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철 이었습니다. 좋은 시기에 보기 좋게 실연을 당하고 휴가마저 눈물을 흘리며 혼자 밥먹기는 싫어서 30대 남자가 휴가지로 선택하기 힘든 본가로 향했습니다.
부모님께는 엄마가 보고 싶었고 엄마 밥이 먹고 싶다고 했지만 사실 어머니 보다 제가 더 요리를 잘합니다. 엄마가 보고 싶긴 했으니까 하나의 이유는 충족했죠.
오랜만에 와서 그런지 집은 낯설기도 했지만 여전히 포근했습니다. 늦게 일어나도 뭐 먹을지 고민 안해도 됐고 그냥 엄마의 존재 자체가 편함의 이유였어요.
아버지께서는 한 번씩 저를 한심하게 쳐다 보면서 "결혼은 언제 할래?" 라는 녹음기를 돌리십니다.
그래도 남자로 태어났으면 종족 번식의 의무는 짊어 봐야지 진짜 어른이 될 수 있다는 지론을 펼치면서 확성기를 키시는데 부모의 잔소리에 반박할 수 있는 유전자탓을 이 문제에는 적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미인과의 결혼에 성공하셨기 때문이죠. 그래서 "아빠 닮아서 눈이 높아서 그래" 라는 빈말로 넘길 수 밖에 없었죠.
사실 실연의 원인도 결혼 문제이긴 했습니다. 한 명은 원했고 한 명은 주저했으니까요. 그래서 원했던 사람이 포기를 한 거죠. 네, 그래서 제가 차였습니다. 저는 결혼이라는 제도가 싫거든요.
결혼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고 제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경험은 조카와 관련된 이벤트입니다. 저에게는 형과 누나가 있고 둘은 모두 결혼하여 슬하에 각각 두명의 자녀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게는 친조카 둘과 외조카 2명이 있는거죠. 사실 형과는 별로 안친합니다. 나이차이도 꽤 나고 제가 어렸을 땐 형이 밖으로 돌았고 제가 다 커서는 역시나 밖으로 돌아서 친해질 수가 없었죠.
누나랑은 엄청 친했고 각별 했는데 이상하게 제가 느꼈던 특별한 경험은 친조카를 통해 일어났어요. 형에게는 두 딸이 있는데 그 중 첫째는 다행스럽게도 삼촌이 갖고 있지 못한 친화력을 타고나서 가까워지는데 무리가 없었어요.
거기다 둘째가 태어나면서 줄어든 부모의 관심을 제게서 채우려고 하는 게 보여서 더 애틋했죠. 그런데 둘째는 달랐습니다. 아기때부터 예민했고 엄마바라기였으며 타인의 손길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몇 번 안아보지도 못했습니다.
제가 안기만 하면 울며 불며 난리였거든요. 그래서 둘째와는 언제나 대면대면 했어요. 그 아이가 저를 바라보는 특유의 표정이 있거든요. 그 신호는 '난 널 좋아하지 않아' 였고 그러면 '나도 너 별론데?' 라는 신호로 저도 그 아이를 유치하게 처다봤죠.
대충 이런 사이고 그래서 그런지 첫째만큼의 애정은 없었어요. 그냥 형의 둘째 아이였죠. 근데 이상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휴가를 핑계로 집에서 빈둥대는데 어머니께서 갑자기 둘째의 하원시간에 맞춰 데리러 가라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아 엄마가 가! 걔 나 안좋아한단 말야" 라고 했지만 어머니에겐 노래 교실이라는 중요한 약속이 있었고 저는 명령에 따를 수 밖에 없었어요. 털레털레 유치원 승합차의 도착지까지 걸어가면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하지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라는 호기심도 생겼습니다. 도착지에는 저 빼고 어머님들만 계셨고 뻘쭘하게 기다리는 저를 처음 바라보는 둘째의 표정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겁니다. 그 아이의 표정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어요.
"저 놈이 왜 여기에 있는거지? " 이런 격한 말을 할 아이는 아니지만 표정은 딱 그랬습니다. 그래서 저도 "나도 네가 좋아서 여기 있는건 아니거든" 이라고 눈으로 말했죠. 우리의 눈싸움을 눈치채신 선생님께서 " 아! 승연이 삼촌이시구나, 아버님이랑 많이 닮으셨어요" 라며 우리 사이의 긴장감을 풀어주셨습니다.
그 기싸움이 끝나고 우리의 사이가 그렇듯 저랑 승연이는 집까지 각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저는 터덜터덜 크록스를 끌고 승연이는 뻘쭘했는지 땅만 보며 걷더군요.
그런데 집에 가는 길에 승연이 쪽으로 구멍이 송송 뚫린 하수도 같은 것이 있었어요. 딱 아이의 발이 빠질말한 사이즈의 구멍이었죠. 저는 저도 모르게 아이가 빠질까봐 승연이의 손을 잡고 제쪽으로 당겼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승연이의 조그만 손을 잡은 순간 아주 묘한 감정이 들었어요. 손의 감각은 찌릿했고 갑자기 '나는 어떤 상황이 와도 이 아이를 지켜야 한다' 라는 사명감이 들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우스운 생각인데 그 때는 진짜 그랬어요. 그리고 내가 이 아이를 사랑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죠.
그 감정이 너무 벅찼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했고 그 사람도 나를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것 같았어요. 아니 그 이상이었습니다. 이 감정을 그 아이도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그날은 참 온순했고 제 손을 놓지도 않았어요.
그 하수도를 지나서 집까지 오는 몇 분의 시간이 너무 좋았습니다. 승연이의 손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움과 따뜻함이 평소와는 다르게 아주 친밀했습니다.
'도데체 내게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며 롤토체스를 하고 있었는데 어머니께서 노래 교실에서 배운 `무시로`를 흥얼거리며 돌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승연이와의 일화를 설명했고 "이 감정은 진짜 뭐야 엄마 나 진짜 모르겠어" 라고 물었죠.
그러자 어머니께선 "우리 아들이 결혼할 때가 된거 같구나" 라며 그건 친족에게서 느낄 수 있는 '피의 당김' 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니 아이를 낳아봐라 네가 오늘 느낀 감정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느낄거다"라고 더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자 내가 고작 내 유전자의 25%를 공유하는 녀석에게 이런 말도 안되는 감정을 느꼈다면 내 반쪽인 나의 아이의 손을 처음 잡는 날은 어떤 기분일까 라는 물음에 도달하였습니다. 갑자기 그 순간이 너무 궁금해졌어요.
자신의 아이의 탄생을 맞이한 부모의 후기를 보면서도 도무지 어떤 감정일 지 상상이 안됐는데, 그 날의 경험과 어머니의 말씀으로 그 경이로운 순간을 예측해 볼 수 있는 단계까진 온 것 같습니다. 최소한 경험의 욕망은 생겼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결혼을 긍정하는 마음이 생긴 것은 아닙니다. 무책임할 수도 있지만 그냥 제 아이가 궁금해졌어요. 그 아이의 조그만한 손을 만져보고 싶어졌습니다. 눈물이 날만큼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