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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7/03/16 01:42:20
Name 신불해
Subject [일반] 『삼국지』에서도 손꼽을만한, 263년 촉나라 정벌전


서양 전투사에 대한 소개글을 보면 고대의 전투에서도 여러 포진과 움직임에 대한 기록으로 인해 풍부하게 당시 상황을 고증하고 설명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반면에 고대 중국 전투의 경우는 추상적으로 몇만이 몇만과 싸워서 이겼다는 식으로 뭔가 아쉽고 미비하게 설명되는 경우가 많구요.


보통 '고대 중국 전쟁' 이라고 하면 누구나 가장 먼저 떠올릴 장면은 어린 시절 소설 삼국지에서 본 온갖 현란한 싸움이지만, 실제 정사 삼국지 역시 그런 점은 피해갈 수 없으니만큼 정사로 알 수 있는 전투의 전개 과정은 추상적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당장 그 유명한 적벽대전 마저도 "뭔가 한바탕 크게 한 것 같기는 한데" 사서의 설명으로만 보면 모호하게 되었이는등...



그런데 이런 삼국시대의 전쟁, 전투 중에서도 흐름이 한눈에 보이는데다 그 공방이 '우아하다' 라고 개인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 전쟁, 전투가 있습니다. 


이 분야가 워낙에 파고드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뭐가 어쩐다고 감히 말하기도 무섭고 그냥 개인적으로 느끼는 감상입니다만..


말하고자 하는 전투는 바로 263년 위나라의 촉 정벌전, 즉 위촉 최후의 전투 입니다. 여러모로 과정이라던지 그 와중에 펼쳐진 공방의 수준이라던지 서로 맞물리는게 굉장히 수준 있지 않았나 싶네요. 물론 동서고금 모든 전투가 그렇듯이 그 와중에 삽질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실책으로 결국 무너지는 것도 그렇구요.



앞서 말했다시피 삼국지라는 이 분야가 워낙에 전문가들이 많다보니, 무슨 번데기 주름 잡으려고 쓰는 글이라기보다 관련 글이 여기에 올라온적은 없는 것 같아서 그냥 가볍게 대략적으로 쓰는 글이니까, 혹시 오류가 있어도 감안해주시기 바립니다. (가끔 삼국지 관련 글 쓸때마다 워낙에 아는 사람이 많아서 오히려 만화로 그리기 두려웠다는 이말년의 심정이 이해가 잘 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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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소의 전쟁 준비와 첫번째 기만책



천하 삼분의 세 나라 중 가장 강력한 위나라는 촉과 오를 상대해야 했는데, 당장 실제적으로 위를 괴롭히는 것은 촉이었습니다. 256년 등애에게 내린 조서를 보면,


 '역적 강유가 해마다 교활한 행동을 하여 백성들과 만족을 동요시켜 서쪽 땅은 편안할 수 없었다.'


라는 구절이 있는데, 그 이후에도 강유는 두 번이나 변경에서 등애와 교전을 펼칩니다. 물론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고 특히 두 번째였던 262년의 후화 전투에서는 제법 큰 피해를 받기까지 한듯 하지만, 피해를 입고 안입고 간에 변경에서 계속 적이 준동하는 것 자체가 여러모로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사마소는 내심 촉나라를 오나라보다 먼저 쳐서 없앨 계획을 가진채, 자신의 뜻을 따라줄 종회를 서장군, 가절도독관중제군사에 임명하고 청주, 서주, 연주, 예주, 형주, 양주 등 모든 주에 배를 만드라는 명령을 특별히 큰 전함을 따로 만들라는 주문까지 했습니다. 위나라가 배를 타고 칠 만한 나라는 물론 오나라 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사마소가 곧 오나라를 치는 큰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나라를 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던 게, 승상이었던 손침의 사망과 거기에 얽힌 혼란, 복양흥(?陽興)에 의한 포리당 건설 사업과 그 복양흥이 승상이 된 일 등으로 인해 굉장히 분위기가 불온했던 상황이라 "아, 오나라가 혼란하니 한번 큰 공격을 하려나 보다." 라고 생각하는 게 합리적인 판단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장대한 훼이크로, 오를 치는 척 하며 촉으로 진군하기 위한 계책이었습니다. 보통 정사 삼국지에서는 삼국지연의에서나 볼 법한 계략 같은건 찾아보기 힘든데, 이 작전은 굉장히 삼국지연의 같은 느낌이 물씬 납니다. 개인적으론 원소가 봉기의 계책으로 한복의 거점을 탈취한 건과 더불어 가장 삼국지연의스러운 장면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게 장장 일년간 오나라를 친다는 시늉을 하던 사마소는 꼬박 1년이 지난 263년 여름, 문무중신들을 모아놓고 갑자기 폭탄선언을 합니다. "우리는 오나라가 아닌 촉나라를 친다!"



사마소가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며 중신들에게 말했던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수춘 평정 이후 6년간 전쟁이 없었다. 이제 다시 군사를 일으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2. "그런데 오나라를 친다고 하면, 배를 만들어 강을 건너야 하는데 이러면 10만 군사를 동원해 백여일이 넘게 전투를 치뤄야 하고 또 그 군사를 지원하기 위해 천만명이 고생해야 한다. 그렇게 해도 막상 현지에 도착하면 북방인 출신 병사들은 역병에 고생할 것이다."


3. "촉을 먼저 치고 3년 정도 잘 준비한 뒤 파촉을 통해 수륙 양용으로 오나라를 치면 전투는 훨씬 쉬울 것이다."


4. "촉을 먼저 쳐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 이유고, 그러면 이제 촉나라의 상황을 보자. 촉의 군사는 대략 9만명 정도 된다. 이 중에 일부는 성도를 지켜야 하고, 다른 일부는 오나라와의 국경선 등 다른 곳에 배치되어야 하며, 막상 전투에 내놓을 수 있는 실제 전력은 딱 5만 정도다!"


5. "강유가 문제인데 강유는 답중에 있다. 대군을 분산시켜 그 강유를 답중에서 오도가도 못하게 묶어놓은 상태로 검각을 후두려패면 쉽게 함락 가능하다"


6. "유선이 멍청하기 때문에, 일단 변경이 공략되면 성도에서는 놀라서 제대로 대응도 못할 것이다. 쉽게 항복 받을 수 있다."





참고로 문제본기만을 보면, 262년부터 함선을 건조하는 등 사마소가 전쟁 준비를 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습니다. 262년부터 '오나라를 노리는 척' 하며 분주하게 전쟁 준비를 했다는 점은 종회 열전을 봐야 알 수 있는데, 나중에 종회에 대한 사마소의 평을 보면 "오직 종회만이 나와 뜻이 비슷했다." 고 하는 말로 봐서 종회 정도 외에는 그 비밀 계획을 잘 몰랐던 모양입니다.



