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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10/31 11:55:59
Name 글자밥 청춘
Subject [일반] 그리고 네게 전화를 해야지. 줄 것이 있노라고..



"...숨죽여 울어야 했다. 하지만 지난 10여 년이 억울해서라도, 지난 천오백일이 분노에 겨워서라도, 동지의 죽음이 너무나 원통해서라도 울고만 있을 수만은 없어 다시 어금니를 깨물며 다짐한다. 오이 시디 회원국이자 지이십 회원국이라며 입만 벌리면 국격을 강조하는 정권이 정작 학습지 교사의 노동기본권은 인정하지 않아..."


마이크에 빨려 들어간 목소리가 앰프를 타고 흐른다. 꽁꽁 언 바닥을 종종걸음으로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 목도리를 두르고 패딩 속 깊이 몸을 숨겨야 하는 차가운 겨울. 우리는 매일 호소한다. 들어주세요. 들어주세요. 매일 다른 사람들, 같은 반응들. 무관심, 그것이 주는 야속함. 거리에 퍼지는 목소리는 닿지 않은 채 자동차 매연 사이로 스러진다. 그래도 경숙이랑 찬승이를 생각하면... 떠나간 이를 그리다 눈물이 배어 나온다. 눈물은 목멤으로, 야속하기만 한 가버린 이여.  보도블록 구석에는 비닐로 둘둘 감은 천막들이 겨우내 버티고 서 있다. 고드름이 끼는 걸 매일 부숴주는 겨울도 벌써 다섯 번째. 길거리의 삶도 벌써 다섯 해. 이제는 저 마천루 안에서 일했던 날들보다 길거리의 귀찮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게 익숙해져 버린 천일 하고도 오백일. 영원히 익숙해질 것 같지 않은 겨울의 길바닥.


나도 남들처럼 고분고분 지나갔었더라면. 약삭빠르게 다른 직업 알아봤더라면. 나도 좋은 애 아빠가 되었을지도 모르고, 이렇게 쌩쌩 달리는 자동차 소리를 들으며 잠을 자지 않아도 됐을 것 같은데. 그 날, 그 날. 동지가 되어달라는 두 손이 너무 따뜻해서 나도 모르게 빨간약을 먹게 된 그 날이 야속하다. 야속한데, 미워지지 않는다. 경숙아! 다른 동지들이 들을까 싶어 나는 맘 속으로만 또 이름을 외친다. 소리 없는 아우성은 자꾸 가슴을 치고, 몸에 둘러 맨 민주노조 승리와 해고자 복직 요구, 재능교육 규탄 같은 말들은 무거워져만 간다. 소복하게 쌓이는 눈은 마음에도 쌓여 다섯 해. 거리의 눈은 녹아도 마음의 눈은 녹을 새 없이. 이 무거운 아픔들을 언제쯤 내려놓을 수 있을지. 하늘은 야속하리만치 푸르고 높다. 눈길 한번 주지 않는 사람들의 종종걸음이 미워진다. 경숙이 너라면 미워하지 않았을텐데, 나는 아직도 멀었다. 웃음이, 쓰다.


경숙은 겁쟁이었다. 맨날 김부장이 왜 수학학습지 하는 애한테 영어랑 국어는 하라고 못하냐며, 다른 선생들 다 한 애에 세 개 네개씩 학습지를 붙여 하는데 왜 니는 그렇게 못하냐며 욕을 할 때면 남몰래 한 시간은 울어야 했다. 하지만 난 안다. 경숙은 남들이 가기 싫어하는 달동네에도 쑥쑥 올라다녔고, 가끔 학생네 집이 학습지 돈을 밀려도 꼬박꼬박 학습지를 넣어줬던 거 난 다 안다. 그럴 때면 김부장의 쌍소리가 사무실을 뒤흔들고 경숙은 또 점심에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울음으로 넘긴다. 그래도 고집 하나는 쇠고집이었다. 아무리 김부장이 뭐라 한들, 다른 선생들이 너부터 생각하라며 시시한 통찰을 덧댄들 경숙은 웃으며 괜찮다고 했다. 그런 경숙이 노조를 하자고 했을 때, 해서 억울하게 잘린 선생님이랑 우리 모두.. 사람같이 일하고 사람답게 대우받아요. 수줍어 하면서도 단호한 결의로 내민 가입신청서를 받았을 때. 나는 참 경숙답다고 생각했다. 겁 많고 착한, 성실하고 미워할 줄 몰라서 자기 힘든 길도 마다치 않는 그런 사람.


