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Date 2005/12/12 09:40:10
Name homy
Subject [공모] Fly High 1화- 조우, 2화 낯선 상대
" phoneK " 님께서 메일로 응모 하신 작품을 옮깁니다.
1,2화를 같이 역어서 보시는분들의 즐거움이 두배 일듯 하네요. ^^

제목:[Fly High]

제 1화- 조우

언제나처럼 그는 편한 모자를 눌러쓰고 길을 걷고 있었다. 겨울이라서 그런지 빈 손은 더욱 허전하기만 했다. 불과 30분 전, 그의 두 손은 중요한 것을 잡을 수 있었을 텐데. 조금만 침착했더라면은.

아직도 시합중인 것처럼 쉴 새 없이 요동을 치는 왼 손을, 잡아채듯 주머니속에 쑤셔박은 채 그는 동료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니, 옛동료의 집을.

"요환이 형, 나 용호..."

무겁게 초인종을 누르자 곧 웃는 얼굴의 요환이 나타났다. 그는 축쳐져있던 용호에게 두 손을 내밀며 인사를 건넸다.

"굳 게임. 넌 잘 했어."

굳 게임. 그렇다, 정말 좋은 게임이었다 그것은. 5판 3선승제 풀세트접전 끝에 그는 신예테란 김주혁에서 지고만 것이다. 하지만 자꾸만 빈 손에 아쉬움이 가득한 것은, 미쳐 마무리짓지 못한 한가지때문이었다.

"싸가지없는 놈이더군. 스타는, 더이상 즐거운 게임이 아니게 되었어."

요환이 티비를 틀자 김주혁의  웃는 얼굴이 비쳤다.

"요즘 애들은 게임을 즐길 줄 몰라. 굳게임이든 악수든 한가지만 했어도 지금 네 표정이 이렇지만은 않았을 텐데."

티비화면을 쳐다보던 요환이 용호를 돌아보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은퇴할거니?"

"모르겠어.이제 다 떠나고 나혼자 남았어. 스타크래프트란 게임은 그대로지만 사람은 언제고 떠나가기 마련이니까."

첫 데뷔가 언제였던가, 거의 십년 간 올드게이머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쳐 뭇 게이머들의 우상이 되어온 조용호. 하지만 우승컵을 손에 안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그는 불과 삼십분 전에 놓쳐버리고 만 것이다. 희망조차 떨어져나간 그의 두 손엔 굳은 살만 남아있었다.

"요환이 형,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 얼마나 선배가 되어야 맘대로 악수를 청할 수 있는거지? 정말 게임엔 승자와 패자뿐인 걸까?"

용호는 오른 손을 쥐었다폈다하며 티비화면을 보았다. 자신이 내민 손을 모른 척 외면하면 김주혁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베테랑인 진행자들은 우왕좌왕 말들을 쏟아내며 어색한 분위기를 막아보려 하고 있었다. 조용호는 그 뒤로 쓸쓸히 사라져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용케 눈물은 참았지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경기에서 저런 모습은 보이고싶지않았는데, 이상할 정도로 자신의 어깨가 초라해 보이는 것이었다.

"잊어버려, 용호야. 아쉽겠지만 올드게이머가 우승하는 것은 하늘에 별따기보다 어렵잖아. 게다가 진호가 이 말을 들으면 기가막혀 하겠다."

그 말에 용호는 웃음이 나왔다. 정말, 작년에 은퇴할 때까지 홍진호는 단 한 번의 우승도 하지 못했다. 만날 때마다 이벤트의 제왕이니 뭐니 놀리긴 했지만 정말 그에 비하면 자신의 슬픔은 작은 듯해보였다. 항상 결승 문턱에서 삼키던 분루를 보아온 용호는 조금 마음이 진정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요환은 이제 됐다는 듯 티비를 꺼버리고 컴퓨터를 켰다. 옛 게이머답게 그의 집에는 컴퓨터가 3대나 있었다. 물론 모든 게이머가 이런 정도의 장비를 갖추고 있는 건 아니지만, 눈부신 게이머생활을 통해 요환이 모은 돈은 상당했다.

"한판 하자. 한판 즐기고 나면 기분이 많이 풀릴거다."

