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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07/17 16:48:29
Name 글곰
Subject [일반] 우리 모두는 우주소년
아래 댓글을 확장시켜서 썼습니다.
https://pgr21.com/?b=8&n=59803&c=2290652
글의 특성상 반말체임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

나는 지방의 도시에서 나고 자랐지만 명절이면 차를 타고 지리산 구석진 곳에 위치한 시골로 향했다. 촌구석 중에서도 손꼽을 만한 촌구석이었던 시골에는 가로등조차도 거의 없어, 저녁 여덟 시만 되어도 사방은 무서울 정도로 어둡고 고요했다. 나는 저녁을 먹고 나면 딱히 할 일이 없어 마당으로 나오곤 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보면 그곳에 별들이 있었다. 머리 위로 쏟아질 듯 찬란하게 빛나는 그 별들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나는 마당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목이 아플 때까지 고개를 들어 북두칠성이며, 카시오페아며, 오리온자리를 찾아보곤 했다.

여덟 살의 나는 과학자가 되고 싶었다. 우주선을 만드는 것이 나의 꿈이었다. 지금도 본가에 가면 액자에 넣어져 걸려 있는 내 유치원 시절 그림 속에서 나의 우주선은 똥꼬에서 무지개빛 불꽃을 뿜어내며 우주로 향하고 있다. 그 아래에는 묘하게 은하철도999를 닮은 기차가 태양을 향해 달려간다. 본가에서 그 그림을 볼 때마다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 나는 우주소년이었구나, 하고

나뿐만 아니라 그 시절에는 모두가 우주소년이었다. 모래바닥에 나뭇가지로 태양계를 그리고, 어린이 과학그림대회에서 달나라로 향하는 로켓 불꽃을 새빨갛게 색칠하고, 언젠가 저 우주 어딘가에서 발이 여덟 개 달린 대머리 우주인과 만나 이야기를 나눌 거라고 생각하던 우주소년들이 교실마다 바글바글했다. 나이가 들어 가며 우주소년들은 대부분 우주 대신 다른 것을 먼저 생각하기 시작했다. 시험. 성적. 수험. 진학. 대학. 졸업. 취업. 결혼. 술. 담배. 게임. 섹스. 자동차. 집. 그리고 수많은 다른 것들을.

그러나 한때 우주소년이었던 그들의 마음 한구석 어딘가에는 여전히 우주가 각인되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문득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잘 보이지도 않는 별들을 찾아 헤매고, 술자리에서 문득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을 외고, 졸린 출근길에 문득 외우주로 나간 보이저와 화성 지표면을 달리고 있는 큐리오시티를 떠올리는 것이다.

아내가 임신했을 때 태교 여행으로 제주도에 갔었다. 밤 아홉 시, 자동차 전조등 말고는 그 어떤 불빛도 보이지 않는 컴컴한 산길을 엉금엉금 올라간 우리는 천문대에 도착했다. 그곳의 커다란 광학 망원경을 통해 나는 처음으로 토성을 보았다. 비록 손톱 절반만한 크기였지만 허리를 두른 고리가 선명했다. 난 아이처럼 흥분했고 아내는 철이 덜 든 큰아들을 보는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뉴 호라이즌즈가 며칠 전 명왕성의 사진을 보내 왔다. 9년 5개월 동안 56억 7천만 킬로미터를 날아 저 아득한 태양계 외곽에서 보내온 그 선명한 사진이 모두에게 공개되었다. 인류 역사상 그 누구도 보지 못했던 명왕성의 모습이. 삼십대 중반을 넘어선 나이에, 옛 꿈처럼 구십 도 각도로 기울어진 우주선의 의자에 앉아 이륙하는 대신 사무용 의자에 구부정하니 앉아 일을 하고 있는 순간에, 모니터 너머로 명왕성의 모습을 보며 나는 어째서인지 가슴이 두근거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명왕성이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우주소년이었고, 지금도 우주소년이며, 앞으로도 여전히 우주소년일 것임을.

