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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6/11/26 20:09:13
Name dk79
Subject [일반] 초등학교 회장 선거의 민주주의
내가 초등학교 때는 회장 선거를 했었다.
옛날에는 담임 선생님이 반장을 지정해주던 날도 있었다고 들었는 때
우리 때는 반장을 지정해주지도, 심지어 반장 선거도 아닌 회장 선거를 했었다.
왜 이름이 반장이 아니라 회장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내가 십수년이 지난 지금도 회장 선거가 머리 선명한 이유는
그 특유의 기묘함 덕분이다. 기묘함이라고 할까. 부조리함이라고 할까. 생각날 때마다 시니컬하게 웃게 되는 그런 것 말이다.

우리 학교는 전학년 각 반마다 회장을 뽑고 4, 5, 6학년을을 투표권을 주고 전교회장을 뽑게 하였다.
그런데 전교회장에 당선되는 아이들의 공약은 정해져 있었다.
배급우유를 흰 우유가 아닌 초코우유, 딸기우유로 만들겠습니다.
학년 별로 반대항전 축구, 피구리그를 신설하겠습니다.
점심시간에 방송실에서 최신가요를 틀어주게 만들겠습니다.
공약이 소개되고 나면 전교회장과 친한 아이들과 정말 저게 실현될거라 믿는 아이들이 엄청나게 환호했고
어이없게도 3년 내내 저 세 공약을 내세웠던 아이들이 당선되었다.

3년 내내 저 세 공약을 내세웠던 아이들이 당선되었다. 그렇다 저 공약은 내가 졸업할 때까지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애초에 전교회장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는 사안들이 공약으로 소개되었고
학교 측과 아무 협의 없이 내세운 공약으로 초등학생 전교회장이 선생님의 반대를 뜷고 학교를 바꾸기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전교회장이 당선되고 나서 공약 이행을 추궁하는 아이들도 없었고
정말 실현될 거라 믿은 아이들의 물음은 "선생님이 안된대" 한 마디에 끝나곤 했다.
첫 투표를 하는 4학년 때는 처음 맞는 고학년만의 투표에 나도 저 공약에 열광을 했었다.
그런데 기묘한 점은 5학년 6학년이 되도 같은 공약에 아이들이 열광했다는 점이다.
2년 동안 이건 전교회장이 아니라 교장선거를 해도 바뀔까 말까구나라는 것을 온 몸으로 느꼈음에도
6학년 전교회장 선거에서 똑같은 공약이 발표되고 아이들이 환호했던 그 기묘함이 잊혀지지 않는다.
내가 6학년 때의 선거에는 꽤 착실한 이미지였던 아이가 지킬 수 없는 공약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며 정말 현실적인 공약 내놓기도 했다.
무슨 공약이었는 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거대담론도 허황된 공약도 아닌 꽤 사실적이고 쓸모 있었던 공약이었던 기억이 든다.
당시 선거 따위에 관심없던 애들은 제외하면 딱 절반으로 지지가 나뉘었다. 초코우유 대박이라는 파와 어차피 저런건 안된다는 파
나와 2년 동안의 공약실천을 본 아이들은 말도 안되는 공약보단 현실적 공약이 당선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선거결과는 큰 표 차로 탈락이었다.
나의 4학년 때처럼 순진했던 4, 5학년들의 몰표 때문이었을까. 대체 그 표 차이는 뭔지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다.
갑자기 글을 쓰다 보니까 어쩌면 내 4학년 때 6학년 애들도 나와 같은 어이없음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 기억도 잘 안나는 초등학교 전교회장 선거가 요즘 들어 자꾸 떠오르는 이유는 국가선거도 이와 무엇이 다른가 싶은 생각이 들어서이다.
대선 총선 때마다 매번 반복되는 공약들. 동남권 신공항, 반값등록금, 국민소득 3만불, 복지확대, 경제활성화, 지역개발, 예산폭탄.
그리고 선거가 끝나자마자 공약은 하늘로 날아가 버린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은 반대할 선생님도 없는데 대체 무엇 때문에 아무 시도도 없이 공약이 날아가 버린단 말인가?
지지자들은 마치 스포츠경기에서 상대팀을 이겼을 때처럼 기뻐하고 공약 같은 건 선거가 끝나자마자 머리 속에서 날아가 버린지 오래다.
우리가 이겼어! 내가 그 팀 팬이라고! 내가 이겼어! 뭘 어쨌던 간에 무조건 이기고 봐야되는거야 이겼으니 됐어!
오히려 공약 이행을 묻는 것은 다른 후보의 지지자들이다. 공약 왜 안 지키나? 언제 이행할 것인가?
공약 이행은 당선된 후보 지지자가 바라던 것 아니었던가?
공약이 마음에 들어서 후보를 지지하였으면 당연히 당선자 지지자가 공약이행을 먼저 요구하는 것이 이치에 맞는 것 아닌가.
심지어 선거기간 동안 공약에 대해서 유세하던 지지자들이 나중에서 공약을 안지키는 이유를 유세하기도 한다.
이런 선거가 매번 4년마다 5년마다 반복된다. 내 초등학교 전교회장 선거가 1년마다 똑같은 공약으로 반복되듯이...
초등학교 6학년 마냥 대책없이 공약을 내세우고, 초등학교 4학년 마냥 아무의심 없이 후보에게 투표한다.
똑같은 공약이 다음 선거에 반복된다. 그러면 그 공약을 보고 또 투표한다.
국민을 개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매 선거마다 국민이 그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정말 지겹고 신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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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1/26 20:31
수정 아이콘
저같은 경우는 심지어 고등학교 1학년때 당시 점심시간을 50분에서 1시간 30분으로 늘려준다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공약으로 세운 후보가 전교회장으로 당선되었었죠. 그가 전교회장으로 무슨일을 했는지 아무도 몰랐지만 리더십전형으로 수도권 사립대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16/11/26 21:27
수정 아이콘
공감하면서도 먹먹한 글입니다.
추천드리고 갈게요.
16/11/26 21:35
수정 아이콘
전 중학교때 학교 매점이 없었는데, 매점 세우는걸 추진하겠다고 해놓고 회장 당선 뒤
아무것도 안한 놈이 생각나네요 크크.
민사고 간다고 까불대더니 어찌되었는지는 모르겠고...
왼오른
16/11/26 22:08
수정 아이콘
전 일본 하이틴 만화를 볼 때마다 느끼는게 있습니다. 초등 중등 고등학교 때까지 선생님 누구도 학칙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았고 따로 비치되지 않았죠. 아이 부모들도 교칙은 신경쓰지 않고 뭘 가져다 주는 것에만 몰두를 했고, 선생님 또한 네가 학칙을 위반했으니 어떤 벌을 받게 된다고 설명하지 않았죠. 때리거나 기합을 주거나 욕을 먹거나...

