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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맛난 점심 드셨는지요?
첫번째 글에 어떤 유저분께서 달아주신 댓글에, 행복은 사소한데서 오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신 댓글이 생각납니다.
이 글을 이어 나가는 순간부터 저는 사소한 행복에 감겨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햇빛 잘 드는 거실의 탁자에서 남편 몰래 마시는 콜라 한 잔과 톡톡톡톡 노트북의 키보드 소리,
이 모든게 정말 사소한 행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네, 결국 일 안하고 집에서 노니 정말 편하네요. 라는 말을 저렇게 길게도 쓸수 있습니다. 헤헤)
오늘은 결혼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엮어보았습니다.
어쩌면 죽 읽으시면서 남들 다 겪는 흔한 결혼 에피소드가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선 혼인신고, 죽음(?)을 무릅쓴 반대는 흔한 에피소드가 아니겠군요.)
예물이니 예단이니 하는 현기증 나는 단어와 절차 들이 나오거든요.
요런 심각한 전쟁을 겪으신 분들이라면, 잠시 심호흡 하시는게 좋겠습니다.
이러한 절차를 모르시는 분들에게는 약간 결혼혐오(?)를 조장하는것이 아닌가 우려도 됩니다. 모든 결혼이 다 이러하지는 않습니다.
고럼, 시작하겠습니다.
구청으로 혼인신고 하러 가는 길이 분명 '논리적'이고 '순차적'인 과정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타인의 눈을 빌어 이 과정을 객관적으로 보자면 '즉흥적'이기도 함과 동시에 '충동적'이라는 느낌을 감출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 '진실함'이 없지 않았기에 혼인신고라는 과정이 무겁지도, 어렵지는 않습니다.
어려울때마다 곁에서 듬직하게 제가 웃기만을 바라며 노력한 남자친구를 보고 매사 감사함을 느꼈고,
순간순간 다가온 위기에 듬직함을 보여준 이 남자에게 인생을 함께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깔려있었기에 혼인신고서에 주저않고 도장을 찍었습니다.
간단한(?) 서류작성으로 단 10분만에 남자친구는 남편이 되고, 여자친구는 아내가 됩니다.
축하의 만찬(!)으로 그날 점심은 구청 인근 롯데X아에 가서 햄버거 세트를 같이 해치웠습니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각자의 일터로 돌아가 일에 매진했죠.
시아버지께 이 사실을 이르자, 시아버지도, 시어머니도 매우 놀란 모습이었습니다.
반대가 심하다는 것은 얼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해야만 할까 라는 생각도 드셨을 것입니다.
시부모님께 차마 '그 말도 안되는 이유'로 결혼을 반대하고 계시다는 것 까지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기가 송구스러웠고,
최대한 저희의 결정을 존중해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퇴근을 마치고 작은 카네이션 화분을 하나 들고 찾아가 혼인신고 접수증을 보여 드렸습니다.
아버님은 혀를 차시고, 어머님의 표정도 그닥 밝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긍정적인 마음으로 이 모든 일이, 이 모든 절차가 잘 진행 되기를 바라고 짧은 만남을 뒤로한 채 집을 나섰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집에 들어가지 않았고- 남편의 자취방을 집으로 삼아 출퇴근을 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집에만 있으면 감기지 않는 나의 눈이, 남편의 자취방에서는 그간 못 잔 잠을 몰아서 자려는 듯 스르르 잠이 들었고,
식성도 곧 잘 찾아 순식간에 10kg가 찌는 기적(...onz)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여자는 결혼식장에 인생 최대 체중을 찍고 버진로드를 걷게 됩니다.)
피신은 생각보다 늦게 들통이 났습니다.
큰동생이야 대충 누나의 '사랑의 도피'를 눈치 챘고, 아버지는 두집살림에 여념이 없으신 듯 했습니다.
어머니는 2교대의 바쁜 생업에 매진해 계셨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제가 집에 들어오지 않은 것을 몰랐답니다.
