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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7/02/01 01:53:21
Name 신불해
Subject [일반] 조명되지 않는 한국사 역사상 역대급 패전, 공험진 - 갈라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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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중기 무렵, 윤관의 북벌과 고려의 동북 9성 설치는 교과서에서부터 나오는 이야기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일이 있었다." 라고 하는 일은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관심이 떨어져 거의 알려지지 않는 편이구요. 요즈음에 인터넷에선 "척준경이 여진족과 싸웠다." 는 정도로 알려져 있는것 같구요.



아무튼 고려군의 총지휘관 윤관이 대군을 이끌고 가 성을 지었다는 '동북 9성' 의 위치에 대해서는 말이 많습니다. 서로 다른 학설을 소개한 저 맨 위의 지도만 봐도 대충 논쟁이 어떻게 되는지는 감이 올듯.... 일단 현재의 정설만 소개하자면 1학설과 3학설 모두 부정되고, 2학설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일단 여기서는 이 논쟁을 다루려는 건 아니라 이 정도만 언급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당시 고려는 윤관의 지휘 아래 무려 17만이라는 대군을 동원해 기존의 국경을 넘어, 여진족을 쫓아내고 동북 9성을 축성했습니다. 이 북벌 계획은 숙종 때부터 준비된 사업이었는데, 숙종이 죽고 나서 예종이 즉위했지만 부친의 숙원이었던 사업이라 이를 그대로 이어받았으니 여러모로 중대한 사업이라 지원이 막대했던 겁니다.



아무튼 대군을 이끌고 가서 성을 짓는것 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별로 어려울 일도 없었고, 여러모로 일이 순조로워 보였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성을 지은 다음부터였습니다.




역사를 순전히 우리 입장에서만 보자면야, 동북 9성을 축성한건 나라의 국경을 넒힌 일이라 장하고 뿌듯한 일처럼 느껴질 수 있겠지만, 당시에 그곳에서 살던 여진족의 입장에서는 난데없는 침략을 당한 일이었습니다. 고려군은 동북 9성을 지역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숫자의 여진족 마을을 불태웠고 무수한 숫자의 여진족을 양민학살 했습니다.



기록을 보면 고려군 중군이 35개의 마을을 불태우고 380명을 죽이며 230명을 포로로 잡았고, 우군이 32개 마을을 불태우고 290명을 죽이고 300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좌군이 31개의 마을을 불태우고 950명을 죽였으며, 윤관이 이끄는 본대가 37개의 마을을 불태우고 2,120명을 죽이고 500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이를 다 합치면 135개의 마을을 불태우고 3,740명을 죽이고 1,030명이 포로로 잡힌 셈입니다. 




그런데 위의 수치를 자세히 보면, 유독 고려 좌군만 죽인 사람이 매우 많고 포로가 아예 없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고려 좌군이 석성이라는 곳을 공격할 무렵, 고려군은 전투에 앞서 사신을 보내 항복하라는 요구를 전했습니다. 그러자 여진족 쪽에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한판 싸움으로 승부를 보려고 하는데, 어째서 항복하라고 하는 것인가?"



그리하여 전투가 벌어졌고, 여진족은 고려군이 깜짝 놀랄 정도로 완강하게 저항했습니다. 석성 내에는 여진족 군사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늙은 부모, 아내, 어린 아이들 등 가족들이 전부 있었던지라 이들을 지켜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운 것입니다. 워낙 저항이 거세자 윤관은 척준경을 파견했고, 척준경이 석성 위로 올라가 여진족 추장 몇을 베어내자 고려군의 사기가 올라 결국 석성은 함락되고 맙니다.



하지만 전투에 패한 여진족들은 고려군에게 항복하는 대신, 바위에 몸을 던져서 자살해버렸습니다. 그리고 여진족 장병들의 남은 가족들 모두 고려군에게 전부 학살 당했습니다.(동사강목의 기록)



어째서 석성의 여진족들은 항복을 하지 않고 싸움을 택했을까. 그들이 무슨 전투광이라서 그런게 아닙니다. 북벌을 시작하기 전, 고려는 이런저런 문제로 자신들이 억류하고 있던 여진족들을 풀어줄테니, 여진족 추장들이 와서 명령을 받들라는 식으로 그들을 소집했습니다. 여진족들은 좀 의아해하면서도 잡혀있던 동지들을 풀어준다고 하니 그 명령에 따랐고, 추장들의 숫자만 400명에 그들을 수행하는 인원들까지 합쳐서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고려는 이들을 환대하는 척 하며 연회를 베풀더니, 이내 병사를 동원해 그들 모두를 학살해버렸습니다. 그나마 분위기가 이상해서 국경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십명 까지 척준경 등을 보내 일부러 추격해서 모조리 죽여버리고 맙니다.




고려 입장에서는 북벌 정책을 시행하기에 앞서 적들의 우두머리들을 죽여 작전을 쉽게 하겠다는 심산이었을테지만, 여진족의 입장에선 피눈물이 나고 이를 갈아도 시원찮을 일이었기에 고려군에 대한 증오심이 하늘을 찔렀고, 무엇보다 항복한다고 해도 약속을 지킨다는 보장이 전혀 없었기에 항복하는 대신 차라리 죽을때까지 싸우는 편을 택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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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고려가 공략해서 장악한 여진족들의 지역을 갈라전(曷懶甸)이라고 합니다. 그 갈라전보다 북방에는 당시 대단히 강성했던 여진족 부족인 완안부(完顔部)가 있었습니다. 완안부의 족장 오아속(烏雅束)은 사냥을 하고 있다가 17만 대군의 북상과 동북 9성의 축성 이야기를 듣자 깜짝 놀라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다만 회의를 한다고 해도 뾰족한 대책은 없었습니다. 고려군의 대군과 정면으로 붙을 자신도 없는데다, 설사 자신들이 항전한다고 해도 다른 부족들이 협력을 해줄지도 미지수였으며, 무엇보다 이 틈을 타 요나라가 고려를 돕는답시고 뒤를 치면 그야말로 끝장난 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회의에서 딱 한 사람, 오아속의 동생이었던 아골타(阿骨打)가 맞서 싸울 것을 주장했습니다.



