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 보기
https://pgr21.com/?b=8&n=72594 청색 작전 (0) - 프리뷰
https://pgr21.com/?b=8&n=72654 청색 작전 (1) - 하복부 강타
https://pgr21.com/?b=8&n=72758 청색 작전 (2) - 패닉
https://pgr21.com/?b=8&n=72865 청색 작전 (3) - 캅카스 유린
https://pgr21.com/?b=8&n=72993 청색 작전 (4) - 체첸의 비극
https://pgr21.com/?b=8&n=73183 청색 작전 (5) - 지옥문 개방
https://pgr21.com/?b=8&n=73284 청색 작전 (6) - 요참형 집행
https://pgr21.com/?b=8&n=73363 청색 작전 (7) - 맞받아 치다
Previously on Fall Blau...
위기에 빠진 독일군을 구출하기 위해 히틀러는 폰 만슈타인에게 돈 집단군을 급조하여 반격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애시당초부터 작전이 한참 잘못된 것이, 일단 구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포위망 내의 독일군이 버텨 줘야 했고, 또 구원군이 소련군을 분쇄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공중보급으로 제6군을 버티게 해 보이겠다는 괴링의 호언장담은 말 그대로 호언장담으로 끝났고, 하필 비슷한 시기에 개시된 소련군의 토성 작전으로 인한 파쇄공격성 진격에 좌익이 무너지면서 독일군은 우익 단독 진격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구원 작전은 실패했고,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은 이제 종말만 남았습니다. 반면에 토성 작전의 스케일을 줄인 소토성 작전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소련군의 차례는 계속되었습니다.
요즘만치 필력이라는 것을 질투해 본 적이 없군요. 신불해님의 글은 언제 봐도, 어느 글을 봐도 늘 명문입니다만...
겨울폭풍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고, 이제 제6군에게 남은 희망 따위는 없었습니다. 앞 글에서 언급했듯이 하필 그나마 가장 가까운 비행장이었던 타친스키 비행장이 문자 그대로 박살이 나 버리고 비행기를 추가로 잃은 건 덤이라서 더 이상 어떠한 보급을 할 여력 자체가 불가능했죠. 이렇게 되자 경각에 달한 것은 바로 캅카스에 깊숙히 발을 들여놓고 있던 제1기갑군이었습니다. 철도망 지도를 다시 한 번 보도록 합시다. (활용하기 전에는 몰랐는데 이게 또 전가의 보도가 되네요. 물론 철도망만 보급로인 건 아니긴 합니다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게 지도가 2017년 지도라 당시에는 없던 철로까지 나와 있긴 한데 최근에 주문한 당시 전장 지도책과 대조하여 확인 결과 큰 차이가 없어서 - 피아티고르스크에서 동북쪽으로 가다가 갑자기 방향을 서북쪽으로 홱 트는 구간이 있는데 이 서북쪽으로 가는 구간'만' 전쟁 이후 지어진 노선이며, 당시에는 그 방향을 트는 지점이 종점이었습니다 - 그냥 넘어갑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만, 캅카스의 병력은 전선을 그로즈니 인근에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머나먼 남쪽 끝이었죠. 근데 이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도상 서북쪽 끄트머리에 있는 로스토프로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최대한 빨리 철수해야 했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제6군이 말아먹은 병력이 33만 가량인데(뭐 이 시점에서는 아직 포위망에서 항복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고는 합니다만), 이게 어디 한둘이어야 말이죠. 이런 손실은 결코 빠르게 메꿔지지 않습니다.
1941년 12월 1일, 그러니까 바르바로사 작전이 종결될 시기쯤에 독일군 및 그 동맹군의 총 병력이 340만 가량이었는데(데이비드 글랜츠, 독소전쟁사), 그로부터 약 1년 후인 1942년 11월 1일에는 350만 가량으로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정확히 석 달 후인 1943년 2월 3일에 총합이 350만에서 300만으로, 무려 병력의 1/7이 사라져 버린 거죠. 반면 소련군의 병력은 일선 병력만 6백만을 넘어가는 어마어마한 수의 병력이었습니다(추정하는 총 병력은 무려 950만 명에 육박합니다). 가뜩이나 병력상으로도 밀리고 있는데 병력의 1/7이 문자 그대로 "소멸"되었다는 것은, 그냥 쉽게 말하면 대재앙이었다는 거죠. 그렇게 남부 전선 전체에 엄청난 구멍이 뻥 뚫렸으니 소련군이 로스토프를 점령하고 캅카스의 독일군 전체를 가둬버리겠다고 큰소리친 것도 결코 허언은 아니었던 셈입니다.
