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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8/03/01 08:09:04
Name OrBef
Subject [일반] 이공계의 길을 가려는 후배님들에게..8 - 소제목 그런거 없습니다.
오늘은 제 의견을 쓰는 것이 아니라, 약간 다른 성격의 글을 쓰려고 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오늘 하려는 이야기가 박사과정 이후에 대한 것인데, '사람은 자신이 경험해보지 않은 것에 대해 말하다보면 금방 밑천이 드러난다' 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 교수님이 제게 해준 이야기를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펌글이군요?

전 지금 박사과정 4년차. 내년 졸업을 앞두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교수를 노려볼 지, 한국으로 귀국해서 교수를 노려볼 지 아직 미정입니다만, 현재의 미국인 지도교수님한테 한국 귀국에 대해 상담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그분하고 '한국 사람이 미국에서 교수되기' 의 주제에 대해 상담을 요청했었습니다.

나름대로 제 여러가지 성격을 나눠서 Strength/Weakness 의 카테고리로 정리한 Self evaluation sheet 를 들고가서 이야기를 시작했고, 약 한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는데, 저한테는 너무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다른 분들께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후 문장은 반말입니다. 영어를 존댓말로 번역하다보면 당시의 분위기가 살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 제 교수님은 학생이 교수 책상에 발 올려놓고 회의하는 그런 개념의 사람입니다 ) 중간중간 말이 이어지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별로 중요하지 않은 대화였거나 그분의 프라이버시에 관한 부분들을 생략한 것들이니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
W : 넌 교수라는 직업이 좋냐?
G : 이건 최고의 직업이지. 난 교수라는 내 직업이 너무 사랑스럽다.
W : 너 평소의 표정을 보면 충분히 그런거 같긴 하다.
G : 뭐 연봉 10억쯤 주면 모를까, 웬만한 직업하고는 안바꿀거야. 하고 싶은 일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직업이 교수말고 또 있는 것 같지가 않거든. ( 이분은.. 주당 80시간쯤 일하는 것 같군요. 근데 그걸 '행복'을 느끼면서 한다는 점에서 이분의 특별함이 나오는 것입니다 )

--
G : 넌 영어를 너무 못해.
W : 알긴 알지. 근데 쉽게 나아지지가 않네.
G : 음.. 이건 니가 조금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어. 내 말은, 니 영어가 약간 말고 큼지막하게 한단계 정도 좋아지지 않는 이상은 미국에서 교수하기 힘들 거라는 얘기야. 내 실험실에 유학온 외국인 학생 중에서 영어가 떨어지면서도 교수가 된 사람은 하나밖에 없었어. 그 친구도 처음에는 임용이 안돼서 우선 회사가서 3년정도 경험을 쌓고 영어 실력 좀 늘이고 나서야 교수가 됐지. 그 녀석 연구 능력이 상당히 좋았던 건 너도 알지?
W : 응. 이쯤에서 짧게 내 영어를 평가 좀 해줘. 어휘가 딸리니 표현이 이상하니.
G : 문법
W : O.O??? 문법? 내 생각에는 문법이 그나마 나은거 같은데?
G : 너도 일상 대화용 영어는 괜찮아. 근데 연구비를 따내기 위한 고급 영어는 상당히 정형화되어있는데, 넌 그런 개념이 전혀 없어. 한마디로 무쟈게 싸구려 영어야.
W : …