"지금 가만히 있는다면 어찌 갈라전만 잃겠습니까? 모든 부족이 우리의 곁을 다 떠날 겁니다!"



동북 9성이 계속 유지된다면 완완부에 복속되어 있는 다른 여진 부족들이 모두 떠날 테고, 그러면 완완부도 끝장인 셈입니다. 그런 점을 역설하자 오아속도 마음이 동해 군대를 파견해 끝까지 저항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마침 고려군의 여타 만행으로 갈라전의 소규모 부족들은 고려에 협력하는 대신, 죽을 각오로 저항하려는 기세라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후 벌어진 숱한 중간 부분의 사투에 대해서는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동북 9성을 지키는 고려군은 처음부터 큰 문제가 있었는데, 고려사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조정에서는 병목[甁項] 지역을 취해 그 길을 막으면 오랑캐에 대한 근심이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고들 말했는데, 막상 공격하여 빼앗고 보니 수륙으로 도로가 통하지 않는 곳이 없어 전에 들은 것과는 전혀 달랐다.

근거지를 잃게 된 여진은 보복을 다짐하는 한편, 땅을 돌려달라고 떼를 쓰면서 추장들이 해마다 와서 분쟁을 벌였다. 온갖 속임수를 쓰고 갖은 무기를 동원해 공격해 왔는데, 성이 험하고 견고해 좀처럼 함락되지는 않았지만 수비하는 전투에서 아군이 많이 희생되었다.

게다가 개척한 땅이 너무 넓고 9성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며 계곡과 골짜기가 험하고 깊어서, 적들이 자주 복병을 두어 왕래하는 사람들을 노략질하였다.

- 고려사 윤관 열전.





즉 당초 본래의 계획대로라면, 고려는 중요한 길목 한 두 곳을 막아 성을 축조하면 여진족이 얼마나 몰려오건 타워 디펜스 게임을 하듯 막을 수 있을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사전에 파악한 지리 정보가 모조리 엉터리였고, 막상 성을 짓고 보니 사방 팔방으로 뚫리지 않은 곳이 없어 삼국지 게임으로 치면 수춘 블러드를 하는 상황이 된 셈입니다.


더구나 당시 고려군이 커버할 수 있는 능력에 비해 무턱태고 개척한 땅이 너무나 넒고, 자연히 동북 9성들 역시 거리가 너무 멀어져 근처의 성들이 상호간에 보완을 해주기는 커녕 각지에서 나홀로 수춘 블러드를 찍는 셈이 된겁니다. 어쩌다가 이 성에서 다른 성으로 사람을 보내려고 하면 길이 너무 멀어 여진족 복병이 중간에서 전부 차단해버렸습니다.


더구나 하루 아침에 집을 잃고 살던 땅을 잃게 된 여진족들의 저항 의지는 상상을 초월했으니... 그 전투는 그야말로 끝이 없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척준경의 활약이라던지 그런것도 있었지만, 단기전으로 끝날 줄 알았던 전투는 무려 1년이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시간이 가면 불리한건 대군을 동원한 원정군 입니다. 당시 고려에서는 물자 공출에 지친 수공업자들이 도주하는가 하면, 서경에서는 식량 부족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고려군이 힘든 만큼 여진족도 힘들었습니다. 당시 여진족은 모든 부족을 총동원해서 10군으로 나누고, 각 군을 끊임없이 축차 투입하는 방식으로 전투를 치루고 있었습니다.


금사 알새 열전中
斡賽將內外兵,劾古活你茁、蒲察狄古乃佐之。
高麗兵數萬來拒,斡賽分兵為十隊,更出迭人,遂大破之。
알새가 내외의 병력을 이끄는 장수가 되었고, 핵고활니줄과 포찰적고내로 보좌케 하였다.
고려의 병력 수만이 방어하여 오니, 
알새가 병력을 10대(隊)로 나누어 번갈아 가며 출병하게 하였고 마침내 고려군을 대파하였다.



전부족이 전투를 치루거나 준전시상태로 대기하는 판이었고,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하자 자연히 흉년이 찾아오게 됩니다. 사람들이 굶주리고 도적들이 발생하는 등 여진족도 몹시 힘겨웠으나, 어쨌거나 살기 위해 싸우는 것이니만큼 필사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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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전장, 길주





그렇게 계속해서 이어지던 전쟁은 전쟁 말기에 이르러 동북 9성 중 길주성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흐름이 됩니다. 여진족은 길주 방면에 수만이나 되는 여진족을 개미때처럼 집결시켰고, 어떻게든 동북 9성을 유지하려는 고려군도 필사적으로 여기서 적을 막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수만의 여진군은 길주성에 쉬지 않고 공격을 퍼부었고 풍전등화의 길주성은 단지 성을 지키던 이관진(李冠珍)의 결사항전 속에서 간신히 몇달을 버티던 형국이었습니다.



이때 동북 9성 개척 정책의 핵심 인물 중 한 사람인 오연총은 개경에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자 분기탱천해서 자신이 나서 구원하겠다고 하여 왕명을 받고 병력을 소집해서 북방으로 나섰습니다. 



