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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획은 옹개와 마찬가지로 익주군 출신 호족이었습니다. 하지만 옹개와는 달리 남중 일대의 한족과 이민족들 모두에게 고루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옹개를 비롯하여 고정과 주포 등 반란의 주동자들이 모두 처단된 상황에서, 그는 일약 반 촉한 세력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앞선 글에서 언급했던 역사적 사실 때문에 남중의 여러 이민족들은 대체로 한족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당장 고정의 부하들이 옹개를 살해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요. 그런데 맹획은 이들을 규합하여 힘을 하나로 모았습니다. 남중 일대에서 맹획의 영향력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첨언하자면 삼국지연의에서는 맹획이 이민족으로 그려지며, 그가 실제로도 이민족이라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주장을 뒷받침해줄 근거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정황상 한족일 가능성이 훨씬 높지요.
여하튼 그렇게 모은 힘으로 맹획은 제갈량과 맞섰습니다. 그러나 승자는 제갈량이었습니다. 맹획은 사로잡혀 포로 신세가 되었지요. 아마도 이 시점에서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지 않았을까요. 옹개, 고정, 주포 모두 사이좋게 저세상으로 떠난 상황이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뜻밖에도 제갈량은 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제갈량이 출병할 때 마속이 수십 리나 배웅하면서 조언한 바 있었습니다. 남중 사람들은 복종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으니 설령 오늘 그들을 격파해도 내일이면 다시 반기를 들 것이고, 그렇다고 죄다 없애버리는 것도 불가능한 만큼, 그들의 마음으로 승복시키는 것이 상책이라고 말입니다. 이민족과 한족 모두의 믿음을 얻고 있는 맹획을 만났을 때 제갈량의 머릿속에 그 조언이 떠올랐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요.
한진춘추 등의 사서에 따르면 맹획은 사로잡힌 후에도 오히려 다시 싸우면 이길 수 있다며 허세를 부렸다고 합니다. 이에 제갈량이 풀어준 후 다시 싸웠다고 하지요. 그렇게 일곱 번을 풀어주고 일곱 번을 사로잡자(七縱七禽) 마침내 맹획이 진심으로 복종했다고 합니다.
이 기록의 진위에 대해서는 과거에서부터 설왕설래가 많았습니다. 무슨 소꿉장난을 하는 것도 아니고 수천수만 명에 달하는 목숨이 걸린 전쟁에서, 일곱 번이나 상대를 놓아준다는 게 당최 말이 되느냐는 것이지요. 제갈량의 남정 과정에서 실제로 전투를 벌인 기간은 기껏해야 몇 개월에 불과한데 일곱 번씩이나 사로잡고 또 놓아줄 시간이 되겠느냐는 지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일화가 사실이라는 의견이 있는 반면, 터무니없이 과장되거나 윤색된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의견도 만만찮습니다.
물론 이천 년 전의 진실이 무엇인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제갈량이 그만큼 남중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만은 사실일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반란 주동자들의 목을 죄다 날려 버렸으면서도 유독 맹획에게만 유화적인 태도를 보인 이유도 설명이 됩니다. 제갈량이 가장 절실하게 원했던 존재가 바로 맹획이었던 겁니다. 남중 일대의 한족과 이민족을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으면서도, 진심으로 승복하고 촉한을 배반하지 않을 사람 말입니다. 아마도 그런 맹획의 마음을 얻고자 한 행동들이 칠종칠금이라는 고사로 남아서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는 게 아닐까요.
결과적으로 맹획은 제갈량에게 항복합니다. 그리고 제갈량은 남중 일대의 행정체계 개편에 나섭니다. 익주군의 이름을 건녕군으로 바꾸고, 남중 4개 군을 나누어 총 7개의 군으로 재탄생시킵니다. 전쟁에서 공을 세운 이들이 각 군의 태수로 임명되었습니다. 마충은 장가태수, 여개는 운남태수, 왕항은 영창태수가 되었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그 아래 관리들은 촉한에서 파견하지 않고 이민족의 우두머리(渠率)들을 관리로 삼았습니다. 사람들이 의아해하자 제갈량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만일 외부 사람을 이곳에 두려면 군사도 두어야 하는데 그러면 먹을 것을 대기 어려운 것이 첫 번째 어려움이요, 그렇다고 군사를 두지 않는다면 전쟁에서 부모 형제를 잃은 이민족들이 복수하려 들 것이니 이게 두 번째 어려움이요, 또 이들은 이미 반란을 일으킨 적이 있는데 외부 사람과 함께 있으면 분명히 서로 믿지 못할 것이니 이게 세 번째 어려움이오. 나는 이제 군사를 두지 않아 물자 운반의 어려움을 없애고, 법령을 간략하게만(粗) 정해서 이민족과 한족들이 대략(粗) 편안하게끔 하겠소.”
