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국민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집에 가던 길이었죠. 당시 저는 약 1km 남짓한 길을 걸어서 등하교했습니다. 등하굣길에 철도건널목과 찻길 하나씩을 건너야 했으니 요즘 학부모들 같으면 애들을 보내놓고도 노심초사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특별히 멀거나 위험하다는 생각 없이 잘 다녔던 것 같습니다.
집이 한 300m나 남았을까, 골목길을 가던 중 목소리가 들립니다.
"꼬마야. 안경이네. 눈이 안 좋은가 보지?"
한 30대 됐을까 싶은 아저씹니다. 심하게 허름하지도 말쑥하지도 않게 입은, 그냥 평범한 낯선 아저씨. 당시에는 또래에 안경 낀 아이는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까, 제가 좀 특이한 취급을 받는 일은 익숙했습니다.
네. 눈 안 좋아요. 대답했더니 다가와서는 이것저것 묻습니다. 어디까지 보이는지, 저기 멀리 슈퍼 간판에 '담배' 글씨가 보이는지, 몇 살인지, 몇 학년인지, 학교는 잘 다니고 있는지, 공부는 열심히 하는지, 뭐 그런 시시콜콜한 것들을 물으면서 친한 척을 합니다. 저는 일단 답을 해 주면서도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왜 나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지? 낯선 사람이 말 걸면 따라가지 말라 그랬는데, 나쁜 사람인가?
그럴 즈음 갑자기 아저씨가 묻습니다.
"너희 반에 철수 있니?"
아뇨. 없는데요.
"그래? 민수는?"
민수도 없어요.
"그러면 영철이는?"
없어요.
"상민이는?"
가장 흔해 보이는 이름들을 하나하나 주워섬기던 그가, 상민이가 있다는 내 대답을 듣자마자 말합니다.
"내가 상민이 아빠다"
이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린지. 나는 이때 이 사람이 그 책에서만 보고 말로만 듣던 유괴범이구나.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초딩..아니 국딩이라고 아무리 무시해도 분수가 있지, 그런 정도로 넘어갈 거로 생각했나 싶어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일단 성인 남자와 일대일로 마주 보고 있는 상황에서 열 살도 안 된 아이가 할 수 있는 게 뭐 있을 리가 있나요. 대충 이것저것 이야기하면서 장단을 맞춰 주었습니다. 상민이네 집 이야기도 하는데, 내가 알고 있는 상민이네 집 위치와 전혀 다른 곳으로 이야기하네요. 상민이네 집에는 이미 한 번 놀러 간 적이 있었거든요.
살짝 긴장됐지만, 오히려 엄청 무섭거나 어떻게 할 줄 모르겠다는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안전하게 도망갈 각이 나오면 바로 튈 준비를 하면서 겉으로는 완전히 넘어간 것처럼 연기했지요. 제가 살면서 큰 위기 상황에 차분하게 멘탈을 잡고 대처하면서 기막히게 극복했던 적이 몇 번 있었는데, 그 첫 번째 사건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아저씨가 별 내용없는 이야기를 좀 하다가 드디어 기다리고 있던 바로 그 대사를 칩니다.
"아저씨가 맛있는 거 사줄 테니 같이 가자."
책에 나오는, 여기저기서 마르고 닳도록 듣던 유괴범의 전형적인 대사입니다. 뭐 이렇게 전형적인가 싶기도 했는데, 어쨌든 정체를 저렇게 대놓고 밝혀 주니 더 확실해지는 순간입니다. 알겠다고 했더니 인근에 주차해 놓은 오토바이 쪽으로 가서 시동을 걸려는 것 같습니다.
나에게서 약간 멀어지면서 잠시 시야에서 사라진 그 순간, 전력 질주로 도망가기 시작했습니다. 학교 운동회에서야 4~5등밖에 못했지만, 맨날 다니는 골목길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골목길을 꺾어 꺾어 조금만 뛰면 집이 멀지 않았으니까요. 뒤에서 "어..! 어..! 안되는데!!" 하는 소리가 들리지만 무시하고 맹렬히 뛰었습니다. 사실 오토바이도 있는 마당에 성인 남성이 꼬마 하나 못 잡을 건 아니었겠지만, 백주대낮에 소란을 감수하고 추격, 납치하는 것까지는 포기한 듯, 쫓아오는 소리는 더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집까지 쉬지 않고 달려서, 엘리베이터도 없는 아파트 4층을 뛰어올라 우리 집까지 한달음에 달려 들어갔습니다. 들어가자마자 엄마를 찾았는데, 엄마는 빨래 중이었습니다.
"엄마, 나 방금 유괴당할 뻔했는데 도망왔다!!"
숨을 몰아쉬며 두서없이 이야기를 마구 쏟아내는데, 엄마는 얘가 뭔 이상한 소리를 하는가 싶어서 멀뚱히 듣다가는, 뭐 또 쓸데없이 애들끼리 장난하는 이야기를 하는가 보다 판단합니다. 그래그래 잘했다 잘했어. 인제 들어가서 좀 씻고 숙제하고 있어라.
아니 엄마 아니 그게 아니고...
그러지 않아도 흥분한 상황에, 조리 있게 상황을 잘 설명할 능력은 당연히 없었고, 사건은 그저 흐지부지되고 말았습니다. 살면서 만나기 어려운 큰 위기를 뛰어난 기지를 발휘해 벗어난 사건이었으므로 당연히 상응하는 칭찬과 적절한 사후수습을 바랐습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별 것 아닌 취급을 받고 나니 머쓱하고 억울했죠. 지금 와서 생각하니, 바로 경찰에 신고하고 그자의 인상착의, 만난 장소, 오토바이가 있던 곳 등을 알렸어야 했을 것 같은데,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 같네요.
그 머쓱함을 달래주고 30년 전 나에게 우쭈쭈를 선물해주고자 이 글을 써 봅니다. 전혀 부티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을 나를 왜 대상으로 삼았는지는 아직 미스테리입니다. 요즘 유괴범들이야 저렇게 어리숙하게 범행을 하진 않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