일단 1년간의 훼이크 끝에 사마소가 실상을 밝힌 후에는, 다른 중신들은 적극 찬성까진 아니어도 사마소의 뜻을 함부러 거스르기도 그렇고 그냥저냥 동의하는 쪽으로 갔습니다. 다만 대촉 전선 전문가였던 등애만은 "어렵지 않겠습니까." 하며 발을 빼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왠만한 사람이라면야 그냥 죽이고 말면 그뿐이나, 명성 깊은 장군인데다 무엇보다 촉나라와의 전쟁을 가장 잘 아는 등애를 배제하고서는 이 큰 작전을 진행하기 어려웠습니다. 사마소는 크게 우려하며 주부(主簿) 사찬(師纂) 등을 파견하여 등애를 거듭 설득했고, 계속된 설득에 등애도 결국 마음을 굳여 계획에 찬동하게 됩니다.



이렇게 내부적으로 동의를 얻은 사마소는 전국에 군사 동원령을 내립니다. 그렇게 해서 모인 병력의 숫자는 무려 18만명. 정말로 한 나라를 멸망시키는 전쟁이라는 느낌이 확 들 정도로 엄청난 병력을 모은 사마소는 그 해 9월 낙양에서 대규모 진열식을 가지며 필승을 다짐합니다. 이때 등돈(鄧敦)이라는 장수가 촉 정벌은 불가하다고 하자, 출정식을 한 상황에서 군대의 사기를 해친다고 생각해 열이 뻗치는데다 상대가 등애 정도도 아닌지라 사마소는 등돈을 처형하고 시신을 사람들 앞에 조리돌림 하면서 되려 전쟁의 의지를 강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이때, 위나라군의 대략적인 형세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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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서장군 등애

위나라의 대 촉 전쟁 최고 전문가. 3만 군대를 이끌고 적도 - 답중으로 침공하여 그 곳에 있는 강유를 붙들어놓는 임무를 맡음. 금성 태수 양흔, 농서 태수 견홍, 천수 태수 왕기 등이 이 군대에 포함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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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옹주자사 제갈서

당장 전쟁이 펼쳐지는 장소와 가까운 옹주 지역의 자사. 3만 대군을 이끌고 기산 방면으로 진군해서, 등애와 맞붙는 강유가 퇴각하여 다른 전장으로 구원을 가려고 하면 퇴로를 막아 저지하고 시간을 끄는 임무를 맡음. 즉, 등애와 협공 작전을 펼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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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진서장군 종회

현장의 지휘관 중 이 계획에 가장 이른 시기부터 가장 깊숙히 개입되어 있던 인물. 18만 대군 중 본대인 10만(혹은 12만) 대군을 이끌고 포야-당락-자오 세 갈래 잔도로 한중을 침공하는 계획.


등애와 제갈서가 강유의 군대를 묶어놓고 있으면, 그 사이에 종회가 촉의 중심을 후려치는 것이 핵심.


 
보면 알 수 있겠지만 그냥 마냥 대군을 이끌고 공격을 가는게 아니라, 전략 - 작전술적 차원에서 핵심적인 테마가 잘 잡혀있는 행보였습니다. 이를 요약하면 '우월한 숫자를 이용해 일부 군대로 강유를 저지한 뒤, 남은 병력으로 빈집을 턴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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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변경 지대에서 위협이 압력이 거세지자 강유는 첩보를 통해 곧 위나라군이 움직임을 취할 것이라는 정보를 얻어냅니다. 강유는 이 정보를 바탕으로 성도에 자신의 의견을 전달했습니다.



“듣기로 종회가 관중에서 군사를 일으켜 진취(進取)할 틈을 엿본다고 하니 의당 장익과 요화를 아울러 보내 제군을 감독하며 양안관구(陽安關口)와 음평교두(陰平橋頭)를 나뉘어 지키게 하여 미연에 방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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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출저


하지만 강유의 이런 제안은 묵살 당합니다. 이는 바로 황호 때문이었는데, 일단 강유와 황호의 사이 자체가 좋지 못했습니다. 이때가 되기 얼마전 강유는 유선에게 "황호를 처단해야 한다." 는 제안을 했지만 유선은 "황호 걔 별것도 아닌 소인배인데 뭘 그리 위험하다고 잡으려고 하냐." 이렇게 넘겨버렸고, 일이 이렇게 되자 강유는 성도에 있다간 자기가 다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밖으로 나와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렇게 두 사람의 골이 깊었던데다, 황호가 무당을 불러 위나라가 쳐들어오는지 점쳐보게 했고, 이 무당이 "위나라 쳐들어올 일 없음." 이라고 점을 치자 그 말을 신뢰한 황호가 유선에게 말해 논의 자체를 없애버렸습니다. 무당 때문에 나라가 망하는 순간...


(일단 강유의 생각대로라면) 강유는 답중에서 적을 막고, 음평으로 오는 적도 그쪽의 지원군과 같이 막아내며, 한중 방면에서도 양안관구에 충원된 병력으로 버티는게 (이론적으로는)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뭐 이젠 의미 없어졌고...




결국 이 상태로 전쟁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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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군으로 진군하는 위나라군의 장수들




마침내 도합 18만 대군이 3군으로 나뉘어 가히 장대한 스케일로 진군해오기 시작했습니다. 동쪽 방면에서 종회가 이끄는 주력군이 왕함이 지키는 낙성, 장빈이 지키는 한성, 장서와 부첨이 지키는 관성, 즉 양안관구를 향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그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서쪽 방면에서도 숙명의 맞수, 등애와 강유의 교전이 펼쳐집니다. 한편 이 무렵이 되서야, 발등에 불이 떨어진 성도에서는 지원군을 파견합니다. 요화는 음평을 향해 나아가고, 장익과 동궐은 동쪽 한중 방면으로 나아가 종회의 부대와 싸우는 쪽을 지원하려고 했던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큰 기술이 한번 발생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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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무가가 아니라 건위(建威) 쪽으로 갈 건데?"


 "헐, 레알임?



 제갈서 군이 이동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장익과 동궐은 본래 가려던 동쪽 양안관구가 아니라, 음평 방면에서 엉덩이를 깔고 혹시 모르는 변수를 막기 위해 한달이나 죽치고 앉아 있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희대의 삽질이고, 어떻게 생각하면 동쪽 방위라인을 신뢰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결정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는데...확실히 방위 라인은 강력하긴 했습니다. 그런데 전혀 다른 문제가 터지고 맙니다.



몰려드는 위나라의 대군을 막고 있는 3곳의 요충지, 낙성과 한성 그리고 관성(양안관구) 중 낙성과 한성은 종회가 직접 공격을 퍼부어도 요지부동으로 버틸 뿐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우주방어가 지속되고 있었는데, 장서와 부첨이 지키던 관성에서 결국 일이 터지고 맙니다. 그런데 그것도 위나라군이 잘 싸워서가 아니라, 내부에서 사건이 발생한 탓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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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 : "내가 생각해보니까 말이야. 적이 멀리서 왔는데 성만 지키고 있는건 안될것 같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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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첨 : "저기;; 우리가 명령 받은건 성 지키라는거였는데 나대면 안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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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렇게 하자. 나는 나가서 싸워서 공을 세울테니 너님은 성을 지키면서 공을 세우는 거임. 오케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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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을듯."



