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2만년 전 간빙기가 시작될 무렵, 현생인류는 남극 대륙을 제외한 세계 구석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기원전 1만 7000년 경, 빙하가 녹으며 겨우 수백년만에 해수면을 12m 상승시켰고, 기원전 1만 2000년 경에는 지구의 따뜻함이 거의 오늘날에 버금가는 정도가 되었다.
이 사이에 세계의 인구는 열배 이상 폭증해 600만명에 육박하게 되었다. 인류는 아메리카 대륙의 남쪽 끝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인류는 지구 전역에서 새로운 생태계의 새로운 식물상과 동물상에 꾸준히 적응해나갔다.
이주의 과정에서 콩과식물과 외떡잎식물은 인류의 오랜 친구가 되었다.
이 식물들은 생으로 먹기에는 다소 건조한 씨앗과 곡물을 제공했고, 인류는 이것들을 곱게 갈아 죽처럼 끓여먹기 시작했다.
외떡잎식물이 다양하게 번성하는 행운의 위도대 곳곳에서 토기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무리는 많게는 백수십명에 이르기기까지 서서히 거대해졌고, 어떤 지역에서는 정착생활이 시작됐다.
## 측면구릉지대, 1만 4000년 전, 첫 작물화
대부분의 수렵 채집 사회에서 야생 곡식을 채집하는 것은 여성들의 몫이었다. 따라서 농경은 아마, 어떤 위대한 어머니에 의해서 발명됐을 것이다.
게으른 그녀는 분명, 매일 이른 아침 멀리까지 나가서 곡식을 수확하는 일에 질려 있었을 것이고, 분노나 호기심, 혹은 막연한 기대에 이끌려 집 앞 마당에 야생 곡식의 씨앗을 흩뿌렸을 것이다.
그리고 수렵채집인이 살던 대부분의 지역에서 수많은 게으른 여자(가끔은 남자)들에 의해 되풀이됐을 그 시도는 대부분의 경우 일종의 소일거리로서 별 수확없이 끝났을테지만, 이곳, 측면구릉지대(hilly flanks)에서는 달랐다.
게으른 여자를 따라 떠돌이들이 낟알을 뿌렸고, 그 땅 위에서 최초의 거대 정착지가 자라났다. 인류 최초의 대회합이 열린 것이다. 동식물의 순화가 자연스레 이루어졌다.
## 1만 3000년 전, 영거 드라이아스, 정착지 황폐화
최근들어 농경의 발달이 인류의 영양상태에 끼친 악영향을 조명하는 여러 이야기들이 유행하고 있지만(다음 글에서 후술하겠지만, 사실이다), 첫번째 정착지들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들은 이들이 나름 풍요롭게 살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위계질서는 느슨했고, 빈부격차는 적었으며, 폭력적인 인신공양이나 적군의 도살, 그리고 광기에 가까운 악신 숭배는 거의 없었다. 그런 무시무시한 흔적이 대대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한참 뒤의 이야기인데, 그 사이에는 영거 드라이아스, 즉 소빙하기가 있었다.
Dryas octopetala
오늘날 아이슬란드의 국화이기도 한 담자리꽃나무(Dryas)는 추운 지역에서 번성한다.
그리고 이 시기, 무려 일천년간 담자리꽃나무가 번성했다.
곳곳에 생겨난 정착지들의 평화로운 일상은 갑작스레 깨졌다.
체중이 40kg가 넘는 홍적세 후기의 거대동물들이 이 시기에 대부분 멸종했다. 유라시아 북부 지역에서만 무려 80여개의 생물 속(屬)이 사라졌다.
향후 일천년간 지속될 소빙하기가 몰아닥친 첫번째 유토피아들 또한 곧바로 멸망했다.
해가 아무리 지나도, 싹은 트지 않았고, 주민들은 추위에 떨었다.
지난 일천년간 번영했던 첫번째 거대 집단들은 산산조각났고, 게으른 여신의 후손들 대부분이 절멸했으며, 뒤바뀐 환경에 간신히 적응한 소수는 다시 떠돌이가 되었다.
그들은 일천년간의 정착생활에 익숙해져 있었지만 갑작스런 하늘의 분노에는 별 수 없었다.
인류의 역사는 여전히 가혹한 적응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인류는 이토록 가혹한 시련에도 좌절하지 않고 끝끝내 살아남았다.
## 1만 1700년 전, 괴베클리테페, 두번째 정착,
기원전 9600년 경, 하늘이 노여움을 풀었고, 빙하기가 끝났다. 온난화는 겨우 수십년만에 천년 전의 기온을 되살렸다.
그러나 떠돌이들은 다시 정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들은 대대손손 일천삼백년간 옛 아포칼립스의 공포를 노래해왔다.
정착은 곧 파멸의 위기를 불러일으킨다.
수백만년간 사바나를 떠돌던 자들이 감히 시도했던 첫번째 정착은 하늘에 의해 짓밟혔다.
