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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3/05/25 16:13:17
Name tyro
Subject [일반] 양산형이 슬픈 이유
0.

'카오스를 할 때 조심할 게 몇 가지 있어, 그 중 하나는 프리룰에서 나엘을 하면 안된다는 거야!'

예전에 어디선가 들었던 말이 머리 밖으로 슬며시 빠져나온다.
"그래 그 말이 맞는 말이었어, 그런데 내가 왜 프리룰에서 나엘을 선택했을까..."

그리고 채널에서 광고를 하는 사람에게 귓말을 보내던 순간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1.

"8282 채널로 들어오세요."
광고인에게 귓말을 받고 채널로 들어가 보니 아직 사람이 없다.

'오늘은 어떤 캐릭터를 선택할까?'
'어떤 플레이를 하지?'
오랜만에 카오스를 한다는 생각에 즐거운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그러던 중 인원이 다 모였고, 광고자가 방을 만들자 하나 둘 화면에서 사라진다.
나도 서둘러 방에 들어가 진영을 골랐다. 물론 내가 선택한 진영은 나엘이다.

"나가지 마세요. 나가면 이xx입니다."
오늘도 여느 때와 같이 경고메시지와 함께 시작한다.

5, 4, 3, 2, 1...


게임화면으로 전환되고 나온 캐릭터들을 보니 '가래(나)/프로드/자이/엘딘/실크' 이다.
최악의 조합이다. 시작부터 고생길이 보였다.
결국 나랑 '자이'가 립을 가기로 정했다.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게다가 상대는 '래퍼드/악동/아키로/에일/바이퍼'가 아닌가.
암살, 립, 정찰, 테러, 한타 등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 없는 좋은 조합이다.
다시 한숨이 나왔다.

크립을 잡다가 '래퍼드/에일'을 만나 도망간다.
하지만 끈질긴 추격전 끝에 '자이'는 '에일'에게 덜미를 잡혔고, 결국 '래퍼드'한테 죽임을 당했다.
뭐 안타깝지만 나라도 살아야지...

립조는 예상대로 망했다. 라인상황은 어떠한가?

'에일'이 방어타워(제1방어탑)를 밀고 있는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곧이어 '악동/래퍼드'에 의해 잡힌 라인 캐릭의 비명이 들려온다.

상황이 점점 안 좋게 진행되는 것이 느껴진다. 설상가상으로 상대방들도 고수들이다.
'에일/키로'는 소환물을 온 사방에 뿌려 맵을 장악했고, 아군의 위치가 어디인지 계속해서 발각된다.
일단 적에게 정보가 들어가게 되면  '래퍼드/악동/바이퍼'는 혼자서 성장하는 캐릭들을 가만두지 않는다.

라인에서 성장하던 '실크/엘딘'이 사망했다는 메시지가 화면에 뜬다.

연이은 악재에 성장을 포기하고 다 같이 중보(제2방어탑)와 함께 방어하면서 버티기로 결정했다.
곧이어 적들이 북쪽에 있는 '중보'로 쳐들어왔고, 치열한 전투 끝에 가까스로 방어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방어전이 끝나니 '에일'이 아래 배럭(생산기지)을 미는 일종의 성동격서였다.

'배럭' 가운데 일부가 파괴되고 한타 교전도 밀리는 절망적인 상황.
희망이 보이질 않았다. 차라리 누군가 욕을 하면서 총대를 메면 좋겠다는 생각이 살짝 든다.



2.

'절망의 허망함은 희망과 같다 - 루쉰'


시작은 '프로드' 유저의 한마디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차피 이래죽으나 저래죽으나 마찬가지이니, 나가서 멋지게 한타라도 하고 지지를 칩시다"

그리고 '프로드'를 필두로 상대 진영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너무도 좋은 상황이라 상대도 방심했던 탓일까?
적들이 서로 떨어져 있는 틈을 노려서 교전에서 이득을 보았고, 더 나아가 상대방의 배럭까지 미는 데 성공했다.
이를 통해 불리했던 정황을 많이 따라잡았다. 예상 밖의 행동에 적들이 당황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아군의 마법기술연계를 킬로 연결해줄 수 있는 스턴 캐릭의 부재와 그 시간을 만들어 줄 탱커가 없는 점이 뼈아프게 작용했다.
잇따른 교전 손해로 상황은 점점 패배 쪽으로 가까이 다가간다.

