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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0/06/29 18:14:40
Name PKKA
File #1 1차_충돌_지도.jpg (111.1 KB), Download : 56
Subject [일반] "8월의 폭풍"으로: 소련과 일본의 40년 충돌사-9



*  본인은 『8월의 폭풍』의 역자이자 연재소설 『경성활극록』의 저자임을 독자분들에게 먼저 알리는 바입니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75357299
https://novel.munpia.com/163398

9. 할힌골 전투: 일본군의 1차 공세

소련과의 국경충돌이 격화된 곳 중 하나는 몽골인민공화국과 만주국의 국경지대였습니다.

만주국, 정확히는 관동군은 몽골과 만주국의 국경을 할흐강(할힌골강)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몽골은 할흐강 동쪽 16km 지점의 노몬한 마을을 전통적으로 만주와 몽골의 경계선으로 삼고 있었기에, 만주국의 국경 주장에 반발하였습니다ㅣ.

이 16km의 차이 때문에 양측은 계속해서 논쟁을 해 왔으나 계속 해결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만몽국경의 이런 불안감 때문에, 몽골은 소련에 병력 주둔을 요청했습니다. 그 때문에 1936년에 소련 자바이칼군관구 소속 제57특별소총군단이 몽골에 주둔하게 되었습니다. 제57특별소총군단은 제36차량화소총사단, 제6기병여단, 제11전차여단, 제7, 8, 9차량화-기계화여단으로 구성된 기동화된 부대였습니다.

1939년 4월, 윤봉길의 홍커우 의거로 큰 부상을 입었던 우에다 겐키치 대장이 사령관이었던 관동군은 소련과 국경충돌시 적용할 새로운 작전지침인 '만소국경분쟁처리요강'을 작성하여 배포하였습니다.

이 요강은 상호 국경이 불분명한 지역에서는 책임구역의 지휘관이 자체 판단으로 국경선을 정하며(!) 임의로 정한 국경선을 소련군이 넘어왔을 시 적극적으로 소련군을 격퇴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일시적으로라도 소련 영내에 침범하는 것을 허가한다(!!)는 초강경한 지침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 지침을 작성하고 배포를 주장한 자는 바로 관동군 참모부 작전과의 참모장교로 훗날 대본영 참모가 되어 수많은 월권행위를 저지르며 악명을 떨친 츠지 마사노부 소좌였습니다.

이느 요강은 소일 충돌시 사태를 항상 확전으로 몰고 갈 지침이 되었습니다.

결국 긴장상태의 만몽국경에서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1939년 5월 8일, 만몽국경의 하일라얼에 주둔한 관동군의 보병 제23사단 소속 소규모 정찰대가 분쟁지역에 비밀리에 진입하다, 몽골 제7국경수비대에 발각되어 전멸당하며 할힌골 전투의 서막을 시작했습니다.

5월 11일, 몽골군 국경수비대의 소규모 병력이 분쟁지역으로 진입하였습니다.

제23사단장 고마쓰바라 미치타로 중장은 미 몽골군을 몰아내겠다며 장갑차중대와 기병중대로 구성된 사단수색대를 급파하였습니다.

사단 수색대장 아즈마 야오조 중좌는 수색대를 지휘하여 만주국군의 중대급 기병대와 합류하여 몽골 국경수비대를 양익포위하려 시도했습니다. 몽골군은 포위망 형성 전에 재빨리 빠져나와 할흐강 서안으로 후퇴했습니다.

이걸로 국경분쟁은 일단락 되는 듯 했지만, 소규모 몽골군이 계속 분쟁지역에 들어오자, 5월 14일에 관동군 육군항공대 소속 폭격기들이 몽골 제7국경수비대를 폭격하며 충돌이 격화되었습니다.

5월 15일에는 제23사단이 만주국군 소속 몽골인으로 구성된 흥안군의 제7기병연대를 투입하여 추후 작전의 도약점을 확보하려 했습니다.

5월 21일에 600명 규모의 소련군과 몽골군이 할흐 강의 하류를 가로질러 흐르는 할랴스틴강의 북쪽과 남쪽에 진지를 구축하자, 제23사단은 야마가타 다케미쓰 대좌의 제64연대를 아즈마 중좌의 수색대, 흥안군 제6기병연대와 함께 파견하여 야마가타 지대로 편성해 몽골군을 섬멸하러 들었습니다.

