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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6/04/02 10:57:57
Name santacroce
Link #1 http://santa_croce.blog.me/220344726234
Subject [일반] 푸에르토 리코 이야기: 미국의 51번째 주가 되면 행복할까? 1

앞글 아사타 샤커 이야기에서 잠깐 언급된 푸에르토 리코 이야기입니다. 원래 이글은 2015년 초 작성 되었습니다. 


연초부터 라틴 아메리카의 몇몇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간헐적으로 연재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베네수엘라, 아르헨티나 소식을 전했는데 이번에는 푸에르토 리코 (Puerto Rico)에 관한 글입니다.  

가끔 농담 삼아(?) 사람들이 던지는 말 중에 이럴 바에는 차라리 한국이 미국의 한 주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현실을 개탄하는 자조적 의미임을 감안해도 미국에 대한 일방적 숭배에 가까운 주장을 보면 좀 당혹스럽기까지 합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1980년대 이래 정치사회운동의 강력한 동인이었던 전투적/감상적 반미주의의 퇴보에 대해서는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긴 합니다. 

그런데 푸에르토 리코의 근현대사를 보면 미국의 한 주가 되고자 했던 많은 사람들의 일방적 짝사랑과 비록 소수였지만 목숨을 걸고 이를 저지하고 독립을 이루고자 했던 일단의 사람들을 마주치게 됩니다. 또한 어정쩡한 전략으로 실리를 추구하자는 실용주의 노선의 승리도 인상적입니다. 

짧은 지식이지만 푸에르토 리코의 격동의 근현대사를 정리해 봅니다.  

 

푸에리토 리코(Puerto Rico) 개요

 

푸에르토 리코의 지리적 위치를 보면 아래 지도처럼 미국에서 멀어지는 순으로 쿠바, 히스파놀라(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 다음에 있습니다. 푸에르토 리코는 다른 두 개의 섬들과 역사(스페인 지배)와 산업(설탕 산업)에 있어서 유사성이 매우 높지만 인종 구성에 있어서는 구별되는 면도 있습니다. 쿠바의 주요 인종이 흑인 노예 후손인 점과 달리 푸에르토 리코는 인구의 75.8%가 백인이고 흑인은 12.4%에 그치고 있습니다.

 

* 푸에르토리코의 위치

 

푸에르토 리코는 원래 카리브해의 다른 섬들과 마찬가지로 티아노 원주민의 터전이었으나 1493년 콜럼버스의 두 번째 항해 중 콜럼버스가 이 섬에 도착하면서 운명이 바뀝니다. 그 후 스페인의 식민지로 400년을 남아있다가 1898년 미군이 상륙한 이후 미국의 지배를 받습니다.

현재는 인구 약 370만 명이 거주하며 미국의 해외 영토로 외교/국방은 미국 연방정부가 담당하지만 예산, 행정, 사법(제한적이지만) 체계는 다른 50개 주와 비슷한 위치입니다.

사실 일반 50개 주에 비해서 자치권이 훨씬 큰 편인데 예를 들어 연방정부에 별도의 소득세를 내지 않고 있고 있습니다.  

푸에르토 리코 사람들은 미국 시민권을 부여받고 있지만 미국 대통령이나 상하원 선거의 투표권이 없습니다.(미국 본토로 이주하면 투표권은 회복됩니다.) 

 

독립의 염원을 담았던 금지된 깃발

 

라틴아메리카의 대부분이 그랬듯이 푸에르토 리코도 수백 년의 스페인 지배를 받아 왔습니다. 

그런데 스페인의 라틴아메리카 식민지의 지배력은 19세기 들어 현격히 약화됩니다. 결국 19세기 중반을 넘어서면 스페인은 카리브해 해의 쿠바와 푸에르토 리코와 같은 인근 섬들로 영향력이 제한됩니다. 