"고마워, 요환이 형. 역시 형밖에 없다니깐."

용호는 새삼스럽게 고마움을 느꼈다. 역시 되돌아올 곳은 티비화면 안이 아니라 모니터안이었다. 방송이 어떻게되든 게이머는 게임을 할 뿐. 키보드와 마우스가 양 손바닥에 와닿자 용호는 가슴속에 타다남은 재를 느낄 수 있었다.

"쥐 쥐."

"굳 럭~"


그 날 둘은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게임을 했다. 물론 현역인 용호와 은퇴한 요환인 만큼 실력의 차이는 있었지만 그래도 테란의 황제라 불리우던 요환의 전략은 만만치 않았다. 단순히 기분풀이겸으로 게임을 하던 용호는 점점 저그가 되어가고 목동이 되어갔다. 최선을 다하지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그 날 용호는 요환을 통해서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 나는 목동. 피곤을 모르는 어린이지."

용호는 밤이 되어서야 요환의 집을 나섰다. 하늘마다 맺힌 별에게 악수를 건네며 숙소에 도착하자 모두가 잠이 들어있었다. 결승전까지 연습상대가 되어주느라 몹시 피곤한 모양이었다. 용호는 그 중에 모니터 앞에 앉은 채 그대로 잠이 들어버린 연습생들에게 담요를 덮어주며 켜져있는 컴퓨터를 종료시키려 했다. 싸이를 하고있었던 동생도 있고, 디아블로를 하고있던 동생도 있었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스타를 하고있던 동생도 있었다. 컴퓨터를 하나하나 종료시켜나가던 용호는 포즈가 걸려있던 한 컴퓨터의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공방에서 많은 즐기는 헌터 3:3게임인 듯했다.

용호는 조금 호기심이 생겨서 포즈를 풀어보았다. 보아하니 게임은 이미 끝난 듯한데, 동생은 게임안에 남아서 혼자서 프로토스로 플레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 화면에서 용호는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승패가 결정난 뒤 별의미없이 놀고있던 동생의 인구수가 이상했다.

198까지 차있던 인구수가 하나씩 줄어가는 것이었다.

"뭐지, 이건?"
게임 안에는 동생의 프로토스 하나뿐이었다. 파티창을 봐도 확실했다. 그런데 왜 유닛의 수가 점점 줄어가는 것일까.

"we are under attack!"

"헉!"

깜짝 놀라 용호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스피커 음량이 최대로 되어있어서 귀청이 떨어질 뻔 한 것이다. 하지만 곧 상황을 파악한 용호는 걷잡을 수 없이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어디지?'

용호는 유닛이 사라져가는 지점을 살펴보았다. 분명히 유닛이 파괴되어가고있었다. 하지만 실체가 보이지 않았다.

"옵저버... 옵저버를.."

용호는 부랴부랴 옵저버를 생산했다. 하지만 온 맵을 밝혀도 혹 그곳에 숨어있으리라 예상했던 무언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멍하니 모니터화면을 보고있던 용호는 일단 게임을 종료하고 리플레이를 저장하기로 했다. 이런 종류의 버그라면, 미리 맵제작자나 게이머들에게 공개하여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료버튼을 누른 용호는 더욱 당혹스러웠다.

"종료가...되지않아?"

그와중에도 프로토스의 유닛과 건물들은 하나씩 파괴되어가고있었다. 용호는 멍하니 우측상단의 인구수를 쳐다보고있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있었다.
용호는 똑똑히 보았다. 모든 유닛이 제거된 상태에서 나타난 인구수 표시를.

'1/0'

"어디지? 무언가가 있어!"

마지막 남은 넥서스가 파괴되어가는 순간이었다. 용호는 넥서스의 체력이 사라지는 것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약 250정도의 타격치였다.

"거짓말. 이런 타격치를 지닌 유닛은 없다구!"

그 때 갑자기 채팅창이 떴다. 용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모니터앞에 바싹 붙었다. 채팅메세지는 피로 칠한 듯한 붉은 색이었다.

'아깝게 결승문턱에서 좌절한 조용호 선수군요.'