사랑의 도피가 들통났던것은 의외의 것, 바로 도시가스비 였습니다.
3인 자녀가구의 할인을 받던 도시가스비가 왠일로 많이 나오자, 도시가스공사에 전화를 해서 물어봤더니
"고객님의 자택은 2인자녀 가구로 할인이 되지 않으십니다."라는 말과 함께- 할인을 거절당했답니다.
등본을 떼어 확인해보니, 딸은 온데간데 없고 아들만 둘- 등본에 남아 한 가구를 꾸리고 있던 것입니다.
어처구니가 없어 동사무소에 가서 물어보았는데 따님 결혼하신것 아니냐며, 아니면 독립해서 나가신 것 아니고는
등본에서 빠질 이유가 없다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입장에서는 순간 황당하셨을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가정폭력'의 이유를 떠나, 나 하나 살겠다고 절차무시의 혼인신고를 한 이 행동은
지금도 종종 저 스스로를 반성하게 하는 과정입니다.
저의 ‘무단가출’, 아니 도피 사실을 알게 된 집안은 발칵 뒤집혔고,
아버지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핍박하며 저를 찾아오라고 난리를 부리셨답니다.
보면 그 자리에서 반쯤 밟아도 된다고 하셨답니다.(내가 무슨 짐승도 아니고 컹;;)
그런 여파로 한밤중에 제가 근무하는 사무실로 들어가 제 자리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기도 했고
(제가 그나마 일찍 퇴근해서 다행이었고, 아침에 열심히 정리했습니다.), 이를 본 회사 직원들이 경비를 출동시키자
경비와 함께 한바탕 소란을 부리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회사 전체로 퍼져나갔고, 저와 아버님은 면목이 없었습니다. 저 역시도 회사에서 눈치보느라 무던히도 애를 썼구요.
나가 지내면서 내 마음이 편해지고, 즐거워졌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부모의 마음을 어기고 나와 사는 죄책감이 아닌, 나 하나때문에 볼모로 잡힌 막내동생의 절규가 가장 마음에 아팠습니다.
- 누나 들어올때까지 아빠가 나한테 욕하고 때렸어.
- 오늘도 그릇 깨고, 소리지르고 그래.
- 누나 나도 도망가고 싶다.
고등학교 1학년의 동생의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것 같아 ‘다시 들어가야 하나’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마음을 다 잡게 됩니다. 이대로 물러나면 모든것이 물거품이 된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게 된다 라는 마음이.
한바탕의 소란도 두 달 여 정도되니 소강되었고, 주변이 조용해지자 저희는 일단 앞으로의 계획을 짜 나갔습니다.
일단 저와 남편의 생각은 ‘소박하게 살자’였으니 소박한 삶에 대한 계획을 세워 나가는 것이었죠.
벌이는 같이 하고, 월세가 아주 많이 매우 아깝지만 우리의 첫 신혼집은 남편의 자취방으로 정했습니다.
혼수? 별 욕심도 나지 않습니다. TV야 없어도 그만, 컴퓨터가 있으니 그것으로 대충 보고- 아니면 퇴근하고 책을 읽습니다.
다만, 둘이 누워 결국 아침에 한명이 바닥으로 내려오게 되는 마성(?)의 싱글침대가 넓어졌으면 좋겠다고 소원했고,
100L도 채 되지않아 다음날이면 야채가 시들어버리는 냉장고가 조금 커졌으면 좋겠다고 기도했습니다.
가장 필요한 게 저 두가지이니 혼수는 저렇게 두가지만 마련했으면 좋겠다고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그리하야 남편과 저는 인터넷으로 기존것보다 조금 큰 조금 넘는 냉장, 냉동칸이 분리된 백색 냉장고를 하나 샀고,
침대만큼은 좋은것을 쓰자는 의미로 푹신푹신한 매트리스만 새것으로 장만했습니다.
(첫 혼수 기념 선물이라고 냉장고에 제철딸기를 잔뜩 채워서 넣어준 기억이 나는데, 아- 딸기가 먹고싶네요.)