처음 노조 할 사람들을 모으는 건 쉽지 않았다. 노조를 하자고 할 때마다 동료 선생들은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경숙은 포기하지 않았다. 김부장이 우리의 책상 위에 있는 것들을 깡그리 쓰레기통에 던져버릴 때도, 매일 나오는 학습지를 못 받게 되어도, 회사에서 잘린다는 으름장에도, 그리고 실제로 잘려도. 경숙은 포기하지 않고, 그리고 미워하지도 않으며 함께 하자고 했다. 하나둘, 그렇게 모인 사람들로 시작했다. 노조라고는 길에서 쇠파이프나 휘두르고 욕설이나 해대는 건줄 알았던 사람들이 모여 하나부터 배워간다. 노조가 뭔지, 우리가 요구할 게 뭔지. 가장 열심히 공부하는 경숙은 조합원 하나하나의 손을 잡고 우리의 투쟁이 우리의 것임을 알려줬다. 회사에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사회에서도 관심을 둬 주지 않았던 작은 학습지 노조는 그렇게 탄생했다. 쇠파이프 대신 기타를, 보도블록 대신 피켓을, 어깨동무하고 노래하며. 그렇게 시작했다.


처음에는 저 큰 빌딩을 향해 나쁜 건 너희라고, 소리 지르고 악다구니를 썼다. 그렇게 속이 시원할 수가 없다. 기본급도 없고 인권도 없었던 시절 나는 매일 아침 우리를 세워놓고 욕설과 조인트로 하루를 시작했던 김부장을 향해 확성기를 잡고 시원하게 깨소금을 뿌린다. 야 이 개새끼야! 경숙은 그러지 말라고 내 어깨를 손바닥으로 탁, 탁 치지만 하나도 안 아프다. 사실은.. 속이 시원해요. 엄청나게. 하고 호호호 웃을 때, 그때는 다 이긴 줄로만 알았다. 우리를 거리로 몰아낸 모든 문제 역시 금방 해결될 것 같았다. 우리들의 선생님이었던 민주노조의 상임 활동가라는 사람들이 쓴웃음으로, 어렵지만 해내자는 말이 그때는 왜 와 닿지 않았는지. 순진했던 우리는 이겨사 그럴싸한 선생님 되어보자고. 주황색 가로수 불빛 아래서 투쟁을 외치고 든든한 천막으로 들어서던 날들. 길바닥의 잠자리가 추운 줄도 모르고 마냥 희망찼던 날들. 이제 그럴싸한 선생님들은 어디 가고 어엿하게 빨간 노조 조끼가 어울리는 몇몇만 남아있다. 그 많은 천막은 온데간데없고 서너 개의 천막만이 우두커니 서 있다. 시린 손을 입김으로 하염없이 녹여보려 애쓴다. 경숙이 네 따뜻한 손이면 금방 녹았을 것이다. 새하얀 입김이 너울너울 거리로 흐른다. 법이, 민주주의가. 그런 것들에 기대어 버티고 서 있다지만 사실은 우리가 서로를 버티게 했음을, 그런 얄팍한 민주주의나 법이 우리를 몇 년이고 이 자리에 붙박게 하지 못함을. 그래서 그렇게 따뜻한 사람이었으리라.


그날은 대학생들이 연대를 온 날이었다. 젊은이들이 잊지 않아서 참 고마웠다.  그런 고마운 날 떠난다는 너의 말이 얼마나 어려웠을지. 경숙의 선택에 누구도 화내지 않고 누구도 투덜대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안다. 경숙이 없었으면 시작도 못 했을 일임을. 경숙에게는 언제나 마음에 빚을진 듯했다. 힘들고 지치고, 서로 상처를 긁지 않고서는 버티기 어려울 때도 희망과 웃음을 잃지 않게 해 준 것은 언제나 경숙이 따뜻한 믹스커피 한 잔을 내밀며 손에 꼭 쥐여줬기 때문임을. 그러니 미안하다고 우는 동지를 차마 잡을 수가 없었다. 빨리 가라고 했다. 엄마도 없이 매일 아침밥이나 제대로 먹겠느냐며, 찬승이를 생각하라며... 1000일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기에 딱 좋은 시간이다. 경숙 동지는 긁히고 구겨진 듯 낡은 전화카드 한 장을 쥐여주며 꼭, 꼬옥 잊지 말자고. 바보야 요새 누가 공중전화를 쓰니. 그래도. 그래도. 그 울음 섞인 눈망울에 고개를 끄덕일 때까지 너는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우리가 너 복직시켜 줄 테니까, 찬승이랑 밥 잘 먹고 가서 돈 많이 받는 일 하고. 응? 아 누가보면 남편인 줄 알것어! 조합원들이 하하 호호 깔깔대며 웃는다. 우린 슬픈 이별에 익숙하지 않다. 대신 웃음으로 보내는 건 익숙하다.