겨울폭풍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폰 만슈타인에게는 제1기갑군이 철수를 완료할 때까지 로스토프나도누(이하 로스토프)를 어떻게든 사수해야 하는, 정말로 어려운 임무가 떨어진 셈입니다. 왜 로스토프를 그토록 강조하느냐? 다시 지도를 보시면 아주 자연스럽게 해답이 나옵니다. 제1기갑군 전체에 보급물자를 수송할 수 있는 능력이 되는 중요 보급기지로 활용 가능한 도시가 로스토프뿐이었던 거죠. 선택지는 없었습니다. B집단군 전체가 무너져내린 이상 A집단군은 작전이고 유전이고 뭐고 다 포기하고 철수하지 않으면 섬멸당할 판이었으니... 그러나, 그들 앞에 놓인 길은 무려 800 km에 육박하는 거리였습니다. 작전이 개시될 당시 출발지점이었던 하리코프에서 스탈린그라드에 이르는 진격거리와 거의 똑같은 거리. 병력상에 엄청난 구멍이 뚫린 이 시점에서 보급 상황을 고려했을 때 로스토프는 함락 자체가 시간 문제였고, 더구나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소련군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유료화되어서 링크를 못 거는 게 몹시 아쉬운데, 그 예전에 최훈의 삼국전투기에서 이런 말이 나온 바가 있습니다. 퇴각 작전이야말로 정말로 어려운 거라구요. 그 이유는, 우선 퇴각이 결행될 경우 사기라는 측면에서 아군의 사기는 낮고 적군의 사기는 높으며, 더 큰 문제는 어떠한 전과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병력을 최대한 온존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세가 오른 적군의 추격은 그야말로 덤이죠. 더욱더 큰 문제는 그 얼마 안 되는 독일군의 주요 기갑 부대 중 하나가 바로 이 제1기갑군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필사의 탈출이 시작된 거죠. 먹느냐 먹히느냐, 혹은 퇴로가 끊기느냐 마느냐... 독일군 입장에서 가장 어려운 난이도의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가 장광설이 되었으니 전장 지도를 봅시다. 지금까지는 각 지역별로 쭉 서술하고 시계바늘을 돌려서 다른 지역을 서술하는 방식으로 했는데, 이번에는 좀 여기저기 널을 뛰어야겠군요.
로스토프 북쪽에서 드디어 소련군이 진격의 나팔을 불었습니다. 사악한 파시스트 침략자들에게 줄 신년 선물로 이보다 더 적절한 것이 있었을까요? 가뜩이나 치명타에 치명타를 더하여 입은 추축국군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무너져내렸습니다. 북쪽의 이탈리아군이야 더 이야기하면 입, 아니 키보드 두드리는 손만 아프니 패스하도록 하고, 지도상에 나와 있는 독일군은 프레터-피코 분견군이라고 되어 있군요. (장군 이름이 프레터-피코입니다. 막시밀리안 프레터-피코.) 이 병력을 박살내기 위해 발진하는 소련군의 병력은 총 4개 군이었는데, 이 중 소련군 제6군이 이탈리아군을, 제1근위군과 제3근위군 및 제5전차군이 이 프레터-피코 분견군과 그 바로 아래에 있던 홀리트 분견군을 공격했고, 제5전차군 아래에 있는 제5충격군은 독일의 두 분견군이 소속된 제4기갑군이 아니라 제1기갑군을 공격하는 부대였습니다.
자캅카스 방면, 그러니까 최전선에서의 공격입니다. 1 TA(제1기갑군) 옆의 파란색 러시아 어로 된 것은 특임대. 그리고 그 밑으로 3개의 전차사단과 3개의 보병사단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퇴각하면서 버텨내야 하는 소련군의 규모 역시 무려 4개의 군에 추가로 2개의 기병군단(그것도 근위기병군단).
그리고 이게 펀치를 날릴 때 측면에서만 날리면 좀 섭하죠. 일 주일쯤 지나서 이번에는 남쪽 측면을 방어하고 있던 제17군의 밑단으로부터 강력한 어퍼컷이 날아들었습니다. 더구나 더욱더 치명적이었던 것은, 겉보기에는 제1기갑군보다 사단 수가 많아 보일지는 몰라도 이들의 주력군은 바로 추축국군의 약체인 루마니아 군이었던 것. 특기할 사항인지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당시 슬로바키아에서 파견한 1개 규모의 산악사단도 바로 여기에서 싸우고 있었습니다(슬로바키아 제1산악사단). 듣기로는 전투력이라는 측면에 있어서 이들에 대한 평가는 확실히 나은 편이었다는군요. 슬로바키아가 워낙 작아서 그렇지...
거의 동시에 남쪽의 측면이 정리되자마자 일명 오스트로고시스크-로소쉬 공세가 펼쳐지면서(1월 13일 공격 개시), 이탈리아 제8군의 잔존 부대는 완전히 박살, 헝가리 제2군 역시 붕괴되었습니다. 그야말로 남부 전선이 총체적으로 붕괴하고 있었죠.