살아남은 인간들은 하늘의 분노와 별들의 움직임을 하나로 엮어 노래하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위대한 회합을 재개하자는 욕망이 이내 꿈틀거렸고, 하늘의 뜻을 읽는 자들이 하나 둘 재등장했다.
믿음을 가진 자들은 떠돌이들을 다시금 한 곳에 모았다. 그 위대한 역사는 하늘의 뜻을 읽는 것이었고, 재정착의 허락을 구하는 일종의 의식이었다. 점성술사와 주술사들의 지시 하에 떠돌이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거석을 옮기고, 곡식을 심었다. 그렇게 다시 정착생활이 시작됐다.
1994년, 터키 괴베클리 테페(Göbekli Tepe)에서 클라우스 슈미트의 발굴팀은 고고학 역사에 획을 그을만한 발견을 했다.
그것은 커다란 돌기둥들이 원형으로 나열돼 있는 유적이었다. 그리고 그 돌기둥들은 각자가 다른 지역에서 채굴된 것들이었다.
그 돌들을 그렇게 배치하는 데까지 많은 다툼이 있었을 것이고, 많은 죽음 또한 있었을 것이다.
발굴팀은 깨달았다.
자신들이 발굴한 것이 단순히 최초의 정착지가 아니라, ‘종교’ 그 자체였다는 것을.
괴베클리 테페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태초에 말씀이 있어 모이라 하셨고, 모였으니 궁해졌으며, 자연스레 씨를 뿌렸더라.”
두번째 정착생활은 이전과 판이하게 달랐다.
이전처럼 태평하고 느긋한 정착생활은 허용되지 않았다.
하늘의 뜻을 읽는 자들은 남는 곡식을 자신들에게 가져오라 명령하기 시작했다.
미래를 위한 공동의 비축은 어느새 소수의 권력수단이 되었고, 그 권력은 곧 거대한 건축물과 성스러운 장신구를 낳았으며, 다시 그것들은 권력자들의 신성함을 증거했다.
하늘의 뜻을 읽는 자들은 수없이 많은 동료 정착민들마저 가축화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제 절대다수의 농민들은 끔찍한 수탈의 시대를 살게될 터, 채찍질당하고, 주릴 것이다.
## 새로운 시대
비옥한 초승달 지대와 측면구릉지대
기원전 1만년 경 이후, 약 일천년간 농경은 측면구릉지대를 따라 번성했고, 기원전 8500년경에는 비옥한 초승달지대의 서쪽 일대에서 특히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500년안에 어떤 정착지는 무려 500명 규모를 돌파할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남부지역은 광활한 평야가 펼쳐져있었지만, 토양은 비옥하다기보다는 건조한 편이었다. 그러나 이곳이 괜히 ‘비옥한 초승달 지대’라고 불렸던 것은 아니다. 분명 이곳의 대부분은 척박했지만, 동시에 비옥한 몇몇 지역이 존재했다.
그리고 눈 덮인 추운 산도 있었다.
무엇보다, 이 곳은 다양했다.
남쪽의 건조한 지역은 종교의 어머니가 되었고, 풍요로운 식량으로 가득찬 비옥한 습지대는 도시의 아버지가 되었으며, 유라시아의 가교적인 지리에서 기인한 이 곳의 생물 다양성은 최초의 종교적 정착민들로 하여금 다양한 생물학 실험(의도적 생태순화)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도록 허락했다.
이 곳에서 안정적으로 농사를 짓기 위해 고대인들은 수로를 비롯한 관개시설을 주기적으로 정비해야했고, 그것은 곧 많은 수의 인원을 대규모 건축 프로젝트에 효율적으로 배치할 수 있는 사회, 엄격한 위계질서를 통해 계급과 신분이 구별되는 사회를 탄생시켰다.
훗날 최초의 도시가 탄생하는 것도 이 곳이었다. 이 곳의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욕망을 절제해야했고, ‘보다 더 큰 뜻’에 복종해야만했다. 권위에 대한 복종, 그것만이 그토록 척박한 공간에서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가장 상식적인 길이었다.
반면, 동시기에 이보다 더 비옥했던 특정 지역의 사람들도 있었다. 아마 가혹한 신분제를 버티지 못하고 ‘최초의 도시’를 탈출한 어느 하층민 출신 꼬마의 눈에 모두가 풍요롭게 사는 그 공동체는 천국처럼 보였을 지 모른다.
사제 집단이 회초리를 휘두르며 신성한 신의 심판 따위를 읊조려봤자, 그들은 걸쭉한 맥주나 마시면서 신따윈 엿이나 먹으라고 할 수 있었다. 신을 아무리 모욕해봤자 사시사철 풍요로운 이 곳에서는 아무도 굶지 않았을테니까.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풍요로움이 그곳을 더 거대하고 더 엄격한 ‘도시’가 되지 않도록 억제했다.
그러나 더 큰 도시가 작은 도시를 잡아먹는 잔혹한 군비경쟁의 수레바퀴는 이미 돌아가고 있었다.
풍요로운 최초의 유토피아 주민들은 곧 신성한 신들을 모시는 잔혹한 도시의 새 노예 신세로 전락할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