 [다원적질서]였고, 한반도의 [고려]가 부상할 수 있었던 지정학적 여건도 이러한 현실에 기반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한편 몽골세계제국의 출현은 아시아의 질서를 완전히 바꾸어놓았습니다. 지금껏 인류가 보지 못한 규모의 대제국을 건설한 몽골[천하의 범위]를 전례없는 수준으로 확대시켰습니다. 그리고 중화인 입장에서는 역사상 최초로 이민족에 의한 전면적 지배가 시작된 사건이었습니다. 몽골제국은 중원을 지배하면서 페르시아인, 돌궐인, 거란인, 위구르인, 그리고 심지어 유럽인을 기용하면서 한족을 차별했습니다. 심지어 북경(대도) 건설을 담당한 이는 [아미르 알 딘]이라는 무슬림이었으며, 쿠빌라이 칸 치세 당시 북경에는 로마가톨릭 주교좌가 설치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명나라의 건국은 반몽골운동이었을 뿐만아니라 몽골이 데리고 온 모든 외세를 배격하는 배타적 민족주의 운동이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주원장이 남경을 수도로 삼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죠. 오랑캐가 득실거리는 화북보다, 오래전부터 한족이 중심이었던 남경이 이상적이었을 것입니다. 다만 영락제가 북방공략을 위해 수도를 북경으로 옮겼는데, 이게 나중에 중화인민공화국 시대까지 계속될거라고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명나라의 황제들은 영락제와 같이 아주 특이한 황제를 제외하면 대부분 내부지향적이었으며, 쇄국에 가까운 정책을 펼쳤습니다. 스스로 천하의 중심, 천자의 나라라고 선포했지만, 쿠빌라이의 제국과 같은 권위나 힘을 떨칠 수 없었고 몽골, 여진, 토번 등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중화세계의 모범생이라고 불리는 조선조차 초기에는 명나라를 진심으로 사모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태조 이성계부터가 원래 명나라를 공략하기 위해 편성된 군대의 지휘관이었죠. 

결국 명나라는 만주에서 발흥한 여진족에게 멸망하고 맙니다. 여진족의 아이신기오로 일가는 중원을 정벌하기 전에 몽골의 부족들을 먼저 복속시켰고, 칭기스칸의 옥새를 확보하였습니다. 칭기스칸과 쿠빌라이칸의 후계자로서 그들이 했던 것처럼 중원을 정복하고자 했고, 놀랍게도 성공하게 됩니다. 청나라는 어떤 의미로는 한족에 대한 여진-몽골 연합 지배였습니다. 만주황족은 대대로 몽골황족과 통혼하였고, 한족과는 달리 만주인과 몽골인은 대부분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청나라는 저항하는 나머지 몽골계 부족을 제압하기 위해 몽골의 정신적/종교적 근원지인 티벳을 정복하고, 또 청나라를 위협하는 몽골계 잔당 준가르를 멸망시켜 신장지역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는 청나라가 얼마나 몽골세계에 영향을 받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한 단면입니다. 청나라의 궁극적 권위는 중국천자가 아니라 몽골세계의 대칸으로서의 지위로부터 나오는 것이었기 때문에 저항하는 몽골계를 모두 복속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청나라는 한편 몽골세계를 상대하는 이번원명나라로부터 물려받은 조공국을 관리하는 예부를 따로 설치하여 외교를 관리하였는데, 조선 앞에서는 중국천자로 군림하였고, 몽골세계 앞에서는 대칸으로 군림하였습니다. 그리고 준가르 잔당을 멸망시킬 때 협조했던 러시아와는 애매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서로 대등한 황제국이라고 인식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할 당시 강희제는 러시아에 서신을 보내면서 서로 대등한 '황제(칸)'라고 부른 적이 있으며 양국 모두 부족함 없이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다툴 필요가 없다고 썼습니다. 아무튼 만주족이 건국한 청나라는 쿠빌라이 시대를 제외하면 전례없는 수준으로 중국의 영토를 확장시켰으며, 이는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단 여기서 유념해야할 것은 만주족의 청나라는 '중화왕조'가 아니었다는 사실이죠. 청나라는 시리아인, 아랍인, 그리스인, 세르비아인 등을 지배하던 오스만제국처럼 여러 민족을 청나라 황실에 복속시키는 방식으로 지배하였고, 청나라 무력의 근본이었던 [팔기군]은 오스만제국의 [예니체리]처럼 폐쇄 귀족이었습니다. 그리고 예니체리와 마찬가지로 타락하고 나태해졌죠. 그리고 이들이 완전히 쓸모없다는 사실은 태평천국의 난으로 명백해졌습니다. 