찬승이는 우리 투쟁의 아이돌이었다. 매일 학교가 끝나면 뛰어와서 같이 신나게 노래도 부른다. 꼬마 아이 입에서 '그들은 나를 동지라 하네!' 같은 가사를 들을 때면 기분이 묘하다.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희망에 젖기도 하고. 다행히 여기에는 애들 가르치는 거 하나는 기똥찬 사람들로 가득하다. 여느 학원에서 종합반 받느니 여기서 아주 국영수과사 음악 체육 미술까지 싹 다 종합코스로 프리미엄 과외를 시켜준다. 가끔 그럴 때면 찬승이는 아 여기서도 공부해~ 하며 입술을 삐죽삐죽, 다리를 퉁탕 퉁탕. 그럴 땐 육개장 큰 사발 하나면 바로 해결이다. 찬승이는 삼촌들 사이에서 굳건히 서서 제 몸에 한참 큰 빨간 조끼를 자크까지 쫙 올리고는, 투쟁! 하고 외친다. 투쟁이 뭔지 아니? 당연하죠! 으쓱하는 찬승이에게 약이 올라 물었던 기억이 난다. 뭔데뭔데? 맞추면 내가 오늘 소시지도 준다! 하고 천하장사 소시지를 하나 쑥 뽑아든다. 며칠 전 대학생들이 와서 주고 간 소시지에 찬승이도 눈이 반짝인다.


"투쟁은요, 소풍이요! 컵라면도 먹고, 노래도 부르고, 근데 저기 저 빌딩 아저씨들은 빼고 하는 거요!"


그 말에 모두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 녀석아, 누가 좋아서 투쟁하니! 찬승이는 소시지를 받고는 금세 뜯어 입에 한가득 물고는 말한다. "근데 이거 끝나면 우리 엄마 또 선생님 하는 거죠? 너무 추워서 이제 선생님 다시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정곡을 찌르는 말에 누구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그럼! 하고 쓱쓱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이내 삼촌 이모들 사이로 소시지를 들고 휙 사라지는 찬승이. 모두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찬승이. 경비아저씨에게 과자를 나눠줄 줄 알던 찬승이. 그런 찬승이에게 별소릴 다 하던 못된 경비아저씨에게 당돌하게 우리 엄마가 나쁜 게 아니라 사장님이 나쁘다고 배를 뚝 내밀던 찬승이. 그래도 아저씨는 추울 거 같으니까 과자 같이 먹어요. 했던 찬승이. 그 엄마에 그 아들이었던 경숙이와 찬승이.


그런 찬승이를 이혼한 전 남편이 데려가겠다고 했나 보다. 맨날 빨갱이들 시위하는 데만 데리고 다니는 미친년이라고. 변호사는 방법이 없다고 했다. 경숙은 이게 왜 뭐가 문제냐며 뭐가 나쁘냐고 악다구니를 썼지만, 법 앞에서 우리의 외침은 언제나 보잘것없다. 민주주의여 안녕. 민주주의여 안녕. 나는 경숙이 하루하루 눈물이 많아질 때마다 민주주의 같은 건 개똥이라고 생각했다. 술 처먹고 집사람도 패고 애도 패고 말리는 옆집 사람도 패고 신고받고 온 경찰도 패는 불한당이 우리보다 낫다는 법의 판단에 열불이 터졌다. 하긴 이런 일이 하루 이틀이 아니니 자꾸 웃어야 하는데, 경숙이만 보면 웃을 수가 없다. 찬승이는 아빠가 좋니? 했더니 싫다고 했다. 아빠만 보면 엄마가 운다고 했다. 애도 아는 걸 배워먹은 판사들이 모른다. 애도 아는 걸 어른들이 몰라서 우리가 이런다고.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소리로 읊조렸다. 삼촌, 추워요. 나는 찬승이의 빨개진 귀를 양손으로 꼬옥 안아줬다. 우리 컵라면 먹을까? 진짜요?! 아 근데 엄마가 컵라면 많이 먹지 말랬는데. 엄마한테는 비밀로. 비밀로오~? 쉿! 쉬-잇!


