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핀란드의 영화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신작<사랑은 낙엽을 타고>(2023)를 보았습니다. '빈티지 로맨스'라는 소개가 붙긴 했지만 어쨌거나 제목과 예고편을 통해 당연히 낭만적인 로맨스 영화라는 기대를 품고 감상을 했는데요. 막상 본 결과 기대와는 상당히 다른 느낌의 영화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감상 이후 감독의 정보를 찾아보니, 이 감독은 예전부터 계급적인 문제의식을 갖고 영화를 찍어 온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그의 작품 <천국의 그림자>(1986), <아리엘>(1988), <성냥공장 소녀>(1989)는 '프롤레타리아 3부작'으로 씨네필들에게 꽤 유명하다고 합니다. 찍은 작품이 꽤 많고 마냥 계급 이야기만을 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무튼 이렇게 독특한 문제의식과 영화 스타일로 명성을 이어 온 모양입니다.
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 대해 두괄식으로 평해보자면, 이 영화를 일반적인 상업영화, 특히나 로맨스 영화로 기대하고 보게 된다면 적잖이 당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이야기의 중심에는 로맨스가 있지만, 그 로맨스가 가령 매혹적이고 섹슈얼한 느낌의 것이냐 하면 전혀 아닌 것 같다는 것이죠.
기대했던 것과는 완전 다른 느낌의 작품이었지만, 긍정적으로 본 측면이 있어 그 부분을 밝히는 리뷰를 작성해보고자 합니다.
(스포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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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숏과 인물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영화 스타일에 관한 사전지식이 없는 관객이라면 이 영화는 굉장히 당황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이 당황스러운 감정을 야기하는 것은 우선 무엇보다 숏의 배치와 인물 표현 방식의 독특함이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서 두드러지는 이 독특한 숏의 구성과 인물의 표현방식은 특히 ‘단절성’과 ‘정적임’을 지향하는 듯하다. 인물들을 잡아내는 단절적인 화면전환, 도시나 노동현장의 전경이 제시되는 방식 등에서 드러나듯이 숏은 뚝뚝 끊어지게 배치된다. 그리고 이에 호응하기라도 하듯, 영화 속의 인물들은 부자연스럽게 경직되어 있는 모습이다. 인물들은 단지 양태가 정적인 것을 넘어 그 표정 또한 블랙코미디풍으로 과장‧극화되어 무뚝뚝한 것으로 표현되는데, 역시 이는 영화 전체적으로 두드러지는 그 묘한 단절감을 더욱 배가시킨다. 숏과 인물을 이토록 두드러지게 ‘뚝 뚝 끊어내는’ 방식으로 구성‧배치하는 영화가 있었을까 질문하고 싶게 만들 정도로 이 영화는 이 점에서 특징적이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가 생성하는 그 단절감이란, 이를테면 장면과 장면 간의 단절감, 상황과 인물 간의 단절감, 인물과 인물 간의 단절감 모두를 포괄하는 매우 복합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 단절감이란 어떤 면에서 보면 영화를 보는 관객과 영화 속 상황과의 단절감, 즉 일반적인 상업영화라면 결코 추구해서는 안 될 그런 극적 효과에 도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나친 독특함, 이질감이 주는 소격효과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독특함은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면, 투박함이라고도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투박하므로 반드시 미학적 성취도가 떨어진다는 주장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영상 매체로서 이 영화가 관객에게 제시하는 결과물은 가령 유려하다거나, 고혹적인 것과는 아주 거리가 멀어 보인다.
2. 계급
사실, 숏의 구성과 인물의 표현방식에서 드러나는 정적임과 단절감은 이 영화가 21세기의 핀란드를 배경으로 하는 '계급 영화'라는 점과 떼려야 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계급. 사실 나는 이 영화의 특성을 규정하는 것에 있어 ‘로맨스’보다는 ‘계급’을 먼저 논하지 않을 수 없다고, 아니 그래야만 한다고 과감히 주장하고 싶다. 카우리스마키 감독이 맑시스트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적어도 이 영화에서 계급은 사랑에 선행한다. 영화를 통해 내가 목도한 것은 로맨스보다는 노동계급의 매우 현실적이고 비루한 삶 그 자체ㅡ온갖 '단절'로 가득한ㅡ에 가까웠다.