점차 카리브해의 식민지에서도 토착 자산가와 지식인을 중심으로 스페인으로부터 독립(또는 자치)을 꿈꾸기 시작합니다. 푸에르토 리코에서도 1868년 Lares라는 지역에서 반 스페인 봉기가 일어났으나 스페인에 진압되어  지도급 인사들이 외국으로 망명을 떠났습니다. 이들의 주요 망명지 중 하나는 미국의 뉴욕시였는데 1892년 일단의 망명객들이 푸에르토 리코를 대표하는 깃발을 만들었습니다.(아래 그림의 왼쪽 참조)

흥미 있는 점은 독립인사들이 만든 푸에르토 리코 깃발이 쿠바 깃발과 색깔만 다를 뿐 똑같다는 것입니다. 또한 색깔을 보면 미국 성조기의 색과 거의 동일합니다.

실제 푸에르토 리코의 깃발은 쿠바 깃발을 참조해서 만들었습니다. 스페인 식민지 시절부터 쿠바와 푸에르토 리코는 매우 밀착되어 있었는데 특히 설탕산업이 이 지역의 핵심이었던 점과 영토의 크기나 주민수 등에서 쿠바가 주도적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실질적으로는 자치권)을 얻으려는 노력에 있어서도 푸에르토 리코 지도자들은 자신들을 쿠바혁명의 푸에르토 리코 지부라고 소개할 정도였습니다.  

또한 쿠바나 푸에르토 리코 깃발 모두 미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물론 쿠바 깃발은 성조기보다는 멕시코로부터 갓 독립한 텍사스의 론스타 깃발을 참조하였습니다.) 역내 최대 강대국이자 미국 혁명의 높은 이상에 대한 카리브해 지식인들의 흠모가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깃발은 1898년 스페인 지배 종식까지는 물론이려니와 그 후 1952년까지 무려 60년간 공식적 사용이 금지되는 비운의 깃발이 됩니다.  

 

* 푸에르토 리코, 쿠바, 미국의 깃발

 

 

미국 점령의 의미: 식민지 지식인들의 고민

 

푸에르토 리코 독립인사들은 스페인의 힘이 점점 다해가자 1897년 대표단을 꾸려 스페인과 협상에 들어가 결국 11월 25일 자치권을 인정받습니다. 하지만 카리브해와 태평양의 주도권을 노린 미국의 참전은 푸에르토 리코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1898년 4월 미국이 스페인과 전쟁을 개시해 한 해가 다 가기 전에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미국은 전쟁 배상을 논의하기 위해 스페인과 파리조약을 맺게 되는데 이 자리에서 쿠바, 푸에르토 리코, 필리핀, 괌 등의 스페인 지배를 종식하기로 하고 특히 필리핀, 괌, 푸에르토 리코는 미국이 직접 지배(식민지)하기로 합니다. 독립국 지위를 인정받은 쿠바, 파나마, 아이티, 도미니카 공화국마저도 실질적으로는 상당 기간 미국의 보호령으로 전락하였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푸에르토 리코 점령은 지식인들에게 매우 복잡한 고민을 던져 주었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1897년 스페인으로부터 이미 자치권을 얻었는데 스페인이 무슨 권한으로 미국에 넘긴 것이냐는 적법성 시비도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물론 부질없는 문제 제기로 그쳤겠지만요.) 

하지만 미국의 점령을 반기는 사람들도 의외로 많았습니다(사실 대부분의 지배 엘리트가 환영했습니다.). 깃발에서 보이듯이 당시 라틴아메리카 지식인에게 미국은 지금 천조국이라며 부르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이상 국가였기에 미국의 점령을 미국의 정식 주로 편입되는 발판으로 보고 반겼습니다.  

경제적으로도 미국의 영토로 편입되는 것은 푸에르토 리코의 많은 자산가들에게는 굉장한 기회였습니다. 당시 푸에르토 리코의 최대 산업은 해안 지역의 설탕산업이었습니다. (원래 카리브해 최대 설탕산업 기지는 아이티였으나 검은 자코뱅 혁명 이후 그 지위는 쿠바로 넘어갔고 푸에르토 리코 설탕산업도 함께 발전합니다.) 그런데 1850년 이후 경쟁이 격화되면서 푸에르토 리코의 설탕산업은 침체기 접어들었습니다.

