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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6/09/18 23:59:10
Name 양정현
Subject 글쓰기, 멘토
1.

  드디어 제목이 붙었습니다.
  저는 기분이 지금 매우 좋아요. 과제인 독후감을 다 썼기 때문이죠.
일주일치 두뇌 가동률의 대부분은 오늘에 할애되었을 겁니다.

그것들을 다시 읽다 보니 글쓰기와 멘토에 관한 생각이 떠올라 그걸로 썰을 풀어볼까 합니다.

  멘토-라는 단어의 뜻을 알게 된 건 고3때였어요. 혹시 기억하시는 분이 있나요?
듣기문제였죠. 멘토의 조건을 쭉 나열하고서 뽑는 식이었던 것 같은데.
뭐, '스승'으로 어느정도 설명이 될 겁니다. 현재 교직에 서 있는 사람들은 엄밀히는 '선생'이죠.
혹은 아예 '교원'이라 불러도 될 것입니다. 그렇게 형편없는 사람도 많거든요.
그렇다고 제가 교사들 전반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느냐, 그건 아닙니다.
사람들의 대부분도 형편 없거든요. 'SF의 99%는 쓰레기이다. 하지만 세상 모든 것의 99%는 쓰레기이다.'



2.

  아시모프의 말이 맞나요? 검색을 해보다가 안 나와서 포기하고 기억에 의존해서 썼습니다.
이제 상아탑에서 글쓰기를 하고, 인용을 정확히 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만 그냥 가기로 합시다.

  이렇게 인용하는 글쓰기를 머리가 굵어지면서 점점 많이 접하게 되더군요.
예전에는 권위에 의존하는 나약한 방식이 아닐까 하여 고깝게 여겼습니다만, 이제는 저도 그렇게 쓰게 됩니다.
이유는 간단해요. 누군가가 먼저 생각했던 것을 시침 뚝 떼고 제 생각인양 말하기 미안하더라구요.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보면 우리는 인용뿐인 글을 써야 할 지도 모르죠. 이미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으니까요.
게다가 어쩌면, 나를 구성하는 것은 성장과정 중 끊임없이 유입된 타인들입니다.

  뭐 그 문제는 차치해두고. 실제로 그런 글쓰기를 구상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번에 소개하는 저의 멘토인데요, 그 사람은 고백합니다.
자기가 구상한 그의 글쓰기 방식은 이미 옛저녁에 누군가에 의해(기억이 안 나네요) 구상되었다구요. 정말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나 봅니다.



3.


-닭장에서 탈출하기


  현재에까지, 이 서울 제국에서 산다는 것은 아파트와의 전쟁이다. 군화발에 의해 구획되
고, 비둘기가 날아오른 이래로 도시에 우뚝 선 이 회색 괴물들은 서민들의 증오하는 대상
인 동시에 열망해 마지않는 연모의 대상이다. 아, 이 측은한 적과의 동침! 혹은 뒤틀린 애
증의 연애.
  요전에야 양계장의 실태를 알게 됐다. 불쌍하다고 쯧, 혀를 차는데 이것은 나에게도 해당
되는 것이 아닌가? 닭을 먹는 것은 인간이되 날 먹는 것은 대지라는 것. 이것 외에 닭과
나 사이에는 큰 차이점이 없다. 글쎄, 이를테면 아파트는 양계장이다.
  닭들의 지상목표는 무엇일까? 주인 눈에 안 띄고 오래 사는 것. 남들 사이에서 튀지 않아
야 한다. 그러면 적어도 확률은 조금 올라갈 게다. 때문에 우리 닭들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은 타인이다. 아니, 타계이다.