유일한 희망은 제 3방어탑(용)을 끼고 방어를 계속하면서 빈틈을 노려 상대방 본진(최종목표)을 날리는 것이다.
물론 조금 더 버틸 수는 있지만 더 시간이 흐르면 힘들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모두 모험을 하는데 동의했다.
상대방 시야를 피해 본진을 향해 달려간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하지만 그러한 시도도 소환물의 정찰에 걸리면서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목표로 삼았던 위치에 도달하기 전에 한타 교전을 벌일 수밖에 없었고,
'프로드'의 회심의 궁극스킬을 막아내는 '래퍼드'의 무적기술 활용으로 대패하면서 승부가 갈리게 되었다.

끝나고 나서 서로 웃으면서 말을 나눈다.
"비록 일방적이긴 했지만 그래도 재미있었고 좋은 승부였습니다."



3.

게임이 끝난 뒤 잠시 상념에 빠진다.


나엘 진영은 각자의 기량도 괜찮았고, 팀플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프로드'를 택한 사람의 지휘는 훌륭했고, 그 덕분에 개개인이 지니고 있었던 기량 이상의 힘을 발휘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상대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조합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어떻게 했다면 조금 더 좋은 상황을 만들 수 있었을까?

게임에서 몇 가지 아쉬웠던 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보았다.
(1) 초반 립 캐릭터의 부재 탓으로 겪은 심한 피해
(2) 한타 교전 전에 따로 움직이는 캐릭터를 끊어줄 수 있는 스턴 캐릭의 부재
(3) 한 타교전 시에 상대방 스킬을 맞아줄 탱커가 없어서 무너지는 진형

이런 점을 극복하기 위해 아래와 같은 조합 변화를 생각했다.
(1) '자이'를 라인으로 보내고, '엘딘'대신 립캐로 '사카/첸'을 선택
(2) '가래'대신 스턴캐릭으로 '참새/샤'를 선택
(3) '실크'대신 '무라'를 선택

만약에 '샤/사카'를 선택해서 립을 가고 '자이/무라/프로드'가 라인을 갔다면 더 괜찮은 상황을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오랜 고민 끝에 나온 최선은 당시 유행하던 조합이 되어버렸다.



4.

어렸을 때 바둑을 배우던 기억이 생각난다.

아마 조금씩 다르긴 하겠지만, 보통은 먼저 간단한 규칙을 배우고 그다음에 정석의 기본형태를 배운다.
그리고 이렇게 배운 기본을 바탕으로 정석과 다른 형태로 두면 어떻게 되는지 한판 한판 해보면서 익혀나간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패턴을 해보면 이런 효과가 생기고 저런 패턴에서는 저런 결과가 나온다는 걸 알게 되는 것이다.

기본정석에서 파생된 형태를 정리하면 책 한 권 분량이 가볍게 나온다.
그렇게 관련된 책을 수어권 읽다 보니 정석이 왜 정석으로 남게 됐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정석의 근간은 상대와의 수싸움이며, 여러 수싸움을 비교하는 과정에서 가장 좋다고 생각되는 패턴이 정립된다.
그렇게 쌓이고 쌓인 패턴의 총체가 정석이다. 가볍게는 다섯 수에서 깊게는 사십 수가 넘어서까지.

만약 정석을 극복하려면?
기존에 연구되었던 수싸움보다 더 좋은 패턴을 생각해야 한다.
여러 수싸움을 비교하여 정석이 형성되는 원래 과정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과정에서 처음에 배운 기본정석을 선택하였다.

사전에서는 정석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정석[定石]
바둑에서,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공격과 수비에 최선이라고 인정한 일정한 방식으로 돌을 놓는 법.

과연 그러한가?
겉으로 보이는 방식은 일정하지 몰라도 그 속에 담긴 수싸움은 가변적이지 않을까?