붉은 군대로서도 상당히 경이로울 정도의 진격 속도라고 해야겠습니다. 물론 독일군이 아둥바둥하지 않고 최대한 빨리 탈출하기 위해 뒤로 돌격 중인 건 감안해야겠습니다만, 단 2주 만에 전선을 무려 200 km나 뒤로 밀어버렸습니다. 경부선을 따라 서울에서 대전을 넘어 영동까지의 거리가 200 km 정도 되니 어마어마한 속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림에서 보시다시피 뭔가 하나 링크가 깨져 있긴 한데 원본 지도와 비교해 봐도 뭐가 깨졌는지를 잘 모르겠군요. 일단 그대로 지도를 쓰는 이유기도 합니다. 그보다, 저 북쪽의 로스토프를 향해서 마치 칼을 들이대는 것처럼 삐죽 튀어나온 돌출부가 보이시는지요. 저 지역을 방어하고 있던 것은 제4기갑군이었고, 그 남쪽을 방어하고 있던 게 제1기갑군이었는데, 제1기갑군은 엄청난 길이의 전선을 사단 하나가 달랑 방어하고 있었을 정도로 전선이 신장되어서 답이 안 나오는 상황이었고 그 약점을 제대로 푹 찌르고 들어간 게 소련군의 제2근위군이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남서 전선군과 남부 전선군 역시 독일군을 밀어붙이면서, 로스토프에서 불과 100 km 떨어진 지점에 붉은 군대가 들이닥쳤습니다.
다시 일 주일이 지난 후의 전선입니다. 보시다시피 북쪽에서는 벨고로드-하리코프 측선 코앞까지 붉은 군대가 당도했고, 동맹군이 섬멸되었으며...
남부 집단군의 중부에서도 홀리트 분견군을 강타하고 독일군을 밀어버렸습니다.
남쪽에서도 캅카스의 대부분을 탈환하고 캅카스 최대의 도시 크라스노다르를 노리며 무려 7개 군이 독일군 제17군과 제1기갑군을 밀어붙였으며, 한편으로 소련군 제9군과 제58군이 독일군 제17군과 제1기갑군 사이를 끊기 위해 강력한 공세를 펼쳤습니다. 보시다시피 로스토프가 가시권에 들어왔죠. 이 제51군 휘하의 제3근위기계화군단(구 제4기계화군단)의 진격은 독일군이 기적의 병기라고 부르던 카드인 티거 전차에 간신히 가로막혔습니다. 지도를 보시면 CC라고 되어 있는데, 러시아 어라서 저걸 영어로 바꾸면 SS. 그 유명한 슈츠슈타펠 소속 사단이 로스토프를 끝까지 이 악물고 방어하고 있었던 겁니다. 해당 사단은 비킹(Wiking) 사단으로, 1942년 11월 9일에 기갑척탄병사단이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이들이 기갑사단으로 개칭된 것은 1943년 10월.
하여간 이들은 헤르만 호트의 지휘 아래(호트가 SS사단장이었다는 건 아니고, 제4기갑군이 호트 담당이었습니다. 당시 SS사단장은 펠릭스 슈타이너) 놀랄 만한 방어력을 선보였고, 그 틈에 제1기갑군의 사령부 및 1개 기갑 사단과 1개 보병 사단, 그리고 2개 보안 사단이 퇴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히틀러의 실책은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자고로 지장이라 함은, 물러날 때에 확실히 물러나고 뒤를 돌아보지 않으며, 헛된 망상을 품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나 히틀러는 이렇게 전 전선이 박살나서 더 이상 지도를 보기도 지겨울 정도로 너덜너덜해져 가는 상황에서도 차후에 캅카스로 향할 공세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그놈의 망상이 도진 거죠. 그래서 이 캅카스 지역의 반도, 정확히는 크라스노다르 서쪽의 쿠반 반도에 집단군 급의(!!!!) 병력을 남겨 두기를 원했습니다. 유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이고, 더욱 크게는 전쟁을 지속할 여력 자체가 빠르게 떨어지고 있는 현실을 외면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1군의 탈출은 영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1기갑군의 일부 병력이 쿠반 반도에 남은 건 그런 이유입니다.
결국 2월 4일에 어떻게든 제1기갑군의 병력은 간신히 철수했고 보안사단 등이 남아 로스토프에서 최후의 저항을 벌였지만, 일부 병력은 쿠반 반도에서 오래 발이 묶였습니다.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좀 나중에 해야 할 것 같군요.
마침내 붉은 해일은 소련 제3의 도시인 하리코프까지 들이닥쳤고, 하리코프는 그 해방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같은 시기 홀리트 분견군을 포함한 독일군이 마침내 남부 돌출부에서 퇴각했습니다. 이번 글이 좀 정신이 없죠. 특히 지도들이... 그만큼 소련군이 해일과 같이 전 남부 전선에서 밀어붙였다는 이야기고, 독일군의 피해가 그만큼 컸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보통 말아먹은 게 아니라는 말이죠.
그리고 마침내 로스토프가 2월 14일에 해방되었습니다. 어찌나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에서 크게 격돌했는지 나중에 이 도시가 복구되는 데 10년이 넘게 걸렸다더군요. 아무튼 비록 남부 집단군 전체를 박살내 버린다는 소련군의 작전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전 전선에서 붉은 해일이 밀어닥치고 있었습니다. 독일군은 12월 이후로 엄청난 거리를 뒤로 밀려나야 했고, 기껏 점령한 캅카스를 모조리 내줘야 했으며, 고질적인 연료와 자원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었습니다.
모두들 그렇게 소련군의 턴이 계속되는 줄 알았습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