--
G : 그나저나, 약점란에 적혀있는, ‘미적 감각이 부족해’ 이건 뭐니
W : 내가 나를 돌이켜볼 때, 난 방정식은 잘 풀어. 실험도 지치지 않고 잘 하지. 근데 왜, 저번에 그거 있잖아. 니가 내 실험결과 보고나서 ‘샘플 4-7 을 YYY 로 표면처리한 다음에 45도 각도에서 전자현미경으로 찍으라’고 한거. 솔직히 이제와서 얘기지만, 난 ‘그게 뭐 다르겠어?’ 라고 생각했었거든. 근데 찍어보니 죽이드만. 난 왜 너같은 센스가 없지?
G : 이놈이 날로 다 먹을라고 하네.
W : 아냐 난 심각해. 세상 사람들 중에 나만 그런 센스가 없는 거 같아.
G : 그건 왕도가 없어. 굳이 하나 팁이라면, 10시간내내 실험만 하지 말고, 9시간 실험하고 나면 1시간 정도는 ‘이걸 어케하면 인상적으로 보이게 할 수 있을까’ 를 고민하라구. 10시간 일한거 50% 만 표현하는거보다는 9시간 일한걸 100% 표현하는 쪽이 사실상 두배가까이 일을 더 한거야.
W :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은 해.
G : 생각만 하지 말고, 실제로 해봐. 해보면 금방 는다. 아, 그 말을 하다보니 너한테 해주고 싶은 말이 생겼다.
W : 뭔데
G : 한국은 어떨 지 모르겠지만, 미국에서 실험쪽으로 교수를 한다는 것은, 중고차 세일즈맨하고 비슷한거야. 물론 연구를 하다보면 다른 경쟁자들보다 2배의 성과를 거둘 때도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까지 혼자 잘나기는 힘들어. 중고차 딜러도 마찬가지잖아? 같은 제품가지고 장사를 하지. 근데 돈 버는 속도는 개인 능력에 따라서 비교 불가수준이거든. 같은 제품, 같은 가격인데 왜 차이가 나는거 같냐. 이걸 잘 생각해봐. 아인슈타인도 이론 물리학이니까 성공한거지 이쪽 필드에서는 그런 성격가지고는 어림도 없어.
W : 니가 그런 말을 하니까 좀 이상하다. ( 제 교수님은.. 대가중에 대가거든요 )
G : 넌 내가 이 바닥에서 일을 시작하던 시절을 못봤으니까.

--
W : 널 보면 부러운 게 하나 더 있다.
G : 뭐 부러운게 한두가지일라고?
W : 넌 일을 참 여러가질 동시에 진행하는 능력이 있다. 난 안되는데. 그런 능력은 어떻게 생기는거냐.
G : 그건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실패의 충격을 최소화하는 방법이지.
W : 어?
G : 잘 돌이켜봐. 내가 너한테 제안했던 일이 열가지 정도였다고 치면, 반 정도는 뻘소리였지?
W : 사실은 그렇지.
G : 근데 내가 그 중 하나만 너한테 제안을 했다면 50% 의 확률로 넌 인생 망치고 난 돈 날리는거지.
W : 그렇군.
G : 근데 열가지를 하다보면, 하나 걸리는게 있기 마련이다. 더구나 다른게 막혀도 지치질 않지.
W : 그럼 이건 일을 시키는 사람과 일을 받는 사람의 차이인거냐?
G : 아니. 난 학생때도 그렇게 했다. 너도 그렇게 하면 좋겠다.
W : 그래. 맞는 말 같다.

--
G : 하여튼 교수를 하고 싶다 이거지. 그럼 포닥하면 도움이 된다.
W : 어차피 포닥을 거치지 않고 교수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G : 꼭 그런건 아냐. 이쪽 인력은 비교적 부족한 편이라서, 니가 약간 눈을 낮춰가려고 한다면 포닥 생략해도 된다. 근데 생략하지 마라.
W : 이유는.. 영어랑.. 또하나 내가 생각하는 그거겠지?
G : 그래. 영어실력을 더 키우고 교수하는게 좋다는게 하나고, 맨땅에 헤딩을 한번 더 해보는 경험은 많이 도움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니가 지금 생각하는 거긴 포닥하는 곳으로 좋지 않다.
W : 내가 하던 일이랑 비슷한 일을 하는 곳이라서?
G : 그렇지. 그건 노예근성이지. 지금 니가 하는 것으로부터 많이 다른 분야를 한번 파봐라. 뭐 올해 말 즈음에 다시 얘기하게 되겠지만, xxxx 여기를 한번 가보면 좋을 거 같다. 거기 할 일 참 많다.
W : 그래.
G :  미적감각에 대해 아까 니가 투덜거린 것은, 포닥 과정을 잘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그나저나, 넌 남을 아랫사람으로 부리는 것을 잘 하나?
W : 해본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조금 자신없는데?
G : 그거 어렵다. 넌 아랫사람으로서는 최고수준이지만, 윗사람으로는 어떨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W : 고민 좀 해 봐야지.
G : 또하나 더 있어.
W : 뭐냐
G : 넌 팀웍이 좋다. 두어명 소그룹으로 일하면 최고인거 같다.
W : 고마워.
G : 근데, 문제가 있다.
W : 뭔데
G : 일단 교수가 되면, 팀이란 것은 니가 은퇴하는 날까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린 다 혼자고, 우리가 흔들릴 때 잡아주는 사람같은 것은 없다. Our worst enemies are ourselves.
W : 그것은 그렇겠네.
G : 각오를 단단히 해라. 뭐 오랜기간 널 보아온 것은 아니지만, 넌 정서적으로 좀 불안정하다. 재작년에 혼자서 반년동안 낑낑대다가 나랑 대판 싸웠던 것을 잊지 말아라.
W : 그래. 고마워.