오연총이 이끌던 대군은 곧 공험진(公嶮鎭)이라는 곳에 도달했습니다. 이 공험진이 어디인지는 확실치가 않은데, 이 장소가 정확히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동북 9성의 위치를 비정할 수 있는 중요한 곳이기도 합니다. 이 공험진이 길주 너머에 있다고 치면 여진군이 잠시 후퇴(하는척) 하며 물러나는걸 오연총이 추격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하여간, 고려사에서는 공험진이라고 불리우는 장소, 여진족의 금사에서는 목리문전(木里門甸)이라고 불리우는 장소에서 고려군과 여진군의 대군은 일대 회전을 벌이게 됩니다.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이 전투는 여진군의 기습이었다고 합니다. 앞서 말한 가설대로 물러나던 여진족을 오연총이 추격한 것이라면, 갑자기 적이 반격하자 예상치 못했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한국사에 보기 드문, 수만 대군의 일대 회전은 꽤 오랜 시간 동안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곧 그런 교착 상태도 끝나고 맙니다. 바로 여진족의 비밀병기가 전장에 투입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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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여진군에는 사묘아리(斜卯阿里)라는 장수가 있었습니다. 사묘아리는 대 고려전은 물론이고 이후에 요나라와의 송나라와의 전쟁에서도 모두 맹활약한 금나라 초기 최고의 맹장이기도 한 장수였습니다. 


그 사묘아리가 창을 들고 혼란한 전투 중에 적 장군 중에 한 사람을 발견하여 달려들어 찔러 죽이자 전세가 갑자기 확 바뀌게 되었고, 고려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으며 퇴각하게 됩니다. 그렇게 고려군이 물러난 틈을 타, 사묘아리는 자신의 아버지 혼탄(渾坦)과 더불어 멀리 떨어져 있던 석적환(石適歡)과 함께 군사를 합세시켜 굉장한 전력을 갖추게 되었고, 제차 공격을 해서 결국 동북 9성 중 2개의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마침내 9성 방위 시스템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서부터는 고려사엔 두리뭉술하게 되어있고 금사에 자세히 나와있는 내용)



한번 대패한 고려군의 오연총은 이렇게 물러가기엔 억울하다고 생각했는지, 병력을 재집결시켜 빼앗긴 2성을 되찾기 위한 전투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이미 사묘아리의 군대가 좋은 위치를 장악해서 수비하고 있자 별다른 공략 방법도 찾지 못해 결국 어쩔 수 없이 퇴각했고, 적이 등 뒤 를 보인 순간을 사묘아리는 놓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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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군이 문자 그대로 때죽음을 당한 성천강



물러나던 고려군은 얼어붙은 갈라수(曷懶水), 즉 지금의 성천강을 건너가고 있었는데, 고려군의 뒤를 쫒던 사묘아리는 바로 여기서 적을 급습하게 됩니다. 고려군은 놀라서 정신없이 도주했고, 이미 전열이 붕괴던 적을 여진군은 마음껏 유린하며 대파했습니다. 


너무나 막대한 타격을 입은 오연총은 조정에 스스로의 실책을 고백하는 장계를 올린 뒤, 윤관과 함께 다시 북상하려 했으나 마침 화친 분위기가 조성되는 한편 조정에서 패전의 책임을 묻기 시작하자 다시 돌아와서 전투가 끝이 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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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高麗)가 갈라전(曷懶甸)에 9성(城)을 축성(築城)하자, 혼탄(渾坦)이 공격(攻擊)하였는데,
목리문전(木里門甸)에서 적(敵)과 만나, 오랫동안 역전(力戰/힘껏 싸움)하였고,
사묘아리(斜卯阿里)가 정창(挺槍/창을 겨누어 듦)하여 (고려의) 진중(陣中)에서 그 장수를 치자(馳刺/질주하여 찌름)하자, 
적(敵)이 드디어 궤멸(潰滅)하였다.
혼탄(渾坦)과 더불어 석적환(石適歡)이 도문수(徒門水)에서 합병(合兵/병을 합침)하였는데, 
사묘아리(斜卯阿里)가 주장(主將)이 되어 적병(敵兵)을 깨트리고, (고려의) 그 2성을 취(取)하였다.
고려(高麗)가 입구(入寇/적이 쳐들어옴)하자, 
아병(我兵/아군)으로써 요해(要害/요새, 방어가 쉽고 공격은 어려운 곳)에 둔수(屯守/주둔하여 수비함)하니, 
(고려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고, 곧 돌아갔다.
사묘아리(斜卯阿里)가 갈라수(曷懶水)까지 추급(追及/뒤쫓아 따라붙음)하였는데,
고려인(高麗人)이 빙상(冰上/얼음 위)을 쟁주((爭走/다투어 도주함)하였고,
사묘아리(斜卯阿里)가 승지(乘之/기세를 탐)하여, (고려군을) 살략(殺略/죽이고 약탈함)하여 기진(幾盡/거의 없어짐)케 하고는,
드디어 석적환(石適歡)과 합병(合兵)하였다.
길에서 적병(敵兵) 5만(萬)과 조우(遭遇)하여, (사묘아리가) 격주(擊走/공격하여 나아감)하였다.
또 석적환(石適歡)과 함께 적(敵) 7만(萬)을 조우(遭遇)하자, 사묘아리(斜卯阿里)가 선등(先登/선봉으로 공격함)하여, 
분격(奮擊/분발하여 공격함)하여 (고려군을) 크게 깨트렸다.
석적환(石適歡)이 말하길
「네가 하루 동안에 중적(重敵/강한 적)을 세 번 격파(擊破)하였으니, 공(功)을 어찌 가(可)히 잊겠는가.」
이에 후사(厚賜/후하게 하사함)하였다.
-금사 사묘아리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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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사 사묘아리 전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고려군의 병력은 무려 5만 ~ 7만. 엄청난 숫자의 병력이 일대 회전에서 대패하고, 도주하는 과정에 추격전을 겪으며 궤멸당한 것입니다. 이 정도의 패배는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도 찾기 힘들 정도로 큰 패배인데,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시기에도 이 정도 규모의 패배는 거의 없었고, 피해가 심각했던 몽골의 침입이나 왜구의 침입 당시에도 하나하나의 교전은 규모가 크진 않았습니다.


