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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3/05/23 20:43:23
Name 선비
Subject [일반] 타바코
타바코

금요일 저녁이었다. 봄날임을 알리듯 해가 기울어도 날씨가 따뜻했다. 건대입구역 2번 출구 앞에서 인혜를 기다리며 담배를 뽑아 물었다. 인혜의 친구들을 만나는 날이었다. 7시까지는 아직 5분이 남았다. 나는 담배를 비벼끄고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커피 티백에 손가락을 문질렀다.
"승우야!" 여자친구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인혜의 친구들은 이미 몇 번 만난 적 있는 사람들이다. 여자친구가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만난 친구들이었다. 나는 운동권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들과 나의 공통점은 아직 졸업을 하지 못했고, 술을 좋아한다는 것뿐이었다. 이 정도 공통점이면 친해지기 충분하다.
술자리는 길게 이어졌다. 그들은 자기네들끼리 광주 민중항쟁이니, 신자유주의 시대의 인간성의 파괴니 등을 떠들었고, 나는 신자유주의가 내가 배운 자유주의와 비슷한 것이길 기도하며 재벌과 다국적 기업들을 비판하며 맞장구를 쳐줬다. 그들은 내가 마음에 든 눈치였다. 복학을 하게 된다면 자기네들 활동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술김에 기분이 좋아져서 선뜻 그러자고 했다.
김진호란 친구는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길게 길렀고 중키에 마른 남자였다. 긴 머리카락에서 예수보다는 실패한 영화감독이 떠올랐다. 술이 좀 들어간 뒤에 그가 물었다.
"그런데 쉬는 날은 무얼 합니까?"
"아무 것도 안 하고 술이나 마십니다." 내가 대답했다.
그의 팔꿈치가 인혜의 어깨에 닿았다.
"취미나 그런 건 없어요?"
"그림을 그립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이 아직 고등학교 참고서 여백에 남아 있을거다.
"네? 그림이라면 어떤 걸 그리죠?"
"모든 걸 그립니다. 인혜도 자주 그리죠. 누드화를 그릴 때도 있는데..."
"무슨 소리야!"
인혜가 내 어깨를 때리면서 소리질렀다.
"그냥 농담입니다."
나는 기분이 나빠져서 담배를 빼어물었다. 인혜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담배 끊는다고 했잖아."
"맑스도 담배를 피웠다고."
"맑스는 다른 일도 했잖아."
나는 내 이름을 딴 경제이론을 만드는 일을 잠시 고민하다가 재떨이에 담배를 눌러 껐다. 소맥을 천천히 한번에 들이켰다. 여전히 기분은 좋지 않았다.

그들과 헤어지고 인혜와 DVD방을 갔다. 죽은 아내가 돌아오는 내용의 지루한 일본 영화였다. 돌아온 아내가 다시 사라지는 장면에서 인혜는 펑펑 울었다. 기분 전환이라도 해볼겸 인혜의 옷깃 속으로 손을 넣어 가슴을 만졌다. 인혜가 짧게 소리지르며 내 손을 쳤다.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내가 방금 새끼고양이라도 죽였다는 듯이 나를 노려봤다.
"그런 거 하지마!"
"미안해."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넌 네가 성녀라도 된다는 거야?"
"무슨 말이야?"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내 친구들한테는 왜 그랬어?"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하...... 됐어. 그만 나가."
우리는 영화를 다 보기도 전에 DVD방을 나갔다. 화면속 여자 주인공이 말했다.
"바보네."