태평천국은 기독교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나, 본질적으로 한족을 광복시키고 만주족을 몰아내기 위한 민족주의적 운동이었습니다. 사실 한족의 반만주감정은 오래된 것으로, 아편전쟁 이전부터 이미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이었습니다. 아편전쟁을 일으킨 영국조차 한족의 반만감정을 잘 알고 있었으니, 할 말 다했죠. 실제로 아편전쟁 전야 영국인들의 기록을 보면 자기네들이 청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켜도 만주족을 혐오하는 한족들이 만주인을 위해 싸우기보다 영국인과 협조할 것이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청나라는 결국 몽골제국과 비슷한 문제를 안게 되었습니다. 다만 몽골과는 달리 청나라는 한족을 적극 기용하면서 태평천국을 진압하였고, 청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한족이 군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이는 양날의 검이긴 했지만, 생존의 문제를 눈 앞에 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서양열강의 침투가 본격화되고 청나라의 무력함이 점점 심화되자 중국의 한족들은 중국의 모든 문제가 [만주족] 때문이라고 주장하게 됩니다. 이는 동남아와 태평양에 널리 퍼진 화교 네트워크 사이에서도 공유되던 감정이었고, 이를 강력히 부르짖는 기수가 바로 현대중국의 아버지 [쑨원]이었습니다. 그는 열렬한 민족주의자로 만주족의 청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다면 누구와도 손잡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중국을 침탈하였던 영국과도, 프랑스와도, 심지어 일본과도 적극적으로 협력하면서 청나라를 멸망시키려고 했습니다. 쑨원은 일본에게는 일본이 듣고 싶은 말을, 영국에게는 영국이 듣고 싶은 말을 해주면서 새로 탄생할 [중화민국]은 이들에게 많은 이권을 보장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탄생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몽골과 만주인 일부, 그리고 티벳은 독립하였습니다. 이들은 청나라 황실의 지배를 받은 나라였지, 한족의 지배를 받는 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는 일본이 이용하기에 딱 좋은 상황이 되었죠. 

그런데 지극히 배타적인 민족주의를 주장하던 쑨원 및 그의 동지들은 명나라의 주원장과 마찬가지로 신생공화국의 수도를 남경으로 삼았지만, 일단 중화민국이 탄생하자 옛 청나라의 영토를 모두 수복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러시아제국도 수많은 민족들을 다스린 나라였으나 볼셰비키 혁명 이후의 소련 지도자들은 러시아의 옛 강토를 모두 포기할만큼 멍청하지 않았습니다. 중국의 혁명가들도 마찬가지였죠. 다만 소련과 차이가 있다면, 소련은 구 러시아제국의 민족들을 [러시아화]하는 데 실패했지만 중화민국, 나아가 중화인민공화국은 구 청나라의 민족들을 [한화] 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이렇듯 중국의 범위와 세계관은 원래 있던 것이 계속 순환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변화하고 진화했습니다. 

