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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9/02/12 03:59:07
Name 신불해
Subject [일반] 청나라 vs 프랑스 (수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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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 전쟁 이후 여러 서양 제국주의 열강들은 청나라의 영토를 떼어먹거나 지분을 확보하기 위한 행동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영국은 홍콩을 기점으로 해서 상해, 천진 등 주로 동남쪽 개항장에 발판을 만들었고, 러시아는 동북에서 서북으로 걸친 국경선을 타고 남하하는 모양새를 취했습니다. 



다른 국가인 프랑스의 경우는, 남쪽 - 즉 인도 차이나 반도에서부터 중국의 서남 지방, 곧 운남성 방면으로 진출하려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차지해야 할 곳이 바로 베트남이었습니다.



1858년, 베트남에서 프랑스와 스페인 출신의 선교사가 살해 당하는 사건이 발생 했습니다. 조사 결과 "기독교 박해가 이유가 아니다." 라는 베트남 쪽의 설명에 스페인은 물러났지만, 프랑스는 "기회다." 라고 여기며 '가톨릭의 보호' 를 명분으로 수천명의 병력을 파견했고, 그럭저럭 지리멸렬한 상태가 이어지긴 했지만 결국 4년만에 베트남도 굴복하여 항구도 프랑스에게 개방하고 배상금도 물러주는 등 불평등 조약을 체결 합니다. 이 조약을 1차 사이공 조약(Treaty of Saigon)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불평등 조약을 맺은 이후에도 프랑스는 자기들이 필요하다 여겨지면 노골적으로 군사를 보내 침공하거나 장악했고, 베트남의 지방관들은 이미 조약도 맺었고 힘으로도 상대가 안되니 저항은 할 수 없지만, 분통을 참지 못하고 자살하는 사람들까지 있었습니다.  



베트남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니던 프랑스군은 "베트남 북쪽을 통해 운남으로 진입할 수 있다." 는 판단에, 베트남 북쪽의 통킹 지역을 무력으로 점령하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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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미국의 '베트남 전쟁' 의 사적 원인이 되는 '통킹만 사건' 으로 잘 알려진 통킹만






그런데 당시 이 베트남 북부 지역에는 또다른 세력이 있었습니다. 바로 흑기군(黑旗軍)이라고 불린 중국계 세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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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기군의 모습




그 이전, 전중국을 휩쓴 태평천국의 난이 진압 당하자 잔당 일부는 중국을 떠나 국경을 넘어갔는데, 흑기군은 그렇게 베트남 북부로 몸을 떠난 태평천국군 잔당이었습니다. 그 숫자가 제법 되고 전투력도 상당하다 보니, 당시 쇠퇴해 있던 베트남 정부에선 이를 진압할 능력은 없었고, 대신 흑기군에게 적당히 감투를 주고 합법적인 직위를 보전한 다음, 대신 베트남 북부 지역에 있던 여러 반란을 진압하는 임무를 맡겼습니다. 흑기군은 성공적으로 이를 수행하며 베트남 정부에게 공인 받은 무장 집단이 되었습니다. 이 흑기군의 수장은 유영복(劉永福)이라는 인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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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게임 거상에서 대만(?)의 영웅으로 나오는 유영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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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인물은 이렇게 생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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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북부 홍강 삼각주 지역




흑기군은 베트남 북부에 자립해서 적당히 통행세 등을 거둬들이며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 세력이 여기로 들어오니, 분쟁이 생길 것은 자명한 이치였습니다. 프랑스 출신 상인이 화물을 운반 하던 중에 이 통행료 문제로 마찰이 빚어지자, 프랑스는 수백여 명의 병력을 파견해서 곧 홍강 삼각주 지역을 점령했습니다. 그런데 이 병력이 하노이로 돌아가던 중, 흑기군의 습격을 받아 패퇴하고 사령관이던 프란시스 가르니에(François Garnier)가 전사하기까지 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하지만 여러 외교적 압력은 어쩔 수 없어서, 베트남은 또다시 프랑스와 불평등 조약을 맺어야 했습니다. 제 2차 사이공 조약으로 알려진 이 조약에서 "베트남은 독립국." 임이 선포 되었는데, 이는 베트남에 대한 중국의 영향을 떨어뜨려놓기 위함이었습니다. 물론 프랑스가 베트남 좋은 일을 해주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고 그렇게 중국의 영향력을 떨어뜨린 다음,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종주권을 강화하기 위한 이유였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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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리비에르



이렇게 점점 베트남을 잠식해가는 프랑스였지만 북부에는 흑기군이 계속 버티면서 프랑스의 계획을 성가시게 방해했습니다. 이에 프랑스는 앙리 리비에르(Henri Rivière) 대령을 사령관으로 파견하여 베트남 정부에 조약 위반을 따지려 했습니다.