이 말의 핵심은 두 번 반복된 ‘粗’라는 글자에 있습니다. ‘거칠 조’인데 여기서는 ‘대강, 대충, 대략’ 정도의 의미로 쓰였습니다. 즉 남중 지역을 완전히 흡수 합병할 생각은 애당초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저 반란이 지나치게 일어나지 않고, 물자를 공급받을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 가지 조치가 취해집니다. 우선 남중의 병사들 중 정예병 1만여 가를 북쪽으로 이주시킵니다. 이들을 5개의 부(部)로 편성했는데 당해낼 자가 없어서 비군(飛軍)이라고 불렀다 하네요. 또 호족들에게 권해서(또는 협박해서) 이민족들에게 금과 비단을 지급하고 대신 그들을 각 집안의 사병(부곡部曲)으로 편입하도록 합니다. 말하자면 돈을 지급하고 이민족들을 고용하는 체계를 갖추도록 한 거죠. 그리고 고용 창출이 많은 호족들, 즉 정부 시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호족들에게는 특별히 관직을 자녀에게 물려줄 수 있는 권한까지 부여합니다. 실제로도 맹획을 비롯하여 맹염과 찬습 등 협조적인 남중의 호족들은 촉한에서 상당한 고위직까지 올라가게 됩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귀부했었고 내항도독 지위까지 맡고 있었던 이회는 말할 것도 없지요.
당근과 채찍을 함께 제공하는 이러한 방식이 꽤 효과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안정적인 직장을 얻게 된 이민족들은 만족하고 점차 한족에 복속되었습니다. 또 남중의 호족들 역시 비교적 전향적인 자세로 협력에 나섰습니다.
물론 그렇다 해서 만사 평화로웠던 건 결코 아닙니다. 당장 제갈량이 북쪽으로 돌아가자마자 운남군에서 이민족이 반란을 일으켜 태수 여개를 죽였습니다. 월수군에서도 태수 공록과 초황이 연달아 살해당했지요. 좀 더 나중의 일이지만 유주라는 자도 반란을 일으킨 바 있습니다. 남중은 제갈량 생전에는 물론이거니와 사후에도 항상 시끄러운 지역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혹자는 제갈량의 남정이 결국 실패했다고 단언하기조차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제갈량이 남중 정벌에서 달성하고자 한 전략적 목표는 그 스스로가 밝힌 바 있습니다. '이민족과 한족이 대략 편안하게끔' 하는 것이죠.
물론 양자 간의 완전한 평화는 애초에 불가능했습니다. 제갈량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현대의 관점에서 볼 때 중국 남부의 이민족과 한족 정권의 관계는 사실상 일방적인 수탈에 가까웠습니다. 심지어 제갈량의 목적 중 하나는 그러한 수탈의 강화였습니다. 금과 은, 소와 말 따위의 물자를 공급받는 것 말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평화라는 건 언어도단이죠. 실제로도 남정 이후로도 남중 지역에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는 건 이미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러나 제갈량은 맹획으로 대표되는 '남중의 한족 출신 호족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그 결과 남정 이후의 반란은 예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옹개, 주포, 맹획처럼 호족이 중심이 된 대규모 반란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지요. 이회전, 여개전, 마충전, 장억전, 장익전 등 촉서의 기록에 남아 있는 반란은 모두 주체가 이민족으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규모 또한 크지 않아서 제갈량처럼 중앙군을 동원할 필요 없이 내항도독이 진압할 수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즉 제갈량은 남중 정벌을 통해 두 가지 이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첫째는 전쟁에 쓸 병력과 군수물자를 다수 확보할 수 있었고, 둘째로는 후방의 근심을 덜고 중앙군을 온전히 활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이득은 모두 제갈량의 다음 목표와 직결된 것이었습니다.
227년. 제갈량은 군사를 이끌고 북쪽 한중에 주둔합니다. 그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북쪽 위나라로 향하는 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