그렇게 10평 남짓의 원룸에서 우리의 첫 신혼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모로 남편이 돈을 모으고, 굴리고, 단도리하는 재주가 있어 저는 망설이지 않고 남편에게 경제권을 위임했습니다.
(후에 이 경제권은 다시 제가 가져옵니다. 이유는 없습니다. 내꺼야 내꺼!!! 히히)
급여를 받아 제 앞의 공과금을 모조리 내고 일련의 용돈정도만 남긴 후 남편에게 한푼도 빠짐없이 돈을 맡겼습니다.
그러다 원룸 보증금과 두세달여간 모은 우리의 돈으로 조금 더 나은 삶을 살자며, 15평대의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됩니다.
아직 월세의 굴레는 벗어나지 못하지만 일단은 원룸보다는 생활조건이 더 좋고, 방범, 오물처리 등이 용이한 공간이라 판단하여
회사 근처의 아파트로 이사를 갑니다.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원룸의 작은 주방에서 빵을 굽겠다며 쪼그리고 오븐의 열기를 견뎌나갔던 일이,
콩자반을 만들겠다고 작은 원룸을 사흘간 간장냄새 화생방 훈련장으로 만든 일도 새록한 추억이 되었습니다.
이사를 하고, 관리비라는 것을 내고, 삶의 질이 조금 더 나아짐과 동시에 지출도 조금 늘어납니다.
그러면서도 꼬박꼬박 제 월급에서는 스무살 시절 호기롭게 다녀보겠다던 1년 중퇴 대학생활의 학자금 대출이
원금과 이자를 포함해 1~20여만원이 나갔던 상황이었습니다.
잔금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빚이란 건 길게 끌고 가 봐야 좋을것도 없고, 그간 이 빚을 낸다고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냐며-
남편이 자신의 목돈을 보태 이 돈도 전부 갚아줍니다.
다니던 대학교가 마침 회사의 인근이라 학교 학생회관에 있던 은행에 가 대출금을 전부 갚던 날이 생각납니다.
운전하고 나오며 학교의 이곳저곳을 보며 학창시절의 꿈을 키웠던 잔디와 본관건물들이 눈에 들어오고,
다 갚은 학자금 대출금의 영수증을 보니 마음이 찡하고 남편에게 더욱 더 고마움이 샘솟습니다.
그렇게 가을이 짙어지고, 추석이 다가오면서, 저는 거칠었던 격한 감정들이 이내 사그러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으로
남편과 함께 아버지와 어머니(이제부터는 친정이라 표현하겠습니다.)를 뵈러 가기로 합니다.
우리의 섣부름을 용서받음과 동시에 우리의 진심과 포부를 알아 주시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배 한 상자, 사과 한 상자를 들고 추석 즈음과 맞물린 아버지 생신에 친정집으로 갔습니다.
“실례합니다.”
아버지는 막내와 식탁에서 식사를 하고 계셨고, 현관 입구에서 저희를 보자마자 들고 있던 숟가락과 밥그릇을 마구 던지며 포효하셨습니다.
“야 이 XX 여기가 어디라고 와!!! 나가!!! 오지마!!! XX!! 이 XX!!!”
-콰앙!
격한 폭언이 온 아파트를 휘감으며 저희는 그렇게 들고갔던 배와 사과를 다시 들고 집에 돌아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후에 전해들은 이야기로는 저희가 다녀 간 후 잠잠했던 집에 또 다시 폭풍이 몰아쳐 시도때도 없이 어머니와 동생들을 핍박하셨다고 합니다. 그 기분의 여파가 명절까지 이어졌고, 친정집의 세 가족은 그렇게 친가로 가 명절을 보냈다고 합니다.
다섯식구여야 할 집이 어째 네명만 왔으니 어리둥절 했고, 사연이 퍼져 큰댁에서도 이를 알고는 저희 아버지를 설득을 했다 하셨습니다.
