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학개론] 누구나 자신만의 동굴은 있다
오랜만에 쓰는 오늘 연애학개론은 이른바 '연인들을 위한 연애학개론'입니다.
연애를 해도 무언가 쓸쓸하고 외로운 누군가를 위한 이야기랄까요.
그 사람이 곁에 있어도 나는 외롭다
우리는 연애를 왜 하나요?
사람마다 다양하고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공통된 정서는 바로 '외로워서'일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연애 동기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외로워서 누군가를 만나고 외로워서 연애를 시작합니다. 물론 연애를 시작하면 우리의 피부를 감싸고 있던 표면적인 외로움은 쉽게 휘발되어버립니다. 혼자 집에서 쓸쓸하고 무료하게 보내던 주말을, 이제는 연인과 함께 영화도 보고 맛있는 밥도 먹고 카페에서 이야기도 나누고, 그러다보면 외로움은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하죠. 하지만 연애를 한다고 해서 모든 외로움이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좋아하는 연인과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혹은 늦은 밤 전화통화를 하다가도 문득 문득, 우리는 외로움을 느낍니다.
우리는 사람이니까요.
단지 한 사람의 인간이기에 외로운 것이죠. 누군가는 '존재 자체의 고독'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누구나 자신만의 동굴은 하나씩 필요합니다.
누구나 자신만의 동굴은 있다
결국 사람은 누구나 외롭습니다. 내 가장 가까운 부모, 형제, 연인이 대신해줄 수 없는, 나만의 외로움은 누구나 간직하고 있는 법이니까요. 그리고 이러한 외로움은 누군가와의 만남이나 누군가의 위로로 해소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닙니다. 오직 스스로가 감당해야만 하는, 나만이 끌어안아야만 하는 그런 외로움이죠.
그러니, 지금 이순간 쓸쓸히 혼자 모니터 화면을 쳐다보는 나의 외로움이, 이순간 화려한 번화가에서 연인의 손을 잡고 길을 걷고 있는 그 누군가의 외로움보다 더 크다고 단언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오히려 연애를 통해서도 해소되지 않는 외로움의 맨얼굴과 마주했을 때, 우리는 더 외로워질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외로워서 연애를 하고, 또 연애를 하면 나의 외로움이 사라질 것이라 기대합니다. 결국 문제는 여기에서 시작되는 것이죠. 상대방과의 뜨거운 연애를 통해 나의 외로움이 해소될 것이라 믿었고, 상대방 또한 그럴 것이라 믿었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 넓은 세상에서 나를 100% 이해해주는 타인은 없다는 사실을, 오히려 연애를 시작한 후에야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것이죠. 결국 '내'가 아닌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나의 외로움과 갈증을 전부 해소하려 했던 기대 자체가 나를 더욱더 외롭게 만들어버립니다. 결국 누군가가 대신해줄 수 없는 나만의 고독과 외로움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스스로를 끌어안고 추스르는 과정이 우리에겐 필요한 것이죠.
하지만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 사람이 나로 인해 행복하길 바라고 나를 통해 외롭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연인과의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하길 바랍니다. 즉, 상대방의 모든 생각과 고민, 아픔들을 낱낱히 알고 싶어하죠. 하지만 이러한 바람이 지나치면 일련의 '집착'과 과도한 '공유의 강요'로 이어집니다. 즉, 상대방의 모든 문제와 고민 혹은 외로움이 나를 통해 해결되길 바라는 것인데요. 그러니 나와 연애하는 상대방이 외롭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공유하고 모든 고민과 아픔을 나누는 연인사이인데 외롭다니? 라는 반문과 함께 상대방이 외로움을 느끼는 것 자체가 둘 사이에 대한 일종의 배신처럼 느껴지는 것이죠.
하지만 나에게도 그 사람에게도, 자신의 외로움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고, 또 스스로를 위로하고 치유할 자신만의 동굴은 필요합니다.