"익, 어떤 놈이 장난치는거야?"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용호를 감시하는 이는 없었다. 켜진 것은 단 하나의 컴퓨터이고 숙소에 깨어있는 것은 혼자였다. 용호는 조금씩 두려운 생각이 들어갔다. 버그니 장난이니 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것은.

"누,누구냐 너! 대체 뭘 하고있는거지?"

'이름같은 건 없습니다. 단지 난 이 게임을 이제 소멸시키려합니다.'

채팅창의 글자는 한자씩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 아무리봐도 그것은 사람이 타자를 치는 느낌이 아니었다.

'김주혁의 컴퓨터에 다른 프로그램이 깔려있었던 건 알고있었나요?'

"다른 프로그램이라니? 대체 무슨 소릴하는거야?"

화제가 갑자기 김주혁쪽으로 옮겨갔지만 용호의 두려움은 더해만 갔다.
대체 그런 사실들을 어떻게 알고있는걸까.

'불의를 참는게 착한 것인가? 당신은 계속 이상한 느낌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포즈 제의를 걸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대는 패배자가 되었는데 만족할 수 있는가?'

"시끄러. 간섭하지마 나에게!"

'그러면서도 악수를 건넨 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어요. 오랫동안 게이머들을 지켜보았지만 그대와 같은 사람은 드물었지요.'

"사실이 아니야! 확신이 없었어! 김주혁도 프로다. 아무리 그래도 불법적인 프로그램을 썼을 리는 없어..."

용호의 목소리는 점점 힘이 없어져갔다. 사실, 마지막 5라운드에서 그는 김주혁에게 많은 이상함을 느끼고도 모른 체한 것이었다. 그것은 약 65%정도의 확신이었을까.
하지만 이제 잊으려 했는데. 그저 마음 한구석에 묻어둔 채 내버려두려 했건만. 용호의 원망을 아는지 모르는지, 채팅창에는 감정없는 글자들이 또다시 나열되고 있었다.

'아무튼 이제 나는 이 게임을 종식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게임의 의미를 모르는 자들에게 더이상 책임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

모니터화면이 점점 어두워지면서 마지막 한 줄의 문장이 그려져갔다.

'행여나 나를 막을 생각이라면 그만두는 것이 좋습니다. 게이머는 날 절대 이길 수 없습니다.'

모니터화면이 완전히 어두워지자 숙소안은 침묵에 잠기었다. 그렇게 소리를 쳐대도 잠에서 깬 동료는 없었다. 마치 순간인 양 용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니터앞에 앉아있었지만 그 사이 스쳐간 생각만도 수만가지였다.

"이기고 싶었어. 그래, 나는 이기고 싶었어. 이기고 싶었다구..."

낯선 고해성사와 함게 그의 눈에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2화- 낯선 상대

다음 날 아침, 용호는 퉁퉁부은 눈으로 티비를 켰다. 결승전의 다음 날은, 연이어 프로리그 결승이 있는 날이었다. 바로 김주혁이 출전할 그 엔트리였다. 용호는 티비화면을 통해 김주혁의 눈을 보았다. 과연 그 말은 정말일까, 정말 다른 프로그램이 있었던 것일까.

"네, 결국 무대전자와 BO(best one)팀간의 승패는 에이스 결정전으로 판가름나겠군요. 어제 결승에서 힘겨운 승리를 거둔 김주혁은 많이 피곤한 듯하지만 그래도 사기만큼은 최고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데뷔1년만에 양대리거 본선진출에 그 중 하나를 우승했습니다. 에이스 결정전의 부담감은 그 충만한 사기에 비교할 바 아닐겁니다."

김주혁의 상대는 화려한 컨트롤로 제2의 임요환이라 불리우는 초성대였다. 그는 상대가 상대인 만큼 많이 긴장한 듯했다. 그러나 게임 스타트가 눌러지고 막상 게임이 시작되자 전혀 긴장됨없이 테테전의 초반을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뭐야, 용호. 벌써부터 복수할 생각이야?"

티비를 보고있던 용호의 어깨를 짚은 것은 정수영 감독이었다. 용호는 그의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고개를 떨구며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감독님. 역시 저는 큰 경기에 약한가 봐요."

"운이 없었던 것뿐이지. 그게 너의 모든 운이라고 생각치는 마. 너는 아직 최고의 저그니까."

