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는 대일수출 잔여육 설에 대해 다뤘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그와 함께 양대 '썰'로 군림하던 탄광 썰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왜 삼겹살일까?'라는 질문에 최종적인 답을 내 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이학각론 #1, 한국인이 사랑한 삼겹살, 삼겹살의 역사 (하편)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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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 잔여육 설이 나오기 전까지는 탄광에서 일하던 광부들이 ‘기름으로 탄가루를 씻어내던’ 것에서 삼겹살 문화가 유래했다는 설이 많은 인기를 얻었었다. 그 당시를 다룬 기사를 하나 살펴보자.
86년 석탄산업합리화 조치로 인해 탄광은 대부분 문을 닫았지만, 쇳가루 날리던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과, 분필가루 날리는 교실에서 일하던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삼겹살을 먹을 핑계로서 이 썰을 써먹곤 했다. 한국인의 삼겹살 사랑이 ‘몸속 탄가루를 씻으려는 절박한 의식’을 행하던 광부들에게서 시작됐다는 또 하나의 슬픈 역사. 과연 정말일까?
돼지고기 소비가 늘기 시작한 76년 당시, 그 당시의 소비자들이 어떤 부위를 선호했는지를 살펴본다면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시기 소비자의 부위별 선호가 어떠했는가에 대한 자료는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5년 후인 81년의 기사를 통해 당시 분위기를 추측해 볼 수는 있다. 81년 축협중앙회 육류 부위별 인기 조사 자료를 보면, 전체적으로 삼겹살이 살코기에 밀리고 있지만, 서울에서는 삼겹살의 인기가 살코기를 거의 따라잡은 것을 볼 수 있다24). 해롤드 맥기가 말한 ‘어리고 기름진 도시 고기와 기름기가 적고 질기지만 맛과 향이 강한 시골 고기’로 나뉘는 현상이 이 시기 대한민국에서도 나타났던 것이다25).
<표 2. 1981년 돼지고기 부위별 선호도 조사> 44.3% vs. 8.3%로 서울과 농촌의 삼겹살 선호도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삼겹살은 분명 ‘도시인의 고기’였다. 그리고 절반 가까운 소비자들은 굳이 특정 부위를 고르지 않았던 것 역시 재미있다. ‘아무거나’는 술집에만 있던 것이 아니었나보다. (단위 %)
결국 삼겹살이 기를 펴던 곳은 시골이 아닌 서울이었다. 광부들이 삼겹살을 즐겨 먹었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고, 기름이 탄가루를 씻어준다는 속설이 도시 노동자들의 선호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분명 있다. 하지만 삼겹살 유행이 시작된 것은 분명 농촌도 탄광도 아닌 대한민국 수도, 서울이었다.
왜 서울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시골에는 적고 서울에는 많은 어떤 존재 덕분이었다. 그랬다. 공장에서, 사무실에서 하루 일을 끝마친 이들이 하루의 피로를 씻기 위해 쌉쌀한 소주 한 잔에 안주를 곁들이던 곳, 바로 술집 겸 음식점 말이다. 당시의 모습이 경향신문에 인기리에 연재되던 소설, 『나신의 제단』에 잘 나타나 있다.
그들은 빽빽한 술집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연탄 냄새가 확 풍겼다. (중략)
"얘, 아주머니더러 돼지 삼겹살 한 접시와 뜨끈뜨끈한 순대 국물 좀 달라고 해라. 김치도 새것을 가져 오고 소주 한병, 알겠지?" (중략)
소녀는 연탄 화덕 위에다 은박지를 깐 두꺼운 쇠판을 얹어 놓았고 소주병과 잔을 탁자 위에 갖다 놓았다. 뜨끈뜨끈한 순대국물이 담긴 뚝배기도 가지고 왔다. 기철이 소주를 따르고 있는 사이 쇠판이 어느 정도 달구어졌는지 소녀는 돼지 삼겹살을 쇠판 위에 올려놓았다. 기름이 지글지글 탁탁 소리를 내며 탔다.26)
서울 등 대도시를 기반으로 냉동 삼겹살 구이집들이 우후죽순 생겨나 삼겹살의 유행을 이끌기 시작했다. 여기서 하나 더. 이들 식당은 소주를 팔던 술집 겸 음식점이었다. 삼겹살의 인기는 밥반찬이나 식사 메뉴가 아니라 소주 안주로서 시작되었다.27)
그런데 왜 하필 소주였을까? 원래 서민의 술은 단연코 막걸리였다. 하지만 정부가 발목을 잡았다. 1961년 말을 시작으로 막걸리의 쌀 함량 규제가 생기더니28), 급기야 1966년부터는 쌀은 한 톨도 못 쓰고 밀가루로만 막걸리를 빚어야 했다29). 평생 쌀막걸리를 먹어온 이들이 갑자기 만들어진 잡곡 섞인 막걸리나 밀막걸리에 입맛을 들이기란 쉽지 않았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걸리를 사랑하던 이들은 꿋꿋이 버텨 주었다.