반면 역내 최대 설탕 소비국인 미국은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수입 설탕에 대해 높은 관세(15%)를 물렸기에 푸에르토 리코 설탕 업자에게는 그림의 떡이었습니다.

당연히 푸에르토 리코 설탕 업자들은 미국에 편입되는 것은 관세를 면제받을 수 있는 황금의 기회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푸에르토 리코의 모든 산업이 미국의 점령으로 좋아진 것은 아닙니다. 내륙 산악지역의 커피 산업은 오히려 반대의 운명에 직면하였습니다. 그동안 구축해온 카리브해 국가들과의 연계망이 무너지고 미국에서 선호하는 브라질 커피 대비 경쟁력도 낮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즉, 푸에르토 리코가 미국에 편입되면 커피산업은 퇴출 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그럼에도 초기에는 대부분의 식자층이 미국의 한 주가 되기(statehood)를 꿈꾸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  1900년에는 미국 편입을 목표로 하는 연방당(Federal Party)이 창립되어 열성적 운동을 펼치기도 합니다. 이들 열성 운동원들은 미국 편입에 적극적이지 않은 반대파에 대해 공공연한 백주 테러를 자행하기도 하였습니다.(나중에 소개할 푸에르토 리코 근대화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무노즈 마린이 어린 시절 유력 정치인인 아버지와 헤어져 미국으로 이사를 간 이유 중 하나가 이들의 공격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국 식민지배의 목적(백인의 짐?)과 푸에르토 리코 지도층의 분화

 

스페인과의 전쟁을 통해 미국은 푸에르토 리코뿐만 아니라 필리핀, 괌이라는 식민지를 얻으며 결과적으로 제국주의 대열에 동참하게 됩니다. 그런데 미국 지식인들은 자국의 식민지배에 대해 현실적 이득과 미국 독립의 의의 수호라는 갈림길에서 고민에 빠집니다. 특히 구대륙의 식민주의의 후폭풍(아이티 흑인 혁명 성공 등 유색인종에 수적으로 압도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보면서 이에 대한 염려도 미국의 지식인 사이에서는 적지 않았습니다.

미국 지식인의 식민지배 관련 갈등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마크 트웨인과 키플링입니다. 마크 트웨인은 대놓고 미국의 식민주의에 대해 분개하였지만 키플링은 필리핀 점령을 두고 문명 전파는 운명적인 '백인의 짐(The White Man's Burden)'이니 목숨을 걸고라도 야만적 유색인들을 교화하라는 시를 쓰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미국도 이들 식민지를 궁극적으로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입장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키플링의 주장에 공감을 보이는 이들이라고 해도 수백만 명의 유색인종을 미국 시민으로 받아들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을 것입니다. 남북전쟁을 거쳐 남부의 흑인 노예를 해방시켰지만 남부 백인은 물론 북부인들 마저도 유색인종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의식은 공고했습니다. Jim Crow 법과 같은 흑백 분리법이 다시 남부에 들어서는 것에 대해 미국 중앙 정치계도 용인하는 분위기였으며 미국이 백인 국가 이어야 한다는 신념은 매우 확고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필리핀의 운명은 명확했습니다. 임시로 지배할 뿐 미국의 한 주로 편입시킬 생각은 조금의 가능성도 열어두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푸에르토 리코는 좀 달랐습니다. 위에도 썼지만 인구 구성이 식민지 출신 백인(크리올)이 다수였고 지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미국 백인 사회와 동질화 가능성이 높았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국 주류사회가 푸에르토 리코의 크리올들을 자신들과 같게 취급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들을 자치능력도 부족한 열등한 백인들로 간주하였습니다.

즉, 열등한 백인들로 본토가 오염될지도 모를 즉각적 본토 편입을 고려하지는 않았지만 필리핀처럼 방치하기도 뭣한 어정쩡함이 미국의 푸에르토 리코 미래에 대한 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여간 미국은 1900년 Foraker Act를 제정하여 이 새로운 식민지에 대한 정책을 공포합니다. 푸에르토 리코를 미국법이 적용되는 지역이지만 생산품의 미본토 유입에 대해서는 관세를 매김으로써 미국 본토가 결코 아님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엄밀하게는 영토(territories)가 아닌 소유물(posessions)로 간주하였습니다. 