그런데 현지에 도착한 앙리 리베에르는 "협상 따위 해봐야 아무 쓸모도 없다." 는 생각으로 바로 군사를 동원해 베트남 하노이를 점령해버렸고, 흑기군과 싸울 준비를 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참다 참다 못한 베트남 정부는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 했습니다. 이에 응한 청나라는 원군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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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하는 리비에르





일이 이렇게 되자 먼 외지에서 옛날 맞서 싸웠던 청나라 관군과 태평천국군의 후예인 흑기군이 같이 힘을 합치게 되는 기묘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확실히 교전비 자체는 프랑스쪽이 압도적으로 우세하긴 했지만, 전체적인 전황에서는 오히려 프랑스에 불리하게 돌아가 사령관인 리비에르가 전사하고 하노이를 넘겨주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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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지원군을 이끌고 온 쿠르베



상대가 똑같은 열강도 아니고, 별것도 아닌 것들이라고 생각했던 상대에게 일격을 받아 사령관이 전사까지 하자, 프랑스의 여론은 들끓었고 프랑스는 "좋아, 이제부터 진지하게 간다." 는 느낌으로 의회 차원에서 군비를 확충하고, 대규모 원정군 파견이 이루어져 사령관 쿠르베의 지휘 아래 1만 5천명이나 되는 병사를 베트남에 파견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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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하는 프랑스군.




프랑스군은 투언 안 전투에서 베트남 정규군을 상대로 싸워 프랑스군 12명이 다치는 동안 베트남 군 2,500명이 전사하는 압도적인 교환비를 보였고, 이 시점에서 베트남 정부의 저항 능력은 완전히 상실 된 셈이었습니다. 다음 문제는 이제 흑기군이었는데, 흑기군은 그렇게 호락호락 하진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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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기군의 모습. 모두 소총을 휴대하며 상당한 무장 수준을 보여줍니다.





푸호아이(Phu Hoai) 전투에서 프랑스군 2,500명과 흑기군 3,000명이 격돌했는데, 프랑스군의 첫 공격을 흑기군이 잘 저지하고 오히려 밀어붙이며 프랑스군이 퇴각하면서 거의 패퇴할뻔까지 했으나, 프랑스 해병대가 활약하여 재차 반격하면서 겨우 흑기군의 공세를 저지하고 전황을 안정화 시켰습니다. 치열하게 교전이 펼쳐지던 중 계속해서 내리던 비로 제방이 무너져 물난리가 나면서 전투가 멈췄습니다.



프랑스 쪽에서는 "다 이긴 싸움이었는데 제방 때문에 저들이 운이 좋았다." 고 했지만, 실제로는 물자와 부상자가 물난리 때문에 모조리 날아버린 흑기군이 쪽이 더 큰 타격을 받았었습니다. 프랑스 쪽에서는 60명 정도의 사상자가 나왔고, 프랑스 쪽에서는 "흑기군은 300명이 죽었고 부상자를 합치면 600명 정도일 것이다." 라고 발표했습니다. 



교전비로 보면 프랑스가 우세하긴 했지만, 당시 국제 여론은 "프랑스 저 놈들 가오는 다 잡더니 의외로 고전하네? 꼴 좋다 낄낄" 식으로 '사실상 프랑스가 진거나 다름 없다.' 는 반응이 더 컸습니다. 이후에 펼쳐진 팔랑 전투(Battle of Palan)도 비슷한 수준의 교환비가 나와 "뭔가 이기긴 이겼는데 개운하진 못하다." 는 느낌이 더 커졌습니다. 결국 두 번의 작전을 지휘한 부에 장군(Alexandre-Eugène Bouët)은 팔랑 전투 이후 해임 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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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고도 해임당한 부에.