한족과 북방민족의 투쟁, 이민족에 의한 수백년 간의 지배, 그리고 이에 대한 반동, 그리고 서양열강과 근대와의 조우, 일본의 충격, 혁명과 국민국가의 건설 등...이러한 시각을 모두 담아낸 중국통사가 나왔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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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7 10:50
수정 아이콘
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20/07/17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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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20/07/17 11:15
수정 아이콘
아아 재미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20/07/17 11:20
수정 아이콘
그런 배경을 누구보다 더 중국공산당이 잘 알고 있고,

그래서... '영웅'같은 병맛영화가 나온거겠죠?

아니 그냥 진시황 싹둑하라고.. 젠장~~

번오기 형가 등은 XX냐?
데브레첸
20/07/17 11:24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말씀대로라면 중국도 역사적으로 유고슬라비아, 오스만, 러시아 제국-소련처럼 다민족, 다문화제국에 가까운데, 왜 중국만이 한족 중심의 통일된 왕조로 남아있는지 연구할 가치가 있겠네요. (외몽골과 대만은 날라갔지만 비교적 '일부'죠)
개인적 추측입니다만, 중국은 타 제국과는 달리 중심민족인 한족이 90% 이상의 압도적인 비율을 보였고, 민족 간 종교갈등이 '비교적' 약했고,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며 하나의 통일중국에 대한 갈망이 강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현재까지도 유지되는 중국공산당의 엄격한 일당독재 통제능력도 있을 거고.
Je ne sais quoi
20/07/17 11:33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배고픈유학생
20/07/17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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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됨) 역사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지않아서 댓글달기가 두렵습니다만 몇가지 의견을 쓰자면요.

쑨원의 삼민주의 중의 민족주의는 처음에는 멸청흥한을 원칙이 맞습니다만,
후에는 서양의 반제국주의를 타파와 중화민족간의 평등을 주창하는 민족자결권의 의미를 갖게 되었고,
실제로 1931년 중화민국 헌법에서 "오족공화론"을 내세워 중화민족 간의 평등을 주장을 했죠.
또한, 신해혁명을 통한 중화민국의 설립은 역사적 의의로
2천년 넘게 지속된 중국의 봉건주의를 타파한 아시아 최초의 공화제도 수립이라고 봐야된다고 봅니다. (반봉건주의)
한족부흥을 위한 청나라 멸망으로 보기에는 '민족'이라는 지엽적인 측면으로만 지나치게 바라본게 아닐까 싶습니다.
부질없는닉네임
20/07/17 11:53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후추통
20/07/17 11:54
수정 아이콘
원문 전체를 봐야겠지만...이거 수당 이전에 그렇게 민족융화를 시도했던 북조의 왕조들을 무시하는것 같은데요? 북위의 경우 낙양과 평양 양대수도를 뒀다가 유목귀족들의 반발로 반란이 났을정도고요.

북조의 가장 골치아픈건 민족간 갈등을 최소화 시키는 거였고 결국 이걸 해결하지 못하고 나온게 지역주의 즉 우문태의 무천진 집단 즉 관롱귀족이었습니다 한족 강족 갈족 선비족 할것 없이 우리는 무천진에서 굶어가며 식량 나눠먹으며 풍파를 견뎠던 동향인이라는 개념이죠

중국사에서 이 사건은 절대 그냥 넘어갈수 없는 대사건인데 그냥 뭉뚱그려서 수당시절 넘어가고 몽골과 여진으로 넘어간다?

중국의 화이사상이 중화사상으로 넘어가는 역사적 기념비적 사건이 바로 저 무천진 집단과 관롱귀족의 성립과 붕괴인데 저 사건을 언급 안한다는건...무례한 이야기입니다만 중국사 공부 다시해야할 분 같습니다. 몽골과 여진의 통치에 반발한 이유는 그들이 이민족인것도 있겠지만 그 이전의 이민족과는 달리 그들의 정체성을 지켜가며 강압적인 통치를 자행했기 때문입니다.