5.

스덕생활을 하다 보면 여러 가지 재미있는 표현을 익히게 된다.
한 때 넷상에서 대세를 타던 삼체도 스덕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니 말이다.

그러한 표현 중 하나가 양산형이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말인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어감상 대량생산에서 유래된 말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최연성 이후 보통 테란들을 칭하는 표현으로 사용하는 듯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런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양산형이라는 말에서는
누군가가 틀을 만들면 나머지 사람들은 그 틀이 만들어진 의미를 모른 채 그대로 사용한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6.

과거에 논란거리였던 <아카디아2  테저전 맵 밸런스 논쟁>이 떠오른다.

당시 테란은 저그를 상대로 원배럭 더블을 해도 졌고, 그 밖의 것들을 했는데도 졌다.
그래서 나온 결과가 10:0이다.

테란은 그대로 무너졌는가?
아니다. 당대 테란은 2배럭 압박, 선팩조이기, 벙커조이기, 치즈러쉬 등 여러 시도를 통해 아카디아의 저그를 이겨냈다.

이후 뮤탈리스크 뭉치기 컨트롤의 발달로 저그의 2해처리 뮤탈빌드에 테란은 다시 한 번 무너진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테란은 다시 여러 방법을 강구했다.
정명훈의 발리오닉, 이영호의 골리아닉, 패스트베슬 등등

그리고 테란의 원배럭 더블은 지금도 정석으로 남아있다.



7.

얼마 전에 추게에서 재미있는 글을 봤다.
김연우님의 '왜곡된 최연성의 유산'이다.

이 글에서
최연성이 연주한 즉흥곡은 정석 안에 담긴 수싸움을 나타낸 것이고
즉흥곡을 기록한 악보는 정석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양산형 테란들의 악보는 일정했을까?
아니다. 계속해서 악보는 변했을 것이다.
다만, 거장이 생각해 낸 큰 흐름은 바꿀 수 없었기에 그대로 기록했을 뿐이다.

정석은 누가 만들었는가?
몇몇 거장과 수많은 양산형이다.

하지만 대중은 양산형이 만든 악보는 알지 못한다.
기억하는 건 오직 거장 뿐.

아마도 양산형이 슬프게 다가오는 이유는
나 또한 그런 사람 중 하나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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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5/25 16:19
수정 아이콘
예전에 썼던 글인데 아래 글 보고 생각나서 올려봅니다. 김연우님 글 보고 영감을 받아 쓴거였는데, 그분이 결혼하신다니까 모르는 분인데도 왠지 감회가 새롭네요. 혹시 이 글을 보신다면 결혼 축하드립니다.
13/05/25 16:23
수정 아이콘
그러고보니 아카디아는... 결국 원배럭 더블로 극복하지 않았던가요?
이제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13/05/25 17:00
수정 아이콘
뭘로 극복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데 극복은 했었죠..

10:0 의 전적이 20:20 에서 테란이 몇판 더 이긴 정도로 끝난 걸로 기억합니다..
떴다!럭키맨
13/05/25 17:21
수정 아이콘
이재호가 해법을 보여줬습니다.

원배럭 더블로 출발을 해서 뮤탈 짤짤이 잘 막고 한방 병력 진출해서 안죽고 시간 잘끌면서
저그 멀티 드론 뽑는 타이밍 늦추고 저그 한방병력이랑 잘 싸워주고 배슬을 동반한 SK테란으로 저그의 디파일러 잘 끊어주면서
틈나는대로 드랍쉽 날려가며 저그 멀티 방해하면서 4가스 먹은 저그 상대로 힘싸움 계속해다가 결국 말려죽이면 된다. 이게 해답이였죠.

아마 좀 나중에 지금은 은퇴한 염보성 선수가 어떤 스타프로그램에 나와서 이재호 선수에 대해서 이야기한적이 있었는데...
아카디아가 나왔을때 진짜 답도없고 너무 힘들어서 도대체 어떻게 플레이해야되나 자신감을 잃고 있었는데...
이재호 선수 플레이하는거보고 허탈하기도 하고 좀 뭔가의 벽을 느꼈었다 그런 뉘앙스가 담긴 발언을 했던걸로 기억해요.