물론 이런 전투만 있는것은 아니고, 선따이 전투(Son Tay) 등에서는 9,000명의 프랑스군과 3천명의 흑기군, 7천명의 베트남 군, 2천명의 청나라 군 도합 1만 2천 명의 대군이 맞붙어 80여명의 프랑스군이 전사하고 320명여명이 부상 당하는 동안, 거의 900명이 전사하기도 했습니다. 이 전투는 도합 2만 명이 넘는 부대가 맞붙은 대전투였습니다.




그런데 이 전투에선 사실 곡절이 있었는데, 주로 전투에 나선것은 3,000명의 흑기군이었고 도합 9천명으로 프랑스군 전체와 맞먹는 숫자였던 베트남군과 청나라군은 눈치를 보면서 전투에 소극적으로 임해, 사실상 흑기군 혼자 싸운 셈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실제로 죽은 사람들의 숫자는 거의 흑기군이었고, 흑기군은 이 전투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당연히 흑기군 대장 유영복은 대단히 분개해하며 이후의 전투에서는 흑기군을 사리며 소극적으로 전투에 임하게 됩니다. 




또한 교환비 자체는 훌륭했다고 해도 83명이 죽고 320여명이 부상당한것도 당시 프랑스 입장에선 다소 부담스러운 피해였습니다. 그 정도만 해도 여태까지 입었던 피해 전부와 거의 맞먹는 수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까지 대부분의 전투에서는 계속 1대10 정도의 교환비가 나왔는데, 마진을 계산해 보면 그 정도로는 불만족스러웠습니다. 프랑스는 일대백 수준의 압도적인 전과, 세상 전부가 납득할만한 그런 전과가 필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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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전투 중 중 최대 혈전 중 하나였던 선따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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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따이 전투의 재판인 박닌 전투



선따이 전투 이후 박닌 전투(Bắc Ninh campaign)에서 1만 명의 프랑스군과 2만 명의 청나라군, 그리고 3천명의 흑기군은 양군 합쳐 총 3만명에 이르는 대군단의 격돌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엄청난 규모의 군대가 맞붙으면서도 서로 사상자는 그다지 많지 않았는데, 저번 전투로 심기가 불편해진 유영복이 정예병인 흑기군을 전면에 세우지 않았고, 별로 사기가 안 높은 청나라군은 적당히 싸우다 도주를 했기 떄문이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40명 정도의 사상자가 나왔고, 청나라 쪽은 400명 정도의 사상자가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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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장과 좌종당




사상자 자체는 여태까지와 비슷한 1 대 10 구도긴 했지만, 박닌 전투는 청나라 조정에 꽤 충격을 주었습니다. 여태까지의 전투야 흑기군 위주로 펼쳐졌고 청나라가 좀 지원을 주는 형태여서 약간 불리한 구도가 나온다 쳐도 대수로울 게 없었지만, 박닌 전투는 청나라 군이 무려 2만 명이 동원되어 주가 되서 전투를 치뤘는데 성과가 별로였으니 말입니다.



당시 베트남 문제에 있어 청나라 조정에서는 강경파와 유화파가 대립 중이었는데, 여태까지는 좌종당 - 괄괄한 성격으로 '신강 포기론' 을 무마시켰던 그 그 좌종당 위주의 강경파가 득세했었습니다. 강경파는 흑기군을 지원하고 베트남 문제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고 여겼는데, 박닌 전투 이후 이홍장을 중심으로 하는 유화파가 크게 힘을 얻어 "협상을 통해 일을 끝내자" 는 쪽에 여론이 모이게 됩니다.




이렇게 되어 청나라와 프랑스가 체결한 조약이 바로 '간명조약' 입니다. 간명조약은 총 5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요지는 "프랑스는 안남 지역의 국경선을 확실하게 보장한다." "프랑스와 베트남이 맺은 조약을 청나라는 인정한다." 는 것입니다. 즉 프랑스는 베트남을 확실하게 해 먹고, 그 담보로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뭘 하건 상관 없으니 중국 국경선 넘어오는 일은 없게 하자는 의도였습니다.