....그리고 그렇게 성을 박차고 나간 장서는 싸우기는 개뿔, 적장 호열에게 항복했고, 이 난데없는 사건으로 관성의 수비가 약화된 틈을 타 호열은 부첨을 죽이고 성을 함락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곳에서 손가락만 빨고 있던 종회는 대군을 이끌고 프리패스로 관성을 통과해 꾸역꾸역 진군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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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되겠다. 이렇게 답중에서 죽치고 있다가 한중 쪽이 무너지면 큰 일 난다."




그 무렵, 서쪽 전선의 강유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강유는 관성의 함락 사실을 모르고 있었지만, 일단 중요한 전장인 동쪽 전선을 지키기 위해 이동했습니다. 그러면 비어있는 서쪽은 어찌하려고 했을까 싶은데, 아마도 요화 등의 지원군으로 어떻게 시간을 버려고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당연히 강유를 붙잡는 임무를 맡고 있던 등애가 호락호락하게 보내줄리는 없었습니다. 등애는 천수태수 왕기, 농서태수 견홍, 금성태수 양흔 등을 파견해 물러나는 강유군의 뒤통수를 끊임없이 위협했습니다. 강유는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 진군하고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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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어디가?"





 답중을 지나쳐 퇴각하려면 무조건 지나가야 하는 음평은 이 무렵 위나라군의 작계대로 제갈서군에게 장악된 이후였습니다. 한달이나 이 곳에서 죽치고 있었던 동궐, 장익은 하필 제일 중요한 순간에는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아마도 관성 쪽에서 난리가 나자 결국 동쪽으로 이동한게 아닌가 싶음.)




 이렇게 되자 강유는 큰일 나게 되버렸습니다. 서쪽에서는 등애군 3만이 눈에 불을 키고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고, 앞에는 제갈서군 3만이 있습니다. 도합 6만 대군을 상대로 싸움을 걸수도 없고, 설사 직접적인 교전을 하지 않고 시간만 보내고 있다고 하더라도 강유의 발이 묶이는 순간 종회의 10만 대군이 무주공산으로 휩쓸고 다닐 상태입니다. 도무지 각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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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종회군이 쳐들어오고 있는 동쪽 한중 방면이나, 하다못해 남쪽 검각 쪽으로 이동해야 마땅한 강유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북쪽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합니다. 북쪽이라면 위나라의 영토. 이게 내 본진 내주고 적 본진 터는 스타크래프트도 아닌데... 



 그런데 북쪽은 옹주 지역이고, 옹주 자사였던 제갈서는 이 일에 훨씬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강유가 30리를 이동하자 제갈서 역시 밀착 마크 하기 위해 따라붙었습니다. 그런데 30리 정도 북쪽으로 갔던 강유는 대뜸 군사를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달려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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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축구, 농구 같은 스포츠에서도 움직이며 적을 끌어들이고 공간을 만드는 스페이싱은 전술의 기본 개념.




강유군이 방향을 전환해 움직이자 당황한 제갈서군 역시 따라 붙으려 했지만, 조금의 지체도 없이 움직였던 강유군이 좀 더 빨랐습니다. 그렇게 전혀 공간이 없었던 상황에서 공간을 창조한 강유의 기동전에 의해서 촉나라 군은 단 하루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제갈서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포위망을 탈출하게 됩니다.



숨통조차 없었던 상황에서 6만 대군을 뿌리치고 빠져나온 기적의 기동전을 펼친 강유였지만, 그런 성과도 무색하게 도우러가려고 했던 양안관구 쪽은 이미 함락된 직후였습니다. 그러자 강유는 요화, 동궐, 장익 등과 함께 검각으로 향했습니다. 본래도 천혜의 요새였던데다, 강유의 군대가 살아남아 지키고 있자 종회는 10만 대군을 가지고도 검각에서 발이 묶여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 놓이고 맙니다. 떄문에 회유의 편지를 보내기도 하지만 당연히 묵살.


일이 이렇게 되자 위나라군의 막대한 대군은 오히려 약점으로 작용합니다. 적국의 깊숙한 곳 까지 들어서 있는데, 본국에서 보급하기는 어렵고, 현지에서 먹을것을 구하려 해도 워낙에 대군인지라 한계가 있습니다. 오래 죽치고 있는것도 불가능한데, 만약 여기서 물러난다면 18만 대군을 이끌었던 종회는 물론이거니와 모르긴 몰라도 작전을 강행했던 사마소도 조금은 타격이 불가피할 테고, 위나라 군도 한동안은 큰 군사를 동원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하지만, 이 난국의 순간에, 일발역전의 패가 아직 남아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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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없어? 그러면 길을 만들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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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애는 검각 쪽에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고 음평에서부터 시작해서 무려 700리나 되는 험지를 지나가기로 결심합니다. 사서의 표현을 빌리면 이때의 등애군은 "산을 뚫어서 길을 통과하고, 계곡에 다리를 만들고, 장수고 병사고 할 것 없이 나무를 붙잡고 낭떠러지를 기어올라" 이동했습니다. 길이 너무 험하고 계곡도 깊은데다, 당연한 말이지만 보급도 거의 불가능한 곳이라 엄청난 노력을 필요로 했지만 결국 근성으로 등애는 이 길을 돌파하는데 성공합니다.



그야말로 사지를 정면돌파해서 나타난 등애군을 본 후방 수비대장 마막은 놀라서 싸우지도 않고 항복 했습니다. 이때 촉나라군은 모든 전력을 검각의 수비라인에 집중시켰고, 만약 여기서 군사를 뺸다면 종회가 뚫고 올테니 그럴수도 없었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에서 제갈량의 아들 제갈첨은 모을 수 있는 모든 전력을 긁어모아 등애군을 한번 격퇴하는 최후의 기염을 토했지만, 다시 전열을 수습한 등애군이 재차 역공을 가하자 급조 전력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퇴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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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우


그리고 이 무렵 더 이상 쥐어짜낼 전력이 없는 촉의 최후 전력으로 대오나라 방면 전선에 있던 염우가 수천여병력을 이끌고 귀환하고 있었으나, 중간에 외계인에게 납치를 당했는지 이세계로 진입하는 포탈을 탔는지 완전히 행방이 묘연, 기록에서 문자 그대로 소실 됩니다. 


싸우려고 해도 정말 이제 조금의 여력이 없던 촉나라는 결국 등애에게 항복을 했고, 마침내 촉나라가 멸망하게 됩니다.







 수많은 떡밥이나 의견 교환이 넘쳐나는 삼국지 후반부의 사건이라 세세하게 파고들면 이야깃거리는 훨씬 많겠지만, 간략하게 살펴본 대략적인 양상은 이와 같습니다. 


