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믿기 힘든 일이였다. 분명 내가 졌다.
2008년, 스타크래프트의 범국민적 전성기가 끝난지 몇 년이나 지난 후다.
주변에 스타를 챙겨보는 이는 거의 없었고, 직접 하는 사람은 주변에 내가 유일했다.
그런데 신입생 환영회에서 만난 이 녀석은 자신있게 스타를 한다고 했다.
당연히 나는 “피시방에서 몇번 해본정도” 인줄 알았다. 로템에서 몇겜 정도 해봤겠지.
만나서 한 게임 하자고 했을때 실력차를 느끼고 멋쩍게 위닝이나 하자고 할 줄 알았다.
사실은 그게 아니였다.
이 녀석의 빌드나 뮤짤은 분명 아직까지도 스타를 끊임없이 하는 수준이다.
왜 졌지?
친구가 저저전이 싫다길래 내가 토스를 해서 진거다. 내 주종도 아닌데, 너무 오만했다.
내가 저그를 잡겠다고 했다. 제대로 붙고 싶었다. 날 제대로 싸우게 한건 네가 처음이야…
프리저가 베지터를 상대로 변신했을때 이런 기분이였겠지.
20분 뒤, 상대는 베지터가 아니라 초사이언 오공임을 알게 됐다.
종족을 바꿔도, 맵을 바꿔도, 날빌을 써도 계속 졌다.
친구가 그만하자고 했다. 숙제해야 한다고.
그러면서 그 자식은 내 대학교 인생 바꿀 한 마디를 내 가슴에 꽃고 헤어졌다.
“너무 쉽다 야, 컴퓨터랑 하는 줄 알았네.”
2.
다른 의욕은 딱히 나지 않았다. 술마시는 친구에게도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오락만 했다.
니가 날 깔봐? 그것도 게임으로?
고등학교때, 입시한다고 탈덕을 하긴 했다. 스타를 오래 안하긴 했다.
그래, 내가 게임을 못하는건 노오오력이 부족해서야. 노오오력.
공부할때는 안나오던 근성이 마침내 성인이 되니까 피어나오기 시작했다.
게임을 엄청나게 하기 시작했다.
수업끝나고 게임하고 밥먹고 게임하고 자고 일어나서 게임을 했다.
감시하는 사람 없이 기숙사에서 사니까 눈치 보는 일도 없었다.
중간고사가 하루 앞으로 다가온 날, 강의실에서도 노트북으로 필기를 하는 척 하면서 APM 측정기를 봤다.
그렇게 손을 많이 쓴것 같은데, APM이 240을 넘지 않는다. 어떻게 된걸까.
이제동과 김택용은 그렇게 잘 손이 빠르던데. 나도 두손이 있고, 열 손가락이 있는데.
수업이 끝났다. 노트북을 덮고 다음 수업으로 가는 길에도 스타에 대한 생각은 여전했다.
그 때, 누가 뒤에서 나를 붙잡았다.
“저기 아까 뒤에서 널 봤는데, 너 혹시 스타하니?”
3.
소개팅에서 못생긴 남자를 만났을때 여자의 반응이라는 움짤을 본적이 있다.
순간 나는 그 심리를 약간이나마 알 수 있었다.
위 아래로 스캔했다. 이 놈은 뭔데 나에게 말을 걸었을까.
답을 내리는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였다. 정리가 덜 된 빨간 곱슬머리,
테 얇은 안경, 얼굴엔 주근깨, 신경쓰지 않고 학교에 온듯한 츄리닝과 티셔츠. 아, 이 놈도 겜덕후구나.
스타를 한다고 대답했다. 녀석은 얼마나 신이 났는지 목소리의 톤이 올라갔다.
“그치? 너가 APM체크하는거 보면서 그럴것 같았어! 와 반갑다.
너 혹시 지난 주말에 MSL 결승전 봤니? 비수랑 장비가 붙은거? 프로리그는 봐? 혹시 한국인?”
대답들이 끝나기도 전에 폭풍처럼 몰아오는 질문러쉬에 매우 당황스러웠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 얘기하는 주제가 스타라니. 발가벗겨진 기분이였다.
미안한데 다음 수업을 가봐야한다며, 다음에 얘기하자고 하면서 재빨리 자리를 떴다.