하지만 베트남 문제에서 완전히 손을 떼자는 것으로 일이 되자 그때까지 숨죽이고 있던 강경파들의 불만이 터져나왔고, 설상가상으로 현지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조약의 체결 조건에는 청나라군이 베트남에서 철군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철군한다' 는 말은 있어도 '언제까지' 라는 말은 없었는데, 아직 청나라군이 철군하지 않았을때 프랑스는 서둘러 부대를 보냈었고, 아직 현지에 남아있던 청나라군과 마찰이 벌어져 결국 국지전까지 이어졌습니다.



프랑스는 이에 대해 "2억 5천만 프랑을 배상하라" 고 요구했고, 청나라는 "1개월 안에는 확실하게 전군이 철수할것." 이라고 구체적인 기한을 제시했지만, 배상에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어쩄든 프랑스가 싸움을 걸어올 것이라는 것은 분명했고, "배상금을 주고 사죄할것인가" "아니면 싸울것인가" 를 놓고 격론이 펼쳐진 끝에 강경파가 다시 기세를 잡아 결국 싸우는 쪽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다른것보다도 '돈 문제' 가 컸습니다. "어차피 돈 줄 바야에 차라리 그 돈 가지고 싸우자." 는 게 당시 청나라의 뜻이었습니다. 아마 돈 문제만 안 걸려 있고, 후술할 프랑스의 공격만 아니었으면 어떻게든 대충 수습해서 전쟁 안하려고 했을 확률이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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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직 청나라가 "싸워야 하나 사죄해야하나" 하고 논의하던 그 무렵, 프랑스는 이미 선수를 쳐서 복건의 마미군항(馬尾 軍港)을 초토화 시켰습니다.



이 마미군항은 은 2천만냥을 들여 만든 양무파의 기대 그 자체였지만, 아무런 저항도 못해보고 박살이 나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입장이 명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이곳을 맡고 있던 하여장(何如璋)은 "평화 협상을 할 수 있으니 반격을 하지 말아라." 라는 발포금지령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어 무려 군함 11척, 병력 600명이 단 한방의 총도 쏴보지도 못한 채 몰살 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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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히 말해 바로 이때부터가 '청불전쟁' 입니다. 그 전까지는 '베트남 사태' 정도로 표현하면 될듯.





마미군항의 참극으로 청나라는 전쟁 시작하자마자 뭘 해보지도 못한 채 재해권을 바로 상실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의외로 그 이후의 전투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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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전(劉銘傳)




이 상황에서 해상에서 프랑스가 작전을 진입하는데 핵심 기지가 될 수 있는 대만을 방어하기 위해 유명전이라는 인물이 대만 순무로 파견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이홍장과 같은 계열인 회군의 인사로 양무파의 핵심 인사 중 한 명이었고, "산천 대지를 더럽히는 괴물이다" 라는 악평이 자자했던 '철도공사' 를 반대에도 불구하고 적극 지지하고 밀어붙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유명전은 대만에 도착하자마자 태세를 정비하고 방어를 철저하게 준비했습니다. 이윽고 프랑스 군대가 대만의 기룡포대를 공격하자, 유명전은 "이 상황에서 어차피 해상에서 싸우면 방법이 없다." 는 뜻으로 해안가에서는 적당히 저항하다가 도주했고, 프랑스군이 상륙을 시작하자 반격을 감행, 100명 이상의 피해를 입히고 프랑스군을 격퇴했습니다.



몇개월 뒤 프랑스군은 다시 한번 공격해왔지만 유명전은 이번에는 '청야전술' 로 적에게 맞섰습니다. 일부러 적이 점령하게 지역을 내준 뒤 오히려 포위를 감행해서 프랑스군을 대패시켰습니다. 약이 오른 프랑스군은 전력을 보강해 유명전을 잡으려 했지만, 이쯤 되자 유명전은 아예 산악지대로 달아나 숨어 다니며 게릴라전을 감행, 전력이 강한 적과 결코 제대로 싸워주지 않으면서 프랑스군의 기를 빼놓았습니다.



이렇게 지지부진한 시간이 계속되는 동안 프랑스군은 전투와 질병으로 인해 전사자가 무려 700명에 이를 정도였습니다. 물론 청나라 군도 만만찮게 사망했지만, 원정군인 프랑스군 쪽이 훨씬 타격에 민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대만의 프랑스군은 아주 한참 뒤에나 겨우 어느정도 현지 청나라군에 타격을 줄 수 있었고, 그때는 이미 전쟁이 거의 끝날 즈음이라 대세에는 아무런 지장도 주지 못했습니다.