호랑이처럼 무서운 정수영 감독도 그 날만큼은 용호에게 관대했다. 늘 큰 경기 패배뒤에 눈물을 삼키던 용호의 참모습을 알고있어서인가, 다독여주는 모습은 마치 친 형과 같았다.

"그런데, 난 솔직히 마지막 경기만큼은 네가 잡을 줄 알았거든.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후반에 그렇게 밀리다니 말야. 많이 아쉽더라 정말."

그렇다. 그것은 용호 역시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정말 무슨 트릭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많은 물량이 한꺼번에 쏟아져나와 용호의 본진을 뒤흔들었고, 그리인해 당황한 용호의 컨트롤이 겹쳐져 게임은 한 순간에 기울고 만 것이다.
용호는 급한 일로 나가봐야한다는 감독님을 뒤로 한 채 다시 티비화면에 집중했다. 게임은 이미 중반,하지만 서로 팽팽한 가운데 배틀크루져를 모으고있는 상황이었다.

"네, 이제 마지막 결전이 되겠군요. 배틀과 배틀의 싸움은, 숫자가 동등할 경우 거의 운이 좌우하기 마련인데요."

"그렇지요. 서로 배틀 외에 발키리나 레이스를 뽑을 엄두를 못내고 있습니다. 양 선수 모두 이 부분이 승부처임을 직감한 것입니다."

3시와 9시 양 본진에서 배틀크루져들이 순항을 시작했다. 맵 정중앙에서 만나기 전 옵저버는 양 선수의 개인화면을 잠깐 비추었다.
숫자는 똑같았다. 그런데 김주혁의 배틀크루져 중 한 대가 체력이 급속히 깎이는 게 아닌가. 마치 플레이그를 맞은 듯 배틀의 체력게이지는 어느새 붉은 색이 되어가고 있었다.

"네,작렬했습니다. 야마토 포 일제 공세! 정신없는 난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서로서로 일꾼까지 데리고 온 일생일대의 우주전쟁!"

"아, 그런데 김주혁 선수쪽이 약간 운이 없었나봅니다. 점점 밀리는게 보이시죠, 캐스터님?"
배틀크루저들이 일제히 불을 뿜기 시작했다. 양 선수 모두 배틀을 학익진 형태로 배치한 뒤 일점사를 통해 서로의 배틀을 하나씩 제거해나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배틀에 달라붙은 일꾼들이 체력을 회복시키고 있었서 결과는 더뎠지만 분명 시간이 지날 수록 김주혁의 배틀이 적어져갔다.

'이상한데. 3시와 9시 사이엔 아무것도 없었을텐데.'

용호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화면을 바라보았다. 배틀의 체력을 그렇게 삽시간에 빼앗을 수 있는 유닛이 있었던가.
그런데 그 때 갑자기 채팅창이 떴다.

'너는 스타를 할 자격이 없다, 김주혁.'

깜짝 놀란 옵저버가 용준의 혀보다 먼저 포즈를 걸었다. 경기중 채팅은 위반이었다. 하지만 더욱 놀란 것은 두 게이머였다. 특히 김주혁은 옵저버가 채팅을 한 줄 알고 헤드폰을 낀 채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뭡니까! 경기중에 이래도 되는건가요?"

하지만 잔뜩 화가 난 듯한 그의 표정 한구석에서 안도의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용호였다. 채팅덕에 그는 다행히 패배를 모면한 것이다. 오히려 시간이 갈 수록 굳어져가는 것은 초성대의 얼굴이었다. 거의 승부가 갈릴 즈음 포즈가 걸렸기 때문이다. 만약 채팅이 아니었더라면 지금 웃는 쪽이 어느 쪽일지는 명확했다.

"아,이게 무슨일이죠. 여러분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상황이 파악되는 대로 정확한 판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포즈~가 걸렸는데 말이죠. 그런데 방금 그 채팅이 누구의 것이었는지를 먼저 파악해봐야겠습니다. 만약 두 경기자중 한 명이 채팅을 한 것이라면 협회의 규칙에 따라 반칙패가 선언되는데요.. 그런데..."