  박완서의 '닮은 방들'이라는 소설이 있다. '나'와 남편은 형편이 빈궁하여 처가살이를 하
고 있다. 남편의 "딩"하는 차임벨 소리는 마치 겁쟁이의 실로폰 연주같다. 그런데 남편의
태도는 당당하기가 무쌍하다. 그렇다면 그 소리의 정체는 무엇? '나'의 의식이 걸러낸 산
물? 응당 독립했어야 할 성인 부부가 얹혀사는 데에 대한 부끄러움의 표상?
  그리하여 '나'는 남편과 함께 아파트로 이사한다. 드디어 제 궤도에 오른 부부의 역할 놀
이가 시작된 것이다. 무릇 현대인이라면 아파트에 집 한 채 는 있어야지-그러고 나면 이
제 이 닭장 안에서는 서로의 눈치를 보며 닮아가는 일만 남아있다.
  '나'의 삶은 지리하다. 그의 정체는 타인에 의해 구현된다. '어느 집의 세탁기, 딴 집의 피
아노......', '다이어트를 했다.', 그리고서는 결국 '겨우 남과 닮기 위해 하루하루를 잃어버
렸다.'
  현대인은 끓임없이 강요당한다. 튀지 마라, 정맞는다, 그러면서도 뒤쳐지지는 마라, 그러
면 어떻게? 정답은 '일단 남들 하는 건 다 하세요.'
  때문에 내가 주시하는 대상은 남일 수 밖에 없다. 새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선 나는 나를
보는 것일까? 실상은 날 보는 타인을 그려내는 것일 게다.
  이러한 정서는 '나'의 남편에 대한 회고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딴사람들은 다 무장
을 하고 있는데 그만이 무방비 상태인 것으로 여겨져 불쌍'하단다. 본디 타인 앞에서는 항
상 그들을 견제하고 닮을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온전히 '부드러운 속살을 노
출시키고 있'으니 튀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처가집에서 그토록 당당하던 그도 아파트의 벨을 누르며 흡사 '아파트의 살인
범'이 된다. 결국엔 '닭' 된거다. 나는 여기서 금속적 냉기를 느낀다. 회색과 철의 이미지.
  결국 '나'는 존재론적 탈피를 시도한다. 어떻게? 미답지를 탐험해서. 같은 네모진 방의
같은 D포마드와 담배냄새. 슬프게도 '내' 남편과 너무나도 닮아있는 자와의 간음을 마치
고 '나'는 거울 앞에 선다. 비로소 '나'는 처녀가 된다. 미답지, 즉 처녀지에 갔다 온 '나'에
게 박수갈채를. 그런데 '내'가 본 거울 속에는 정말 '내'가 있었을까? 존재론적 탈피는 성
공?

   발칙한 고백을 하자면 나는 사실 아파트에 살지 않는다. 자그마한 연립주택에 적을 두
고 있는데 부모님은 항상 집이 좁다고 미안해하신다. '이사를 가야 하는데......' 그러한 발
언의 이면에는 그 나이대에게 부과된 사회적 역할과 기대치에 대한 압력이 있다. 사실 우
리 가족은 현재 집에 큰 불만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우리의 이사를 요구하는 자들은
누구? 우리를 닭장 속에 끌어들이려는 타인들,- 닭들?
  부모님은 다시 나에게 말씀하신다. '그래도 우리보다 못 사는 이들도 있단다.' 아이고, 그
럼 그 눈을 우리보다 잘 사는 이들에게 돌리면요? 그럴 수 있잖아요?
  타인이 나의 기준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닮은 방들 속에서 우리는 남들만 신경쓰며
살아왔다. 이제는 '나'라는 주체의 기준을 세울 차례이다.
  한 소설에서 '새장의 문을 열어본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이 나온다. 나에게 이르러 새장
은 닭장으로 변용된다. 닭장 속에서 눈치만 보며 타인에 맞춰 사는 삶에 의미가 있는가?
양계장의 닭들에게 닭장을 열고 아예 달아나 버리라고 종용할 때이다. 그것, 현대인에게
부여된 존재론적 탈피의 과제.