다만, 푸에르토 리코 최대 생산품인 설탕에 있어서는 다른 제약조건을 걸어 무관세가 관철되었습니다. 제약조건은 미국 내 불만을 달래기 위해 500 에이커 이상의 토지 소유를 금지한 것인데 미국 내 사업자의 경쟁자가 될 수 있는 대형 플랜테이션의 등장을 막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500 에이커 규정은 실제 집행에 이르지 못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푸에르토 리코의 사탕수수/무 농장들은 점차 미국 설탕 트러스트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특히 총독(governor)들이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설탕 트러스트와 유착되는 일이 잦았습니다. 1913년 초대 총독이었던 알렌은 세계 최대 제당회사인 American Sugar Refining Company의 회장이 되었는데 전 총독의 지위와 제당회사를 통해 푸에르토 리코의 경제적 이권에 깊숙이 개입합니다. 1930년대까지 푸에르토 리코 경작지의 40%가 설탕 플랜테이션 농장으로 전환되었고 미국의 신디케이트 은행들의 소유로 넘어갔습니다. 

또한 영어교육을 의무화하면서 미국화(Americanization)를 도모하기 시작합니다. 비록 검열과 가혹한 처벌은 없었으나 상급학교의 영어전용 의무화나 초급학교 수업 중 일정 비중 영어 수업 확대는 아무리 미국에 편입되기를 원하는 이들마저도 불편함과 짜증을 일으 켰습니다. 실제 나중에 소개할 무노즈 마린의 두 번째 부인은 결혼 전에 영어전용 수업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다가 학교에서 해고되었다고 합니다.

푸에르토 리코 깃발의 사용도 실질적으로 금지되었습니다.

사실 미국 지배자들은 푸에르토 리코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푸에르토 리코에서는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푸에르토 리코의 포르투갈식 표기인 'Porto Rico'를 1932년까지 공문서에 사용할 정도였습니다.  

한편 푸에르토 리코 산업의 대미 종속성도 점차 커져갔는데 1930년에는 푸에르토 리코의 대외무역 95%가 미국과의 교역이었습니다. 경제 의존성은 나중에 푸에르토 리코의 미국 한 주 편입이나 독립 모두에게 부담이 되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푸에르토 리코 엘리트들의 미국에 대한 태도가 분화되기 시작합니다. 여전히 미국의 한 주로 편입되기를 염원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그냥 막연히 워싱턴 의원들의 처분을 기다린다고 해서 편입이 성사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현실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 중 한명이 정치인 무노즈 리베라(Luis Munoz Rivera)인데 앞으로 등장할 무노즈 마린(Luis Munoz Marin)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무노즈 리베라는 언제 올지 모를 본토 편입을 기다리기 보다 당면한 개혁을 수행하고 자치능력을 키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이런 모습이 진정한 미국화의 과정(미국적 가치의 실질적 구현)이라고  봤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1900년 제정한 Foraker Act에서도 푸에르토 리코의 미래에 대한 어떤 계획도 제시하지 않자 무노즈 리베라는 점점 미국 편입의 희망을 버리고 자치 강화와 함께 독립의 가능성 마저 인정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무노즈 리베라의 이런 노선 변화로 인해 미 총독부가 그를 지배 권력에서 배제하는 근거가 됩니다.

하지만 개혁이 중요하다는 무노즈 리베라는 푸에르토 리코에서 자치파(autonomist)를 이끌며 주요 정치세력으로 재부상합니다. 

 

미국 시민권의 댓가

 

1906년 테오도르 루즈벨트는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 푸에르토 리코를 방문하는 데 이 자리에서 푸에르토 리코인들에게 미국 시민권을 부여하겠다고 제안을 합니다.