고려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이에 견줄만한 패배는 2차 여요전쟁에서 강조가 주력군 30만을 모조리 잃어버려 고려가 거란군에 쑥대밭이 되고 현종이 도주한 사례 정도고, 그보다 앞선 시기를 찾는다면 후삼국 시기를 제외하면 거의 고구려 말기 주필산 전투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정도입니다. 







여진이 다시 원근의 부족들을 모아 길주(吉州 : 지금의 함경북도 길주군)를 여러 달째 포위하고서 성에서 10리 떨어진 곳에 작은 성을 쌓아 여섯 개의 목책을 세우고 맹렬히 공격해오는 바람에 성이 거의 함락되려 하였다. 병마부사(兵馬副使) 이관진(李冠珍) 등이 군사를 독려하여 하룻밤 사이에 다시 여러 겹의 성을 쌓고 수비와 전투에 임했으나 싸움이 오래 계속되고 형세가 궁해져 많은 사상자가 났다. 오연총이 그 소식을 듣고 분연히 출정하려고 하자 왕은 다시 지휘권을 부여해 파견했다. 도중 공험진(公嶮鎭)에 당도했을 때 적이 길을 막고 기습하는 통에 아군이 대패해 장졸들이 무기를 버리고 여러 성으로 흩어져 들어가니, 성이 함락될 때 수없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오연총이 자책하는 장계를 올린 뒤, 윤관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다시 길주로 진군하려 하는 차에 마침 적이 사자를 보내어 화친을 요청해 왔기 때문에 결국 귀환했다. 재상들이 패전에 대해 문책해야 한다고 건의하자 왕은 사자를 보내 부월을 거두어들였고 오연총은 복명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갔다. 재상과 대간들이 문책할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자 왕은 그의 관직을 박탈하고 공신의 칭호를 삭제하였다가 얼마 뒤에 수사공(守司空)·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다시 임명하였다.


고려사 오연총 열전






여진이 길주(吉州)를 포위했는데 오연총이 그들과 싸우다가 크게 패배하자....(중략)평장사(平章事) 최홍사(崔弘嗣)·김경용(金景庸)과 참지정사(叅知政事) 임의(任懿) 및 추밀원사(樞密院使) 이위(李瑋)가 선정전(宣政殿)에서 왕과 면대하고 윤관과 오연총이 패전한 죄를 물어야 한다고 강경히 주장하자, 왕은 승선(承宣) 심후(沈侯)를 보내 두 사람이 귀환하는 도중에 지휘권을 박탈했으므로, 윤관 등은 복명하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재상과 대간이 그들을 치죄하라고 건의했으며, 간관인 김연(金緣)·이재(李載) 등은 대궐문 밖에 엎드려,

“윤관 등이 제멋대로 명분 없는 전쟁을 일으켜 패전하고 나라에 피해를 입혔으니 그 죄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들을 하옥시키소서.”라고 강경하게 간쟁했다.

왕이 심후를 시켜, “두 원수는 명을 받들어 출정한 것 뿐이며, 예로부터 전투에는 승패가 있게 마련이니 어찌 죄가 되겠는가?”라고 설득하게 했다. 그러나 김연 등이 계속 간쟁하는 바람에, 왕이 어쩔 수 없이 그를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 고려사 윤관 열전






동북 9성을 다룬 전투는 고려와 여진족 모두 자기들이 이긴건 엄청나게 전공을 과장하고 패배한건 축소하는 경향이 있어서 서로간의 전투 기록이 잘 교차되지 않는데, 이 공험진-갈라수 전투의 패배만큼은 금사에서도 확인되고 고려사에서도 확인이 됩니다. 고려사에서는 금사만큼 전투를 자세히 묘사하지 않고, 전투에 나선 병력 숫자도 언급되지 않으며, 금사에 나와 있는 2차 전투(공험진에서의 패배 이후 다시 재공격을 하려 했다던가)가 생략되어 있긴 하지만 "뭔가 엄청난 패배를 당했다." 는 건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되려 경우에 따라서는 금사의 기록보다 더 적나라한 기록도 있는데, 대패한 병사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와 갑옷까지 모조리 벌이고 달아났다는 언급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 패배 이후 조정에서는 윤관과 오연총을 탓하는 여론이 가득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종종 오해하기도 하는데, 당시 고려 조정의 이른바 '배알없는 사대주의자' 들이 윤관과 오연총의 하늘같은 공적을 일부러 비방하여 동북 9성을 반환하게 하고 전쟁을 멈추게 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조정에서는 당초에만 해도 동북 9성을 다룬 전투에 대해 우호적인 여론이 많았고(다른것도 아닌 선왕인 숙종의 의지였으니), 전쟁이 길어지며 피폐함이 극심해지는 와중에서도 적어도 "일단 힘들긴 해도 얻은 땅은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 정도로, 비판 여론이 대세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이르러 상황이 이렇게 되자, 완전히 여론이 윤관과 오연총을 탄핵하는 의견으로 가득 차 이 두 사람은 장수의 부월을 뺏기고, 돌아온 뒤에 왕을 만나 복명도 하지 못하고 바로 집으로 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탄핵을 당합니다. 왠만큼의 패전이 아닌 이상 이렇게까지 탄핵 될 수는 없으니, 이것도 고려군이 전투에서 매우 큰 패배를 당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어찌되었건 전투가 끝나고 윤관과 오연총이 죽일 놈이 된 후, 조정에서는 완전히 계륵이 되어버린 동북 9성을 놓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기껏 얻은 땅을 그냥 버리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유지하려고 해도 유지할 능력이 없다는게 판명된 셈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때마침 여진족 쪽에서 적당히 숙여주고 공경한 태도로 고려를 섬기겠다는 의사 표시를 보였습니다. 여진족에서 그렇지 않더라도 손을 댈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고려는 마침 잘됬다는 심산으로 "그들의 태도에 몹시 갸륵하여 상을 주겠다." 는 식으로 동북 9성을 모두 여진족에게 반환 했습니다.