이 영화의 원제는 Fallen leaves, 즉 '낙엽'이다. 이를 <사랑은 낙엽을 타고>로 초월번역 한 것은 나로서는 다소 부정직한 것으로 느껴진다. 물론 <사랑은 낙엽을 타고>라는 제목은 매력적이고 낭만적이다. 그리고 물론 이 영화에 로맨스(사랑)는 있다. 그 로맨스가 없으면 이 영화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영화는 특정한 시대적·계급적 맥락성 속에서의 '로맨스'를 강렬히 조명한다기보다 그 '맥락성'을 더욱 깊게 반추하게 만드는, 그런 성격의 영화에 더 가깝다.
낙엽은 중력의 영향 하에서, 그 스스로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허공을 떠돌다 예측되지 않는 지점에 낙착한다. 낙엽은 그저 불어오는 바람 속에 자신의 운명을 내맡겨야 한다. 그리고 그 낙엽의 운명이란, 노동계급의 운명이다. 다시 은근히 도래하는 전쟁의 위협 속에서 그저 불안에 떠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2024년 핀란드의 어딘가에서 육체노동으로 생계를 연명해야하는 중년 노동계급의 운명인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이 영화는 직설적이고 노골적으로 노동계급의 삶과 운명을 발화한다. 안사(여주인공)와 홀라파(남주인공)는 아날로그적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매체인 라디오를 통해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의 소식을 일상적으로 전해 듣는다. 알콜중독자이자 육체노동자인 홀라파는 자신의 취향을 사교적으로 뽐낼 수 있는 어떠한 세련된 교양도 체득하고 있지 못하다. 그는 그저 술과 침묵으로 일상과 여가를 채운다. 과묵함을 깨고 일터의 동료와 나누는 담화라고 해 보았자 시답잖은 농담 이상은 없다. 안사의 경우 자신은 알콜중독자가 아니지만, 그녀의 가족들은 전부 술 때문에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다. 그런 의미에서 안사는 ‘술꾼’을 싫어하지만 동시에 술꾼인 홀라파를 마치 가족처럼 혹은 가족대신 구원해야만 하는, 서글픈 계급적 운명에 사로잡혀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사실 이 영화가 왜 계급영화인지를 논하기 위해 영화 속 요소들을 하나하나 짚는 것 자체가 무용하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요소들이 계급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통해 관객이 목도하는 모든 것은 21세기 육체노동자가 기거하고 있는 물질적 토대의 어느 한 지점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 안사와 홀라파의 로맨스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기적적인‘ 일인 것처럼 진행된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가는 그들에게 로맨스란 것은 분명 필요하지만 그 자체로 매우 위태롭고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의 이름과 주소와 전화번호를 아는 것조차 쉽게 달성되지 않는, 그 매우 이질적이고 힘에 벅찬 사랑이 그들의 사랑이다. 우리가 흔히 로맨스 영화에서 기대하는 방식의 남녀의 사랑싸움, 성적 긴장감, 다소 비일상적으로 전개되는 일화들, 그런 것은 이 영화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이 영화에 '로맨스'는 없다. 그들은 매우 정직하게 서로를 원하고 사랑을 표현함에도, 그들의 사랑은 육감적이거나 매혹적이지 않다. 그들의 사랑은 오히려 어딘가 절박하고 비장한 것이다. 삶은 그들에게 전투이자 투쟁이다. 삶이라는 벼랑 끝, 바로 거기에 그들의 사랑이 있다.
3. 희망
이 영화는 <사랑은 낙엽을 타고>라는 낭만적인 제목이 풍기는 사랑의 달콤함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가 보여주는 현실은 오히려 고단하고 비루하며 어딘지 모르게 암담한 것이다. 밀린 전기세와 불안정하고 위험한 일자리를 넘어 안사와 홀라파가 그릴 수 있는 미래와 행복이란 과연 어떠한 것일까. 그럼에도, 이 영화는 냉소를 근본적인 자세로서 견지하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는 분명 차가움을 터치하는 계급 영화이지만, 그래도 이 영화를 '로맨스'영화라고 말할 수 있는 조금의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은 감독이 놓지 않고 있는 일말의 희망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일말의 희망을 차가운 계급적 현실 속에 어떤 방식으로 틈입시킬 것인지는 분명 이 영화의 중요한 감상 포인트가 될 것이다.