한때 우주소년이었던 모든 아저씨들을 위해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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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약선인
15/07/17 16:51
수정 아이콘
공감합니다.
천체망원경 하나 가지는 것이 꿈이었는데...
지금은 돈은 가졌으나...
순수한 열정은 사라지고...
밤 하늘은 너무 밝아 별을 볼 수 가 없네요...
15/07/18 10:52
수정 아이콘
공감합니다
15/07/17 17:13
수정 아이콘
보이저, 아폴로, NGC, 메시에, 반사망원경, ASA 1000, 오리온자리 대성운, 삼태성, 플레아이데스 성단, 시리우스 쌍성계, 베텔기우스, 리겔, 화성, 토성, 목성, 엔데버, 챌린저, 콜롬비아, 부란, 스카이랩, 소유즈, ISS, 휴스턴, 백조자리 X1, 우주배경복사, 맥동변광성, 헬리혜성, 슈메이커-레비 혜성, 하야부사......
Galvatron
15/07/17 17:24
수정 아이콘
20년전 일본에서 돌아오는 아빠가 약속했던 천체망원경을 가지고오시지않았을때 한 한주일 아빠하고 말을 안했었죠.....
지금은 살 돈이 있어도 밤12시가 돼도 별이 몇개 안보이는 대도시에서 살고있으니 사봤자가 됐네요.
저 신경쓰여요
15/07/17 17:25
수정 아이콘
맞아요. 어렸을 적 우주 소년이었죠. 글이 참 좋네요.
15/07/17 17:26
수정 아이콘
이루펀트의 우주시리즈앨범이 생각나네요 누구나 우주나 별에 대한 동경은 커서도 다등들가지고있는것같습니다
영혼의공원
15/07/17 17:44
수정 아이콘
전 어릴적에 홈즈를 읽다가 탐정이 되고 싶어서 "소년중앙" 같은 잡지에 나오는 탐정키트? 구입했던 기억이 있어요
물론 조잡한 상술 제품이었지만 나름 진지하던 ... 그립네요
율리우스 카이사르
15/07/17 17:44
수정 아이콘
플루토~~ 발음이 귀여워 애들이 좋아하는 마지막 행성.. 이제 행성에서 빠졌죠? ?
iAndroid
15/07/17 17:45
수정 아이콘
과학도는 명왕성을 가장 가까이서 봤다는 것에 기뻐합니다.
공학도는 명왕성까지 가서 제대로 작동했다는 것에 기뻐합니다.
15/07/17 21:14
수정 아이콘
크크킄크크크크크크크크크크크크
언뜻 유재석
15/07/17 17:47
수정 아이콘
15/07/17 19:01
수정 아이콘
플루토 기여어...(2)
사과씨
15/07/17 17:59
수정 아이콘
그 시절을 추억하며 가끔 아이폰에 깔려있는 Starwalk를 실행해서 하늘을 향해 휘적휘적 돌려보곤 합니다. 따로 공부하지 않아도 줄줄 외울수 있었던 오리온자리 마차부자리 백조자리 큰곰자리 작은곰자리 알데바란 카펠란 시리우스.... 뭐 그런 이름들이 맥주캔을 잘라 만들어보려고 그렇게 애썼던 반사식 천체망원경 없이도 간단하게 보이더라구요. 맞아요... 저도 글곰님처럼 우주소년이었던 것 같습니다.

... 그나저나 iOS용 Starwalk 2가 공짜더군요. 1은 한 6달러 주고 샀던 것 같은데... 혹시 아이폰 쓰시는 분들은 지금 다운 받아보세요 크..
15/07/17 18:16
수정 아이콘
안드로이드에서는 google sky map 추천합니다. 공짜입니다!
15/07/18 09:35
수정 아이콘
급하게 검색해보니 3.29불이군요 ㅠㅠ
15/07/17 18:37
수정 아이콘
저는 우주에대해 잊고 지내다 우주형제 만화 보고 우주에 대한 동경이 다시 살아나더라구요
은하관제
15/07/17 19:02
수정 아이콘
은하계의 관제사가 되고 싶습셉습니다. 괜찮은 은하계 있으면 추천좀 부탁드립니다.
15/07/17 19:49
수정 아이콘
추천드립니다
나이가 들어가니 그동안 잊고 살았던것에 관심이 다시가기 시작합니다

예전에는 참 눈앞에있는것에만 안달복달했는데 다시 우주이야기에 눈이 가네요
리비레스
15/07/17 19:51
수정 아이콘
몇달전에 나사 홈페이지에서 명왕성 지명 투표할 때 한국의 탐험가 혜초에 대해 조사해서 보냈는 데 아쉽게 안됐던 기억이...크크
15/07/17 20:35
수정 아이콘
중고등학교 때 친척집 옥상에 비닐하우스 천문대를 만들어 놓고 관측하던 기억이 납니다. 80년대라 그때는 지금처럼 택배 인프라가 없었죠. 일년동안 모든 돈으로 서울 뉴코아 백화점에서 망원경을 샀는는데 다음 날 밤인가, 매장에서 판매한 여직원이 눈을 흠뻑 맞으며 망원경 박스를 인천까지 갖고 왔었습니다. 여직원은 이쁘지 않았습니다.
DarkSide
15/07/17 22:36
수정 아이콘
이 글 보고 삘이 팍 꽂혀서 다시 인터스텔라 한 번 더 보러 갑니다. 추천합니다.
오렌지샌드
15/07/18 09:02
수정 아이콘
소녀도 끼워주세요. 초등학교 때 태양 반지름을 외우고 고1때 전교에서 지구과학 둘째가라면 서러웠다구요.
그랬던 소녀가 이젠 우주라 하면 발밑의 허전함에 불안감을 느끼는 보통여자가 되어버렸네요. 그래비티가 너무너무 무서웠더랬습니다..
지금이라도 눈앞의 일로 안달복달 말고 좀 꿈을 크게 가져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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