변호사는 하루빨리 시위를 관두고, 당장 식당 일이든 청소 일이든 고용계약서만 있다면 친권을 유지할 수 있을 거라 했다. 고분고분 사회에 고개를 조아린다면 우리 찬승이를 지킬 수 있다고. 발목 뒤에 주렁주렁 매달린 동지들이 자식새끼보다 소중하냐고. 바보 같은 경숙은 그게 무슨 고민거리라고 울고 앉아있다. 빌어먹을. 아들 하나 잘 키워야지! 이 사람아.. 이 사람아... 나는 전화카드 한 장을 지갑에 꼭꼭 숨겨 넣었다. 우리가 나눌 건 체온뿐이지만, 우리가 씨 돈이 없지 가오가 없느냐면서. 너 없이도 이겨서 약 올릴 거라고, 복직해서 놀려줄거라고. 그렇게 울음을 안주 삼아 웃음을 담은 잔을 든다. 경숙은 술잔을 받을 때 마다 배신해서 미안하다고, 도망쳐서 미안하다고 속죄를 하고 우리는 그 속죄에 몸둘 바를 몰라 몇 번이고 손사래를 치고. 내일이면 떠날 이가 마지막까지 따스함만을 남긴 채, 그해 겨울. 경숙과 함께 거리의 마지막 밤을 보내던 날. 매일같이 느끼던 바닥의 냉기도 추운 줄 몰랐던 그 날 밤. 품에 잠든 찬승이를 애타게 바라보는 경숙과, 이제 찬승이 엄마로도 살아야지. 하고 웃었던 나. 그래야죠. 고마워. 미안해요. 그런 소리 마라니까. 그렇게 희망을 나눴던 밤이 지나간다. 아침 해와 함께, 경숙과 찬승은 떠났다.



길거리에서 경숙이를 보내고 2년쯤 됐을까, 경숙이가 죽었다고 했다.


사인은 가스중독.


반지하 방에 내려오는 가스관이 낡았는데, 겨우 내 얼었다 녹았다 하는 동안 관에서 가스가 새기 시작했다고 한다. 난방비 좀 아껴 보겠다고 한 방만 보일러를 틀고는 찬승이를 껴안고 자다가 느낌이 이상했는지. 보통은 이상한 줄도 모르고 그냥 죽는다고 하던데 경숙이 얘는 누가 시위 좀 해본 애 아니랄까 봐 깨스냄새는 기가 막히게 알아서...


경숙이는 대문 앞까지 찬승이를 품에 꽉 껴안고 기어갔다고 한다. 문고리에 손이 걸린 채로 사망했다고 한다. 그래도 찬승이를 품에서 놓지 않은 채, 부둥켜안은 채 경숙이는 갔다. 찬승이는, 이틀 뒤 병원에서 엄마 외로울까 싶어 금세 따라가 버렸다고 한다. 한다. 한다. 장례식이 끝나고도 일주일이 넘게 지난 일이었다. 남의 입으로 전해듣는 동지의 죽음에 모두가 슬픔과, 분노와, 회한과, 서러움으로. 누군가는 그 빌어먹을 남편 새끼를 죽여버리겠다고, 누군가는 이 빌어먹을 회사가, 나라가 이렇게만 안 했어도 걔가 반지하 방에서 가스중독으로 죽었겠느냐고. 가난, 이 지랄. 염병. 개 같은.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산 착한, 착한.. 나는 그날 그 공허한 외침들 속에서 조용히 술을 먹었고, 술을 많이 먹었고, 술을 아주 많이 많이 먹고 그때야 눈물이 자꾸 차올랐고, 경숙이랑 찬승이가 자꾸, 자꾸 떠올라서. 그래서 도로 한가운데로 뛰쳐나갔다. 조합원들끼리 돌려쓰는 통기타를 메고, 그렇게 중앙선에서 노랜지 울음인지 모를 목소리로. 새벽녘 번져가는 텅텅 빈 8차선의 잘 닦인 도로에 눈을 부라리고. 음이 하나도 맞지 않는 기타와, 목놓은 통곡으로. 가슴에 박혀 내려가지 않을 동지의 목소리를 들어달라고.