하지만 자치파를 중심으로 시민권 부여에 반대하는 기류가 형성됩니다. 푸에르토 리코의 미래에 대한 어떤 청사진도 없이 시민권을 부여한다는 것은 현 상황(즉, 식민지)을 고착시키겠다는 의도라는 것이 반대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미 의회는 1917년 3월 Jones Act를 통과시켜 일방적으로 푸에르토 리코 사람들에게 미국 시민권을 부여합니다. 이에 푸에르토 리코 하원의원들 전원은 시민권 부여 반대를 의결하는데, 식민지 고착뿐만 아니라 당면한 1차 대전에 미국을 위해 싸울 병사를 모으기 위한 술책으로 판단하였습니다.  

실제 Jones Act가 통과된 2개월 후 윌슨 대통령은 21~30세의 미국 청년에 대한 강제징집 법안에 서명합니다. 이에 따라 2만명의 푸에르토 리코 청년들이 1차 대전 참전을 위해 징집 되어습니다. 

한편 자치파(무노즈 리베라는 1916년 사망)가 푸에르토 리코의 미래 옵션으로 보호국 지위 가능성을 열어두자 이에 실망한 독립파들은 별도의 세력을 구축하고 1922년 푸에르토 리코 민족당(Puerto Rican Nationalist Party)을 결성합니다. 

그리고 아래에서 소개하는 '선생님(The Teacher)'이라고 불린 한 남자가 민족당에 합류하며 푸에르토 리코의 정치사는 큰 소용돌이에 휩싸입니다. 

 

* 한국전에 65 보병연대로 참전한 푸에르토 리코 청년들의 전투 장면 그림 모습

 

 

'선생님'이라고 불린 한 남자: 알비주 캄포스

 

알비주 캄포스(Pedro Albizu Campos)는 1891년 푸에르토 리코에서 태어났는데 스페인 바스크계의 아버지를 두었지만 이름도 모를 세탁부를 어머니로 둔 사생아였습니다. 어머니는 알비주 캄포스가 어렸을 때 사망하였는데, 온전한 백인이 아닌(타이노 원주민과 흑인 노예의 피도 섞임) 알비주 캄포스를 아버지는 아들로서 인정조차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매정한 아버지였지만 알비주 캄포스가 하버드 대학에 입학하자 마음을 열고 그를 아들로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 알비주 캄포스의 하버드 재학 시절 사진

 

하버드 재학 중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에 알비주 캄포스는 장교로 미군에 자원입대하는데 훈련을 마치고 그가 배치된 부대는 375 보병연대였습니다. 그런데 375 보병연대는 미군의 인종차별 정책에 의해 흑인 사병으로 만 채워진 부대였습니다. 다만 지휘관은 백인으로 분류되었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완전한 백인이 아니었던 캄포스가 군 시절 인종주의를 강하게 경험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 알비주 캄포스의 인생을 보면 하버드마저도 그의 인종적 특징을 보상해 주지는 못 했습니다. 

1919년 하버드로 복귀한 알비주 캄포스는 세계 곳곳에서 온 민족주의 지도자들과 교류하게 되는데 인도의 시인 타고르나 아일랜드의 발레라, 이탈리아 민족운동파 등이었습니다. 이때 경험은 그가 민족주의에 눈을 뜨게 만들었으며 간디식 방법보다는 아일랜드와 이탈리아의 행동주의적 경향에 큰 감화를 받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여간 알비주 캄포스는 매우 뛰어난 학생이었고 언어적 재능도 높아서 영어, 스페인어, 독일어, 프랑스어, 포르투갈어, 이태리어, 라틴어, 히랍어에 능통했다고 합니다. 

하버드 법대를 졸업할 때도 미 국무부, 대법원 등에서 손짓을 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알비주 캄포스의 졸업은 그리 순탄하지 못하였습니다. 원래 최고 학점 이수자가 졸업 고별사를 낭독하도록 하는 하버드 법대 전통에 따라 취우수자 예정자였던 알비주 캄포스가 고별사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푸에르토 리코 출신 그것도 혼혈인 학생이 하버드 법대의 고별사를 낭독하는 것은 수치다'라고 생각한 한 교수가 그의 시험을 고의로 늦추면서 결국 고별사를 하지 못하였습니다. 덕분에 변호사 시험도 제 때 치루지 못하면서 알비주 캄포스는 변호사 자격은커녕 하버드 졸업장도 없이 1921년 고향 푸에르토 리코로 쓸쓸히 돌아옵니다.