이렇게 모든 상황이 정리되었습니다. 고려의 입장에서 보면, 비록 잠시 고개를 숙인 완안부에게 (그들이 금나라로 성장하기전까지) 조공을 받고 상국 취급을 받았으니 명분은 취했지만, 실리적으로 보자면 17만이나 되는 대군을 북방에 투입하고, 또 그 병력을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물자를 소모하고도 얻어낸 것이 없었던데다 농사도 망치고 민심도 흉흉해졌으니 그야말로 완벽한 실패 그 자체였습니다.


굳이 위안을 삼자면, 훗날 엄청난 대국으로 성장한 금나라에게 빠르게 군사력 투시도 하고 최후엔 외교적으로 일을 마무리 지으면서, 혹시나 있었을지도 모를 금나라와의 분쟁요소에 있어 미리 한번 힘을 보여주어 그런걸 막게한 예방전쟁이었다... 식으로 생각할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이 공험진 - 갈라수 전투는 무력으로 동북 9성을 유지하는 정책의 완벽한 실패를 의미하는 큰 역사적 의의를 부여할 수 있는 전투일텐데, 자세한 전황은 금사에 나와 있고 고려사에서는 "뭔가 지긴 졌는데." 식으로 애매하게 서술되어 있는 탓에 거의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동북 9성을 다루는 매체의 대부분의 서술도 한번의 큰 전투 이후 완전히 유지 능력이 무너졌다기 보다는, "동북 9성을 설치했으나 여진족들의 저항이 거세서 분쟁을 겪게 되자 고려는 이를 돌려주게 된다." 로 좀 두리뭉술하게 언급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잘 모르고 보면 정말 사력을 다해 유지하려 했으면 힘들긴 해도 충분히 지킬 수 있었는데 뭣 모르는 놈들이 반대해서 유지를 못했다는 식으로 보일 공산도 있어서... 실제로는 수만 대군이 대패한 상황이니 의지를 떠나 유지할 방법이 더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여진족의 입장에서보자면, 뒷날의 우리 입장에서는 입을 쩝쩝 다시면서 "아쉬운 일이었다!" 라고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당장 거기서 살고 있던 여진족 입장에서는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 내 집과 내 터전을 빼앗아간 침략자" 를 상대로, 포기하지 않고 맞서 싸워 불굴의 의지로 항전한 끝에 마침내 승리를 거둔 일이었다,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관점을 바꿔서 본다 치면....



이 전쟁은 여진족들에게 있어서 또다른 의미가 있었는데, 그전까지 흩어져 있던 여진족들이 이때 한번 서로 뭉치게 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후 요나라와의 전쟁이 벌어지자 당초에 완안부를 제외한 여진족들은 "설마 거란을 이길 수 있을까." 하고 관망하고 있었지만 아골타가 한번 승리를 거두자 이후에는 구름처럼 몰려들어 여진족의 규합이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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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티온
17/02/01 02:03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키스도사
17/02/01 02:23
수정 아이콘
항상 좋은글 감사합니다. 궁금한게 저 대참패 당시 척준경은 어디에 있었나요?