말끝을 흐리는 것을 보니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이 사태를 정확히 파악한 이가 있었다. 티비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던 용호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역시 꿈은 아니었어. 녀석의 말 또한 허풍이 아니었단 말인가..."

녀석의 정체는 무엇일까. 국립과학연구소에 의뢰를 해야하는 것일까, 아니면 컴퓨터 프로그래머에게 의견을 물어야하는 것일까.
용호는 도와줄 이가 누구인지 생각해보았지만, 이런 현상을 그대로 믿어줄 사람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먼저였다. 누군가의 장난이 아니면 녀석은 분명 유령같은 존재일지 몰랐다 컴퓨터 속을 돌아다니는.

"아, 지금 판정이 나왔는데요. 음... 아무래도 이번 라운드는 재경기에 들어가야할 것같습니다.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게임 중에 일어난 그 채팅은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엠씨는 자신 스스로도 납득되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어폰을 통해 들려오는 말을 그대로 시청자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엠씨 옆의 두 보조자 역시 말도 안된다는 표정으로 엠씨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경기자는 재경기라는 말에 한 숨을 쉬며 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거의 50분에 가까운 혈전을 다시 치뤄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둘의 표정을 더욱 어둡게 했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날 재경기는 없었다.
양 선수의 컴퓨터가 고장을 일으켜 스타가 제대로 실행이 안되었기 때문이다.

"용호형, 여기 컴퓨터가 이상해. 스타가 안되는데?"

그 때 막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언가를 직감한 용호는 얼른 그 쪽으로 달려가 어느 컴퓨터인지 확인했다. 역시나 예상했던대로였다.

"막내야, 스타 언인스톨하고 다시 깔아봐라. 그래도 잘 안되면 나한테 말해주고."

"그 정도는 나도 알지. 지금 벌써 3번째 인스톨한거다. 그런데 뭐가 잘못되었는지 전혀 실행이 안되는거 있지."

"포맷해봐. 스타깔기 전에 바이러스 백신부터 설치하고 실시간 검사로 돌려놔, 알겠지?"

바이러스가 아니란 건 알고있었다. 하지만 컴퓨터 안에서 이런저런 활동을 하는 녀석이었다. 혹시 백신에 걸린다면 그보다 더 좋은 결론은 없을 터였다.

막내에게 일을 지시한 뒤, 용호는 다시 티비앞에 앉았다. 김주혁과 초성대의 재경기는 내일 재개될 거라는 멘트와 함께 스타리그 중계는 막을 내리고 있었다. 물론 두 팀은 아직 승부가 난 것이 아니기에 이로 인해 두 에이스는 더욱 큰 부담을 지게된 것이다.

무대 뒤로 사라지는 김주혁의 표정이 밝지 못한 것은 물론 그런 이유도 있었지만, 정체모를 누군가때문에 게임이 중단되고 게다가 그런 말(채팅이지만)까지 들었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용호는 그런 김주혁의 뒷모습을 보며 이상한 감정에 빠져들었다.

'나는 정말 저 녀석이 밉지 않았던 것일까...'

만약 결승 5경기에서 이의신청을 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겉으로는 김주혁을 위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스스로의 안전을 위한 조치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까지 들게하는 대낮의 사건이었다 그것은.

그 날 저녁, 용호는 막내로부터 '포맷이고 나발이고 아무 소용없었다'라는 푸념을 전해듣고 직접 컴퓨터 앞에 앉아 이것저것 만져보기 시작했다. 스타뿐 아니라 컴퓨터에 관련된 모든 지식은 용호의 머리속에 있었다. 만약 단순한 소프트웨어 이상이라면 금방 밝혀낼 수 있을 터. 그러나 프로그램상의 문제는 전혀 아니었다. 다른 프로그램이 정상작동하는 와중에 유독 스타만 에러가 난 것이다.

8,90년대 처음 붐을 일으켰던 구세대 게임이라 할 수 있는 스타크래프트가 윈도우 xp에서 에러난다는 것이 아이러니했다. 역시 어젯밤의 일 때문인가. 녀석이 한 번 침투해 들어온 컴퓨터는 모두 이렇게 되버리는 것일까. 내친 김에 용호는 블리자드에 질문메일까지 보내었다. 그러나 되돌아온 것은 리인스톨을 해보라는 상투적인 답장뿐이었다.

