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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1/12/22 01:30:46
Name Apatheia
Subject [빠순] 이번엔 여기까지.
(이 글은 '빠순'의 글입니다.

비위 안맞으신 분들은 읽지 마세요.)



그저께인가...

자고 일어났더니 아랫입술 끝쪽이 몹시도 가렵다는 느낌이 들었다.

뭐야...하고 거울을 봤더니 잔뜩 부르터있었다.

그깟 야근 몇 번 못견디고 이런 약한 꼴을...

부르튼 입술 위로 립스틱을 바르며 나는 가볍게 혀를 찼다.



이 곳에 온지 한달 남짓...

몇 번이나 엄살을 떨려는 컨디션에 호통을 쳐가며 꾸역꾸역 일을 견뎌냈다.

그 쌓인 피로가 극에 달했는지

오늘은 아무 것도 한 일도 없는데도 연신 졸음이 쏟아지고 머리가 아팠다.

바람을 쐬면 나아질까.

그렇게 일찍 가서 할 일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부적부적 디캠을 챙겨들고 네시쯤 회사를 나섰다.



메가 웹 안은 정말 지옥같았다.

사람은 많고... 여기저기서 피워대는 담배연기하며...

머리가 아프다 못해 속이 메슥거렸고

급기야 다리가 후들거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견뎌야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찬 커피에 찬 콜라에 찬 아이스티까지...

찬 음료수는 종류대로 골라 마셔가며 더워져오는 머리를 달랬다.

덕분에 긁혀버린 속이 비명을 질러댔지만

이것쯤이야 이것쯤이야 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이렇게까지나 새가슴이었나 하는 걸 오늘 처음 느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흘끔흘끔 쳐다볼만큼

소리를 지르고 발을 동동 구르며

나와 일행들은 경기를 지켜봤다.

크림슨 아일즈의 석패 때도, 인큐버스의 힘겨운 역전승때도...

손톱을 물어뜯고 안절부절 못해가며

힘들게 경기를 지켜봤다.

사일런트 볼텍스의 마지막 경기.

...노랫말에도 있지만, 정말 슬픈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었다.

딱히 진 적이 없는데도 이상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 맵은

결국, 내가 응원하는 사람의 승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스튜디오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vod로 딜레이된 경기를 보고 있는데

저 편에서 와 하는 환호성이 들리고

승자의 이름을 연호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머리가 핑 내두르는 느낌이 났다... 그리고 코끝이 매워왔음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 다이얼을 눌러 회사로 전화를 했다.

-정민씨... 졌어요...

지금 생각해도

그 목소리는 많이 흔들렸던 것 같다.



그는 말이 없었다.

차 끊어졌을 텐데 집에들 가셔야죠 라는 짤막한 인사와 목례만을 남기고

조금은 야멸차다 싶을 만큼 뒤돌아서 먼저 가 버렸다.

그리고 그런 그 뒷모습이 까닭없이 면구스러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도 돌아서 메가웹을 나왔다.

...수고하셨다는 인사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했다.

괜찮아요

기회는 많아요

다음번에는 꼭 우승하세요...

하고 싶은 말이, 해 줘야 될 말이 너무나 많았는데도

그렇게... 우리 모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택시를 타고 철야를 위해 회사로 돌아왔다.

의자에 쓰러져 잠이 든 그의 매니저가 보인다.

아마... 저 사람도

어젯밤 철야로 충혈된 그 눈을 비벼가며 실시간 중계를 지켜보다가

그만 맥이 풀려 잠이 들었구나 싶자

또 한번 가슴 깊은 곳에서 한숨이 차올라온다.

맥없이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켠다.

우습게도, 지금 어딘가에서 허탈해 있을 사람보다

또 정석의 한계 운운 영원한 2인자 운운...

자기 일 아니라고 함부로 떠들어댈 사람들의 입과 손이 더욱 걱정되고 무섭다.

그래도 한가지 다행스러운 건...

오히려 그가 이겼을 때보다도 더욱 많이 올라온 카페의 글들이었다.

...팬이란 건

승리의 순간만을 함께하기 위해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멋진 경기였음에

일방적이지 않은 접전이었음에

승자로서도 발뻗고 편히 앉아 얻은 승리가 아니었음에 감사하며

깨끗한 게임이었음에

두 사람 모두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음에

최고의 대회 준결승이라는 타이틀에 부끄럽지 않은 명경기였음에 흐뭇하다.

...이번엔 여기까지.

그러나, 다음엔 더 높이.

TheMarine Owns All... 적어도 내겐.


-더없이 슬픈,

그러나 여전히 그를 믿기에 더이상 슬퍼하지 않기로 한 12월 어느 새벽에.

Apatheia, the Stable Spi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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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7/28 18:10
수정 아이콘
아직도 .. 못 본 경기네요..
차마 볼 수 없는 이유는 무었일까요
02/07/28 18:11
수정 아이콘
오랜 글을 천천히 읽고 있습니다..
하나하나..
나는날고싶다
01/12/22 02:23
수정 아이콘
수고 하셨습니다..(_ _) 근데 '빠순'은 좀 그렇네요..-_-;;;;
Apatheia
01/12/22 02:23
수정 아이콘
빠순 모드로 쓴 글이다 그거죠 머 ^^;
Zz@mPpOnG
01/12/22 07:30
수정 아이콘
마음에 와닿는 글이네요... 주변 사람들에게 "이러 이러해서 분명히 누군 이긴다, 누군 진다."고 운운한 제가 부끄러워 지는 군요... 이런 말이 위로가 되지 못한 다는건 알지만 홍진호님 그리고 김정민님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Apatheia
01/12/22 07:54
수정 아이콘
카페에 글이 올라왔더군요, 너무 아쉽지만 고쳐야 될 것이 무엇인지를 아주 확실히 알았다고... 너무나 많은 분들의 성원에 감사드린다는. 그리고 한시간쯤 후에, 여러분이 올린 글 겨우 다 읽었다고, 이제 들어가 자겠습니다 하는 글이 올라왔더군요. 원래도 정민님 어른스러웠지만 하룻밤 사이 한뼘쯤 더 자란 것을 느꼈습니다. 곧고 파릇하게 커가는 어린 나무를 보는 건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죠. ^^
마요네즈
01/12/22 09:33
수정 아이콘
일단, 제 예상이 너무나도 들어맞은 것에 대해서 죄송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김정민선수.. 정말 아쉬운 한판이었습니다.. 정민님.. 담 스타리그때 한층 업그~레이드된 모습으로 당당히 신의 마지막 한수까지 깨달아서 우승하실수 있길..^-^
장현영
정민이도 유승이 감독도 많이 속 상했겠네요...저도 개인적으로 정민이 응원을 집에서 소리질러 가며 했었지만...아쉽게도 지더군여...1달전쯤 우리 집에 와서 다음날 오전에 대회가 있다며 밤새 열심히 연습하는 모습을 보며 참 흐뭇했었는데...저두 어제 너무 아쉬워서 같이 본 사람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요...물론 우리끼리의 패인 분석이었지만... 암튼 위로 많이 해 주시고 힘 내서 다음에는 더 잘하라고 전해주세요...
01/12/22 14:22
수정 아이콘
저도 이번에 정민님이 결승진출을 못하셔서 아쉽지만...다음에는 정말 더 멋지고 성숙한 모습 보여주실거라고 믿습니다...비 온뒤에 땅이 굳는다고 하잖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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