--
G : 그리고 이자식아. 네놈이 적어오지 않은 문제가 하나 있다.
W : 뭔데?
G : 좀 남이 말을 하면 받아적어라 이 색기야. 니가 무슨 사진기같은 기억력이 있는 놈도 아닌데 왜 안적냐.
W : 으음. 이건 반박의 여지가 없다.

--
G : 그럼 이제 정리를 해보자. 내년 5월 졸업한다고?
W : 그래.
G : 좋아. 그럼 내년 1월 즈음부터는 학위 논문을 쓰기 시작해야 하고, 11월 xxx 학회에 가서 ( 이 사람은 ‘보내준다’ 이런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제가 가는겁니다. )  ‘나 포닥 내지는 교수자리 구합니다’ 라고 약장사를 해야한다.
W : 응 그정도는 생각하고 있었지.
G : 그러려면 9월 즈음에 니가 생각하는 학교 교수들한테 ’11 월 xxx 학회에 오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교수님하고 짧은 대화라도 나누고 싶습니다.’ 라는 이메일을 뿌려라.
W : 그런 식으로 일을 진행하는 것인가?
G : 너처럼 소심한 사람들 말고 정상적인 사람들은 다 그렇게 한다.
W : 나는 소심하지 않아. 저번에 말했잖아.
G : 아냐 넌 내 기준으로 보면 아메바 수준으로 소심하다.
W : 에라이
G : 됐고, 하여튼 9월 즈음에 그런 이메일을 보내려면 8월 즈음에는 레주메가 완성이 돼야지. 그러려면 지금 쓰고있는 논문들이 적어도 ‘accepted’ 상태는 되어야 하고, 그러면 다음 미팅때는 draft 를 들고와야겠다.
W : 바라는 바야.

흑흑 교수님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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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3/01 08:26
수정 아이콘
좋은글 감사합니다. 새벽에 일어난 보람이있네요^^
朋友君
08/03/01 08:48
수정 아이콘
이런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게... ^^
08/03/01 09:11
수정 아이콘
좋은 교수님 두셨네요 ^^
엘케인
08/03/01 10:52
수정 아이콘
웬지 모를 부러움..
우리고장해남
08/03/01 11:16
수정 아이콘
부럽네요 우리학교 학부장님은 수업 날로드시던데;;
제리와 톰
08/03/01 11:58
수정 아이콘
멋있는 교수님에 좋은 학생인 것 같습니다.
김용만
08/03/01 15:15
수정 아이콘
OrBef님 졸업하시는군요! 교수님도 멋지시고.. 정말 부럽네요..
그런데 OrBef님 예전에 담배 금연하신다고 하셨는데 끊으셨는지는 글이 없네요 ^^
08/03/01 18:13
수정 아이콘
재밌군요. "교수! 니말에 나도 동의해!. 게 좀 소심하지."
08/03/01 20:07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공대 다니는 입장에서 도움 많이 되는 글인듯..

끝에서 다섯번째 줄, <에라이> 인상적이군요 웃고 갑니다^^
08/03/02 15:32
수정 아이콘
아아... 정말 소탈하신 교수님이군요.
중간에 산재한 영어 단어는 도대체 뭐란 말인지... [원 뜻은 알겠으나 의역을 못하겠어요;]
08/03/02 23:40
수정 아이콘
고된 길을 가시는군요. 자신의 단점을 여과없이 지적해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건 정말...
살아가는동안 만나기 힘든 행운이죠!!
OrBef님, 부디 성공하시길...
점박이멍멍이
08/03/03 00:25
수정 아이콘
OrBef님 부러울 따름입니다.... 잘 되시길 바래요.
상위권에 못드는 대학에서 학위과정에 있는 저로써는 정말로 절망입니다. 길이 너무 한정적이죠...
앞날이 두렵습니다.
08/03/03 02:03
수정 아이콘
아이고 모두들 감사합니다 ㅠ.ㅠ

저거 말고도 지적해주신 단점들이 더 있었는데, 너무 개인적인 것들이라서 ^^;;
08/03/03 02:07
수정 아이콘
저 담배 못끊었습니다. 음하하하.

전 소심하지 않다니까요!
08/03/03 11:11
수정 아이콘
OrBef님// 소심하지 않다라... 아무리 봐도 AAA 인데요? ;;
일명 트리플 A 라고 불리죠 아하하;; (전 소심한 AB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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