  이것이 이번에 쓴 독후감입니다. 책에서 인용한 부분이 많아 안 보신 분은 이해하기 힘들실 거예요.
재미도 없는 내용, 애써 들여다보실 필요는 없지만 전 제 글에서 여러분이 어떤 사람들 느끼지 않을까 살짝 기대해 봅니다.
상아탑에서의 글쓰기는 힘듭니다.
고등학교때의 자유분방한 분위기와 더불어 제 멘토(!)인 이 사람의 방식에 물든 저는, 조교와 한 학기 내내 부딫쳤어요.
그런데도 어쩔 수 없이 이렇게 글을 쓰게 되는 걸 보면, 그 사람이 제게 미친 영향은 과연 지대하구나 싶습니다.

생각해보니 정치적 성향도 거진 그에 의해 형성됐네요.

  하긴, 최근에 읽은 5권의 책 중 그의 책이 4권 입니다. 이렇게 글이 써지는 것도 당연해요.
창작(!) 도중 어떤 작품을 감상하면 그것이 창작과정에 시나브로 녹아들거든요.



4.

  눈치채신 분도 있겠지만, 제 또다른 멘토는 단연코 이영도입니다. '새장의 문을 열어본 적이 있냐'구요?
저 맥락에 쓰일려면 훨씬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만, 독후감은 자필작성인데다가
원고지도 부족하여 머리꼬리 자르고 덜컥 인용해 버렸네요.
그에게 사과를 하고 싶네요. 하지만 항상 제 글은 그에 대한 러브레터입니다. 어쩔 수 없어요.
의도했건, 그렇지 않건, 글 속에는 그가 빈번히 등장하곤 합니다.

  동기 한 명이 저와 같은 '영도빠'인데 최근 그 친구 역시도 폴라리스 랩소디의 한 구절을 인용한 것을 보고 웃어버렸습니다. 예, 멘토-라는 거죠.



5.

  다시.
  저는 여러분이 제 멘토가 누군지 맞추기를 기대합니다. 사랑을 확인하고 싶거든요.
아쉽게도 그는 남자이긴 합니다만.
  뻔뻔스레 독후감에서 자신이 주체가 되라 어쩌구 했지만, 역시 나를 구성하는 것은 타인이기도 합니다.
물론 자신을 구축하는 일부가 타인인 것과, 타인이 자신의 기준이 되는 것은 다르죠.
차이가 미묘하긴 하네요. (자주 말하는 거지만) 하지만 잘 구별해야되겠죠.

  뭐 아무튼, 글을 쓰다보니 멘토에 대해서, 나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번에 읽는 책은 그의 책에 나와서 집어들게 된 것입니다. 에코의 장미의 이름인데
굉장히 독해가 힘겹네요. 하지만 사랑의 힘으로 일단 끝장을 보긴 해야겠습니다.

  

6.

  저는 글쓰기에 한정지어 말했습니다만, 범위를 넓혀보죠. 여러분의 멘토는 누구입니까?
  부모님은 논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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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jangbono
06/09/19 00:03
수정 아이콘
저번 제목없음 글도 그렇고 정말 글 잘쓰시네요.
부럽습니다.^^
My name is J
06/09/19 00:19
수정 아이콘
양정현님의 멘토는 모르겠지만...
에코를 읽으신다니 반가움에....우후후후-

에코를 읽으실때...한가지 말씀 드리고 싶으신 것은
모든 정보를 다 얻으려 하지 마시고 다 해석하려 하지 마세요.
아는 만큼 읽는다면 그만큼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조금더 많은 것을 읽고 난 후에 읽게된다면 전혀 새로운 부분들을 찾을수 있답니다.
사실 이건 방법이 없어요. 에코아저씨는 천재거든요. 으하하하-
에코아저씨의 말대로.. 아는 만큼 숨겨진 의미가 많은 책입니다 그분의 것은.. 전 요새 푸코의 진자를 다시 읽는 중인데..그간 몇권의 오컬트(?)서적을 읽었더니 훨씬 유쾌하게 읽고 있습니다. 으하하하-