DVD방을 나와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인혜가 담배를 뺏었다.
"차라리 내가 피울거야."
나는 인혜가 담배 연기를 천천히 들여마시고 기침하는 모습을 보면서 담배를 하나 더 빼어 물었다. 성냥으로 불을 붙이고 성냥을 아주 천천히 흔들어 껐다. 인혜가 내 입에서 담배를 낚아 챘다. 그녀는 무릎을 구부려 담배를 땅바닥에 비벼 끈 후에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착한 여자야. 내가 술마실 돈이 떨어졌다고 하면 아마 콩팥이라도 팔걸. 그런데 담배는 왜 그렇게 싫어하는 지 모르겠다. 나는 그녀와 헤어져야겠다고 결심했다.
"연락하지 마"
뒤에서 인혜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술에 취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최대로 똑바로 걸어갔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편의점에서 진로와인이라고 적혀있는 포도맛 알코올 음료를 두 병 사왔다. 나는 시집을 읽으며 그것들을 마셨다. 이해가 가지 않는 페이지들은 찢어버렸다.

일어나서 시계를 보니 두 시쯤이었다. 바닥엔 찢어진 종이들이 널려있고, 나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주전자에서 보리차를 따라 마시면서 커피포트를 켰다. 휴대전화와 지갑을 들고 집을 나섰다. 비틀거리다 현관문에 옷이 걸렸다.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 뚝 끊어지는 느낌이 났다. 인혜가 예전에 하루에 담배 세 개피만 피우라고 해서 오래 피우려 사 놓았던 시가였다. 부러진 시가를 주머니에 넣고 거리로 나왔다.

머리를 감지 않은 탓에 머리가 가려웠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거리를 걸었다. 미용실이 보였다. '남자커트 12000원'. 지갑을 보니 3만 2천 원이 있었다.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미용실에 들어갔다.

미용사는 이십대 중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였다. 약간 통통하지만 엉덩이가 예쁜 여자였다. 머리를 다 자르고 감겨주면서 미용사가 물었다.
"그런데 두발이 왜 이렇게 상하셨어요?"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술을 가끔 마셔서 그런가."
나는 일주일에 술을 두어번 정도밖에 안 마신다는 듯이 수줍게 대답했다.

"그런데......"
머리를 말리면서 내가 물었다.
"머리를 안 상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샴푸를 깨끗이 헹궈내고 찬 바람에 드라이하세요."
드라이를 하면서 그녀의 가슴이 흔들리는 걸 구경했다. 구역질나는 조승우. 여자 가슴이라면 사족을 못 쓰지. 나는 카운터에 12000원을 내고 다시 거리로 나섰다. 햇볕이 뜨거웠다.

다섯시가 넘어 기온이 조금 내려갔다. 담배를 입에 물며 나는 윤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윤성은 덩치가 큰 복학생 친구다. 그는 내 전화를 귀찮아하는 눈치였다.
"동아리 후배들이랑 술약속이 있어."
"잘 됐네. 나도 그 동아리잖아."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우울한 일이 있다는 내 말에 그럼 같이 마시자고 했다.

진로 와인 한 병을 들고는 윤성을 만나러 갔다. 윤성은 내 술병을 보더니 짧게 한숨을 쉬었다. "부르주아네, 포도주를 다 마시고."
"나 소주 못마시잖아." 내가 대답했다.
윤성을 제외하고는 술자리에는 아는 얼굴이 없었다. 후배들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동아리 선배라는 나를 어색해했다. 말하는 화석을 어떻게 대할 지 난처해하는 고고학자들 같았다. 어쨌든 나는 담배를 꺼내물었다.

후배들은 자기네들끼리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무슨 휴대폰 게임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술자리 게임이 몇차례 돌아갔다. 게임 같은 걸 할 기분은 아니었기에 몇판 져주면서 술을 마셨다. 계속 지니까 후배 한 명이 물었다.
"아, 형은 게임을 왜 이렇게 못해요?"
"야, 나는 졸업도 못해."
"그럼 게임에서 빠지실래요?"
"너는 동아리에서 좀 빠져줄래?"
실수를 한 것 같다. 후배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한테 향했다. 집에 가야 한다고 말하고 테이블에 만 원을 올려놓고 나왔다. 친구가 나를 따라내려왔다.
"야 너 후배들한테 왜 그래?"
"무서워서 그래." 나는 다시 담뱃갑을 꺼냈다.