본문에 대해서 코멘트를 달자면 양산형 특히 빌드를 통한 최적화 플레이가 용이한 테란을 중심으로 좀 폄하하는 의미로 불러지기 시작했다가 종족 가릴거없이 선수들의 플레이가 고도로 최적화 되기시작하고 프로리그의 경기수가 많아지면서 지친 시청자들이 비슷한 맵에서 스토리도 없는 경기에 지쳐 양산형 플레이 양산형 경기라는 말들이 급속도로 퍼저나가기 시작한거 같습니다.

말씀하신대로 패러다임을 이끌건 종족을 이끌던 거장의 칭호를 받을만한 선수들은 존재했었고 비슷한 빌드로 시작했지만 빌드의 최적화 유닛활용 타이밍계산등 수많은 변주를 통한 여러 작곡가,연주자 테란들도 많았었고 그것들은 조금씩 껍질을 깨어 각 종족과 맵에 맞는 최고의 플레이 좀 오글거리지만 신의 한수를 찾기 위한 플레이에 다가섰습니다.

저 역시 마지막 두줄에 깊히 공감하는 바이지만 보고 즐기기 위한 경기에서 모든 시청자들이 선수들의 플레이와 경기하나에 디테일함을 살펴가며 일일히 환호하고 탄성을 짓는거는 사실상 힘든일이고 또 승리하기 위해 한수 한수를 내다보면 전술의 기동에서 조금 다른 모습을 을 보여줄뿐 전략시뮬 특성상 거의 똑같은 빌드 똑같은 타이밍을 최적화하는 모습들은 자주 나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경기가 많아지고 시청자들이 신선함을 느끼지 못하고 그것이 스타크래프트의 수명이겠지요.

거장은 존재했고 그리고 또 그것에 영감받은 수 많은 작곡가들이 변주를 통해 저마다의 색깔과 나름의 방식으로 각 종족의 플레이를 가장 완성에 가까운 모습을 만들기 위해 경쟁하고 노력했습니다. 이것은 개인과 개인의 대결이 아닌 스타크래프트로 로 구현할 수 있는 각 종족의 가장 아름다운 플레이를 볼 수 있는 재미였다고 생각하고 스타크래프트 그 자체가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조금씩 진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스타1은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즐길 수 있는 그런 좋은 오락이였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게는 양산형 선수로 기억될 지 모르겠지만 제가 좋아했던 스타를 가지고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해 머리를 싸매고 재미있는 경기들을 보여줬던 좋은 추억들을 담고 저도 그렇고 그 시절의 친구들도 앞으로의 인생에서 양산형이 아닌 정말 특별한 거장으로서 멋진 곡을 남길 수 있는 인생이 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글 잘읽었습니당.
13/05/25 20:35
수정 아이콘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바람모리
13/05/25 17:09
수정 아이콘
워3카오스군요.
내가 녹기전에 적을 녹여야하는 조합인데 어중간하게 힐러가 들어갔어요.
나엘은 차라리 5여캐를 가야합니다?

롤은 안하고 카온만 하는데 다들 롤만해서 그런지 꽤나 쾌적합니다.
노말에 해당하는 공식대전만 검색합니다.
정말 못하는 사람이나 말없이 탈주하는 사람은 있지만 욕이나 트롤러는 없어요.

얼마나 사람이 없냐면요..
전체게이머에게 메세지를 보내는 확성기 시스템이 있는데요.
거기에 일베인일것이 분명한 유저가 "광주는.." 하고 드립을 시작해도
뒤를 이어서 드립을 완성시키는 사람이 없어요.
곡물처리용군락
13/05/25 18:48
수정 아이콘
패치가 너무 이상한방향으로 흘러가면서 계속 악순환이 반복되었죠..저도 열심히 하다가 롤로 갈아탔네요;;
13/05/25 20:40
수정 아이콘
카온은 해보질 못했는데 그렇군요.
결국 카오스도 역사의 뒷길로 사라져가나 보네요.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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