하지만 설득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고, 그렇게 쫓기듯이 친가에서 명절을 보내고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아버지는 이 긴 싸움에서 제게 인생에서 처음으로 백기를 들게 됩니다.
아버지가 너그럽게 마음을 풀어볼테니 집에 다시 오라 하십니다.
남편은 장인어른 대접할 술이라며 마트에서 제일 비싼 양주를 골랐고, 정장을 차려입고 처갓집으로 입성했습니다.
나가 있는 사이에 친정 어머니는 몰라보게 야위었고, 아버지 역시 편한 얼굴은 아니었습니다.
조니워커가 오고가는 주안상에서 그간의 이야기를 풀어 내셨습니다.
아버지는 사위에게 많이 서운했다 하셨습니다.
자네를 그렇게 가혹하게 평가한 것은 내가 자네를 시험하려고 그런 것이었다며-
무시한 것은 아닌데, 그런것도 잘 모르고 넙죽 서류에 사인 하나로 딸을 데려간게 매우 서운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저도 써놓고도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어처구니 없는 일은 이것 뿐만이 아니니 뒤로 더 가봅니다.)
‘내가 그런것은 그런게 아니고, 다 너희를 시험하고 사랑하는지를 보고자 함’이 었다는 말로 사위와 장인어른간의 갈등은 일단락 되었습니다.
혼인신고가 되어있으니 식만 올리면 되고, 그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됩니다.
상견례를 진행하여 서로의 의견을 조율하고, 이간의 오해를 풀기로 합니다.
허나 이 결혼의 준비과정에서부터 복병은 아버지 하나가 아니었음을 저는 알게 됩니다.
아버지 하나만의 옹고집으로 무산될 뻔 한 결혼식이 친정 어머니의 의견개입과 함께 서서히 의미가 어그러져 가게 됩니다.
그간의 오해와 어려움을 딛고 마련된 상견례 자리.
일단은 그간 과한 감정표현이나 각자의 마음고생은 서로의 사과로 일단락 되었습니다.
시댁 어른들은 당신 자식이 어마무시한 멸시로 상처받은 것에 대해서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로 하십니다.
그리고는 형식적으로 예단이니 예물이니 하는 것에 대해 어른들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상견례가 시작되기 전에 남편은 장모님을 따로 모시고 이렇게 얘기를 드렸습니다.
“장모님, 예단이며 예물이 예전 혼례를 따르는 좋은 전통이라고 생각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허례허식이라고 생각도 듭니다.
적은 돈도 아니고 양가 어른께서 이러한 과정에 쓰실 돈이 매우 부담이 되실 것 같아 저는 이러한 절차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꼭 이점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부탁드렸다고 합니다.
해서 상견례 자리에서도 이 말이 수면위로 떠오릅니다.
시어머니께서 “귀한 따님 보내시는 애틋한 마음 잘 알아, 저희 딸처럼 예쁘게 키우고 예뻐하겠습니다.
그리고, 예단이니 기타 것들은 정말로 절대로 보내 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이렇게 결혼하여 둘이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이 저희에게 큰 의미입니다.
큰애(남편의 형, 아주버님)때도 마찬가지로 전혀 그러한 절차가 없었으니, 전혀 신경 써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게 상견례를 마치고, 결혼준비에 돌입합니다.
사실 저러한 상견례를 마치고 나면, 저희가 준비할 것은 웨딩드레스에 맞는 제 몸, 즉... 격한 체중감량만이 필요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줌마들 사이에서의 입소문이며, 부추김이 이 결혼에 걸림돌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어느 날 친정어머니가 불러 남편과 집에 갔더니 두툼한 돈 봉투를 내어주십니다.
“이게 뭐요 엄마?”
-예단비다.
“?????!!!!?!?!?”
-비단봉투는 네가 사서 잘 포장해서 가지고 있어.
생략하기로 한 예단이 여기서 튀어나오게 됩니다.