현지에서 죽은 700명 가량의 프랑스군은 공동 묘지에 묻혔는데 전쟁이 끝날 무렵, 프랑스의 레스페스(Lespès) 제독은 "묘지를 잘 보존해달라." 는 부탁을 했고, 유명전은 흔쾌히 이를 받아들여 그때까지 싸운 적수들의 무덤을 잘 보존했습니다. 그리고 이 무덤은 아직까지도 대만에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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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는 공동묘지에서 행사를 하는 프랑스 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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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에서의 성과로 프랑스가 후방의 걱정 때문에 흡사 아편전쟁 때처럼 내륙으로 운하를 타고 밀고 들어오는 것이 저지 되었고, 이제 남은 것은 육상에서의 싸움이 되었습니다. 통킹 삼각주 방면에서는 치열한 싸움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프랑스군이 여러모로 유리했습니다. 치열한 싸움이 펼쳐졌지만 대체적으로 꾸준히 1대 10, 심하면 1대 20까지의 교환비가 나오며 청나라군은 람(Lam), 케프(Kép), 추(Chu) 전투 등에서 연전연패 했습니다. 그렇다쳐도 전투는 상당히 격렬했는데, 특히 케프 전투에서는 격렬한 전투 후에 잔뜩 흥분한 상태였던 프랑스군은 사로잡은 중국인 포로를 마구잡이로 학살했고, 이 잔학 행위가 유럽 현지에서 널리 보도되며 "충격!" "경악!" 같은 상황이 되는 바람에 되는 일 없는 프랑스는 또 체면을 구겨야 했습니다.



공정을 위해 프랑스 편을 좀 들어보자면, 사실 이 전투 동안 포로가 아예 없기는 양측 모두 마찬가지였습니다. 프랑스 군인들은 프랑스군 대로 "적의 목을 베어오면 현상금을 주겠다." 는 식의, "코를 베어오면.." "귀를 모아오면..." "수급을 모아오면..." 같은 식의 동아시아에서는 익숙한 제도에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찌되었건 프랑스군은 우월한 전투력을 바탕으로 계속 이기고 있었고, 연전연패한 청군은 결국 베트남 국경지대까지 밀려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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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남관(鎭南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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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자재(馮子材)




이렇게 청군이 밀리던 상황에서 원군이 도착했는데, 원군을 이끌던 인물인 풍자재는 무려 67세의 노장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혈기만은 대단해서 프랑스군의 공세가 절정에 달하던 시점에 직접 칼을 뺴고 앞으로 나서서 "만일 적군이 한발자국이라도 관문 안에 들어온다면, 광동과 광서에 있을 부모들의 얼굴을 무슨 낯으로 보려는 것이냐?" 라고 소리치며 아예 돌격을 감행했고, 늙은 사령관이 앞장서서 돌격하는 모습을 보고 흥분과 사기가 극에 오른 청나라 장졸들도 따라 돌격하는 바람에, 거짓말처럼 프랑스군은 진남관 부근에서 패퇴하고 물러나고 맙니다.




이 패배는 프랑스 군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어, 실제 사망자 숫자 이상으로 정신적인 타격을 입혔습니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여러 일지에서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졌던 걸을 알 수 있습니다.  싸움에 참여했던 모리 병장(Maury)의 일지를 보면,



"밤은 매우 어두웠고, 병사들은 말없이 행진하고 있었다. 우리는 부끄럽고 화가 났다. 우리는 승리와 많은 친구들을 남겨두고 말았다. ....우리는 슬픔과 침묵과 상실의 쓰라림에 시달리면서 방해받지 않고 동당(Dong Dang)에 도착했다. 스프를 마시고 야전병원에서 잤는데, 우리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고 아침에 커피 한잔만 겨우 마셨기에 배가 고프고 괴로웠다. 굉장히 피곤했지만, 그날 밤은 정말로 괴로웠다. 내 영혼은 그날의 기억, 우리의 불행과 싸움과 환상에 시달렸다."




