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Date 2011/12/11 20:08:15
Name PoeticWolf
Subject 마초가 사는 하루
특별히 가식을 떠는 사람은 아니지만 만나는 사람들에게 심어주려고 애써 노력하는 저의 이미지가 하나 있는데, 바로 제가 마초라는 사실입니다. 삶의 햇수는 누구나에게처럼 저에게 지혜를 주었고, 그래서 어렸을 땐 미숙하게도 말로 '난 마초다.'라고 했다가 여러 번 웃음거리가 되었지만 이제는 행동으로 보여주려고 다방면으로 시도를 합니다. 그리고 무촌임에도 아직 절 잘 모르는 아내에게 절 알리려 이런 저런 걸 시도해보는 편입니다. 사람을 온전히 알려면 평생도 모자른다죠.

총각 때부터 늘 아내와 부딪혀왔던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경제관입니다. 마초에게 '아껴쓴다'는 개념은 도대체 세상 못 되먹은 쪼잔함의 극치입니다. 편의점은 비싸니 멀더라도 동네 할인매장을 애용해야하고, 책은 되도록 도서관에서 빌려 보라는 건 먼저 시간(즉 인생)의 낭비이며 책을 수집하다시피 하는 제 취미 생활에 대한 침해였습니다. 게다가 쓴 만큼 더 벌면 되잖습니까? 소비자로서 적극 시장 활동을 해야 너도 나도 잘 사는 세상이 되는데, 마초가 될 수없는 아내는 시야가 너무 좁습니다. 속으로는 이런 말을 정리해 빽 지르고 싶었지만 여자에게 일일이 화를 내는 것 또한 마초다운 게 아니라 그냥 하라는 대로 합니다. 쓰는만큼 벌자는 계획이 잘 맞아 떨어지지 않아 카드 빚이 이월되고, 카드회사에서 담당자 바꿔가며 매일 힘드신 일 있냐고 전화하는 일이 부쩍 줄어들긴 했습니다만,(생각해보니 없어졌군요.) 제 교보 회원 등급이 내려가는 게 책 시장에 커다란 악영향을 미칠 게 틀림없어 속이 탑니다.

차 문제 역시 벌써 몇 개월 전부터 옥신각신입니다. 전 남자의 차 SUV를 고집하고 있고(할부 처리하고 더 벌면 되잖아!) 아내는 빚을 질 때 지더라도 부담없고 면세의 혜택까지 있는 경차를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레이에 한창 꽂혀있는데, 절대 아니되올시다! 제가 키가 작은 편이긴 하지만 어깨와 등과 배가 이렇게 우람한데, 제 마음만은 태산같은 남잔데, 구부정한 경차 드라이브는 면허를 따고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거든요. 이렇게 몇 가지 사안을 놓고는 아직 대치 중입니다. 물론 저는 마초이며 신사이기 때문에 제 마음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마초는 싸울 때 지극히 평온합니다. 아내는 아직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데, 마초인 제가 보기엔 참 어립니다. 감정 조절 하는 법을 아직 배우지 못한 것 같아 안쓰럽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런 꼬꼬마가 감히 어르신이자 집안의 가장인 나에게 대든겁니다. 제 권위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비록 진짜 마초는 여자에게 화를 내는 것을 금기시하지만 이때는 예외입니다. 지금 지는 건 앞으로 평생 종이 되겠다는 뜻이고, 마초는 융자를 다 갚을 때까지는 회사에서 말고는 절대 누구 밑에 있을 체질이 못됩니다. 조용히 목소리를 깔고 "됐다. 그만하자."라고 합니다만, 아이가 된 아내의 격양된 목소리와 감정에 깔립니다. 근엄함에 수그릴 걸 예상했는데, 사뭇 다릅니다. 게다가 듣다보니 애치고는 논리가 반듯합니다. 그럴수도 있겠구나, 설득을 당할 뻔한 자신에게 놀랍니다. 갑자기 어른의 마음이 찾아와 '애랑 싸워봐야...'하며 자리를 뜨는 거지 1개월 전 자료까지 대동한 아내의 논리 정연한 반박에 찔려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쌓여 되도록 아내가 화낼만한 일을 이제는 알아서 피하는 것도 역시 어른의 배려일 뿐입니다. 제 안의 마초는 너그럽습니다.