“어머니, 예단, 예물 다 안하기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도 딸 보내는 입장에 빈손으로 들려보내면 자네집에서 욕할것 아닌가. 나의 성의이니 받아주게.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준비한 예단이라기에 몸둘 바를 몰랐지만, 남편은 여기서 부터 슬슬 화가 나기 시작합니다.
생략하기로 한 예단이 갑자기 튀어나와 부담이 앞설 시부모님 생각에 살짝 화가 나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 친정어머니께서 또 한번 불러 바깥에서 만납니다.
이불집입니다. 보아하니 예단에 같이 들어갈 이불을 살 모양이었습니다.
저도 엄마가 큰 돈을 쓴다는 걱정이 들어 엄마에게 한마디 내비칩니다.
“엄마, 요즘 이불예단도 잘 안한데, 돈만 서로 왕래하고 만다는데 왜 이런것까지 하려고 해...
그날 진심으로 사돈 어른들께서 말씀하셨잖아.”
- 몰라서 하는 얘기! 안해가면 막상 안해왔다고 나중에 소박을 줄것이 뻔하다!
그리고, 엄마 회사에도 너랑 비슷한 시기에 결혼하는 딸이 있어서 얘길 들어보니,
반상기는 안하더라도 이불은 한다더라! 이불은 해야해.
굳이 예정에도 없던 이불예단도 튀어나옵니다.
그리하야 대망의 예단 전달일.
당초 봉투에 담아 전달하는 현금정도로만 생각했던 예단 전달이
이불을 나르는 장정들까지 추가되어 우르르 몰려오니 남편이 더더욱 난처하고 화가 나기 시작합니다.
저도 어찌해야할 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시댁에 들어가 여름이불 한 채, 겨울이불 한 채로 300만원어치의 이불이 들어가고,
이불단에 싸여 비단 봉투에 적지않은 예단비가 들어가 있습니다.
시어머니와 시아버지는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딸 보내는 마음에 이렇게 준비해서 보내니 사양치 마시고 받으셔요. 호호호호”
벙찐 분위기에 톡 튀어나오는 친정 어머니의 웃음. 그리고 마냥 밝지않은 시어머니의 표정. 저와 남편은 그 자리가 가시방석같습니다.
뒤에 일이 있다며 친정 어머니는 먼저 자리를 나가시고, 저와 남편, 아버님과 어머님만이 서서 집채만한 이불더미 앞에서 서있습니다.
“아가, 얘기좀 하자.”
남편과 저는 어머님과 아버님의 부름에 안방으로 들어갑니다.
생략키로 한 예단이 나오니 어머님은 당황하셨다는 속내를 비치십니다.
받자하면 하나부터 열까지 다 준비해서 주고받았겠으나 이렇게 말이 다 정리되고 나서 이렇게 받고나니
기쁘고 즐거운 마음보다는 부담이 크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주신것은 너를 보아서 감사히 잘 받겠다고 하십니다.
그렇게 부담을 안겨주었다는 이유로 결혼준비에서 남편과의 첫 다툼이 있었습니다.
‘우리 엄마는 나 생각하고, 오빠 생각해서 적지않은 돈으로 준비한거라잖아!’, ‘약속이 다르잖아! 부모님께서 얼마나 당황하셨겠니!’......
결국 이야기는 같은 이야기고- 무의미한 말다툼이 오고갑니다.
일정금액의 예단비를 다시 돌려받아 친정 어머니께 가져다 드립니다.
친정어머니는 매의 부리처럼 예단봉투를 낚아 채더니 금액을 확인합니다.
“거 봐라. 하지말자, 하지말자 해도 이렇게 챙길것은 다 챙긴다니까?!”
친정어머니 생각에는 예단을 하지 말자 했으니, 당신이 보낸 돈이 고대로 다시 돌아올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저 혼자만 가서 들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던 날입니다. 그리고는 어머니의 질문이 재차 이어집니다.
“예단을 이렇게 했으니, 네게 예물은 주시겠지?”
-예물?
“이 멍청아. 예물을 받아야지, 그게 네 쌈짓돈이 되고- 비상금이 되는거지!”