서양의 경우 그들이 다른민족이기 때문이기보단 통치가문의 혼인과 계승권 갈등이 자주 전쟁과 협상으로 이어졌고 이는 그 국가들이 암묵적인 생활권이라는 보이지 않은 선으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동아시아는 특히 중국과 한반도는 자연과 지형 뿐이 아닌 그 국가들이 국경이라는 강력한 통제선이 그어져 있었고 외국과의 왕래역시 강력한 통제 하에서 제한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논문의 논지처럼 문명의 충돌이라고 단순화 시키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훈수둘팔자
20/07/17 12:06
수정 아이콘
모든 문제가 만주족이라고 하는 건 한족의 아전인수 아닌가 싶습니다.

오히려 신장위구르, 티베트, 만주, 내몽골이 현재 중국 국경선에 포함된건 전적으로 만주족이 만들어준거죠.

명나라 시절과 똑같이 갔다면 한족의 전통적 영역인 화북+강남에 +@로 요동반도 이상으로 진출 못했겠죠.
興盡悲來
20/07/17 12:13
수정 아이콘
중국인들 중에는 마오쩌둥을 존경하는 이유 중 하나로 '중화 역사에 몇 명 안되는 천하통일을 이룩한 위인'이라는 점을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하니... 우리는 중국이 진시황 이후로 계속 통일된 상태였다가 중간중간에 (삼국지 시즌이라던가...) 잠깐씩 내분이 일어나고 그 정도가 아닌가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분열된 상태를 기본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더군요....
퍼플레임
20/07/17 12:14
수정 아이콘
우리나라가 민족 의식이 굳혀졌을 때는 언제부터였을까요?
고려 이전에는 사실상 남 보듯했을텐데
20/07/17 13:28
수정 아이콘
고려 몽골침입 이후라고 봐야죠. 일제강점기가 한민족의 배타적 민족주의를 강화시켰듯 몽골강점기도 고려인의 배타족 민족주의를 강화시켰을거라고 봅니다. 실제로도 몽골침입 이후에야 xx부흥운동류가 전멸했고요.
인간흑인대머리남캐
20/07/17 12:45
수정 아이콘
유럽같은 종교갈등이 없었던 것도 한 몫 했으려나요
20/07/17 12:50
수정 아이콘
통합했다가 분열했다가 다시 통합하는 순환. 원래 하나였던 것이 나누어지고, 나누어졌던 것이 다시 하나가 되는 과정의 연속입니다

이 구절을 보니 삼국지 첫 문장이 떠오르네요 크크
minyuhee
20/07/17 13:14
수정 아이콘
금나라 전성기의 마지막이던 장종이 당, 한 등 역대 중화왕조에 대한 제사를 올리며 중화계승의 의지를 표방했죠. 바로 그 다음 몽골의 대두로 금나라는 몰락크리를 맞지만.
날아라 코딱지
20/07/17 13:50
수정 아이콘
바로 이점때문에 폄하 첨삭당하며 푹군으로 규정하고있지만
중국사 부동의 원탑이자
그영항력아래 현재 미래의 중국이 존재할수 밖에 없다는 인물 1위가 진시황이죠
20/07/17 14:59
수정 아이콘
중화세계를 내재화한 우리나라 측 시각과 중화세계 밖에 있었던 일본의 시각 차이 <- 도 물론있겠지만..

중세가 길었던 일본과 중앙집권이 길었던 한국의 차이도 있지않을까 싶어요
Ms.Hudson
20/07/17 15:53
수정 아이콘
'한족'만큼이나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민족도 없다고 봅니다. 한 핏줄처럼 생각해서 하나의 민족이라고 여긴다기 보다는, 중원과 강남을 하나로 묶어서 내부 결속을 다진 후 외부에 힘을 떨치기 위한 개념으로서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이민족이라도 중원으로 들어와 문화를 습득하고 몇대쯤 피도 섞이면 한족이 되는 식으로 하면서 '하나의 민족'으로서 인구를 늘려나가면 사방에서 조공받는 강한 나라 되는거니까요. 당시의 행정 능력과 지형적 문제로 중원-강남 바깥까지 하나로 묶을 여력은 없었다고 보구요, 그나마 장성 이북의 민족이 강성해져서 넘어왔을 때에나 영토 확장을 할 수 있었던거죠.

