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세상을 떠난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전 대통령/총리의 추모식이 오늘 세계각국 정상급 인사들의 참석 아래 치뤄졌는데, 이 분은 보통 1993년 오슬로 협정(이스라엘의 라빈 총리와 팔레스타인의 수반 아라파트의 악수로 유명한) 주도와 1994년 노벨 평화상 수상으로 알려져 있죠. 이스라엘의 주류 정치인들 중에서는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에 가장 전향적으로 입장을 바꾼 인물이기도 합니다.
1992년 시작된 이츠하크 라빈 총리의 2기 노동당 내각에서 외무장관이었던 페레스는 라빈을 설득해 팔레스타인 국가 창설을 최종적 목표로 하는 오슬로 협정을 서명하게 합니다. 요르단과의 평화협상 체결도 페레스의 역활이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을 반대한 유대인 근본주의자에게 라빈이 1995년 암살된 후 페레스가 총리직을 물려받게 됩니다. 페레스가 라빈의 팔레스타인 정책을 계승하기는 했지만, 라빈에게 라이벌 의식이 있었던 페레스는 자신만의 안보적 성과를 먼저 이룬 후 총선을 실시하고 그 다음으로 오슬로 협정의 최종 단계를 이행하는 청사진을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페레스가 염두에 두고 있던 성과라는 것이 팔레스타인 저항단체 하마스의 폭탄제조 전문가 예히야 아야시의 제거였습니다. 이스라엘인 50명 가량의 살해에 연류되어 있던 아야시를 이스라엘 정보당국이 제거하는데 성공하자 페레스는 수개월내에 총선를 실시하기로 선언합니다. 하지만 아야시를 복수하기 위해 하마스는 2개월에 걸쳐 이스라엘의 버스들에 대해 연쇄테러를 일으키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당시 순풍이 불고 있던 팔레스타인과의 평화협정 흐름은 제동이 걸려버리고 맙니다.
몇달후 벌어진 1996년 총선에서 페레스는 강경파 리쿠드당의 네타냐후와 맞서게 되는데 팔레스타인 평화 협정 체결에 상당한 정치적 자산을 투자한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는 이스라엘 선거에 개입해 페레스측을 여러모로 도와주기까지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레스는 아슬아슬한 격차(50.5%-49.5%)로 네타냐후에게 정권을 빼았깁니다. 페레스가 차라리 라빈 암살 직후 조기총선을 실시했다면 압승을 했을텐데 그렇지 않았던게 패착이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그렇듯이 저 당시의 네타냐후는 팔레스타인과의 평화 협정에 관심이 없었고 오슬로 협정은 완전히 동력을 상실해 버립니다. 사실 라빈 총리가 암살되는 분위기를 조장하는데 있어서 네타냐후의 책임이 크다고 하죠. 이스라엘의 우파 정치인들이 팔레스타인의 테러공격으로 인한 국민들의 공포와 분노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는데 능했던 반에 페레스는 늘 고상한 입지를 견지했고, 이게 그가 인생에서 많은 정치적 실패를 겪은 중요 이유라고 합니다.
총리로써 페레스가 팔레스타인과의 평화라는 대업을 이루는데 실패했다고는 해도 이미 먼 과거에 그는 이스라엘에게 다른 큰 안보적 유산을 남기는데 성공했습니다. 바로 핵무기 보유입니다. 건국 초기 이스라엘의 안보적 위치는 매우 위태했는데 이스라엘의 건국의 아버지이자 초대 총리인 벤구리온은 이스라엘의 생존을 위해 핵무기 보유가 필요하다고 보았고 이스라엘 군부 내에서의 눈부신 부상으로 "신동"이라는 별명이 붙은 페레스에게 그 책임을 맡기게 됩니다.
1923년 폴란드에서 태어난 페레스는 1934년 부모를 따라 영국 위임통치하의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합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로 이주한 유대인들이 그랬듯이 처음엔 협동농장인 키부츠에서 농업에 종사하다가, 벤구리온이 주도하던 유대인 방위기구인 하가나 운동에 가입하게 됩니다. 여기서 페레스는 벤구리온을 강력한 정치적 후원자로 얻게 되죠. 1948년 5월 이스라엘이 독립하자 총리에 취임한 벤구리온에 의해 25세의 페레스는 이스라엘 해군의 총수로 임명되고, 1952년에는 30세의 나이로 국방장관에 임명이 됩니다.