무슨의미인지 잘 압니다. 주변 언니들에게 익히 들어 더 잘 압니다.
하지만 제가 관심이 없고, 욕심이 없습니다.
피부톤이 맞지 않아 달지도 않을 순금 목걸이, 귀걸이가 필요가 없고, 왕방울만한 진주는 더더욱 관심도 없습니다.
주렁주렁받아 도둑들어 훔쳐갈까 신주단지 모시듯 데리고, 아니 모시고 있어야 하는 예물은 관심이 없습니다.
-주셔도 받을 생각이 없고...... 관심이 없어 엄마.
“이런 둔탱이! 멍청이! 엄마가 다 이렇게까지 돈을 쓰고 마당을 깔았으면 너도 챙겨야 할 것 아니냐!”
아아, 머리가 휘청휘청 합니다.
생각해보니 엄마가 이불과 예단에 1,000이 넘는 돈을 썼으면 무언가 보상을 받아야 할 것 같은 심리가 불쑥 튀어나옵니다.
결국 저는 남편에게 예물을 요구하게 되고, 이것은 곧 결혼식 과정에서 2차 싸움이 됩니다.
애초에 하지도 말자는 것을 예단이 빌미가 되어 하나 둘씩 시작하게 되니, 한도끝도없는 허례허식이 시작될 것 같은 기분입니다.
그러니 남편은 실망을 하게 되고, 무기력한 싸움이 또 시작됩니다.
저도 요구하고 보니 어떤 면에서는 ‘아 나란애가 참 염치도 없구나.’싶습니다.
하루에도 몇번씩 천사와 악마가 머릿속에서 ‘당연히 받아야지!’와 ‘그래도 안하기로 한건 안하는게 맞지않니?’하며
매일매일 왱왱 싸우게 됩니다.
무기력한 이 싸움은 결국 남편이 할머니와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순금을 녹여
팔찌와 목걸이, 실가락지 3종 세트를 만들어 주는 것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그렇게 의미있는 패물을 제게 예물로 주었다니- 역으로 저 자신이 엄청 부담이 되고 남편에게 미안해집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정말 아껴서 잘 사용하겠다고, 무슨일이 있어도 이것은 절대로 아이 돌반지로도 만들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남편도 너덜너덜해지고, 저도 넝마가 된 기분입니다.
‘얼마나 좋은 예물을 받았느냐’가 매사의 관심이었던 친정 어머니는 순금으로 된 3종세트를
기분좋게 받았다는 말로도 믿지 못해 사진으로 찍어보내라는 극성을 부리십니다.
‘나중에 보여드릴게요.’라고 얼버무림으로도 해결이 되지 않자,
예정에 없던 ‘함사세요’도 하자며 결혼 분위기를 끌어 올리자고 하십니다.
말이 끌어올리는 분위기지 당췌 왜 해야하는지, 저도 남편도 난감하기만 합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기분좋게 딸래미 결혼 시키느라 분위기도 내시는 모양이니 맞춰드리자 하며 함도 들여갑니다.
그렇게 실반지, 실목걸이, 팔찌 3종세트를 가지고 12월의 폭설을 뚫고 친정집으로 함이 들어갑니다.
(나중에 제 친구 함 들어오는것을 보니 제 몸과 남편, 제 패물상자 셋이 덜렁덜렁 간것이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짓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허허(웃는데 눈물이 나네 거참,.))
패물함을 보고는 친정 어머니는 애써 웃어보이셨고, 아버지는 베란다에서 줄담배를 갑으로 피우고 들어오실 생각을 안합니다.
뒤에 어머니는 “그런 예물을 받고 잘 받았다고 하는거냐 이 멍청한X아!!!”하며 저에게 악다구니를 지르시며,
12월.... 저는 어쨌든 겨울의 신부가 됩니다.
결혼식도, 결혼하고 나서 생활도 좀 조용했으면 좋겠는데-
당췌 그러지를 못하네요. 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