하지만 정으로 참고 의리로 버티는 데도 한계가 있는 법. 74년에 밀가루 반, 보리 반이라는 정신줄 놓은 배합비가 나오더니, 2년 동안 레시피를 4번 바꿔대는 미친 짓까지 추가하는 데야 누가 버틸 수 있었겠는가.
이를 기점으로 사람들은 비싸지만 맛있는 생맥주나, ‘세상에서 가장 싸고 빠르게 취할 수 있는 방법’인 희석식 소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도시화로 인해 대도시로 이주한 노동자들의 손에 들린 것은 맛이 변해버린 막걸리가 아닌 값싸게 취할 수 있는 소주였다. 30)
<표 3. 막걸리 원료의 변화 양상> 61년 말부터 시작된 규제가 74~75년에 이르러서는 술이라도 취한 듯 정신없는 변덕을 부리기 시작한다. 77년 쌀막걸리가 살아나지만, 묵직한 밀막걸리에 익숙해져 있던 소비자들이 오히려 부드러운 쌀막걸리를 외면하면서 막걸리는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31)
이렇게 시작된 희석식 소주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60년대, 70년대, 80년대를 지나며 소주의 인기는 높아만 갔다. 이것이 70년대 후반에 시작된 돼지고기 소비 증가와 맞물리며, ‘가격대비 가장 알콜이 많이 든’ 소주에 ‘가격대비 가장 기름진 고기’인 삼겹살을 안주로 곁들여 먹는 대한민국 외식업 역사에 길이 남을 황금 콤비를 낳았다.
알콜 향에
메탄올도 좀 얹고32) 방향제와 합성감미료의 맛만 느껴지던 쓰디 쓴 소주였지만, 진하고 기름진 삼겹살과 함께라면 부드럽게 넘길 수 있었다. 삼겹살의 기름기가 거북하게 느껴질 때면 목젖을 꺾어 털어넣는 소주 한 잔으로 느끼함을 지워낼 수 있었다. 최고의 마리아주. 이것이 우리네 아버지들과 삼겹살의 즐겁고 행복한 첫 만남이었다.
경제 발전과 함께 도시화가 진행되고, 도시로 몰려든 노동자들은 하루의 피로를 씻어 줄 저렴한 술과 안주를 원했다. 하필 도시화가 진행되던 타이밍에 막걸리를 망가뜨려 소주를 국민 주류로 만들었던 우연, 수출을 위한다며 품질이 좋아져 양념 없이도 구워 먹을 수 있는 돼지가 시장에 풀리기 시작했던 우연이 만나 판을 깔았다. 그 판 위에서 ‘기름진 고기안주에 소주’가 나오는 것은 필연이었다.
그리고 1980년, 휴대용 가스레인지가 보급되며 이 필연은 날개를 달았다. 삼겹살은 숯불이나 연탄에 직화로 구워 봐야 기름이 떨어져 불쇼를 일으킬 뿐이었다. 어차피 불판 위에 알루미늄 호일 깔고 구워 먹을 것이라면 굳이 번거로운 숯불과 연탄이 필요하지 않았다. 저렴하고 빠르고 손쉽고 깨끗한 연료, 가스. 가스레인지라는 날개를 단 삼겹살은 돼지고기 구이의 왕좌를 향해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한국인의 삼겹살 사랑은 남녀노소를 따지지 않았고,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를 따지지 않았다. 1980년에 개업한 1세대 삼겹살집인 개성집의 성공 스토리를 들어보자.