유럽은 진,한시대와 비슷한 때에 로마가 제국을 이뤘던 만큼 '하나의 유럽' 정신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로마 멸망 이후 샤를마뉴가 의미있는 재통일을 이루었음에도 분할상속때문에 나가리 되었죠. 프랑크 단일 민족 국가인데도 갈라진겁니다. 동시대에 중국은 수,당이 재통일을 이루었고, 특히 수양제가 운하를 파놓은 덕분에 중원의 결속력이 더 단단해졌습니다. 유럽의 지형적인 '중원'은 프랑스-저지대-독일이고 이 지역이 하나의 국가로 묶이는 시간이 2~300년 정도 지속되었다면 어땠을지... 상상만 해봅니다. 라인-루아르 운하같은거라도 만들었을까요? 어쨌든 이 분열로 인해, 유럽 역사는 동맹과 전쟁, 조약과 배신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다만 프랑스와 독일이 하나로 묶이는 역사는 현재 EU에 의해 쓰여지고 있는 중이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유럽과 중국 역사가 결정적으로 다른 길을 간 이유는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강력한 통치에 대해 말하는 종교가 아니어서, 영주이면 영주인 대로 공작이면 공작인 대로 잘 다스리는 것이 기본 미덕이고, 정복이나 통일, 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전쟁은 충분한 명분이 있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기독교 국가끼리 전쟁을 하려면 교황도 인정할 만한 이유가 있어야 했죠. 그러니 각 영지의 전통을 존중해서 장자 상속이든 분할 상속이든 할 수 있게 열어준 것이구요. 전쟁을 하기 어려우니 결혼을 매개로 한 통합을 더 추구했던 것일 수도 있겠네요.

반면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부터 이미 요순의 이야기를 미덕으로 여기며 천하의 통치권을 이어받고 이어가는 것을 지상가치로 여겨왔습니다. 뜻이 있는 사람이라면 평천하를 목표로 해야 되는 것이구요. 이후 등장한 도교, 불교, 라마교 등은 통치 이념으로서의 유교와 배치되지 않다보니, 한족에게 있어 하나의 통치자 아래에서 하나의 나라를 이루어 태평성대를 누리는 것은 오랜 시간 품어온 목표가 된 것 같습니다.
20/07/17 17:02
수정 아이콘
글쓴분은 헤르미온느이신가요...?
개발괴발
20/07/17 19:01
수정 아이콘
이런 저런 사례를 보면 결국 민족이란건, 무슨 혈연 지연 이런게 아니라
외침에 맞서는 하나의 무리를 규정짓는 무언가 같아요 -_-a

만약에 몽골이 고려를 정복하고 일본까지 정복한 다음에, 몽골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이 고려/일본의 구영토에서 동시에 발흥했으면
고려와 일본은 하나의 민족 동일체 이런 소리 나왔을 지도 모르겠다 싶어요.

결국 지구가 하나의 지구가 되려면 외계인이 쳐들어와야 된다능...?!
브리니
20/07/18 00:04
수정 아이콘
민족의 가장 큰 공통의식은 언어라 봅니다 중국이 그토록 넓은 땅에서 분열과 통일을 했지만 결국 통합(소수민족은 강제..)된 건 표의문자인 한자의 특수성이 가장 크다고 봅니다. 술먹고 왔더니 좀 끼어들어보고 싶었네요..
잠만보
20/07/18 14:22
수정 아이콘
나라가 크고 인정이 다양해서 중화사상이 발생했나 했는데

그 시초가 열등감이라는게 참 흥미롭고 재미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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