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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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그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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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빙게르




이 정도로 병사들의 사기가 눈에 띄게 떨어지는게 보이자, 프랑스군은 갑자기 비관적인 태도로 돌변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사령관이던 네그리에(Négrier)가 청나라 진지를 둘러보다가 총상을 입고 드러눕기까지 했고, 대신 지휘권을 받은 에르빙게르(Herbinger)는 프랑스 - 러시아 전쟁에서 전략가로 명성을 날렸지만 이때는 말라리아 증상이 있었던 탓인지 "정신이 오락가락" 했습니다.




여기에 진남관에서의 전투가 있기 하루전, 남서쪽인 푸 람 타오 지역에서 프랑스-알제리 군대가 유영복의 흑기군과 맞딱뜨렸고, 겁을 집어먹은 프랑스군은 제대로 교전을 하지도 않고 수십여명의 사상자를 남기고 달아났습니다. 여러 정황을 봤을떄 이건 우연의 일치지만, 이 소식을 전해들은 프랑스군은 "후방에 중국 군대가 집결하고 있다. 이대로 있으면 우리 모두는 다 죽는다. 어서 달아나야 한다." 고 마음 먹게 됩니다.




에르빙게르는 공포에 시달려 "이대로 있다간 청나라 병사들에게 다 죽는다. 청군이 추격해올거다. 짐꾼들도 다 도망쳤다. 달아나는것 밖에 방법이 없다." 는 판단을 내려, 당시 프랑스군이 점령하고 있던 중요 기지 랑손을 버리고 달아나야 한다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이에 몇몇 장교들이 "말도 안되는 일이다." 라며 반발했지만, 에르빙게르는 모든 반발을 무시하고 '추' 지역까지 달아났습니다. 



심지어 얼마나 급하게 마음을 먹었는지, 프랑스군은 "시간 끌면 청군이 몰려와 우릴 다 포위해서 죽일거다" 라고 믿고 거의 모든 보급품도 다 내버려두고 떠났습니다. 말 그대로 몸만 가지고 달아나는 줄행랑이었던 겁니다. 전부대가 멘탈이 나가버린 상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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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공포에 시달리며 황급히 물러나는 프랑스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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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군의 퇴각루트.




추 지역까지 프랑스군이 퇴각한 시점에서 프랑스군은 보급품도 거의 다 잃어버렸고, 완전히 지치고 사기가 바닥에 떨어져 도저히 전투 지속이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한편, 프랑스군이 갑자기 퇴각한다는 말을 들은 풍자재는 서둘러 랑손으로 달려왔는데, 보급품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다만 청나라 군도 타격이 적지 않나 수습하는데 시간이 걸렸기에, 프랑스군이 걱정하는 맹추격 후 포위 같은 일은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군은 랑손에서 실제 전투도 없었는데도 환상속의 적에 대한 공포로 달아나는 추태를 보였고, 실질적인 전력만 놓고 보면 아직 충분히 해볼만 했지만 사기는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져버린 참이었습니다. 사태가 좀 진정되고도 자신들의 추태에 엄청난 충격을 받은 프랑스 지휘부는 본국에 조심스럽게 "패전 가능성이 있다." 는 연락을 보냈고, 당연히 프랑스 정계는 뒤집혀졌습니다.




이에 프랑스에서는 "이제 전쟁은 지긋지긋하다."는  여론이 크게 들끓었고, 급기야 당시 수상이던 페리 내각 총사퇴, 영원히 정계 은퇴라는 상황으로 이어졌습니다.




전쟁을 그만하고 싶은 프랑스는 협상을 제의했고, 다시 펼쳐진 협상 테이블에서 이제 승자의 입장으로 앉아 있을 수 있는건 청나라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청나라는 프랑스에 대해, 이전에 맺었던 '간명조약' 을 그대로 하자는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이에 프랑스가 오히려 깜짝 놀랐습니다. 간명조약은 전쟁 하기 이전, 프랑스가 청나라보다 우위에 있을때 맺었던 조약인데, 프랑스가 사실상 패전국이 된 지금 이 시점에서 그 조약을 그대로 내걸었으니 말입니다.




기실 청나라 조정은 대외사정에 밝지도 못했고, 설사 대외 사정을 좀 들었다쳐도 국제정치에 발을 맞추기보다는 어디까지나 국내의 파당 경쟁이 가장 우선시 되었습니다. 이미 전쟁이 끝나기 직전부터 화친파가 세력을 잡아 다른 의견을 모조리 무시하고, "어쩄든 일단 얼른 끝내고 보자." 는 식이었습니다.