내 뒤에서 나를 바라보는 상심한듯한 얼굴이 느껴졌지만, 딱히 신경 쓰이진 않았다.
4.
기말준비를 해야한다는 친구를 붙잡고 다시 게임을 했다. 나에겐 시험보다 더 중요한 문제였다.
세 판을 했는데 세 판을 다 이겼다. 마지막 판은 내가 토스를 했는데도 이겼다.
날아갈듯 기뻤지만 최대한 마음을 감췄다. 괜히 오버하면 없어 보이니까.
“와~ 많이 늘었네. 너 잘한다 야.”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았나 보다. 자연스러운 패배 인정에 넋이 나간건 오히려 나였다.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해도 이미 너무 많이 놀았다며 도서관으로 돌아갔다.
그 친구에게 스타는 별 의미가 없었나 보다.
몇 년후 친구는 의사가 되었다.
딱히 부럽지는 않았다.
난 문과니까.
5.
메멘토라는 영화가 있다.
집 안에 든 강도에게 아내를 잃고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주인공이
사건 조사중에 만난 경찰의 도움으로 범인을 찾아 복수하는데 성공하지만
주인공은 복수했다는 그 사실마저 망각해버리면서 계속해서 범인을 찾아 헤맨다는 내용이다.
복수에 성공한 후의 내 생활이 딱 그 영화의 주인공과 같았다.
그 녀석은 꺾었지만 나의 오락질은 계속되었다.
더 이상 왜 스타를 시작하게 되었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방아쇠는 이미 당겨진 뒤였다.
수업시간도 오후로 맞췄다. 새벽에는 한국에서 하는 프로리그와 스타리그를 봐야 하니까.
그렇게 하염없이 시간이 흘렸다.
6.
그 무렵, 외국에서 호스팅하는 사설 서버가 흥하고 있었다.
래더 시스템을 채용하여 등급으로 실력을 판단하는 시스템이였다.
정식서버에서만 게임하다가 소문을 듣고 이곳으로 넘어가서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디를 뭐로하지? 고민하다가 귀찮아서 그냥 학교 이름으로 했다.
그 곳에서 게임은 계속됐다.
어느 금요일 밤, 문득 게임을 하다가 나도 모르는 뭔가에 이끌려 채팅 채널에 내 아이디를 넣어보았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약 6명 가량 되는 유저들이 그 채팅창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친목현장에 망치아이콘을 달고 있는 내가 나타났다.
그들은 WTF를 외치기 시작했다. 아마 나보다 그 6명이 훨씬 더 놀랐을것이다.
“너 뭐야” 무리 중 한명이 침착하게 물어봤다.
“나 이 학교 사람인데. 너희는?”
“우리도 마찬가지야! 몇학년? 전공은?”
“2학년, 경제학”
“헉 나도” 그 때까지 아무말도 안하고 있던 한명이 답했다.
거기까지 대화를 하자 순간적으로 그 기억이 떠올랐다.
빨간머리에 츄리닝. APM차트를 보고 바로 스타를 한다는 걸 알아차린 그 안경 낀 녀석.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을 열었다.
“너 혹시 기억하는지 모르겠는데”
“너 혹시 날 알지 모르겠는데...”
무슨 멜로드라마도 아니고,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 녀석도 그 순간 날 짐작하고 약속이나 한듯 동시에 이야기를 꺼낼려고 한것이다. 세상에 별 우연이 다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제서야 그 때 너무 급하게 가버려서 미안하다고 모니터 너머로 사과했다. 1년이나 지났는데.
녀석은 괜찮다고 했다.
“그래서, 너희는 자주 만나니? 스타 자주해?” 내가 물었다.
“우리 지금 랜파티중이야! 학교 컴퓨터실에서. 너도 올래?”
그렇게까지 했는데 거절할 정도로 매몰찬 놈은 아니였나 보다. 30분 뒤 노트북과 마우스를 챙겨 컴퓨터실에 찾아갔다.
넓은 공간 한 구석에 8명이 옹기종기 모여서 스타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 그 녀석이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반가운 만남이였다.
7.
빨강머리의 이름은… 그냥 그 녀석이라고 하겠다. 그 녀석의 종족은 저그였다.
이제동의 팬이고 이제동에 영감을 받아 저그를 하게 됐다고 했지만, 실력은 8명 중에 제일 좋지 못했다.