가장 빈번히 부딪히는 부분은 바로 미용 문제입니다. 수염은 마초의 필수 스타일이고, 저의 끝없는 로망이기도 한데, 엄마와 아내가 싫은 소리를 계속하는 통에 아직 한 번도 길러보지 못했습니다. 연휴를 이용해 깜박 잊은 듯 수염을 방치하긴 하지만 그걸로는 성에 차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 정도야 어른스럽게 양보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세수 후 로션과 이상한 액체들을 얼굴에 발라주는 건 대단히 치욕스럽습니다. 아니, 남자 중의 남자가 화장이니 피부 관리라뇨. 추운 겨울 피부가 허옇게 일어난 채 공공 장소를 돌아다니는 게 왜 아내의 수치가 된답니까. 그런 사소한 거 신경써서야 어디 큰 일을 하겠습니까. 아인슈타인도 연구에 집중하기 위해 한 가지 비누만 사용했다는데, 그 예를 사용하기에는 그의 업적이 너무 크기도 하거니와 딱히 아인슈타인이 마초의 이미지가 아니라 아직 사용한 적은 없습니다. 어차피 친절히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것 또한 쪼잔합니다. 싫다 한 마디면 충분한 설명이며 커뮤니케이션이죠. 그럼에도 아침 저녁으로 작은 소동이 일어나는 건 왜 그럴까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냥 얼굴을 아내의 요상한 액체며 크림들에 내 주었습니다. 감기 몸살이 와서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콧구멍이 막혀 밤새 입으로 숨을 셔 혀가 따갑게 아프고, 아침부터는 한쪽만 뚫려 그 코가 시립습니다. 시리운 느낌이 계속 위로 올라가 이젠 눈망울이 얼얼하니, 골이 아픕니다. 두통에 누워만 있는 제 머리를 만지작 만지작하던 아내는 외출 전 화장품 앞에서마저 순종하는 제게 왜 얌전하냐고 묻습니다. 힘이 없어서, 라고 그냥 말합니다. 심각하다고 느낀 아내가 약을 챙깁니다. 참, 저는 마초라 잘 아프지도 않고 약 따위 먹지 않습니다. 그걸 잘 알고 있는 아내가 화장 다음 단계를 실험해보고 싶은가 봅니다.

밖으로 나와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아내가 볼을 제 볼에 댑니다. 오늘은 제 피부가 부드럽다며 스스로의 피부 관리 기술을 자찬합니다. 그러다가 열이 있는 거 같다며 이따 도착해서 꼭 약을 먹자고 합니다. 싫어서 고개를 저었습니다만 미동이었는지 약속했다,라고 엉뚱한 다짐과 새끼손가락이 날아옵니다. 아니었다고, 싫다고 고개를 저었다고 말하는 건 쪼잔한 변명 같아 그냥 가만히 있습니다. 아내가 자꾸 손으로 이마를 만지고 안절부절 쳐다 봅니다. 마초에게 공공 장소에서의 애정행각은 절대 금물이지만 어쩐지 싫지 않고, 힘도 없어 그대로 둡니다.

하지만 그러지 말았어야 합니다. 힘이 없으니 하루 종일 아내 세상입니다. 열 걸음마다 제 목도리를 조릅니다. 권력을 노린 세도가의 밀정처럼 제 입과 코까지 칭칭 감습니다. 숨이 막히지만 힘이 없습니다. 정신이 혼미합니다.
치킨 맥주가 땡겼는데, 아픈 사람이 무슨 소리냐며 거절합니다. 하지만 좋은 생각이라며 자기 마실 맥주만 하나 삽니다. 아픈 거 핑계대고 고구마케익 사먹자고 하니 집에 있는 롤케익 다 먹고 사잡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먹을 거 아껴서 뭐하느냐는 제 레파토리는 막힌 코 속에 눌어 붙어 지끈지끈합니다. 정신이 혼미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디선가 물을 받아 온 아내에 의해 입 속에 약이 들어갑니다. 정신이 혼미합니다.

이렇게 수치와 모욕 속에 하루를 보냈습니다. 워낙 정신뿐 아니라 몸도 마초인지라 집에 올 때쯤 되니 어느 덧 가벼워진 걸 느낍니다. 슬슬 반항할 때가 되었습니다. 열 걸음 전에 제 호흡기를 괴롭혔던 아내에게 항거하듯 목도리를 풀어 제낍니다. 이마로 손이 날아오길레 재빨리 피했습니다. 약 효과가 있나보네,라고 아내가 제 마초성을 부정합니다. 훗, 가볍게 코웃음쳤습니다. 뭐, 일일이 상대할 거 있나요. 마초라고요. 이따가 오늘 하루의 만행을 조용히 복수나해주면 됩니다. 감기 기운 남은 입으로 뽀뽀나 해주려고요.