 여러모로 볼떄, 삼국시대의 여러 전투들 중에서도 규모, 그리고 드라마틱함에 있어서도 꽤 흥미로운 전역이 아닌가 싶습니다. 공자나 방어자나 명확한 대전략이 있었고, 둘 다 실전에서는 그게 조금씩 엇나가며 꼬여갔으며, 그 상황을 타개하는 기책에 기책, 반전에 반전이 거듭된 싸움이었으니까요. 


꼭 삼국지가 아니라도, 대체로 전투에 대한 기록 양상이 간결하고 담백한 중국 고대 사서에 기록된 전역들 중에서도 이 정도면 꽤 다채로운 양상의 싸움 아닌가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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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싶은대로
17/03/16 01:56
수정 아이콘
염우실종사건...
뻐꾸기둘
17/03/16 02:02
수정 아이콘
유선의 대응이 흡사 핑 찍어줬는데 라인 밀다 갱당하는 우리팀 탑솔을 보는 것 같군요...

그와중에 강유가 버스를 운전했으나 마막과 유선의 기사 폭행, 등애의 슈퍼플레이로 숨쉰채 발견.
Agnus Dei
17/03/16 02:26
수정 아이콘
전투 기록의 부족함이 참 여러모로 아쉽죠. 계교전투 수준 정도로만 기록이 남아있어도 쓸만할텐데..
17/03/16 02:30
수정 아이콘
정말 재밌게 잘 봤습니다. 이해하기도 쉽고, 재밌기도 하니 정말 좋은 글인거같습니다.
모리건 앤슬랜드
17/03/16 02:32
수정 아이콘
삼국지 이전시절 전국시대 인물인 소진 왈 '제의 임치에는 7만호가 살고있고, 호당 정장이 최소 셋이니 여기서만 20만 대군이 나옵니다' 라는 말을 했었죠. 그와중에 성도랑 성도 근처에서 긁어모을수 있는 병력이 그렇게 없었나, 그렇게 쉽게 무너질만 했나....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게 안되는 현실에 절망해서 유심이 자살한걸지도 모르겠네요.
17/03/16 02:59
수정 아이콘
전국시대엔 장정(15-60세)를 많이 징발해서 싸웠고 삼국지 시대엔 전쟁, 재해, 농촌경제 파괴로 인한 유민/도적 발생, 호족의 사유화가 발생했고 그중에선 농민에 대한 예속화가 인구 증발에 크게 작용했습니다.
더하여 삼국지 시대엔 병호제와 세습령병제를 운용했기에 병력이 적은 것이기도 하였죠.
모리건 앤슬랜드
17/03/16 04:52
수정 아이콘
그나마 익주가 가장 전쟁피해도 적었고 비교적 건실했고 중앙 집권화도 3국에 비해 가장 잘되있었으며 무엇보다도 국가존망의 위기인데 기록에 남은거라곤 대오전선에서 간신히 몇천 빼서 끌고오다가 증발한거거든요. 제가 말씀드리고 싶었던것은 상대적으로 훨씬 더 후진적이었던 전국시대에는 남자들 박박 긁어다가 전선으로 보내는게 아무렇지도 않은 쉬운 일인것처럼 언급되는데, 국가존망의 위기에 이런 시도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것이 의문스러웠던겁니다.
서현12
17/03/16 04:57
수정 아이콘
사실 전국시대 기록은 뻥튀기가 일단 있다고 봐야 할 겁니다. 아무리 장정들 다수를 전시동원이라지만 후세에도 쉽게 안 나오는 몇십만 대군 운운은 심했어요. 왕전이 초나라를 정벌할때 동원한 대군이 이신과 몽염이 20만 대군으로 항연에게 패한후 다시 진나라 전군을 동원해서 60만인데 솔직히 이쯤이면 과장이 심하죠. 그리고 밑에서 설명했지만 촉나라는 아직 병력 동원의 여력이 있었습니다, 유선이 곽익의 지원을 거부했을뿐(...).
17/03/16 10:39
수정 아이콘
네. 충분히 합리적인 의심입니다.
아마 그럴수 없는 어떠한 이유는 분명 있었을 겁니다. 아마도 정치적인 여론이라던지 호족의 거대화 같은 부분이었다던지.

여담으로 전국시대에는 뻑하면 수십만 대군을 운용하기때문에 그걸 거짓으로 보긴 힘듭니다. 사기뿐 아니라 좌전, 국어 등의 사료도 있고.
원래 춘추시대의 전쟁은 좀 신사놀음이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으니 전국시대에는 그보단 치열했겠으나 후세의 전쟁양상처럼의 모습은아니었다 생각합니다. 고대였기에 가능한 부분이었을 테구요. 그렇기에 그런 것들이 가능했다고 보구요. 시대에 따른 고찰, 제도나 병제 등에 대한 연구 없이 함부로 없다고 재단하는건 최대한 피하는 편입니다.
신불해
17/03/16 10:45
수정 아이콘
단순히 "전국시대보다 삼국시대가 후대였기때문에 전국시대의 행정적 요인이 훨씬 낙후되었을것" 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가령 전국시대 국가 중 가장 통치적 체계가 발달한 진나라 같은 경우엔, 근래에 발굴된 진나라의 법령과 행정문서를 통해 보면 제국의 가장 변경 지역의 채무자들까지 추적할 능력이 있었습니다. 모든 지역의 연간 총 생산량을 계산하고 세금을 부여할수도 있을 정도로 고도화된 행정력이 있었구요.

오히려 이렇게 '너무나도 고도화된' 체제 통합력 떄문에, 진나라가 망할때 조직의 한 요소가 흔들리자 이게 조직의 모든 요소로 도미노 효과가 나서 망했다는 견해도 있을 정도니까요. 진나라의 뒤를 이은 한나라의 경우는 이런 요소가 훨씬 적었습니다. 진처럼 극도로 고도화된 체제 통합력은 좀 부족했던 대신에, 어느 한 요소에서 뒤흔들리는 일이 있어도 '적당한 낙후성' 때문에 타격이 그쪽에만 있고 말았죠.
서현12
17/03/16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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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계적으로 운용된 진나라는 그렇다쳐도 다른 6국의 인구는 다 합쳐봐야 수백만 수준이라는 연구결과들이 있더군요. 이 당시 진이 천하의 절반을 먹은 상태서도 말이죠. 그런데 이런 나라들에서도 수십만 대군을 동원했다고 하면 좀 ? 스러운것도 사실입니다. 거기다가 예전에 신불해님도 언급하셨지만 '호왈' 이라고 하여 사서에서조차 이건 과장이다라는 부분을 알려주는 경우도 상당히 많고.
모리건 앤슬랜드
17/03/16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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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전 남성의 90퍼센트가 전쟁터에서 죽어 없어질때까지 발악했던 파라과이의 예도 있으니까요...
Jon Snow
17/03/16 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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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곡전투랑 너무 비교되네요 ㅜ
도달자
17/03/16 0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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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이후 삼국지끝난줄알았는데 찾아보면 왕평과 강유의 기록도 재미가 쏠쏠하더라구요.