"형, 나 용호야!"

다음 날 용호는 조언자를 찾아갔다. 밤새도록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적임자로 꼽은 그는, 적어도 용호의 말을 허무맹랑한 소리라 하진 않을 터였다. 바로 그 자신이 '몽상가'이기 때문에.
자고 있는 건지 한참 뒤에야 문이 열렸다. 조금전까지 꿈 속을 헤매이고 있던 것처럼 부시시한 얼굴에 엉망인 옷차림새였다.

"민이 형, 오늘도 즐쿰?"

"임마, 한참 좋은 꿈을 꾸고 있었는데."

무슨 꿈이냐는 질문에 강민은 말없이 용호를 방으로 안내했다. 요환과는 달리 작고 소담스런 방이었지만, 여자친구가 왔다간 것인지 찬장이며 옷걸이며 장농이 무척이나 잘 정돈된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러나 작은 침대위는 아직도 어지러히 꿈의 깃털이 휘날리고 있었다.

"잠이 최고야. 너도 너무 게임만 하지 말고 잠도 자둬."

"민이 형도 은퇴한지 꽤 지났구나 이젠."

"뭐, 해볼만한 건 다 해보았으니까. 스타를 하면서 꿀 수 있는 꿈은 다 꾸어봤으니 이제 다른 꿈을 좀 꾸어볼까해서."

강민은 그다지 변한 게 없었다. 오래전 KTF의 주장으로 늘 본이 되는 모습을 보여왔던 강민이었기에, 은퇴를 하면 곧 멋진 사업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사람들의 기대도 있었지만 그는 아직 꿈에 취해 살아가고 있었다. 요즘 각박한 사회를 보면 쉽지 않은 생각일 것
이다.

강민은 안경닦이를 꺼내 안경을 닦고 냉장고로 가서 마실 것과 간식을 차려왔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생각해온 듯한 한 마디를 용호에게 건네었다.

"힘내라. 인생에서 결승이란 것은 매번 다가오기 마련이니까. 그 때마다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돼."

"봤구나, 형도. 잠자느라 못볼 줄 알았는데."

"봤지. 오랜만에 스타가 하고 싶어지더라. 만약 나였다면, 마지막 경기에서 그리 쉽게 허물어지지는 않았을걸."

아직은 현역이야, 라고 말하는 듯한 강민의 모습에서 예전의 그 자신감이 배여나왔다. 이제 잠을 다 쫓은 건지 티비를 보는 강민의 눈빛은 전에 없이 날카롭기만 했다. 마침, 연기되었던 티비에선 김주혁과 추성대의 경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강민의 날카로운 시선은 김주혁을 놓치지 않고있었다.

"스타리그 우승자로군. 하지만 상대도 만만치가 않아. 나, 개인적으로 추성대를 알고있는데 컨트롤이 임요환 못지 않더라구."

"형. 나하고 내기할래?"

"훗, 현역때 놀이를 한 번 더 해볼 생각이야?"

강민은 웃으며 용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나는, 추성대가 이긴다에 식사 한 끼를 걸지."

"그럼 나는, 무승부가 된다에 한표. 내 짐작이 맞다면 분명히 무승부가 될 거야."

"무슨 말이지? 무승부라는 건 엘리전을 말하는 건가? 섬맵이 아닌데 이 맵은?"

"형, 혹시 여기서 녹화가능해?"

용호는 강민의 질문을 무시한 채 녹화할 장비가 있는지 되물었다.

"반드시 녹화해두고싶은게 있어. 실은, 그걸 보여주려고 민이형 찾아온거야."

"녹화야 얼마든지. 하지만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네 하하."

곧 강민도 알 수 있으리라. 용호는 묵묵히 녹화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김주혁과 추성대의 리턴매치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5초..4초..

3초..2초..1초.

"네, 경기 시작되었습니다! 저번하고 맵은 같은데요. 과연 전에 있었던 것처럼 배틀과 배틀의 싸움이 될런지요!"

"아무래도 전과 같은 빌드는 쓰지 않을 듯싶습니다. 러쉬거리가 그리 멀지 않은 관계로 초반 심리전에서 얼마만큼 서로가 이득을 취하느냐에 따라 후반양상도 달라질 것같습니다."
"그렇다면 마이크로컨트롤에 강한 추성대선수가 유리할까요?"