+약 기운과 모바일 환경 때문에 글이 혼미합니다. 죄송합니다.
* Noam Chomsky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12-14 09:50)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토어사이드
11/12/11 20:13
수정 아이콘
아..................
안그래도 저물어가는 일요일 저녁이 더 우울해집니다..
dfsefsfdfefs
11/12/11 20:14
수정 아이콘
마등이 사는 하루
흐름을잡다
11/12/11 20:15
수정 아이콘
읽으면서 눈이 반달 모양으로 변하고 입꼬리가 올라가는 이유는 왜일까요?
거친 마초의 냄새보다는다기 보단
아내분께서 얼굴에 발라주신 스킨로션 내음같은 매우 부드러운 글처럼 읽힙니다.
절대 부러워서 그러는거 아닙니다.
11/12/11 20:16
수정 아이콘
자랑은 자랑갤로....
매콤한맛
11/12/11 20:17
수정 아이콘
깜찍한 하라아 귀여운 아히휴후 떽띠한 니꼴
피와땀
11/12/11 20:17
수정 아이콘
아......... 알콩달콩 화목하게 살아가시는거 자랑하고 싶으시구나...........
매사끼
11/12/11 20:18
수정 아이콘
글이 우울하네요... 우울한 것 같아요... 우울한거에요....
아나키
11/12/11 20:24
수정 아이콘
헤이
헤이
헤이헤이헤이
마초마초맨

이것만 생각하고 들어왔는데...
올빼미
11/12/11 20:29
수정 아이콘
크리스마스는 가까워오고 염장은 심해지고...나도 염장샷이나 올려야지...
그림자군
11/12/11 20:39
수정 아이콘
삼국지 12 한글정발판이 나올까...

글 읽다 중간부터 머릿속엔 이 생각만이...
ㅜㅠ [m]
서른하나
11/12/11 20:45
수정 아이콘
닉네임과 글이 너무 어울립니다. 크 겨울에 쏠로를 더 외롭게하셨지만 ㅜㅠ [m]
감정과잉
11/12/11 20:45
수정 아이콘
아... 이런 글 보면 결혼하고 싶어집니다아...
아차 그전에 모태솔로라는 종교부터 버려야... OTL
11/12/11 21:02
수정 아이콘
이분글은 전부 에게에서 볼 것 같네요.

좋은 글 고맙습니다.
찰진심장
11/12/11 21:32
수정 아이콘
재미있게 읽었는데 뒤로 갈수록 염장글이네요.
흔한 마초의 아내자랑.txt
하우두유두
11/12/11 22:17
수정 아이콘
아 결혼하고싶네요.
꿀사탕
11/12/11 23:08
수정 아이콘
모바일로 작성하셨다고요..??
doberman
11/12/11 23:31
수정 아이콘
경상도 남자와 결혼한 제 아내가 애처롭게 느껴지는 글입니다.
재밌게 잘 봤습니다. 그리고 공감합니다.
Tristana
11/12/11 23:42
수정 아이콘
글 정말 잘 쓰시네요...
11/12/12 01:31
수정 아이콘
자랑이라고 읽는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1286 김치찌개 만들기 [37] PoeticWolf9908 11/12/19 9908
1284 [홍보글] 아마추어 스타크래프트 리그! 후로리그입니다 [31] rOaDin8976 11/12/17 8976
1283 아버지께서 시인이 되셨습니다 [62] 야크모11509 11/12/17 11509
1282 화해에 관한 추상적인 힌트 [48] PoeticWolf11613 11/12/16 11613
1281 뜨거운 커피는 식는다. [16] 영혼9221 11/12/16 9221
1280 남극점 경주 - 아문센, 스콧과 섀클턴(2-1) [7] epic9883 11/12/15 9883
1279 언니의 결혼 날짜가 잡혔습니다. [50] 리실10777 11/12/15 10777
1278 수제비는 역시 고추장 수제비 [28] PoeticWolf9991 11/12/14 9991
1277 백제 vs 신라 - (4) 한성 백제의 멸망 [15] 눈시BBver.210250 11/12/14 10250
1276 손님 맞이 [32] PoeticWolf9219 11/12/13 9219
1275 [Text 인데도 혐오] 과학적으로 보는 좀비 아웃 브레이크. [69] OrBef12115 11/12/13 12115
1274 [리뷰] 엘더스크롤 5 : 스카이림 - 겨울은 스카이림과 함께 [33] 저퀴13947 11/12/10 13947
1273 sk플래닛배 프로리그 2주차(12/06~12/07) 간략 리뷰 및 맵별 전적 정리 [4] 전준우7459 11/12/07 7459
1272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가장. 그리고 아내의 조련술. [86] Hook간다11450 11/12/12 11450
1271 인종의 지능 차이 [91] TimeLord21481 11/12/11 21481
1270 마초가 사는 하루 [19] PoeticWolf9943 11/12/11 9943
1269 남극점 경주 - 아문센, 스콧과 섀클턴(1) [18] epic10395 11/12/11 10395
1268 신라 vs 백제 - (1) 혼란스러운 아침 [12] 눈시BBver.29089 11/12/10 9089
1267 이해. [9] Love&Hate8269 11/12/09 8269
1266 차별은 어디에서 유래할까. [24] 구밀복검8596 11/12/09 8596
1265 키보드 배틀 필승 전략 [57] snoopy12047 11/12/08 12047
1264 퇴근 시간에 전화 한 통이 뭐 그리 어렵다고. [52] PoeticWolf12061 11/12/08 12061
1263 두 개의 장례식 없는 죽음을 맞이하며. [5] 헥스밤10074 11/12/08 10074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