저 산을 넘을 생각을 한 등애랑 저런걸 넘고와서 전쟁이 가능한 등애군 병사들이 대단한게아닌가..
아케르나르
17/03/16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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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하려면 등애처럼. 한니발의 알프스 등산도 생각나네요
아지다하카
17/03/16 0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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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이 있다면 가장 보고 싶은 장면 중 하나가 저 등애의 등산(?) 과정입니다. 사실 저는 지금도 믿기지가 않습니다...모포를 둘러서 절벽을 굴러(?) 내려갔다는데 크크크
산울림
17/03/16 0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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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무당이 나라를 망쳤네요.
R.Oswalt
17/03/16 0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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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잘 짜여진 전략에도 불구하고, 승부의 향방을 결정짓는 것은 현장의 기가 막힌 비책이라는 점에서 지휘관의 역량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느낄 수가 있네요.
운하나 파던 관료가 방위군 사령관이 되더니, 위대한 등반가가...
17/03/16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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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끔한 정리글 잘 읽었습니다.

덧붙여 첨언하자면,

1. 한중의 방어대책 변경은 강유의 제안으로 이뤄진 것이므로 그의 전략적인 패착이다.

2. 강유가 사용한 전술은 바로 위위구조.

3. 양안관구는 바로 양평관으로 원래 관중도독이 주둔하던 곳이다.

4. 많은 경우 보급은 현지조달이 많았다.
멸천도
17/03/16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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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가 기본세팅을 바꾸긴했지만 전쟁발생전에 그거에 맞도록 새로 이동요청을 했으니 강유의 패착이라고하기엔 무리가 있지않나요?
서현12
17/03/16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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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적으로 요약 잘 하셨네요, 여기서 몇가지 더 추가할게 있습니다.

1. 사실 음평을 넘어온 등애군의 수준은 말이 아니었죠, 전속 같은 경우엔 도저히 더 못 싸우겠다고 참형당할 뻔하다가 오히려 다시 그 험한 산길 되돌아가서 도주했을 정도인데 아마 강유관을 누군가가 계속 지켰다면 등애군은 거기서 셧아웃 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제갈첨도 전사할때 강유성을 지키지 못한게 나의 죄라는 식으로 말하기도 했고요. 전속은 이때 원한이 얼마나 컸던지 등애가 누명이 풀려 복귀할때 위관이 '강유에서의 원한을 갚을 수 있을것이다'라는 말로 꾀자 바로 등애부자를 습격해 죽입니다. 이게 누명인거 뻔히 알면서도 등애 복권 안 시켜준 사마소도 사마소지만...

2. 제갈첨의 전사 이후 병력이 없었는가의 문제가 사실 논의가 됩니다만, 사실 남중도독인 곽익(곽준의 아들)이 이미 위군이 쳐들어왔을때 성도로 지원을 하겠다고 연락을 했었습니다. 근데 유선이 성도 방위엔 문제 없다고 씹어서 곽익은 참전을 못했...결국 곽익은 성도 함락 이후 유선의 안위가 보장될때까지 항복하지 않고 있다가 유선의 안전이 보장되자 통곡을 하면서 항복을 했죠. 참고로 곽익은 이후에도 오나라 교주쪽 장수들을 격파하면서 자신이 아버지 곽준 못지않은 장수라는걸 증명합니다.

3. 삼국전투기 최훈작가가 이건 잘 설명했는데 본래 저 당시 강유가 변경한 촉군의 방위체계가 현지조달을 못하게 식량을 다 요충지로 거두고 위군을 깊게들여서 보급로에 문제가 생기면 요충지에서 수비하던 촉군이 한번에 들이쳐 약해진 위군을 섬멸한다는 방책입니다. 강유가 변경했다고는 하지만 당시 촉한 군부가 가뜩이나 입지 약해진 강유의 제안을 반박한 기록이 없다는것만 봐도 대부분 의견의 일치가 있었다고 봐야 하고...한 마디로 촉군이 각지의 요충지를 잘 잡고 식량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식량이 떨어진 위군을 한번에 몰아친다는 전략인데...당시 강유한테 있던 장수들은 장서만 봐도 뭐...

당장 검각의 종회군만해도 대군이 한꺼번에 식량걱정을 해야해서 철수를 진지하게 논해야 하는 수준이었고 이건 양안관구 뚫리고 거기 있는 식량을 얻은 이후에도 그랬습니다. 이러다가 등애의 한타로 밀고 들어와선 저도 등애만큼의 엄청난 공이 있습니다라고 장황하게 글을 써야 했는데 서진의 원준은 이에 대해서 '당시 등애고 종회고 식량문제로 시달리고 있었는데 유선이 항복하지 않았다면 두 장수의 군은 돌아오기 힘들었을것이다.' 라고 가차없이 평가합니다. 이는 촉한 출신인 왕숭의 견해와도 동일합니다. 왕숭 역시 '아니 강유가 오고 있었고 강유의 능력이면 종회 제압이 가능한데 왜 항복?'이라고 한탄했고 촉군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것을 분해하면서 칼을 바위에 내던지고...그외 동진의 손착이나 손성도 이 결정을 엄청 깝니다만 뭐 어쩌겠습니까. 유선이 항복해 버린걸.

4. 사실 촉군 전체 전력 9만 운운은 약간은 사마소의 실수인게 촉한 멸망 이후 병력이 10만 2천이라는 기록만봐도 촉군의 예비전력은 사마소 생각보단 더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이것도 263년 전투 이후 촉한쪽 병력 소모가 있은 후의 기록이라는걸 보면 사마소가 촉군이 9만이니 우리가 이 정도 군사로 치고 들어가면 이길수 있다. 강유를 붙잡아 둘 수 있을것이다라고 한건 약간 계산미스. 한가지 그의 계산이 잘 들어맞은거라면 유선은 성도까지 오면 바로 항복할꺼라는 거였죠.
밴가드
17/03/16 0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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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엔 유비때부터 내려온 한중 방어체제를 대규모로 손 봐서 위군을 압살하려 했던 강유의 도박이 거하게 역효과가 난 케이스라고 봐야 될겁니다. 많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되어야 하는 대전략의 위험성일텐데, 제갈량도 첫 북벌때 판을 좀 복잡하게 꾸몄다가 상당한 위험에 빠질뻔 했죠. 그런면에서 강유는 호제와 있있던 연락(?) 문제로 단곡에서 등애에게 대패당한 교훈을 내면화하지 못한 듯 싶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신불해님께서 언급이 있으셨다면 좋았을 것 같네요.
서현12
17/03/16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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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263년의 전쟁은 아니 설마...설마 했던것들이 이곳저곳에서 터져서 나온 문제라...시작부터가 문제였는데 본문에선 유선이 저기서 무당말을 듣고 논의 자체를 없애버렸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강유가 보낸 서신을 보고 황호랑 무당이랑만 논의한 다음 아예 촉나라 중신들에겐 알리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촉나라 중신들은 등애가 답중으로 제갈서가 음평으로 종회가 낙곡으로 들어간다고 얘기가 나오고서야 알았고 그제서야 증원군을 급하게 보낸겁니다. 워낙 다급했던지라 예전에 세운 방어전략이 모조리 꼬이고 덕분에 강유와 다른 장수들간 커뮤니케이션이 되지 않은것도 한 원인일겁니다. 그런거치곤 강유가 아슬아슬하게 대전략을 완성한 편이지만요.