개성집의 초고속 성장은 1970∼80년대 강남 개발과 궤를 같이한다. 유흥가와 가까워서인지 초창기 손님은 웨이터, 밤무대 악사, 연예인이 주를 이뤘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에도 통금이 풀리는 새벽 4시에 문을 열면 밀물처럼 손님이 몰려왔다. 1982년 통행금지 조치가 전면 해제되면서 사업은 날개를 달았다. 강남에서 가장 먼저 24시간 영업을 시작하자 나이트클럽을 찾는 젊은이들도 삼겹살 대열에 합류했기 때문이다.3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절의 삼겹살은 ‘회식용 고기’였다. 친구와, 동료와, 소주와 함께 먹는 고기였지, 집에서 가족과 함께 먹는 고기는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걸 어찌 ‘국민 고기’라 부를 수 있으랴.
삼겹살의 최종 진화를 완성했던 것은 바로 부위별 포장육 판매였다. 이전까지 고기는 오로지 정육점에서만 살 수 있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81년 9월부터 시작된 포장육 판매 덕분에, 소비자들은 슈퍼마켓이나 축협 등에서 손쉽게 스티로폼과 랩으로 포장된 ‘마트 고기’를 살 수 있게 되었다34). 밖에서 먹던 맛있는 고기를 가족에게도 먹이고 싶었던 아버지의 마음이 전해졌던 것이었을까. 81년 12월에 축협에서 조사한 돼지고기 포장육의 선호도를 보면 삼겹살이 32.7%로 1위, 갈비가 29.7%로 2위를 차지하고 있다. 삼겹살이 드디어 한국인이 가장 선호하는 돼지고기 부위 1위에 오른 것이다.35)
80년대 이전까지의 삼겹살은 술집에서 먹는 고기였고, 아버지가 월급봉투와 함께 집에 가져오던 신문지에 싸인 탐스러운 고기였다. 하지만 포장육이 등장한 이후의 삼겹살은 어머니가 슈퍼마켓에 가 가져오는 랩에 싸인 일상적인 고기가 되었다. 도시의 술집에서 태어난 도시의 기름진 고기 삼겹살이, 도시의 식량창고 마트에서 나와 도시의 삶터인 아파트 현관에 들어서던 그 순간. 삼겹살이 진정한 ‘국민 고기’로 등극하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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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23) 『조선일보』, 「박종인의 논픽션 스토리 - 난 막장 속 ‘산업戰士’... 탄광이 영원할 줄 알았다 (3)」, 2015.03.06
24) 『매일경제』, 「쇠고기등심 가장좋아한다」, 1981.04.24
25) Harold McGee, 『On Food and Cooking』, p.135
26) 김용성, 『나신의 제단』 160~161회. 『경향신문』, 1980.11.04.~05.
27) 『경향신문』, 「쇠고기값」, 1981.03.27. “돼지삼겹살은 반주로 마시는 소주와는 뗄수 없는 안주로 되어있다.”
28) 1961.12.30. 멥쌀 함량을 70% 이하로 제한.
29) 1966.08.28. 멥쌀 사용이 전면 금지됨.
30) 이상의 과정은 허정구, 『1970~80년대 막걸리 소비 퇴조에 관한 민속학적 연구』, 2011, 중앙대학교 석사학위청구논문에 잘 나타나 있다. 짧은 요약을 보고 싶다면 주영하, 『식탁 위의 한국사』, pp. 483-486을 참조할 것.
31) 허정구, ibid, p. 24 표6 발췌.
32) 농담처럼 적었지만 60년대 소주의 품질은 매우 조악해서, 실제로 메탄올이나 이소프로판올 등의 퓨젤 오일이 조금 들어 있었다. 당시 가장 품질이 좋았다던 진로 소주조차 0.2%의 퓨젤 오일을 포함하고 있던 판이니 무슨 말을 더 하랴. 『매일경제』, 1967.06.02.
물론 지금 우리가 먹는 소주에는 메탄올이 한 방울도 들어 있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33) 『세계일보』, 「삼겹살에 울고 웃고」, 2005.06.03.
34) 쇠고기에 한한다. 돼지고기 포장육 판매는 83년에 시작되었다. 단, 축협 등에서는 그 이전에도 소 돼지 모두 부위별 포장육 판매를 실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35) 『매일경제』, 「정육점 부당판매에 무관심한 소비자들」, 1981.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