장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번 연애 상담을 해주며 친해진 후배다. 할 말이 있다고 자취방 앞에 갈테니 나오라고 말했다. 전화를 끊고 술을 사러 길 건너에 있는 편의점으로 향했다. 왼쪽에서 헤드라이트 불빛이 비췄다. 택시 하나가 내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자동차 타이어가 마찰하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택시는 내 앞 50cm 정도를 앞두고 멈췄다. 택시의 문이 열리더니 욕설이 들렸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길을 마저 건너갔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들고 가니까 장미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맥주를 따서 급하게 들이켰다. 장미가 눈살을 찌뿌리면서 말했다.
"왜 이렇게 술을 마셔요?"
"교통사고로 죽고 싶지 않아서 그래."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나도 기적을 바라진 않아."
이런 농담들은 긴장을 조금 풀어준다. 나는 술부터 마시자고 그녀를 끌고 갔다.

눈을 떠보니 처음 보는 천장이었다. 나는 구토감을 느끼며 화장실을 찾았다. 빨강색 변기 커버를 젖히고 토악질을 했다. 음식물 탈수기가 된 기분이었다. 물을 내리고 나오자 침대에 장미가 이불을 목까지 올리고 누워있었다. 코고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꼭 새끼강아지가 내는 소리 같았다. 이불을 걷어보려다가 겁이 나서 그만두었다.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나는 다시 화장실로 돌아갔다. 담뱃갑을 꺼내 담배를 하나하나 부러뜨려 변기에 던졌다. 다시 물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바지를 주섬주섬 입고 다시 거리로 나갔다. 해가 밝아오고 있었다. 내 발걸음 숫자를 세면서 큰 길로 나섰다. 돈은 그대로 있었다. 택시를 잡아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술병을 치우고 침대에 눕자 곧바로 잠이 들었다.

정오쯤에 일어나 커피를 마셨다. 모든 것이 선명해진 기분이었다. 나는 다시 집을 나와 학교로 향했다. 속옷을 판매하는 가게가 보였다. 나는 가게로 들어갔다. 가게에서 예뻐보이는 속옷을 하나 골랐다. 사이즈를 대충 말해주자 직원이 종이가방에 포장해주었다. 신용카드로 결제하고 가방을 들고 가게를 나왔다.

인혜가 살고 있는 학교 기숙사 앞에 도착해서 인혜에게 카톡을 보냈다. 5분이 지나도 답장이 없었다. 전화를 걸었다. 여전히 받는 사람은 없었다. 고양이처럼 나는 혼자였다. 주머니를 뒤지니 부러진 시가가 나왔다. 나는 절반을 꺼내물고 성냥을 그어 불을 붙였다. 성냥불이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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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5/23 21:45
수정 아이콘
글 잘 쓰시네요. 주인공의 상태는 이해가 잘 안되지만..
13/05/23 21:54
수정 아이콘
고맙습니다. 사실 저도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아하스페르츠
13/05/23 21:49
수정 아이콘
상당히 흡입력 있네요
人在江湖
13/05/24 00:11
수정 아이콘
근데 읽다 보니 터*의 한 구절이 생각이 났습니다... ( ..)
13/05/24 00:51
수정 아이콘
왠지 제 주머니에도 부러진 시가가 있을 것 같은 느낌입니다.
오묘하군요. 물아일체
오른발의긱스
13/05/24 10:06
수정 아이콘
담배를 끊었는데 갑자기 담배를 물고 싶네요

남자의 카타르시스를 자극하네요
Zergman[yG]
13/05/24 14:20
수정 아이콘
픽션인가요?
13/05/24 14:29
수정 아이콘
제 정신상태를 반영했지만 대부분 픽션입니다. 우선 비속어가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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