사실 해당방면 사령관인 정서장군 등애가 정벌군을 동원하기 전에는 촉을 뚫을수 없다고 원정을 반대라는 주장을 했는데 등애도 어느정도 촉한의 방어선을 알고 있었다면 정상 작동했을시 힘들다고 결론을 내린거라고 봐야죠.
뻐꾸기둘
17/03/16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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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핑 찍어줘도 갱당할 거라고 계산하고 게임하진 앉죠.
Multivitamin
17/03/16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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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정상적이었다면 강유의 방어시스템도 괜찮았다고 봅니다. 강유의 시스템은, 뭘 해도 자력으론 위를 뚫을 수 없으니 상대의 한타병력 잘 쌈싸먹고 병력공백생길때 치고 나간다의 개념이었던거 같아요. 실제로 이때도 촉군 내부의 연락이 문제가 있었지만, 등애의 등산만 아니었으면 어찌되었든 진나라를 막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니 강유방어시스템의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강유의 잘못이라면 나라가 막장으로 가고 있다는 걸 고려 안한 것...

사실 장서가 처음 항복할땐 그럴수 있다 쳐도 마막이 두번째로 항복하고 유선이 세번째로 항복하는데 (삼연벙??), 강유가 아니라 아마 제갈량이어도 못 버텼을 겁니다..
밴가드
17/03/16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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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저 당시 촉이 정상이 아니었고 강유 자신이 그걸 잘 알고 있었겠죠. 알고 저런 도박을 했다는게 문제고요. 조상이 쳐들어왔을때는 나라가 훨씬 더 정상이었는데도 왕평은 결국 양평관을 적군에게 노출시키는 위험부담을 하지 않기로 합니다. 저 당시에도 어떤이가 왕평에게 후방으로 물러나 낙성과 한성을 대신 지키자고 조언을 했는데도 말이죠.
서현12
17/03/16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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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 입장에선 일단 성도에 남아있는 동궐, 제갈첨, 번건등을 어떻게든 믿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263년 당시 배신같은게 없었던 한성, 낙성의 경우 촉이 망할때까지 함락되지 않은걸로 보면 아예 틀린계책은 아니고 결정적으로 263년 당시엔 낙곡당시 소수의 군으로 유격전과 기만전을 펼친 왕평이 없죠. 강유의 입지 자체가 당시엔 군부 이외엔 중앙정계에서 뭐라고 해도 그냥 가만히 있어야 하는 정도 영향력이었고, 결정적으로 설마하니 나라의 위기 상황에서 황제가 무당의 말을 믿고 방어를 내팽겨치고 신하들한테 알리지 않은 정도까지 막나갈거라곤 아무리 유선이 문제가 있더라도 예측이 가능한 범위였을지가...당장 지금만봐도 '아니 설마하니 무당이 나랏일에 간섭해 나라를 막장으로 만들겠어'라고 1년전에 말했다면 아무도 안 믿었을...
밴가드
17/03/16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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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평같은 사람이 없어기에 더더욱 강유가 저 멀리 답중에 있는 상황에서 위군을 한중으로 끌어들이는 도박을 하지 말았어야죠. 다시 상기하자면 강유의 전략은 그 궁극적 목표가 위군의 전멸이었지 단순한 방어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가능하려면 양평관(관성)이 열려 있어서 본군이 도착해 위군을 협공을 해야 하는데 이 관점에서 강유의 전략은 전역 초장에 실패한 상황이었습니다.
서현12
17/03/16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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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관(관성)이 열려 있어서 본군이 도착해'라는 말씀은(정확하게는 양평관이 아니라 양안관구입니다) 거기까지 강유군의 통로가 확보되어야 한다는 말씀같은데 그래서 본문에도 나오지만 강유가 바로 촉군 본군의 기동통로인 음평교두와 방어선인 양안관구의 병력 증강을 간언한 것이죠. 즉 본군이 도착해 위군을 협공하기 위해서 기동통로를 확보하고 각지 요충지의 병력을 미리 충원하자는게 골자입니다.

무엇보다 강유가 처음 이 방어선 제안을 했을 당시 촉한의 조정에선 이의없이 이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즉, 당시 촉한의 조정에서 이 방어계획은 차질이 없다면 문제가 없다고 여긴것일테고요. 문제는 263년 전역 당시엔 유선이 이걸 중신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자기만 알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때문에 강유가 답중에 혼자 고립된 꼴이 되고 만것이고요. 거기에 당시 강유가 있는 답중은 대촉전선 총사령관인 정서장군 등애와 대치중인데 여기서 강유가 빠지면 등애를 누가 상대하야 하느냐는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밴가드
17/03/16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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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가 263년 전역 전에 조정에 상소를 올려 요화,동궐,장익의 지원을 요청한건 전혀 문제가 없고 이 점은 전적으로 유선과 황호의 병크라고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 전에 강유가 한중의 방어시스템을 변경시킨게 문제입니다. 정촉시 진령산맥을 넘어오는 위군을 전같이 요지에서 최대한 저지라도 시켰다면 강유가 답중에서 한중까지 도착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을 거라고 봅니다. 그리고 저 당시엔 강유가 등애를 상대로 북벌에서 애를 먹고 상황이었는데 위군을 불러들여 섬멸한다는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올수 있었던 건지... 공명을 세우려 했으나 행동이 조밀하지 못했다는 강유에 대한 진수의 평이 그의 한중방어 전략의 문제점을 잘 표현한다고 봅니다.
서현12
17/03/16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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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안관구가 함락되던 시점에도 한, 낙은 아직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애시당초 강유의 요청대로 요화를 음평으로 보내 통로를 확보하게 하면서 여기를 굳게 지키며 철수를 돕고 장익이 자기 병사를 이끌고 양안관구를 지키하게면 강유가 답중에 충분히 도착할수 있죠. 당장 양안관구가 위군에 의해서 바로 뚫린것도 아니고 강유가 한중으로 힘겹게 이동한것도 지원없이 유선이 무시한 때문이고 그 사이 양안관이 배신에 의해서 뚫렸는데 부첨, 장서가 아니라 장익이 저기를 더 많은 병력으로 진두지휘했다면 강유가 오기전에 안 뚫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담헌서에서 홍대용이 이 전략을 평하길 '강유(姜維)는 양안(陽安)과 음평(陰平)을 방비하고자 했으나 황호(黃皓)에게 저지(沮止) 당했다. 만약 강유의 계획대로 했다면 등애(鄧艾)가 음평으로 한 걸음도 들어올 수 없었을 것이다. 등애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종회(鍾會)는 스스로 달아나게 되었을 것이니, 촉한(蜀漢)이 이같이 빨리 멸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강유의 잘못이라면 자기 계획에 있어서 설마하니 황호가 무당까지 부르면서 그걸 막았다는걸 몰랐다는거죠. 강유가 공을 세우면 눈엣가시인 황호 입장에선 곤란해지니 말이죠. 정치가라기보단 군인이었던 강유의 한계라면 한계라고 하겠습니다만.
Multivitamin
17/03/16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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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다 가정과 추측이긴 합니다만, 왕평과 강유의 처지가 달랐던 것도 둘이 택한 전략의 차이를 불러왔을 겁니다.