사묘아리랑 척준경이랑 맞붙으면 재밌었을꺼 같은데 크크
신불해
17/02/01 02:37
수정 아이콘
해당 전투가 벌어진 1109년에는 아마 개경에 있었을 겁니다.
작은기린
17/02/01 02:37
수정 아이콘
정말 잘 읽고 갑니다
오만과 편견
17/02/01 02:49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몽키.D.루피
17/02/01 02:54
수정 아이콘
재밌네요. 자국중심, 혹은 자민족중심주의를 걷어내고 보면 역사가 더 재밌는 거 같습니다.
히오스
17/02/01 02:55
수정 아이콘
그 시절 작은 이 땅에서 17만 30만 군이라니 대단했었고, 크게 말아잡쉈군요...
카바라스
17/02/01 05:04
수정 아이콘
한반도가 인구밀도가 낮았던 지역이 아니라.. 군사력으로 허구헌날 까이는 조선도 임진왜란 터지니 박박 긁어서 17만 대군을 뽑아냈었죠. 농사지으러 가야되니 명군 들어오면서 확 줄어들지만
다람쥐룰루
17/02/01 10:18
수정 아이콘
그 고려보다 작은 우리나라 군이 현역 60만이 넘으니....생산인력을 군으로 돌리는 방식이면 가능은 했을듯 합니다만 단기전을 노려야 하는 단점이 있겠네요
17/02/01 10:24
수정 아이콘
아무리 그래도 고려와 현대의 한국을 땅덩이만 비교하는 건 무리죠. 고려 때 인구가 천만도 안 됐는 걸요...
다람쥐룰루
17/02/01 10:32
수정 아이콘
네 그래서 아마 대군을 운용하기 위한 출혈량은 상당했을겁니다 그 군을 1년 운용하는것도 버거울정도로요
마치 우리나라가 예비군 소집으로 400만을 끌어모은것과 비견될만한 출혈량이지 않았을까 싶네요
17/02/01 03:27
수정 아이콘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왜 북벌을 할 떄 저렇게 동해를 따라서 길쭉하게 올라갔을까요. 함경산맥같은 지형때문이라고해도 너무 길쭉하게 간게 아닌가 싶은데;;
라라라~
17/02/01 03:42
수정 아이콘
여진족 대표들 데려와 연회 열어서 죽인건 진짜 비겁하네요. 피의 결혼식 고려버전이라니......
17/02/01 05:32
수정 아이콘
우리는 소설을 현실로!
아점화한틱
17/02/01 08:10
수정 아이콘
진짜 저부분은 '야만인'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상대적인건지 생각해볼만한 대목이군요... 굉장히 야만적인 희대의 뻘짓이라니...
제랄드
17/02/01 08:34
수정 아이콘
라니스터... 아니, 예종이 안부를 전하라 하더군
Austerlitz
17/02/01 09:01
수정 아이콘
------------------------------------------------------------------
윤관은 젊어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장상(將相)이 되자 비록 군중(軍中)에 있으면서도 항상 오경(五經)44)을 가지고 다녔으며, 어진 이를 좋아하고 착한 것을 즐겨 당대에 으뜸가는 명망을 얻었다.
- 고려사 열전
------------------------------------------------------------------
나는 착한 것을 즐기는 고려남자 윤관, 하지만 여진족들에겐 잔혹하겠지.

------------------------------------------------------------------
923년(태조(太祖) 6년) 마군장군(馬軍將軍)이 된 그는 개정군 3천명을 거느리고 골암진의 동산에 성을 쌓고 거처하며 북번의 추장 300명을 소집, 주연을 베풀었다. 그들이 모두 거나하게 취했을 때를 틈타 위협하니, 추장이 모두 복종하였다.
------------------------------------------------------------------
고려의 개국공신 유금필도 똑같은 계책을 써서 북방을 제압한 적이 있었다고 하니, 이 '술먹이고 뒤치기'는 고려의 시그니처 전법(?)이었나 봅니다.
(그래도 이때는 굴복만 시킨 거라 살려줬다고...)
신불해
17/02/01 12:40
수정 아이콘
추장 학살 사건은 사실 윤관이 직접적으로 엮이진 않았습니다. 동북 9성 공략은 예종 무렵인데, 추장 학살 사건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 숙종 무렵에 발생한 일이라서구요. 물론 전쟁 준비는 숙종 때부터 있었으니 북벌을 위한 포석이긴 했지만요.

최홍정(崔弘正)이라는 사람이 이를 주도했습니다. 본문에도 언급한 일이지만 마침 그때 척준경이 최홍정의 지시를 받고 밖에서 머물던 여진족을 죽이는 행동대장 역을 맡았고.
17/02/01 05:33
수정 아이콘
척준경이 석성 위로 올라가 여진족 추장 몇을 베어내자 고려군의 사기가 올라 결국 석성은 함락되고 맙니다. -> 진짜 소드 마스터네요 덜덜...
보통블빠
17/02/01 05:48
수정 아이콘
저 전투를 고려가 승리했다면 금은 건국이 힘들었을까요??
낭만없는 마법사
17/02/01 06:51
수정 아이콘
진짜 우리나란 대규모 회전에 약한 민족인 거 같아요. 수성은 잘하지만요 신불해님 생각은 어떠세요?
17/02/01 08:39
수정 아이콘
경험이 적어서가 아닐까요. 좁은 땅덩이 안에서만 아웅다웅하다보니...

고구려는 또 달랐을지는 모르겠네요.
겨울삼각형
17/02/01 10:04
수정 아이콘
회전이야말로 지휘관의 능력을 잘 보여주죠.
고려말 이성계는 회전을 잘했습니다.

그리고 위 윤관시기보다 약 90년전 여요전쟁에서 귀주대첩이야말로 자랑스러위해도 될정도의 회전 스케일입니다.
지니팅커벨여행
17/02/01 07:37
수정 아이콘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전쟁과는 별개로, 1학설이 왜 나왔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네요.
17만 대군을 투입하고도 고작 저 조그마한 땅을 빼앗았다가 지키지 못해 대패하고 돌려줬다라...
그냥 저 지역에 17만을 살게 해도 바글바글할텐데 말이죠.
개다가 9성간의 거리가 너무 멀다는 사서의 내용까지 있는데 겨우 저 영역을 가지고 9성이라 주장했다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주장인데 혹시 식민사관의 잔재인지 궁금합니다.
사실 17만 군사에 고려 국력 정도면 3학설 정도 되어야 납득이 될까말까 하거든요.
마우스질럿
17/02/01 12:13
수정 아이콘
저도 3학설이 맞는거 같은데

" 멀어서 관리하기 힘들다. " 는 언급 때문입니다.