서두에서 서술했던 단절성과 정적임은 언뜻 보면 노동계급이 처한 고되고 비루한 현실을 표상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언어와 소통의 상실, 친밀성 영역에서의 무능력과 관계의 단절, 무기력, 그런 것들이 바로 홀라파와 안사의 삶의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동시에 바로 이 지점, 그 숨 막히는 단절성 속에서 묘하게도 아날로그적 관계와 사랑의 가능성이 피어나고 포착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 단절성은 이를테면 안사의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가 바람에 날아가는 클리셰가 도입되면서까지 안사와 홀라파의 관계에 어두움을 드리우는 듯하지만, 오히려 그 단절성은 오늘날 현대사회의 사랑에서는 쉽사리 상상할 수 없고 허용되지 않는 애틋한 기다림과 만남을 가능케 한다(오늘날의 사랑은 사랑의 성사를 위해 누군가의 신발을 닳게끔 하지는 않는다). 그 단절성은, 술을 끊고 안사와 재회하고자 하는 홀라파의 결심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그를 한 밤의 기차에 치이도록 만들지만, 동시에 혼수상태의 홀라파를 안사가 정성스럽게 구원(간호)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안사의 간호는 홀라파를 구원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녀 자신을 구원하는 것이기도 하다. 알콜 중독으로 비극에 이른 가족을 구하지 못했지만 대신 홀라파를 구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구원의 역능을 발휘함으로써 기존의 자신에게 존재하던 상처와 무기력을 극복하고 궁극적으로 스스로를 구원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홀라파에 대한 구원은 안사 자기 자신에 대한 구원이며, 그리고 나아가, 지극히 계급적이고 연대적인 구원인 것으로 읽히기도 한다. 그렇기에 안사는 의식을 회복하여 목발을 짚고 퇴원하는 홀라파를 강아지 '채플린(이 얼마나 노골적인 이름인가)'과 함께 밝게 맞이하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단절성 속에 구원의 가능성을 새겨 넣는 것. 이것이 카우리스마키가 지난하고 칙칙한 현실을 다루는 영화 속에 한 줌의 희망을 새겨 넣는 방식이다.
커피 한 잔, 영화 한 편, 식사 한 끼를 같이 한 것을 제외하고 로맨스다운 로맨스는 단 한 번도 하지 못한 그들에게 '내일'을 허용하는 것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그들의 로맨스는 과연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지속될 수 있기를, 그들이 안전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아마 그들보다 물질적·문화적으로 훨씬 풍족한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그들과 동질적인 불안과 위기를 공유하고 있는 현대사회의 관객들이 가지게 되는 마음일 것이다.
4. 확장
이 영화는 결국 노동계급의 현실과 사랑을 다루고 있는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엔 분명 강한 지역성과 맥락성이 있다. 이 영화는 2024년의 언젠가, 핀란드의 어딘가의 노동계급인 홀라파와 안사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렇다. 다만, 영화에서 드러나는 그 노동계급의 현실은ㅡ물론 그 세계는 2024년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아날로그적으로 구성되어 있지만ㅡ글로벌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아가는 모든 현대인들에게 확장 가능한 것이기도 할 것이다. 시스템의 부품으로서의 노동, 인간적 단절, 술과 향락으로 환원되는 사적 삶, 전쟁의 위협, 끝없는 외로움 속에서 갈구하는 사랑. 그런데 이러한 사회학적 확장의 거시적 시선은 결국 행위론적 확장의 미시적 시선으로 나아감으로써 그 마침표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계급에서 행위로 나아간다는 것. 혹은 그래야 하는 것이라고 이 영화는 말하고 있다. 술을 끊고, 사적 침잠을 넘어 관계성(사랑) 속으로. 도덕적 고려의 대상을 위기에 빠진 '개'에게로까지 넓힐 수 있는 너그러운 윤리적 감수성 속으로. 그 모든 버거움을 간호하는 환대와 친절 속으로. 하여, 중력의 영향력 하에서 낙엽처럼 떨어진다고 할지라도, 소박하게나마 춤을 출 수는 있다는 행위의 가능성으로.
요컨대 이 영화는 달콤하고 우수 섞인 감성을 자아내는 흔한 로맨스 영화라기보다, 우리가 처한 삶의 토대와 시대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불편하고 찝찝한' 사회 참여적이고 현실 고발적인 영화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물론, 그 점이 마음에 든다. 기만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기만적이지 않게 직시한 그 위태로운 현실 속에서, 그 로맨스같지도 않은 로맨스야 말로 가장 필요하고 아름다운 로맨스로서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을 이 영화는 은근히 말하고 있다. 그토록 로맨스같지도 않은 로맨스야 말로 무엇보다 철저하게 로맨스다운 로맨스가 될 수도 있겠다는 점을 깨닫는 순간, Fallen leaves가 아닌 <사랑은 낙엽을 타고>라는 제목에 비로소 고개를 끄덕이게 될 가능성을 목도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