이스라엘의 핵개발 논의는 1950년대 중반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정부 수뇌부들 사이에서는 핵무기 개발을 위한 원전 건설을 이스라엘 자체적으로 이뤄내느냐 아니면 이미 핵기술을 보유한 국가의 도움을 받느냐에 대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페레스는 후자에 속했는데 그의 방식이 정책화가 됩니다. 이 임무의 완성을 위해 이미 국방장관이었던 페레스는 핵개발 사무국장직도 겸직하게 됩니다.
당시 미국의 아이젠하워 정부는 "평화를 위한 원자력" 이라는 구호아래 개발도상국들에게 원자력 기술 지원을 약속했지만 이건 관련 시설들이 미국과 IAEA의 감시를 받는다는 전제조건이 붙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핵무기 개발로 이어질수는 없었습니다.
대신 페레스가 눈을 돌린 대상이 프랑스였는데, 이집트의 나세르가 일으킨 수에즈 운하 국유화 사태로 프랑스와 이스라엘 양국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상태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총대를 매고 이집트를 공격해 영국과 프랑스에게 개입의 명분을 제공하기로 했고, 그 댓가로 프랑스는 과학자들을 보내 이스라엘 네게브 사막의 디모나에 원자로와 지하 재처리 시설을 지어주고 우라늄을 공급해주기로 합니다. 이스라엘의 과학자들이 프랑스내의 원자력 시설들을 방문하는 것도 허용되었습니다.
당시 제4 공화국 시절의 프랑스 정부는 나치 홀로코스트를 극복한 이스라엘에 동정적이어서 두나라의 지도부는 인간적으로도 친해집니다. 40년전 유대인 과학자 바이츠만이 영국 외무장관 벨푸어를 감동시켜 벨푸어 선언을 이끌어내는데 도움이 되었듯이, 페레스의 열정과 비전도 프랑스 정치계급에게 그러한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페레스 자신의 중도좌파적 이념성향도 그렇고, 서구권의 고등교육도 받았던 배경이 도움이 되었죠 (오늘날 미국의 오바마와 클린턴도 페레스를 높이 여기고 극진하게 대했다고 하죠). 실제로 이스라엘의 핵개발이 문제에 처하면 페레스는 각의를 열고 있는 프랑스 수상을 찾아가 즉각적으로 도움을 청하고 응답을 받을 수 있는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알제리 내전으로 인해 제4 공화국이 무너지고 드골이 대통령이 되는데, 그는 프랑스와 이스라엘의 깊은 협력관계에 대해 놀라고는 중지 명령을 내립니다. 하지만 그동안 페레스는 프랑스내에 깊은 인맥을 형성해 놓은 상태였고 프랑스 원자력 담당 장관은 드골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과의 핵개발 협력을 비밀리에 2년간이나 더 지속시켜 디모나 핵 시설이 완성될수 있게 됩니다.
디모나 핵시설을 완성시킨 후 이스라엘이 겪은 어려움이 20톤이나 되는 중수의 확보였는데 미국은 핵 시설 감시를 조건으로 내걸었고 드골은 제공 자체를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페레스는 돌파구를 마련하는데, 바로 노르웨이였죠. 당시 자체적으로 평화로운 핵 프로그램을 진행중이었던 노르웨이는 이스라엘에게 중수를 팔기로 합니다. 사실 이건 페레스가 노르웨이에게 중수는 평화적인 실험용 발전소를 위해 필요하다고 거짓말을 해서 얻어낼수 있었죠. 훗날 오슬로 협정시 페레스가 노르웨이를 방문했을때 노르웨이 정부가 저 과거의 거짓말을 가지고 페레스를 좀 갈궜다고 하네요.
중수 확보라는 가장 큰 어려움을 극복한 이스라엘은 플루토늄을 비축하기 시작했고 몇년 후인 1967년, 네게브 사막 지하에서 핵폭탄 모형을 가지고 임계전 실험을 하여 핵보유국이 되는데 성공합니다. 실제로 핵실험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 이스라엘과 핵을 공동연구한 프랑스가 1960년 핵실험을 성공적으로 실시했기 때문이죠.
페레스는 1960년대에 정치에 입문을 해서 훗날 노동당의 수장이 됩니다. 1970년대에 그는 다시 잠시 국방장관이 되는데 이때 또 다른 국제적 고립아인 남아공의 백인정권과의 핵개발 협력을 추진합니다. 양국간의 협력내용 자체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남아공 핵개발의 족적과 이것이 오늘날 북핵사태에 의마하는 바에 대해서 언젠가 한번 써올려 볼까 생각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