개경에서 전라,경상도가 먼거리인지 함경남도 일대가 먼거리인건지 당장 말타고 달려봐도 거리감각이 나올텐데요

여진민족이 돌려달라고 할 좋은 평야라면 러시아/중국의 국경으로 갈라진 항카호인근의 흥개평야 일대가 아닐까 생각했었습니다.
신불해
17/02/01 12:53
수정 아이콘
3설이나 혹은 그 비슷한 위치를 주장할때 제일 문제가 바로 해당 본문에 나온 전투입니다. 일단 동북 9성의 경계는 공험진이라 그 위치에 따라 9성이 달라지는데...

"길주를 구원하러 가다가 공험진에서 패배했다." 는 건데, 지도에서 보면 알겠지만 3설의 공험진 위치와 길주의 위치는 엄청난 거리 차이라 이게 뭔가 말이 잘 안맞거든요. 참고로 공험진이 회령 혹은 그 근처라는게 널리퍼진게 세종대왕 때부터인데, 이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세종대왕이 '공험진 공정' 주작을 시도 한게 아닌가 하는 말도;;

1학설을 주장하는 경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한가지 이유가 앞서말한 "길주를 구원하러 가다가 공험진에서 패배했다." 는 것 떄문에, "그럼 당연히 공험진은 길주 이남에 있어야 하는거 아니냐." 는 겁니다. 순암 안정복이 그런 말을 했는데 앞서 말한 공험진이 회령에 있다는 설에 대해서는 세종에 주작했다고 은근히 돌려까기도...


그게 아니라면 성호 이익의 경우는 아예 "실제 동북 9성 위치는 이러저러하고, 저 북쪽에 공험진이 있다는건 실제로 거기에 뭘 설치했다기 보다는 가서 그냥 찍고 오고 거기에 뭐 하나 세워놓은거다." 라고 하는등... 여러모로 말이 많습니다.
17/02/01 07:53
수정 아이콘
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아점화한틱
17/02/01 08:13
수정 아이콘
좋은글이네요. 윤관의 동북9성 축조는 배울때마다 항상 두루뭉술하게(게다가 위치도 불분명하다는 말과 함께) 서술하고 또 힘들여 뺏은영토를 다시 어이없이 반환했다는점이 이해가 안갔었는데 이런 사연이 있었군요... 중세라고 할수있는 고려시대에 17만 병력이라면 정말 덜덜하네요. 유럽이었다면 한 국가의 십자군병력으로만쳐도 굉장히 많은 규모의 군대네요 크크 그리고 둘다 희대의 뻘짓이었다는것도 공통점일지도
17/02/01 08:21
수정 아이콘
교과서에서 본 내용과 달라서 좀 충격을 받았네요.
언제나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17/02/01 08:57
수정 아이콘
역사는 역시 교차검증이 필요하죠.
나는 조석이다
17/02/01 09:17
수정 아이콘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17/02/01 10:20
수정 아이콘
완안아골타가 저때 벌써 활약하고 있었군요. 잘 읽었습니다. 잘 알려면 금사도 뒤적뒤적 해봐야겠네요.
무무무무무무
17/02/01 10:26
수정 아이콘
하긴 인종이 즉위하고 금나라가 사대를 요구했을 때 다른 사람도 아닌 척준경이 사대에 찬성했던 것만 봐도 뭔가 있었던 거죠.
그 시절에 최전선 주력 7만이 전투 한 번에 날아갔으면 후덜덜덜;;;;
happyend
17/02/01 11:12
수정 아이콘
왕께서 죽으라 보낸 전장에서 살아돌아왔으니....
라는 도깨비의 무대는 저곳이었을것입니다.
왜냐하면...숙종은 강성해진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귀족자제들로 이루어진 별무반을 만들어 사지인 북방으로 몰아넣을 계획이었으니까요...
17/02/01 11:43
수정 아이콘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요, 저 동여진 땅은 원래부터 여진족이 살던 터전이었던 건가요? 아니면 여진족이 고구려 멸망 등으로 생긴 힘의 공백을 이용하여 저쪽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인가요?
17/02/01 11:50
수정 아이콘
새로운 사실을 또 알아갑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17/02/01 11:52
수정 아이콘
윤관의 9성을 왜 반환했을까 교과석보고 궁금만하고 넘어갔는데 이런 사실이 있었군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wish buRn
17/02/01 12:00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봤습니다.

당시 고려는 저 땅에 왜 17만 대군을 들여부었을까요?
지금 시점으로도 척박한 땅인데
신불해
17/02/01 12:35
수정 아이콘
이 전투 이전에 강성해지는 여진족 완안부와 고려군이 묘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다가, 본문에 나온 석적환의 군대를 임간이라는 장수가 공을 탐내 함부로 공격했다가 오히려 역공을 받아 군대 절반이 궤멸 당하는 대패를 당한 적이 있습니다.(이때 패배한 아군을 단신으로 구원하면서 등장한 사람이 척준경)

완안부가 영향력이 커지는것도 신경 쓰이는데, 마침 야만족 정도로 여겼던 여진족에게 당한 패배가 너무 충격적이라 당시 왕이었던 숙종이 먼저 선빵을 날려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별무반을 창성한게 원인입니다. 마침 수도를 천도하려다가 실패했던 숙종이 그 울분과 정력을 모조리 북벌 준비에 동원했고(기록에 따르면 아예 잠도 안 잘 정도로 여기에 몰두했다고..) 이렇게 말년의 숙종이 나라 전체의 힘을 기울여 준비하던 사업을 이어받은 예종은 선왕의 유지를 잇는 차원도 있어서 적극 지원했습니다.


그래도 전쟁이 1년이나 갈지는 상상을 못했고, 적당히 여진족 쫒아내고 성 지으면 끝날 줄 알았는데... 이후에 나라 살림도 말이 아니게 된 상태에서 대패를 당한 뒤, 여진족이 알아서 숙여오자 낼름 동북 9성을 돌려준 겁니다.