다시 읽게 만든다는것 그것은 작가가 독자에게 발휘하는 최고의 영향력이겠지만,
에코의 책은 절대 한번 읽고 있었다...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아쉬운 부분이 많다고 봅니다.
어렵다...라는 부분이 있거나 모르겠다..싶으면 과감하게 스킵-하시고 계속 읽어나가시는게 좋습니다..으하하하-
블러디샤인
06/09/19 00:23
수정 아이콘
타인이 기준이 되는 삶은 힘들더군요
06/09/19 00:58
수정 아이콘
저 독후감 부분을 읽으면서, '유쾌하지만 어딘가 어설프고 거친 글'(물론, 제가 글을 잘쓴다는 의미는 절대 아닙니다. 저는 글을 몹시 못씁니다.) 을 어디선가 본듯하다.. 싶었는데, 이영도씨의 글의 느낌이었군요.

뭐, 다른 닭들이 나를 끌어내린다기 보다는, 내가 스스로 다른 닭들에 맞춰가는거지요. 그러지 않으면 불안하거든요. 주인한테 잡혀먹힐까봐요. 뭐, 그 잡혀먹는다는 걸 조금 파고 들어보면, 강요당하는 건지, 단순히 별것도 아닌 걸 두려워하면서 저렇게 사는건지 같은것도 좀 생각해봐야 될테지만요.^^

타인에 맞춰 사는 삶도 삶의 방법 중 하나인거고, 그 의미 여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건... 좀 과격하군요..^^;; (뭐, 이영도씨 글 자체가 대개 과격합니다만..;)

아무튼 참 재밌는 글입니다. 읽는 이를 즐겁게 해주는군요. 글을 잘쓰셔서 부럽네요.^^ 저는 글쓰기가 참 안되더라구요. 논설문은 어떻게 쓰면 쓰지만, 감상문 계열은 도통 쥐약이라서..=ㅅ=;;
양정현
06/09/19 01:12
수정 아이콘
S_Kun 님/

이영도는 아닙니다, 제가 위에서 쭉 언급하는 '그'는요.
그리고 독후감의 견해는 제 견해와 많이 다를 수 있어요 :) 과제니까요.

그렇지만 타인에게'만' 맞춰사는 태도에 대해서는 명백히 비난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본'소설도, 그리고 그 독후감도...그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러면 우리의 이사를 요구하는 자들은
누구? 우리를 닭장 속에 끌어들이려는 타인들,- 닭들?

부분은 확실히 좀 이상하네요. 어쩌죠, 제출 해버렸는데.. :/
06/09/19 01:13
수정 아이콘
멘토가 있는 분들이 부럽습니다. 시야가 좁아서 그런 분들을 발견 못한건지 운나쁘게 그럴만한 사람들을 못만난건지 모르겠지만 전 아직 그렇게 생각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타인의 시선이나 기준을 많이 의식하는 삶은 많이 흔릴리죠. 그만큼 자기 주관이나 기준이 정해있지 않다는 뜻일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고 누구나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은 다 있기 마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타인의 기준에 맞추려 노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자신과 타인 혹은 개인과 사회통념사이에서의 적절한 중도를 지켜야 하는거겠지만요.
나도가끔은...
06/09/19 12:34
수정 아이콘
멘토...스승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영적인 무엇이 있어야 하는 관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직접 그 분을 만나보셨는지요?
물론 책이라는 것이 그사람의 가치관을 상당히 많이 포함하고 있는것이기는 하지만
멘토가 가진 의미인 '삶을 이끄는' 정도까지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이 살짝드네요.
이영도씨와 그 분을 무시해서 드리는 말씀이 아니고 그만큼 양정현님의 존재가치도 소중하기에
단편적으로 얻을 수 있는 지식으로 멘토삼는것은 지양해야할 부분인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존중하고 닮고싶은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은 부러운 일이지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을수록 우리 삶의 질또한 향상될테구요.
엘케인
06/09/19 16:45
수정 아이콘
이제 완전 팬이 되었답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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