또한 청나라의 협상 방식은 이홍장이 하면서, 결정은 베이징의 정부에서 다 하고, 세부 내용은 청나라에서 일하던 영국인 외교관 로버트 하트(Robert Hart)가 다 하는 괴상한 형태였습니다. 실무 협상을 하러 나왔는데, 그 협상장에 나온 이홍장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완성된 문서에 대표로 서명하는 일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현지에서 예상 밖의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능한 조정과 낙후된 체제로 인한 행정으로 말미암아 청나라는 사실상 승리하고도 아무것도 얻는게 없었고, 프랑스는 사실상 패전하고도 전쟁을 하기 전과 똑같은 조건이 되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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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원





아편전쟁이 중국인에게 충격을 준 전쟁이라고 많이들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세계가 중국을 바라보는 시선" 에 큰 변화를 주었다고 하면 모를까, 아편전쟁의 '정신적' 타격은 생각보다는 제한적이었다는 시각들이 많습니다. 어쨌거나 '외이 오랑캐' 가 '중화' 를 침입하는건 역사상 그렇게 특별한 일도 아니었으니 말입니다.



오히려 진정으로 큰 정신적 타격을 입힌 것은 바로 '청일전쟁' 이라는 말이 있는데, 실제로 아편전쟁 이후로도 근근이 이어지던 청나라는 청일전쟁 이후로 숨가쁠 정도로 순식간에 무너져내렸고 청일전쟁 이후 중국의 근현대사도 그 이전보다 훨씬 숨가쁘게 발전했습니다. 잘 모르던 서양 오랑캐들이야 그러려니 하는데, 어디까지나 자신들 문명의 수혜자로 여긴 일본에게, 그것도 똑같이 시행하던 근대화 정책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밀려버린건, 아무리 보수적인 시각의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뭔가 심하게 잘못되고 있는것 같다.'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니까요.




청불전쟁은 시기적으로나, 정신적인 타격으로나, 당대 중국인들에게 그 중간쯩메 해당하는 의미를 주었습니다. 분명히 생각보다 싸우긴 잘 싸웠는데, 말도 안되는 이유로 오히려 굴욕을 당하며 국가는 이익을 전혀 보존하지 못했고, 그렇다면 이것은 단순히 힘이 약하니까 더 쎄지면 된다, 이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더 근원적인 부분에 문제가 있고, 그 근원적인 문제란 바로 '체제' 에 있다... 라고 하는 사고까지 이를 수 밖에 없으니 말입니다.



당시 홍콩에서 공부를 하던 쑨원은 훗날 이때의 심경에 대해, 자신의 미래에 있어 청불전쟁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고백했습니다.



"나는 을유년(광서 11년, 1885년) 중불전쟁 때부터 청조 정부를 타도하고, 민국을 건설하고자 결의했다. 그 후, 학당을 혁명을 고취하는 기지로 삼고, 의술을 빌려 사회에 이를 미치는 매개로 삼았다."

 


여담으로 이 청불전쟁은 한국의 역사에 있어서도 생각보다 아주 큰 영향이 있습니다. 청불전쟁이 펼쳐지자, 조선에 주둔한 청나라 군을 베트남으로 이동시켜 프랑스에 맞서게 할것이라는 생각에 일본은 자신들이 지원하던 친일파 정객들을 지원해서 바로 '갑신정변' 을 일으켰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지금 베트남에서 국운을 걸고 전투가 펼쳐지고 있고 심지어 제법 승기까지 잡아가는데, 정상적인 지도층이라면 거기에 전념해서 최대한 이득을 얻어내려 할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청나라 지도층은 "아 이런거 대충 그냥 돈만 덜나가면 아무 조건이라도 좋으니까 도장찍고 수습하고 끝내자" 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일본과 갑신정변 주역들이 생각하던 '베트남 문제만으로도 벅차 조선에 개입하지 못하는 청군' 같은 일은 전혀 없이 1,500명의 압도적인 물량으로 수수깡 같은 개화파 인사들의 세력을 꺾어버리는 결과가 됩니다. 오죽 황당했으면 개화파 인사들의 배후에서 사실상 일을 조종하던 다케조에는 "속았다!" 고 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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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우사카 호노카
19/02/12 05:11
수정 아이콘
마지막에 스노우볼이 갑신정변으로 구르는군요
잘 읽었습니다
뒹굴뒹굴
19/02/12 08:18
수정 아이콘
역시 이기고 삽질하면 청불전쟁이..
파핀폐인
19/02/12 09:23
수정 아이콘
이겼는데..?졌어?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서쪽으로가자
19/02/12 09:27
수정 아이콘
재미있게 잘읽었습니다.

