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보드게임을 좋아합니다. 장기, 체스, 바둑부터 화투와 포커 그리고 마작까지. '어디가서 사람들과 어울리려면 기본적인 게임 규칙들은 알고 있어야 된다'는 할아버지의 지론이 저를 승부사(규칙만 알면 된다고 하셨는데 동네에서 제일 잘하는 사람이 되...)로 만들었습니다. 그 덕에 세계 어디를 놀러가도 사람들과 금방 친해질 수 있게 됐죠.
돌이켜 보면 지난 겨울, 일본 여행 때 우연히 어떤 형님을 만날 수 있던 것도 할아버지 덕에 가능했습니다. 바닷가를 좋아하는 저는 도쿄 옆 치바현의 쿠주쿠리 해변에 놀러갔고, 태평양의 일망무제에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해변을 즐기며 걷다가 파라솔 그늘 아래에서 둘러앉은 네 사람(노인 될락말락한 아저씨 둘, 할머니, 형님)을 봤습니다. 저분들이 뭘 그렇게 열심히 하나 슬쩍 봤는데 마작을 하고 계신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수십초가 지나도록 마작판을 흥미롭게 지켜보자 안경 쓴 아저씨(바닷가에 놀러오면서 양복을 입은걸 보면 진짜 범상치 않은 사람)가 고갤들어 저를 불렀습니다.
"청년, 게임 좀 대신 해줘. 슬슬 배가 아파서 말야."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배운 올드스쿨 일본어 덕에 일상회화엔 무리가 없던 저는 흔쾌히 수락하며 안경 쓴 아저씨를 대신해 마작에 참여했습니다. 아저씨가 화장실로 엉거주춤 뛰어가고 제가 파라솔 아래에 앉으니 잘생긴 형님이 피식 웃으며 반갑게 맞이해줬습니다.
"옛날 알바할 때 생각나네."
"츠 쨩, 또 그 얘기야? 이미 외웠다 외웠어."
"할망구가 왜 이래? 이 친구는 모를텐데. 츠 쨩, 난 언제들어도 재밌다구."
"하핫 아니에요. 제가 너무 많이 말하긴 했죠."
츠 쨩이라 불린 형님이 무슨 얘길 반복해왔길래 두 분이 저런 양극의 반응을 보일까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저는 호기심 생기는걸요? 들려주세요."
"그럴까?"
"네!"
"대학교 4학년 겨울니까... 벌써 20년 전이네."
20년전 이십대의 어느 겨울로 돌아간 형님의 눈은 초롱초롱해졌습니다. 당시 마작 카페에서 알바하던 형님은 손님의 부탁을 받고 잠시 손님의 자리에 앉아서 게임을 했었다고 합니다. 그때 마작판의 사람들로부터 십년간 유모차를 끌고다니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었고 주변에서는 다양한 추측을 했대요.
그렇게 저는 형님의 얘기에 푹 빠졌습니다. 자취하던 형님은 -혼자 사는 이십대 남자가 으레 그렇듯- 거의 매끼니를 부실하게 먹었는데, 그녀와 그녀의 할머니 집에 갈때면 따뜻한 밥과 반찬을 먹을 수 있어서 종종 들렸다고 합니다. 처음엔 일주일에 한두번, 나중엔 거의 매일.
언제부턴가 할머니 대신 형님이 직접 유모차를 끌고 동네를 산책 했대요. 제가 장담하는데 그녀는 분명 굉장한 미인일겁니다. 남자는 관심 없는 여자에게는 시간을 안 쓰니까요. 저도 그렇고요. 그녀의 취미는 독서와 동물원 구경, 수족관 탐험 그리고
"토카레프 권총이요?"
"그래. 나도 난생 처음 들어봤어. 일본에서는 구하기 힘들거라 했더니 내게 만들 수 있는지 묻더라고."
"참 매력적인 분이네요."
"그치."
형님의 눈동자를 보며 저는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유모차에 탄 채로 권총을 쏘는 이십대 여자...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죠. 제 등을 두들기는 불청객이 나타나기 전까지 저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습니다.
"고마워 청년. 덕분에 잘 비우고 왔어. 헤에엑? 지화에 국사무쌍이잖아?"
양복 입은 채 바닷가에 놀러온 안경 쓴 아저씨가 화장실 갔다가 돌아온겁니다. 산통을 깬 아저씨가 원망스러웠습니다. 한참 재밌게 듣고 있었거든요. 제 표정을 읽었는지 형님이 의자를 밀며 일어났습니다.
"메가네 상, 여기 앉으세요. 좋은 패 가진 친구 건드리지 마시고요. 옛날에 저도 메가네 상 때문에 얼마나 억울했는지 아세요?"
"그러고보니 그때도 잠시 내 자리에 츠 쨩이 앉았던 거였으니 억울할건 없잖아."
"맞는 말씀이지만 사람 심리가 어디 그런가요?"
"그렇긴해."
"저는 부인이 기다리고 있으니 이만 가 볼게요."
형님은 미련 없이 일어나 제 뒤로 와서 패를 보더니 귀에 속삭였습니다.
"20년 전의 나도 얼마나 억울했는지 몰라. 지화에 국사무쌍 같은 패는 쉽게 오지 않으니까. 재밌게도 메가네 상 자리를 대신 맡으면 이렇게 종종 잘 떠."
"가시려고요? 얘기는 마저 해주셔야죠."
형님은 미안하다며 멋쩍게 웃고는 파란색 자동차가 주차된 곳까지 해변을 가로질러 뛰어갔습니다. 보조석에서 손을 흔드는 여인은 아마 형수님이겠죠. 이야기 속 그녀가 차에 타고 계신 분 일까요? 저는 어렴풋 알 것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다른 분들은 어떨지 모르겠네요.
왓챠, 넷플릭스에서 확인해보세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일본영화 특유의 감성이 매우 짙게 묻어있는 작품입니다. 저는 매우 재밌게 봤어요. 2003년 영화임에도 안보신 분들이 있을거라 생각해서 스포일러가 될 부분은 최대한 지우고 지웠습니다.
영화 강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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