다행히 1년 후 하버드 졸업이 마무리되고 변호사 자격도 얻게 됩니다. 

이후 알비주 캄포스가 푸에르토 리코에 남긴 족적은 간단히 정의하기 어려울 정도인데 하버드 법대 최우수 졸업자답게 뛰어난 웅변가였고 늘 기층 민중의 벗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푸에르토 리코의 민중들에게 알비주 캄포스는  '선생님(The Teacher)'이라는 호칭으로 불렸습니다.

비록 알비주 캄포스는 한 번도 다수세력이 된 적은 없으나 미연방정부에게는 극악한 테러리스트였으며 지금까지도 감추고 싶은 어두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제공하였습니다.  

물론 그의 사상적 토대를 보면 좌우가 모두 섞인 혼란스럽고 불명확한 모습이었습니다. 미국의 식민지배에 대한 부정이 심하다 보니 스페인 지배 시절의 가톨릭 보수 문화에 대한 동경이 강했습니다. 여성의 전통적 성 역할 강조와 가족계획에 대한 부정적 견해는 그의 보수성을 보여준 대표적 이슈였습니다. 또한 추종 세력이 검은 티셔츠를 입은 것은 일부 학자들이 그를 무솔리니의 파시즘에 경도되었다고 비판하는데 근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성장이 단지 선동적 구호에 그친 것이 아니라 대공황 시절 기층 민중의 파업 동참에 기반한 점은 그를 무솔리니와 구별하는 분명한 근거가 되었습니다.  

 

대공황 속 식민지의 파국과 독립파의 총공세

 

1924년 알비주 캄포스는 푸에리토 리코 민족당에 합류하는 데, 1930년에는 당수로 선출됩니다. 당시 알비주 캄포스는 자신은 독립을 숫자에 기대어 달성하지 않겠으며 대신에 독립을 갈망하는 열렬한 헌신의 세기에 의해 쟁취하겠다는 매우 공세적인 포부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실제 민족당이 의회의 다수파가 된 적은 없습니다.  

알다시피 1929년 대공황이 발발하면서 카리브해의 최대 산업인 설탕산업은 붕괴 직전으로 내몰립니다. 미국이 구제금융을 조성하여 이를 타개해 보려 하지만 우선순위는 반미 정권이 들어설 가능성이 높은 쿠바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푸에르토 리코의 경제 상황은 나날이 악화되어 이를 참지 못한 노동자들의 파업이 이어집니다.  당시 푸에르토 리코의 정치권에는 본토 합병과 독립 사이에 애매한 중도적 노선을 표방한 자유주의 정당이 나타나 세를 얻기 시작합니다.

이 정당은 후에 이름을 인민민주당(스페인어로 PPD)으로 개명합니다. 여기에 핵심 인물은 알비주 캄포스 보다 9살 어린 무노즈 마린입니다. 그의 아버지가 자치파의 거두였던 무노즈 리베라입니다.  

알비주 캄포스는 기층 민중의 파업에 적극 합류하면서 미국으로부터의 독립이 문제 해결방안이라며 일련의 시위를 통해 독립파의 외연을 확대하였습니다.

1932년에는 푸에르토 리코 깃발을 인정해 달라는 시위를 의사당까지 조직하였습니다. 

1935년 10월 23일에는 푸에르토 리코 대학 리오 피에드라즈 캠퍼스에서 독립 지지파와 경찰이 대치하는 데, 4명의 민족당 지지자와 한 명의 경찰관이 살해됩니다. 이를 두고 '리오 피에드라스 학살'이라고 합니다. 

1936년 2월 23일에는 민족주의 청년 로사도와 베아우참프는 4개월 전 리오 피에드라스 학살의 복수를 위해 푸에르토 리코 경찰 총수 리그를 암살합니다. 이 두 청년은 붙잡힌 후 어떤 재판도 받지 않고 경찰청사에서 즉결 처형되었습니다. 