왕평은 장완-비의 승상 시기였고, 이때는 국가적인 정책이 무리해서 북벌을 하지 않고 내실을 다지는 시기였으니, 왕평은 역습을 고려하지 않고 위험부담을 최소화하는 선택을 한 거라고 생각되고요. 반대로 강유는 북벌을 해야만 하니 북벌성공율을 높이기 위해 약간의 위험부담을 감수하고라도 위군을 전멸 시키는 전략을 짠게 아닐까 싶네요. 그리고 실제로도 온갖 삽질이 있었지만, 마막과 유선의 항복만 아니었으면 진나라의 군량부족때문에 강유방어시스템이 성공해서 진나라가 후퇴했을 가능성이 높았지 않을까 싶네요.
17/03/16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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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등애가 저걸 뚫고 오지만 않았어도 쉽게 캐리각은 못만들었을것 같은데 촉의 나라 분위기상 항복하자는 의견이 예전부터 있었으니 이것만 아니었어도 어떻게든 촉나라 장수들이 끝까지 막아봤을것 같은데 진짜 군주가 유선이라 답이 없는것 같네요..
서현12
17/03/16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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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삼국지 60권 마지막에 촉한 장수, 병사들이 분해하면서 바위에 검을 내려치는 장면이 있는데 그게 정사에도 있는 기록이라는게 참...더군다나 항복을 논의했던 초주 같은 경우엔 대놓고 예전부터 제대로 된 기량이 없다고 생각해 많은 사람이 무시하였다는 기록이 대놓고 있기까지 하니 분해하는 사람들이 한둘이었겠습니까. 괜히 옛 사람의 시에 '어리고 몽매한 놈이 천 리 강산을 경솔히 하니, 한촉(漢蜀)의 문무백관이 초주(焦周)를 원망하였다'라는 얘기가 나온것은 아니죠.
호리 미오나
17/03/16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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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초주가 삼국지 정사의 집필자인 진수의 스승이니... 그 인연도 기묘하지요 흐흐
마스터충달
17/03/16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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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산악인 타이틀은 등애 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왜 마속이 산악인이고 등애는... ㅜㅜ
Made.in.Korea
17/03/16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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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속은 단지 산악인이지만 등애는 모험왕이지 말입니다. 크크크크크
Agnus Dei
17/03/16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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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애는 다른 목적으로 산에 올랐지만, 마속은 그저 산이 거기에 있으니까 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래프
17/03/16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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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즐기은자와 산을 이용하려는자의 차이는 큽니다!!!
마스터충달
17/03/16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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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인 마속 인정합니다.
치킨너겟은사랑
17/03/16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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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는 제갈량 사후 이야기가 알고보면 훨씬 잼있죠.
AngelGabriel
17/03/16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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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들인 글 잘 읽었습니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다지만 마막 대신 다른 장수가 수비를 해냈다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아쉬울 노릇이지만요.
17/03/16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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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전쟁을 승리로 이끈 등애와 종회의 최후가 참..

강유 입장에선 기방만 해선 답이없으니 한타 크게 이겨서 역러쉬를 벌여보려 한건데 뜻대로 되질않았네요.

그리고 칭찬방지권의 소유자 마막도..
17/03/16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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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외로... 전부 잘생겼네요 삼국지 위인들은...얼굴보고 뽑나 ㅠㅠ
17/03/16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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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들은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의 그림이라 그렇죠.
예쁜여친있는남자
17/03/17 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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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건 게임 일러스트입니다

실제 삼국지에 실린 그림들 보면 전부 훌륭한 추남내지는 아재들입니다
17/03/16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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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마행처우역거 열심히 보고 있다보니, 삼국지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해요~
bemanner
17/03/16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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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훈의 삼국지 해석 중에 제일 감명깊었던 게 촉 정벌을 다루면서 '하필이면 마막 염우 장서 등이 요직에 있어서 촉이 망한게 아니고, 촉에 문제가 있으니까 마막 염우 장서 등이 요직에 있었던 거고 망할 만했다'(원문 그대로 옮긴 게 아니라 문장이 좀 다릅니다) 이런 해석이었습니다.
17/03/16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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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비슷한 의견입니다.
근데 염우는 좀 폄하당한 면이 많아서 저 둘과 비교되기엔 억울하다고 봐요.
17/03/16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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캬... 깔끔한 정리 잘봤습니다.
술술 읽다보니 당시 상황이 눈앞에 그려지네요.

정말 잘봤습니다. OTL
17/03/16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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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깔끔한 정리 감사합니다.
사실 지금 쓰고 있는 글을 이 부분까지 쓰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런데 당최 몇 년이나 걸릴지 모르겠네요.
딱 1년 전에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208년부터 시작했고 지금은 211년 입촉...... 제가 늙어죽기 전에 263년을 다룰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날이 온다면 반드시 그 때는 신불해 님 글을 참고해서 쓰겠습니다.
세종머앟괴꺼솟
17/03/16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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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전체적으로 보면 국력도 국력이지만 근본적으로 망할 만한 나라여서 망한거네요;
Multivitamin
17/03/16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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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잘 봤습니다.