스타를 본격적으로 본건 2007년 에버때부터라고 한다.
이런 뉴비 녀석이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자랑스럽게 PKO때부터 봤다고 으쓱됐다.
옐로우 알아? 저그의 조상인데. oov의 전성기때는 말이지...
누가 봤으면 우스웠을 나의 스타 꼰대질에도 그 녀석은 뭐가 그렇게 기쁜지 계속해서 웃음을 띄고 있었다.
그 녀석을 비롯한 랜 파티의 멤버들은 학교 내 스타크래프트 동호회 소속이였는데
북미 내의 수십개의 학교끼리 연합을 해서 정기적으로 개최되는 프로리그같은 대학리그가 진행중이라고 했다.
정규시즌이 3경기 정도 남아있는데, 한경기라도 지면 탈락이라고 얘기해주면서 참가하지 않겠냐고 물어봤다.
안 그래도 심심한 참이였기에 고민 하는 척 하다가 승락했다.
그룹안의 모두가 환호했다.
“얘들아, 드디어 우리 팀에 한국인이 생겼어!”
8.
경기는 1주일 뒤 금요일에 있었다. 엔트리는 경기 2일전에 공개가 됐다.
무슨 맵에서 시합하고 싶냐고 물어봤다. 가장 많이 해봤고 익숙한 단장의 능선에 나가겠다고 얘기했다.
상대는 프로토스였다. 나보다 등급도 낮았다.
경기 내내 주도권을 잡으면서 프로토스에게 2번째 멀티 이상을 허용하지 않았다. 매우 좋은 흐름이였다.
그러다가 뭐에 쓰였는지 괜히 무리한 본진 드랍을 하려다 커세어에게 오버로드가 녹고 말았다.
분위기가 점점 이상해졌다. 왠만하면 막을 다크 견제에도 흔들리더니, 반땅싸움에서 힘이 점점 빠지기 시작했다.
30분 정도 게임했을까, 결국 GG를 치고 말았다.
그렇게 잘난 척을 하다가 지고 나니까 너무 부끄러웠다.
2:2가 됐다. 에이스 결정전에 무조건 내가 나가고 싶다고 간청했다. 그러라고 했다.
또 다시 프로토스였다. 초반 더블넥의 심시티가 이상해 보였다.
드론 펌핑 타이밍에 저글링을 찍었다. 초반에 끝내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심시티에 질럿 한기가 홀드를 하자 저글링 한마리도 들어가지 못하게 됐다. 생각밖의 전개였다.
팀원들과 친구들의 얼굴조차도 보기 죄송스러워 기숙사로 왔다.
오늘의 난… 그냥… 그냥 저그였다.
9.
“오늘 MSL 결승이라 다 같이 보기로 했는데, 올래?”
이제동과 이영호가 결승에 붙는 날이였다. 나는 그냥 방에서 보겠다고 했다.
겨울의 새벽은 너무 춥기도 하고, 귀찮기도 하고. 이불 밖은 위험하니까.
두 사람 모두 이름값을 하는 엄청난 명승부의 연속이였다.
이제동이 먼저 기선을 제압하고, 이영호도 그에 뒤지지 않는 한방을 날렸다. 점입가경, 3경기가 되자 둘의 경기력은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순간 내 모니터가 꺼졌다. 무슨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모니터가 꺼지다니, 화가 났다.
그런데 꺼진건 내 모니터만이 아니였다. 문자가 왔다.
“무슨 일이야? 왜 갑자기 게임이 멈췄어?”
한국어를 모르는 그 녀석이 어리둥절한채 자초지종을 물어봤다.
하지만 한국어를 안다고 내가 알 리도 없었다. 모르겠다고 했다. 진상을 알게되면 알려주겠다고 했다.
이내 상황이 파악됐다. 말도 안되는 상황에 킥킥되면서 문자를 보냈다.
“온풍기 때문에 정전이 되서 컴퓨터가 다운됐대.”
나는 아직도 그 때의 답장을 잊지 못한다.
“???????????”
10.
나름 시험 준비를 하던 어느 날 새벽, 학교 카페테리아에서 그 녀석이랑 마주쳤다.
먹고 갈거라는 얘기에 계획엔 없던 합석을 하게 됐다. 그러나 어색한 침묵이 먼저였다.