20년이 지나서 사회에 발을 들이고 나서 쭈욱 주변을 관찰해 보면 공동체의 규칙에 대해서 무신경합니다. 힘으로 해결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퍼져있어요.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회장선거에서 모든 학생들이 내가 무엇을 요구할 수 있고, 회장은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되는 자리인지를 모른다는 겁니다.
도로시-Mk2
16/11/26 22:10
수정 아이콘
[ 국민을 개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매 선거마다 국민이 그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정말 지겹고 신물이 난다. ]

저도 완전히 동감합니다...
Kings'speech
16/11/26 22:22
수정 아이콘
선거는 스포츠가 아니고 우리는 서포터즈가 아니라 통치 행위의 결과를 온 몸으로 살아내야할 사람들이죠. 당선 가능한 한 쪽이 너무 개판이다 보니 반대쪽도 무조건적인 지지를 하는게 맞다는 생각이 퍼지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팬덤정치는 적당히...
16/11/26 23:01
수정 아이콘
대선 전에 PGR에서 봤는데, 박근혜 공약 중에 몇 개나 지킬것 같냐는 댓글에 반대로 야당에 휘말려서 박근혜도 비슷한 공약들은 냈지만 야당과는 달리 이행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박근혜를 지지한다는 댓글이 생각나네요. 보는 순간 화가 확 나면서 기가 차더군요.
16/11/27 00:35
수정 아이콘
그런 사람들은 지금 와서도 다음 1번은 다를거라고 믿고 있겠죠.
깊이에의강요
16/11/27 09:13
수정 아이콘
와... 대단하네요. 할 말이 많지만 하지 않겠습니다...
cadenza79
16/11/27 05:44
수정 아이콘
미국 대통령선거도 그런데요 뭐...
래쉬가드
16/11/27 06:51
수정 아이콘
민주주의는 선거에서 공약을 달성 못했을때 책임을 묻는 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최소한 왜 공약을 달성못했는지 설명하는 시간이라도 갖는걸 의무화하는거로...
투표 전에는 TV토론도 하고 온국민이 즐겁게 지켜보는 쇼라도 하는데 임기말에 대통령 불러다 앉혀놓고 혹독하다싶은 공약청문회라도 해야 무서워서라도 공수표남발을 좀 억제할수있지 않을까요
그놈의 온정주의네 예우네 하면서 떠나가는사람 곱게곱게 보여주는 풍토가 이젠 공약까지 가볍게 만들어버리는것 같습니다.
권력자들이야 그렇다치고 투표말고는 정치참여수단도 별반없는 국민들까지 공약 지키기를 우습게 생각한다는건 선거가 그냥 하나의 거대한 인기투표이고 쇼라는걸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죠.

글쓴님 글에 공감하는게 초등학교 반장선거부터 공수표를 남발하다보니 선거는 단지 내가응원하는 권력자를 탄생시키는 이벤트이고 임기말에 뭐 그동안 수고했겠거니 하고 투표권자들도 넘어가는 문화가 체득되다보니 이게 커서도 마찬가지인것 같아요
아니면 거꾸로 나랏님도 약속 안지키는데 한낱 초등학교 반장이 뭔 공약이야 하고 거꾸로 내려왔을수도 있고요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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