이해보다 중요한 것은 다름에의 인정
그리고 사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나와는 다른 환경에서 각자 수십년간을 살아온 서로가 서로를 100% 완벽하게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어찌보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죠. 그러니 내가 상대방의 마음을 전부 다 이해한다고 믿는 것 자체가 오만이며, 나로 인해 상대방의 모든 고민과 외로움을 해결해줄 수 있다는 믿음 자체가 폭력입니다. 그사람의 동굴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죠. 그리고 이러한 자세는 종종 두가지의 행동 양식으로 나타나곤 합니다.
그 첫번째는 상대방의 문제와 고민을 전부 다 알고 싶어하는 '고백의 강요'입니다. 즉, 상대방의 동의 없이 그사람의 동굴속으로 얼굴을 디밀고 들어가 함께 있고자 하는 것이죠. 상대방이 혼자 고민하는 것 자체를 못견뎌하고 '너의 모든 고민과 외로움의 본질을 내가 알아야겠다'라는 자세에서 비롯되는 행동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만남의 강요'입니다. 즉, 연인인 내가 이렇게 버젓이 있는데 상대방이 혼자서 외롭게 끙끙앓고 있는 모습 자체를 인정할 수가 없으니, 그 사람을 동굴 밖으로 끌어내려고 하는 행동이죠. 상대방의 동의없이 동굴을 부수어뜨림으로써 강제적으로 상대방에게 햇빛을 보게 만듭니다. 이른바, 모든 문제는 나와 함께 공유하고 나와 함께 해결해야 한다는 믿음이 만들어낸 욕심이자 폭력인 것이죠.
하지만 이럴수록 둘 사이의 관계는 더욱더 금이 가게 마련이고, 더 슬픈 것은 이러한 과정 속에서, 부서진 동굴 속에 웅크린 사람만이 아니라, 상대방을 위해 있는 힘껏 동굴 외벽을 내리쳐 부수어뜨린 사람 또한 함께 상처받고 함께 외로울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죠.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간의 동굴을 지켜주는 일입니다. 서로를 100% 이해할 수 없다면, 각자의 동굴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줄 줄 아는 배려가 필요한 것이지요.
정말로 사랑한담 기다려주세요
결국 앞에서 말한 것처럼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고 그렇다보니 상대방에게 무조건적인 이해를 바라는 태도, 혹은 상대방의 모든 것을 무조건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하려는 태도는 오히려 많은 부작용을 동반하게 됩니다. 누구에게나 타인이 이해해줄 수 없는, 혹은 이해받을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하기 마련이거든요. 결국 이해보다 중요한 것은 '다름의 인정'이고 '묵묵한 기다림'인 것이죠. 비록 서로가 함께 연애를 하고 있지만 그사람도 나도, 때로는 외로울 수 있다는 사실, 각자에게 스스로를 돌아볼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당장은 조금 서운하더라도 서로의 공간을 인정해줄 때, 둘 사이의 관계는 더욱더 풍요로워질 수 있는 것이죠.
그러니 정말로 사랑한다면 기다려주세요.
모든 것을 공유하고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잖아요. 성급하게 그 사람의 동굴 속에 얼굴을 들이밀거나, 또 억지로 빛을 보여주겠다며 동굴을 훼손시키지말고 묵묵히 기다려주세요. 그 사람도 자신의 존재를 다독일 시간이 필요하고, 자신만의 외로움을 스스로 끌어안고 추스를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동굴 앞에서 묵묵히 기다리시다가, 그 사람이 스스로의 동굴에서 엉거주춤, 손으로 눈부신 햇빛을 가리며 천천히 걸어 나올 때, 조용히 손 내밀고 끌어안아 주시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당신에게도 당신의 동굴의 필요하듯, 그 사람에게도 그 사람만의 동굴이 필요하니까요.
결국 연애에서의 일방적인 희생이란, 배려를 가장한 욕심이자 폭력일 수 있습니다.
진정한 배려는 tolerance, 즉 서로간의 다름을 인정하는 용기에서 피어나는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