완안부가 위협적이기 전에 먼저 견제한다는 의도 자체는 확실히 좋았을 수 있으나, 문제는 과정에서 여러 만행으로 완안부 이외의 여진족들에게도 적대의지를 불러일으키고, 동북 9성을 설치한 방어라인도 사전 정보 부족으로 엉망으로 축성했던게 패착이었습니다.
마우스질럿
17/02/01 12:08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다만 여진은 원래 함경도 일대에서 살았는가? 라는 의문을 가져보면 언급하신

[당장 거기서 살고 있던 여진족 입장에서는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 내 집과 내 터전을 빼앗아간 침략자" 를 상대로,
포기하지 않고 맞서 싸워 불굴의 의지로 항전한 끝에 마침내 승리를 거둔 일이었다]
라는 말에 동의하기는 어려울듯싶은데요

당장 고려 왕건이 정한 국시도 북방영토 회복 이었고

함경도 일대의 영토의 원래 영유권 문제에 있어서

고구려시절에는 여진민족이 신라,백제와의 사이인 강원도 일대로 이주해서 살았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발해시절에는 대 일본 무역창구역할을 하였던 함흥,흥남인데 이 일대가 모조리 여진민족으로 구성되었다는것도 의문이고..
신불해
17/02/01 12:27
수정 아이콘
고구려, 발해는 수백년전의 이야기인데 못해도 수대전부터 이곳에서 살던 이 무렵 여진인들에게 "우리가 고토를 회복해야겠으니 우리 땅에서 나가라." 라는 건 당황스러운 이야기겠죠. 최소한 여진인의 입장에서 당시 양민 학살하고 마을에 불 지르던 고려군이 "내 땅을 뺏어간 적들" 이 아니라면, 거꾸로 생각해면 집이 사라진 여진인들이 이제 어디서 사는가 생각해보면 되는 일입니다.


다른걸 다 떠나서 그게 고려가 동북 9성 공략에 실패한 큰 원인 이유 입니다. 완안부는 그렇다치고, 고려에 우호적이었을 수 있는 갈라전의 여진족들을 불러서 암살하고 양민학살하고 불을 지르는 식으로 대응하니, 이들이 완안부에 적극협력해서 현지의 상황을 흡사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 7년차 같은 상황으로 만들어버렸으니까요.


실제 갈라전의 여진족 중에서는 완완부의 공격 등에 몰려 고려로 귀순해오는 사람들이 있는등 반 완완부, 친고려파 등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추장 암살과 양민학살 등으로 투항할 수 있을 가능성이 있었던 여진족들도 전부 적을 돌린채 여진족이 옥쇄 각오하고 완안부에 협력해서 싸워 결국 전쟁이 실패하게 되었으니...

물론 고려 역시 이 땅을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할 명분이 있고, 이를 바탕으로 전쟁을 할 수 있는 이유도 있긴 할겁니다. 그래도 어쨌거나 갈라전의 여진족이 죽을 각오로 싸우게 된 '동기'인 "내 터전을 뺏어간다."는 부분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17/02/01 15:21
수정 아이콘
발해의 주요 민족 구성은 말갈족이였습니다.
고구려인들은 수도 근처에 거주했지 그 나머지 지역대부분은 말갈족들이 살았다고 보면 됩니다.
그리고 대조영 자체가 고구려화된 말갈인입니다.
앙겔루스 노부스
17/02/01 15:44
수정 아이콘
발해문제 관련해서는 재일교포 역사학자 이성시의 글을 참고하면 도움이 됩니다. 발해시절 말갈족은 단순히 대씨 왕가의 신하가 아니고, 사실상 반독립세력 복속세력에 가까웠어요. 소수의 고구려 고위층과 다수의 말갈족 중하위층으로 구성된 나라가 발해였습니다.
스덕선생
17/02/01 14:21
수정 아이콘
솔직히 옛 고토 운운은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게 요구한 것과 비슷하다고 봅니다. 거기에 현대적 영토개념이 나온게 백여년도 안 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냥 도둑놈 심보죠. 고려가 여진족을 사람 말 하는 짐승으로 생각해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미국의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처럼 추한 역사인데 이걸 감추고 일본의 제국주의 미화를 비판하면 사실 다른나라에서 비웃을 일이죠. 우리부터 부끄러운 역사들도 숨기지 않고 가르쳐야합니다.
울어주기
17/02/01 14:37
수정 아이콘
역사는 알면 알수록 더 재미있는것같습니다. 도대체 멀쩡한 성을 왜 줬나했더니 저런 비하인드가 있었네요
사랑해조제
17/02/01 15:47
수정 아이콘
아무리 국력이 강하다고 그래도, 17만 대군의 원정은 무리였지 않았나 싶네요. 점령 후에 사민을 한 것도 아니고, 지역에 사는 토착민들을 완전히 적으로 돌린데다가, 토착민들에게 우호적인 외부의 적까지 있는 상태에서… 거기다가 지형조차도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 아니라니?! 리스크가 크고, 또 중간에 그만두기에는 정치적으로 중요했던 원정이 아닌가 싶네요.
17/02/01 19:47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1학설은 너무 터무니 없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저거 먹으려고 중세시대에 17만을 보냈다는게 말인지 방구인지...
사르트르
17/02/02 10:02
수정 아이콘
더 알고 싶으신분들은 임용환저 전쟁과 역사2권 추천합니다. 전쟁역사를 다룬 책인데 로마인이야기처럼 술술 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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