“나 마지막 경기, 출전하게 됐어.”
침묵을 깬 건 그 녀석이였다. 그 동안 무리중에 제일 게임을 못했던 그는 한번도 리그에 출전한 적이 없었다.
2시즌 연속 탈락이 확정된 뒤, 팀의 매니저와도 같은 그에게도 기회를 주자고 모두가 동의한 것이다.
나는 축하한다고, 꼭 이겼으면 좋겠다고 했다. 빈말은 아니였지만, 그렇다고 염원을 담은 정도도 아니였다.
어색한 침묵은 계속됐다. 각자 자신의 음식을 먹을 뿐이였다.
뭐라고 얘기를 할까, 그냥 신경쓰지 말고 후다닥 먹고 도망갈까 생각하다 덕담이나 한 마디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열정적인것 같아. 너가 스타를 좋아하는걸 보면.”
나는 그가 고맙다라던가, 너도 그렇잖아라는 인사치레를 할 줄 알았다. 대신 그는 먹고 있던 미트볼 샌드위치를 입에 넣다 말았다.
“좋아할 수 밖에 없어. 내가 게임으로 만난 사람들은 나의 외모나, 가족환경이나, 말투로 날 판단하지 않거든. 심지어 게임을 못해도 그게 문제가 된적은 없어. 그냥 순수하게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니까.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랑 함께 노는건 즐거운 일이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였다. 다시 한번 순간적으로 내가 무시했던 그 첫 만남이 생각났다.
미안했는데, 또 미안했다. 어쩌면 아직까지도 미안할 일이다.
사과를 다시 해야하나 내심 고민하다가 입을 뗐다.
“경기 나가는거, 내가 연습 도와줄까?”
11.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마침내 마지막 문제의 답을 적어냈다.
그리고 확인도 안해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쿨하게 답안지를 제출했다.
나의 기말고사는 그렇게 끝이 났다.
집으로 가는길에 익숙한 뒷 모습이 보였다. 그 친구였다.
내가 뒤에서 불러 세웠다. 뭐하다 가는 길이냐고 물으니까 시험치고 집으로 돌아 가는 길이란다.
나랑 같은 과목의 시험이였다. 아하, 한마디 내뱉고 주제를 넘겼다.
“나 휴학해. 군대가.”
“아 코리안 밀리터리? 거기에 가면 너가 좋아하는 옐로우도 볼수 있는거야?”
“하하하 아니. 나는 아미. 옐로우는 에어 포스.”
“그렇구나. 너랑 스타하는건 재밌었어. 덕분에 경기도 이기고.”
“나도 즐거웠어. 좀 더 일찍 친해졌어야 했는데, 아쉽다.”
집까지 가는 길 내내 대화가 이어졌다.
어쩐 일로 그 친구와 나의 마지막 대화엔 침묵이 없었다.
12.
몇 년이 흘렀다.
대학생이던 나는 졸업을 하고, 취업을 했다.
그러나 누가 그랬다. 한번 겜돌이는 영원한 겜돌이.
스타크래프트에서 스타크래프트2로, 스타크래프트2에서 리그오브레전드로.
게임은 바뀌었어도 게임을 끊임없이 하는건 변함이 없었다.
메멘토의 주인공처럼 계속해서 복수거리를 찾는것도 여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나도 모르는 뭔가에 이끌려 그 친구와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문득 그 친구는 어떻게 지낼까 궁금했다.
페이스북을 찾아보자니 성이 기억이 안났다. 나도 늙었구나. 롤 클라이언트를 켰다.
아이디가 좀 특이했던것 같다. C로 시작했던것 같은데… R은 두개였나? 모음은 U? O?
생각할수 있는 모든 조합을 떠올리면서 가장 흡사했던것 같은 아이디 몇개를 친구등록시켰다.
이 중에 하나는 있겠지. 너도 게임을 좋아하는 겜돌이니까 이렇게라도 만나겠지.
몇 시간이 지났다.
랭겜을 하고 왔는데 많은 아이디중에 하나가 접속해 있었다.
순간 느낌이 왔다. 먼저 그쪽에서 말을 걸어왔다.
“hi, who is this?”
뭐라고 이야기해야하지 잠깐을 고민하다가, 키보드를 두드렸다.
“혹시 기억하는지 모르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