내가 왜, 세상에 농락당한 채 쌩쌩 달리는 차 소릴 들으며 잠을 자는지
내가 왜, 세상에 내버려진 채 영문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귀찮은 존재가 됐는지
찬바람 부는 날 거리에서 잠들 땐 너무 춥더라 인생도 시리고
도와주는 사람 함께하는 사람은 있지만 정말 추운 건 어쩔 수 없더라
찬바람 부는 날 거리에서 잠들 땐 너무 춥더라 인생도 춥더라


울음이 터졌다. 기타를 바닥에 내던졌다. 언 손 때문에 기타가 쭉 하고 미끄러져 도로를 구른다. 동지들이 하나둘 함께 울어준다. 울면서도 기어이 도로 위에서 날 끌고 나온다. 누가 못 죽고 사는 모자지간 아니랄까봐! 누가! 경숙아! 찬승아!!! 외마디 비명이 텅 빈 새까만 하늘에 닿기는 하는지. 살아남은 이들은 엉거주춤 비틀비틀 죄인이 되어 보도블록의 구석으로 처량한 걸음을 옮긴다. 삶의 자락으로, 삶의 밑바닥으로. 지독하게 끈질긴 목숨으로 다시 얼어붙은 천막 안에 삼삼오오 모여서 죽은 이를 추모한다. 경숙이가 갔다. 도와주는 사람, 함께하는 사람 경숙이가 진짜 가버렸다. 찬바람 부는 날 거리에서 잠들어도 동지가 있으면 좀 나은데, 그런데 경숙이가 이젠 없다. 어디에도 없다. 제 엄마밖에 모르는 찬승이도 갔다. 엄마가 오지 말라고 그렇게 꽉 부둥켜안았는데 꼭 말 안 듣고.. 우린 자꾸 귀여웠던 찬승이와 착해 빠졌던 경숙이를 꺼내고 또 꺼냈다. 미치지 않기 위해서. 돌아버리지 않기 위해서. 죄인이기 위해서. 나는 떨리는 손으로 지갑에서 경숙이가 준 전화카드 한 장을 꺼내 든다. 지갑 깊숙한 곳에 넣어 뒀는데도 처음 받을 때와는 달리 너무나 차가워진 전화카드, 전화카드 한 장.


"이 이....바보가.. 요즘 스마트폰 쓰는 세상에 이걸 주는 거에요.. 이걸로 힘들 때 연락하자고... 전화 하라고.. 그때 내가 그랬거든요. 너 없이도 이길 테니까 잘 살기나 하라고...그래서 아직...아직 한 번도 못 써봤거든요. 이거 씨 구겨져서 들어가지도 않을 거야. 이렇게. 이렇게. 응? 요새 공중전화가 어디 있느냐고....."


경숙 동지, 찬승 동지.
잘 살아야죠. 잘 살아야지 왜.


흐느끼던 동지 한 명이 노래를 시작한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언제라도 힘들고 지쳤을 때
네게 전화를 하라고
내 손에 꼭 쥐어준 너의
전화카드 한 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나는
눈시울이 붉어지고
고맙다는 말 그 말 한 마디
다 못하고 돌아섰네


나는 그저 나의 아픔만을
생각하며 살았는데
그런 입으로 나는 늘
동지라 말했는데


오늘 난 편지를 써야 겠어
전화카드도 사야 겠어
그리고 네게 전화를 해야지
줄 것이 있노라고


오늘 난 편지를 써야 겠어. 그리고 네게 전화를 해야지. 줄 것이 있노라고...

그렇게 4년, 5년의 나날들이 흘러갔다. 슬픔으로, 슬픔을 꾹꾹 눌러 담으며.

또 오는 아침에도 우리는 길거리의 귀찮은 사람이 되어, 보기 싫은 사람들이 되어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 사이로 경숙이와 찬승이를 기억한다. 그 웃음을, 그 선함을. 그래서 누구도 빼앗아가지 못했던 그 억척같고 긍지 있는 삶을. 희망을. 이제는 그렇게 가슴에 묻은 동지들 때문에라도 하루를 희망으로 노래한다. 슬픔은 밤으로, 희망은 아침으로. 무관심과 비참함과 살을 에는 추위와 외로움에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경숙과 찬승이 나눠준 웃음으로. 오늘도 평화로운 세상을 향해 희망을 외친다.