결국 스토리는 지난 번 글처럼 되어버리는군요 -_-!
Lord Be Goja
19/02/12 09:28
수정 아이콘
(수정됨) 조선말기의 동학운동과 진압하는 과정을 봐도 낡은 체제가 나라에 얼마나 큰 재앙을 가져오는지 알수 있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때는 상대가 안좋았다,우리가 마침 주전력이 해체된상태였다고 할수 있지만 몇번이나 좋게 끝낼수있던 사태를 한양진군을 하게 만들고 그걸 정부역량으로 못막아 외세에 손을 벌리는...
아버지가 구식군대 수만을 늘리고 아들이 신식부대와 기관총을 도입하면 뭐하나요.탐관오리하나의 처리조차 못하고 조총으로 무장한 농민군조차 어쩌지 못하는 체제인데...
유닛 공방업을 해도 다루는 사람이 발컨이면 무너지는건 어쩔수없는겁니다.
브라운
19/02/12 09:29
수정 아이콘
정말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당시 동양이 얼마나 국제적인 조약 같은것에 무지했는지 잘 알겠네요.
복슬이남친동동이
19/02/12 10:14
수정 아이콘
이번에 설 연휴 겸해서 베트남 다낭에 다녀왔는데, 바나힐이라고 유명한 관광지가 하나 있더군요. 프랑스인들이 피서하려고 높은 구릉에다가 만들어 놓은 곳이라고.. 가이드 같은거 신청 하나도 안 하고 2인 자유여행이었어서 역사설명 같은건 전혀 못 들었지만, 기분이 참 묘했습니다. 이 글에서 서술된 두 주체가 아니고 그 사이에 낀 사람 입장에서 보자니 더욱 묘해지네요
만주변호사
19/02/12 10:32
수정 아이콘
저 막장시기에도 칼빼들고 뛰쳐나가는 67세 노익장이 등장하는거 보면 역시 대륙의 기상이네요...

청나라.. 이게 나라냐..ㅠㅠㅠ
19/02/12 11:18
수정 아이콘
적당히싸우고도 결말이망했다는게 더충격
솔로14년차
19/02/12 11:33
수정 아이콘
19세기 20세기 동아시아사를 알면 알수록, 서구열강과 동아시아 국가간의 전력차가 기존의 이미지에 비해서 상당히 작다는 걸 느낍니다.
서구열강이 쎈건 명확한데, 지구 반대편에 병력을 보내서 침략을 할 정도로 수준차가 났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사실 그래서 1차 대항해시대 때를 겪고도 국가들이 대강 유지됐고, 2차때도 밀렸다지만 결국 서구열강이 아시아를 차지하는데는 실패했죠.
카바라스
19/02/12 14:15
수정 아이콘
사실 당시 청나라는 한창 양무운동중이었고 청일전쟁 직전에는 전세계 해군력 7위로 여겨질 정도였죠. 물론 무능한 수뇌부 때문에 한수 아래로 보였던 일본한테도 발렸지만..
19/02/12 11:38
수정 아이콘
누가누가 더 삽질하나...
강가딘
19/02/12 13:14
수정 아이콘
역만없이라지만 만약 병인양요에서 프랑스군이 한양을 점령한후 베트남처럼 식민지로 삼을러고 했으면 청나라에서 어떻게 했을지 궁금하군요
카바라스
19/02/12 14:11
수정 아이콘
용의전쟁 1885가 이시기를 다룬 영화네요
새강이
19/02/12 18:24
수정 아이콘
확실히 동양에는 어느정도 체제가 있는 문명이 있어서 아메리카나 아프리카만큼 털리지는 않았네요
메가트롤
19/02/21 18:17
수정 아이콘
늦었지만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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