야먀가타 대좌는 할흐강 동안이자 할랴스틴강 북쪽을 점령한 소련 및 몽골군이 100여 명 정도밖에 안된다는 잘못된 정보를 알고 있었기에, 중대 규모의 조공으로 적을 고착견제하고 1개 대대를 통해 적 북익에서 주공을 가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흥안군 제8기병연대는 남쪽에서 진격해 소련군 우익을 타격할 것이었습니다.

아즈마 중좌의 수색대는 소련군의 후방으로 침투해 할흐강의 다리를 봉쇄하여 소련군의 후퇴로를 차단, 소련군을 완전히 포위할 것이었습니다.

일본군의 총병력은 보병 1,680명, 기병 900명, 장갑차 6~8대에 이르렀습니다.

공세는 5월 28일에 시작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실수였습니다. 분쟁지역에 급파된 소련군의 병력과 화력 및 기계화 정도가 일본군의 예상을 뛰어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소련 제57특별소총군단의 군단장 니콜라이 페클렌코 사단지휘관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5월 15일부터 배치하기 시작한 병력은 제11전차여단의 기관총대대, 전투공병중대, 76mm 포대와 몽골군의 제6기병사단 소속 장갑차대대였던 겁니다.

총 병력은 보병 668명, 기병 260명, 76mm 화포 20문, 장갑차 39대였습니다.

5월 28일 새벽, 일본군 야마가타 지대가 포병의 공격준비사격과 육군항공대의 폭격으로 공세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공세는 소련군의 화력에 막혀서 지지부진해지고 말았습니다.

후방에 침투해 소련군의 후퇴로를 차단하게 되어 있던 사단수색대는 목표지점인 소련군 주둔지 2km 지점까지 접근했을 때, 소련군과 몽골군이 장갑차 10여대를 투입한 기습공격을 당했습니다.

야마가타 지대의 계획은 삽시간에 엉망이 되었고, 아즈마 수색대는 적을 포위하려다가 오히려 자신이 포위당하고 말았습니다. 아즈마 중좌는 포위망을 돌파하려다 전사했습니다.

본대인 제64연대의 공격도 그날 밤에 소련 제36차량화소총사단 소속 제149차량화소총연대가 도착하며 거의 막히고 말았으며, 5월 29일에는 소련 제175포병연대의 1개 대대와 몽골 제6기병사단의 1개 대대가 추가로 증원을 오며 큰 피해를 입은 일본군에 역습을 가했습니다. 야마가타 지대는 400여명의 전사자를 남기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맨 위 지도를 보시오.)

이렇게 할힌골 전투를 시작한 일본군의 1차 공세는 소련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이 이상의 분쟁은 무리라고 생각한 고마쓰바라였지만, 자기 책임구역에서 계속 소련군과 몽골군이 증원되자 결국 관동군 사령부에 병력증원을 요청하며 소련군을 몰아낼 공세를 재차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관동군 사령부는 고마쓰바라의 요청을 받아들여 인접한 만저우리에 주둔한 보병 제7사단의 2개 연대와 사령부 직할인 제3, 4전차연대를 제23사단에 지원해 주었습니다. 보병 제7사단은 거친 환경에서 자란 홋카이도와 남사할린 출신들로 구성되었고 러일전쟁(만화 골든 카무이를 보시오)과 시베리아 출병에서 보여준 활약 덕에 정예부대로 정평이 나 있었습니다. 제7사단의 제28연대 2대대는 만저우리의 주둔지에서 분쟁지역까지 24시단 동안 64km를 도보로 행군했는데도 지치지 않을 정도로 높은 전투력을 자랑하였습니다.

한편 상황을 보고받은 소련 국방인민위원회는 일본군의 반격을 대비할 준비를 하며, 페클렌코가 방어에서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공세에서는 더 적극적인 지휘관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더 공격적이고 맹렬한 지휘관이 제57특별소총군단장으로 새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게오르기 주코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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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c초콜릿
20/06/29 18:20
수정 아이콘
주코프가 여기서의 공적 덕에 나중에 대숙청을 피해갔는데, 바실렙스키를 더 높이 평가하는 입장에서는 가끔 미묘하기도 합니다
20/06/29 20:04
수정 아이콘
둘 다 최고지휘부에서 승리에 공헌했으니 굳이 비교는;;
미키맨틀
20/06/29 18:36
수정 아이콘
10월 혁명때 만들어진 지휘체계인 소대지휘관,중대지휘관,사단지휘관같은 전투지휘관체계은 1939년이면 바뀌어지지 않았나요?
20/06/29 20:04
수정 아이콘
그건 1940년의 일입니다.
카스가 미라이
20/06/29 19:49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드디어 나오네요.
20/06/29 20:04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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