"반드시 그렇다고만 할 순 없죠. 김주혁선수는 초반은 방어하고 후반을 도모하는 스타일이라서 추성대 선수의 공격이 먹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테테전의 초반이 물흐르듯 지나가고 있었다. 용호 역시 아직까지는 별다른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번 한번의 승부로 두 팀의 운명이 엇갈리는 만큼 엠씨의 목소리는 고조되어 있었고, 여느 프로리그 경기와 다름없는 하나의 게임일 뿐이었다.

적어도, '그것'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거 왜이러지. 무언가 이상해...'

가장 먼저 이상함을 알아차린 것은 김주혁이었다. 프로의 예민함은 곧 위화감을 느낄 수 있었다. 분명 이 정도 타이밍이면 나와있어야할 이만큼의 '물량'이 부족하게 느껴진 것이다. 주혁은 바쁜 와중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맵을 체크하며 유닛의 수를 파악했다. 여러 군데에서 게릴라전이 일어나는 중이라 인구의 수는 파도치듯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잠깐의 소강기 동안 인구수는 차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 무언가 부족해보였다.

김주혁의 시선은 자연히 우측 상단으로 고정되었다. 양 손은 유닛을 생산하면서, 유닛이 생산될 때마다 인구수를 확인했다. 그러자 그는 놀랄만한 사실 하나를 알아챌 수 있었다. 전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유닛의 수가 하나씩 줄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버그인가!'

김주혁은 이대로가다간 진다는 걸 직감하고 바로 포즈를 걸었다. 그리고 관계자들에게 버그를 설명했다. 하지만 처음 들어보는 이 버그에 대해서는 관계자들 또한 쉽게 판정을 내리지 못하고, 리플레이를 한 번 더 살펴본 후 결정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저장된 리플레이가 보이지 않았다. 컴퓨터의 모든 폴더를 뒤졌지만 없는게 분명했다. 당황한 관계자는 우선 포즈를 풀고 경기를 속행시켰다. 경기가 끝난 뒤 두 게이머가 저장한 리플레이를 살펴보면 되는 것이었다.

"용호야, 네가 보여주려 한 것이 설마?"

"응, 요 며칠 사이 난 정말 믿기지 않는 일을 겪었어. 형은 유령이나 신의 존재를 믿어?"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용호는 강민에게 그 간 있었던 모든 사실을 낱낱히 설명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자유분방한 사고를 즐기는 강민이라면 어떤 방법을 제시해주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강민은 그런 용호의 이야기를 담담한 모습으로 듣고난 뒤,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거야 원, 네 말이 맞다면 내기는 내가 지겠군. 여기서 이럴게 아니고 점심은 나가서 먹자. 마침 진호와 만나기로 했거든."

강민과 용호는 녹화장치를 한 번 더 확인한 뒤 티비를 켜두고 밖으로 나갔다.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둘은 용준엠씨의 익숙한 멘트를 들을 수 있었다.
"아... 또다시 리플레이가 증발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사태를 뭐라 말씀드려야할지, 정말 당혹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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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12 11:38
수정 아이콘
흥미진진, 다음 편이 기대되네요. 마감 전까지 완결을 볼 수 있겠죠?^^
05/12/12 13:51
수정 아이콘
후덜덜한버그인데요 ~
기대되네요..
무리한 부탁일지는 모르지만 .
마감전까지 완결부탁드립니다..^^
05/12/12 13:56
수정 아이콘
노력해보겠습니다 ㅠㅠ
아케미
05/12/12 15:35
수정 아이콘
으아아, 공모 마지막날 이건 무엇이랍니까. 너무 재밌는데요, 완결 안 내주시면 섭섭하죠~
미이:3
05/12/12 23:56
수정 아이콘
아 즐쿰 엄청 웃깁니다;
독특한 설정이네요..
정말 이렇게 되면 큰일납니다T_T
다들 실직자 된다구요T_T;; 하하;
정말 빠른 연재 속도 이시네요^^
전 단숨에 읽으러 갑니다 ~ ^^ 수고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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