2,800일이 훌쩍 지난 어느 날


재능교육은 최종 노사합의를 통해 마지막으로 사과와 복직을 인정했다.
드디어 구석진 천막이 걷혔다. 거의 8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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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지노조 재능교육투쟁 합의 내용
첫째, ㈜재능교육은 박경선, 유명자를 위탁계약 해지 당시 지역국으로 복직시킨다.(합의서 1항)
둘째, 농성장 시설물 일체를 자진 철거하고, 1인 시위, 집회, 선전활동 등을 즉시 중단한다.(합의서 2항)
셋째, 이번 합의 이전의 내용과 관련하여 인터넷 매체 상의 각종 자료 삭제를 요청할 경우 상호 협조한다. 물리적으로 어려운 경우, 논의하여 진행한다.(합의서 3항)
넷째, 고소・고발 상호 취하 및 형사 건에 대한 처벌불원탄원서 제출, 향후 민・형사상 소를 제기하지 않는다. 재능교육은 합의서 작성일 이전에 발생한 사안에 대해서는 가처분결정에 근거한 간접강제를 진행하지 않는다.(합의서 4항)
다섯째, 학습지노조 재능교육지부 투쟁의 양대 요구사항은 해고자 전원복직과 단체협약 원상회복이었습니다. 특히 先단체협약 체결이 안 되면 절대 먼저 복직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만큼 특수고용노동자 학습지교사에게 단체협약은 중요한 것입니다.
여섯째, 서명주체는 재능교육 대표이사의 위임을 받은 재능교육 노무업무 관련 임원과 실무 집행책임자입니다. 재능교육 직인이 찍힌 대표이사 명의의 위임장(첨부자료2. 참조)도 직접 전달 받았습니다. 또한 재능교육은 합의 석상에서 용역깡패 투입과 그로 인한 피해에 대해 공식적으로 유감을 표명했습니다.
해고자 원직복직, 단체협약 원상회복과 함께 재능교육의 공식사과 없이는 투쟁을 마무리하지 않겠다고 했던 ‘지대위’의 주장을 재능교육이 수용한 것입니다.


단체협약은 후퇴했다는 지적이 있지만, 실질적으로 사과와 완전 복직을 얻어낸 점, 기존 단체협약의 이행현실화를 이끌어낸 점, 2800여일이 넘는 투쟁을 끝내고 드디어 삶의 터전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 점... 아쉬운 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이겼다고는 생각합니다.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 노조의 더 나은 권리신장을 응원합니다.



*본 글의 본문은 픽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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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ya Stark
15/10/31 12:04
수정 아이콘
어렵네요 .... 참 사는게 어렵습니다.
마스터충달
15/10/31 12:13
수정 아이콘
정말 추운 건 어쩔 수 없더라.

이런 가사에 이런 멜로디라니... 더 슬퍼집니다.
ridewitme
15/10/31 12:52
수정 아이콘
이 노랜 정말 불후에요ㅜㅜ
지니쏠
15/10/31 13:33
수정 아이콘
좋네요.
-안군-
15/10/31 18:00
수정 아이콘
후... 어쩌면, 투쟁의 이면에는 저것보다도 더 슬프고 더 아픈 이야기들이 깔려 있을 겁니다.
보기에는 그저 길거리에서 시끄럽게 악다구니나 쓰는 성가신 사람들 같아 보여도,
그들 모두가 누군가의 아들딸이고, 형제자매고, 부모겠지요...
점박이멍멍이
15/10/31 18:31
수정 아이콘
꽃다지... 울컥하네요...
15/11/03 00:22
수정 아이콘
이 제목을 보자마자 전 이런 제목을 피지알에 쓸 사람은 작성자분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공연을 위해 수없이 되뇌었던 가사와 그것에 싣고자한 감정들이 떠오른 나머지, 본문도 보기전에 누군가의 지리멸렬하고 처절하지만 그럼에도 생을 살아내는 글이 써있을 것만 같아 마음을 다잡았는데도 예상보다 훨씬 시린 이야기네요.

픽션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현실을 벗어날 수 없는 이야기고,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경중을 떠나 어느 누군가에겐 허구가 아닌 당장 오늘의 이야기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지요.

오늘 밤은 자폐적 지식인이라는 자기반성을 골똘히 씹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항상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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