최훈말마따나 이때 촉이 당하는 과정에서 항복만 하고 그러는 장수들 보면, 초반부의 화끈한 장수들에 비해 정이 안가죠. 나관중이 왜 연의를 쓰면서 제갈량 죽은후를 대충 넘겼는지 알것 같습니다.
Liberalist
17/03/16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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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강유, 부첨, 제갈첨처럼 최후의 최후까지 포기하지 않고 싸우다 간 장수들이 있으니, 그걸로 위안을 삼아야죠 뭐;;
서현12
17/03/16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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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에 보면 황호가 본격적으로 집권한 이후 설후의 평가에 군주는 암약하고 신하들은 눈치만 보면서 옳은말을 하길 꺼린다는 얘기가 있죠, 물론 설후가 손휴 안심시키려고 그런말을 한것일수도 있겠습니다만, 적어도 황호 집권 이후 촉한의 기강이 무너졌다는건 군데군데 보이죠. 그러나 왕숭같은 사례도 그렇고 당시에도 이 급작스러운 항복은 말이 있었던듯하지요. 왕숭은 초주의 제자들과도 친한 사람이었는데 저런말을 했을 정도니. 오죽했으면 그랬겠나 싶기도.
Liberalist
17/03/16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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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을 읽은 뒤로부터 줄곧 강유빠를 자처했던 입장에서 보면 정촉 과정은 정말이지...
강유가 옹양주군 기만하고 검각에서 종회 저지하고 그야말로 본인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을 다 했는데도 이리 되는걸 보면 참 말이 안 나옵니다.
게다가 촉이 그렇게 허망하게 망한 뒤로도 어떻게든 발버둥치던 모습을 보면... 저 같으면 망한 시점에서 다 때려치우고 부귀영화나 누렸을텐데요.
으르르컹컹
17/03/16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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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바로 강유의 매력이죠.
혹자는 강유의 무리한 북벌과 한중방어시스템 변경으로 인해 촉의 멸망을 앞당겼다고 평하기도 하지만..

다른곳도 아닌 위나라 출신으로, 위나라에 살고 있는 가족들이 보내온 약재인 당귀(當歸: 당연히 돌아와야 하지 않겠느냐)를 보고 말없이 원지(遠志: 뜻은 머나먼 이곳에 있음)를 보냈다고 하죠.

강유의 촉에 대한 충성과 행보는 정말 눈물겨운 정도인데.. 그놈의 유선... 후...
17/03/16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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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주 자사를 유혹하고자 옹주를 쳤다가 다시 전속 회군이라니... 강유의 전술은 정말 멋지네요.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으르르컹컹
17/03/16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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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청룡님도 언급하셨지만, 과거 전국시대 당시 위나라의 방연이 조나라를 침략했을 당시 손빈이 조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사용했던 전술입니다.
위위구조(圍魏救趙) : 위나라를 포위하여 조나라를 침공중인 방연의 군대를 회군시켜 조나라를 구함.

그 절박한 상황에서 저런 기지를 발휘해서 제갈서를 농락하고 검각으로 후퇴한건 정말 발군의 센스입니다만... 휴.. 유선...정말..
17/03/16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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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 그렇군요. 상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D.레오
17/03/16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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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무당이 문제여...
닭장군
17/03/16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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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이또
무적다크아칸
17/03/16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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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강유가 한중 방어전략을 고치지 않았더라면 결과는 좀 달라졌을까요?
장기적으로 보면 머 촉이 진에 먹혔을거지만 그 한번으로 밀리지는 않았을거 같은데
그리고 제갈승상때는 왜 답중루트를 잘 이용하지 않았는지도 궁금하네요.
낙곡때도 답중루트는 큰 위협이 없었던거 같은데...저때는 하나라도 뚫리면 안되는 상황이 됬는지..
서현12
17/03/16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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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시대의 북벌 여건은 제갈량 시대보다 더 어려워져서 강유가 확보하려는 지점이 더 서쪽으로 이동했기에 그렇습니다. 강유의 가장 큰 전과인 조수전투도 기산보다 한참 서쪽이고...
낙곡때와 상황이 달랐던건...총책임자가 조상과 사마소라는 차이 때문이라고 봅니다.
무적다크아칸
17/03/16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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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요.
음평 답중이 본격적으로 나오는게 강유때 나오지 제갈승상때는 언급이 거의 없어서....
사마의는 저렇게 기산루트 뒤를 칠 좋은 루트가 있는데 왜 진작 이용하지 않았는지
뻐꾸기둘
17/03/16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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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의 방어책 재정비가 시대상황 변화를 고려한 조정이라는 의견도 있긴 합니다. 제랄량 시기 북벌군이 한중을 거점으로 활동하였던 것과 달리 강유는 답중에서 주둔했거든요.

강유의 방어책이든 기존의 방어책이든 거점 중심으로 중앙군이 올 때 까지 한중군이 버텨줘야 하는데, 전투도 아니고 배반으로 한중군이 무너진것을 생각하면 개인적으론 큰 차이 없었을거라 보는 편입니다. 이미 망할 나라 였던거죠.
서현12
17/03/16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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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위에서 장익이 양안관구로 가서 한중을 지켰더라면 이라는 아쉬움을 남긴거였죠, 직책만해도 장익은 좌거기장군이었으니 대규모 병력통솔이 그나마 나았을거고. 뭐 황제가 무당말에 놀아나서 닐리리야 하는 마당에 오히려 끝까지 충성을 불태운 다른 촉한 장수들이 신기한 상황이긴 합니다만.
뻐꾸기둘
17/03/16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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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꼭 나라가 망할때가 되면 능력있는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에 없고 밥만 축내는 식충이들이 그 자리 차고 있다가 말아먹더군요. 그래서 능력있는 사람들이 뒤늦게 수습하다가 고통받고.
무적다크아칸
17/03/16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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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중이 대위전선 최전선이 되면서 한중은 수비적으로 가는거였는데...쩝
시대가 바뀌면서 한중이 찬밥신세로...
홍승식
17/03/16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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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애는 진짜 지금봐도 까마득한 저 길을 어떻게 갈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이게 산을 타고 나니 촉에서 낼름 항복했기에 망정이지 조금 멀쩡한 사람이 지키고만 있었어도 완전 망이었을 텐데 말예요.
그러니까 누구도 생각 못하고 제대로된 방어 체계가 없었겠지만요.
서현12
17/03/16 17:01
수정 아이콘
생각을 못했다기 보단 제갈첨도 강유를 지키지못한것을 한탄했으니 만큼 거기를 지킬수 있었다면 상황이 달라졌겠죠, 그러니까 거기에 성이 있던건데...뭐 위에서 나온대로 그냥 나라꼴이 그 모양인 탓도 있을겝니다.
지니팅커벨여행
17/03/16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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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진짜 황호 한놈만 없었어도 허무하게 무너질 판이 아니었네요.
훗날 진나라의 막장테크를 보자면 황호 없이 강유시대 장수들 정도의 인재들만 되어도 계속 지켰다면 오히려 서진보다 더 오래 갔을 수도 있었겠다는 뻘생각을 해 봅니다.
무무무무무무
17/03/17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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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년 촉한 멸망 270년 독발수기능의 난.... if는 의미없다지만 한끝 차이였죠. 물론 촉이 멸망안했으면 진주신설도 없었고 난 자체가 없었겠으나.
비슷한 예로 280년 동오 멸망 290년 사마충 황제 즉위...
하긴 사마염이 아무리 막장이어도 동오와 대치하는 상황에서 사마충을 태자로 올리진 않았을테니 비슷한걸까요.
마텐자이트
17/03/16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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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는 언제나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무언가 있어요
17/03/17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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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들도 그렇고 흥미롭게 잘봤습니다.
17/03/17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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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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