실세 정치인이 된 무노즈 마린도 워싱턴을 방문하여 리그의 암살보다는 독립파에 대한 가혹한 처벌을 질타할 정도였습니다. 

 

* 재판도 없이 즉결 처형된 베아우참프가 처형 직전 거수경례를 하는 모습(80년 전 빛바랜 사진이지만 강렬한 눈빛이 살아있습니다.)

 File:Elias Beauchamp (1936).jpg

 

리그 암살 후 연방 대배심은 알비주 캄포스 등 민족당 지휘부를 기소하게 되는 데 주요 죄목은 이들이 미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목적으로 푸에르토 리코 해방군을 조직하려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7명의 푸에르토 리코 사람과 5명의 미국인으로 구성된 초기 배심원단은 7대 5로 이들에게 무죄를 선언합니다. 

하지만 연방 판사 쿠퍼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10명의 미국인과 2명의 푸에르토 리코 사람들로 배심원단을 새로 구성하여 유죄를 이끌어 냅니다. 

1937년 캄포스 등의 변호사는 판결에 불복하여 상급심에 상소하는데 보스턴 상급심의 배심원은 다시 유죄를 선고하고 이들을 푸에르토 리코 안이 아니라 애틀랜타의 연방교도소에 수감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판결에 대해 1939년 미 상원 의원 마칸토니오(미국의 대표적 좌파 의원으로 한국전쟁 참전에 유일하게 반대 표를 행사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는 미국 사법 역사상 가장 어두운 페이지라면서 당시 검사가 배심원을 일일이 직접 입맛에 맞게 선출했다고 비난했습니다. 마칸토니오 의원은 그리고 푸에르토 리코인들이 미국 시민이라면 실제 동등한 표현의 자유 등의 권리를 부여하여야 함에도 그렇지 못하다면서 이들을 사면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알비주 캄포스의 체포 후에도 푸에르토 리코의 충돌은 계속되었습니다.

1937년 3월 21일 퐁세에서 민족당이 주도한 노예제 폐지 기념 거리 시위가 경찰의 총격을 받아 비무장 시민 17명과 2명의 경찰이 살해되는 '퐁세 학살'이 발생합니다.  


*퐁세 학살 관련 다큐멘터리 동영상 

1938년 7월 25일 퍼레이드 중 미국총독 윈쉽(전직 군장성으로 강경일변도 정책으로 사태 악화의 한 축이 됨)을 암살하려는 총격이 있었으나 경찰관만 살해됩니다. 얼마후 2명의 민족당원들이 알비주 캄포스를 재판한 연방법원 판사 쿠퍼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발각 됩니다.  

푸에르토 리코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악순환은 미의회의 관심을 끌게 되는데 특히 1935년 리오 피에드라스 학살 이후 상원의원 Millard Tydings는 일정한 조건을 만족하는 한에서 푸에르토 리코를 독립시키자는 법안을 상정하려 하였으나 미국과의 경제적 단절을 우려한 푸에르토 리코 정치세력(특히 무노즈 마린)의 반발이 극심해 결국 필리핀만 10년 유예기간을 거쳐 독립시키는 법안만 통과됩니다.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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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tacroce
16/04/02 11:11
수정 아이콘
그런데 pgr은 좀 내용이 길어지면 글이 잘리는 문제가 있네요. 혹시 용량 제한이 있어서 그런 것인가요? 아니면 제가 글 처리에 미숙한 부분이 있어서 그런 것인가요?
마스터충달
16/04/02 11:16
수정 아이콘
pgr보다도 제한이 짧은 사이트도 있긴 합니다. (디피라던가...)

간혹 글의 길이는 과하지 않은데도 잘리는 문제가 발생하는데 이건 html 코드가 지저분하게 쌓여서 그렇습니다. 사진이나 글꼴 태그를 깔끔하게 정리하면 해결되긴 합니다. 근데 산타크로스님 글은 워낙 양적으로 풍부해서리 크크 이런 문제는 아닐 것 같네요.
16/04/02 11:43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16/04/02 12:50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재밌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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