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22/08/08 20:21:05
Name 라울리스타
Link #1 https://brunch.co.kr/@raulista
Subject [리뷰] 피식대학 05학번 시리즈 - 추억팔이에서 공감 다큐로 (수정됨)

시대 별로 유행하는 '갬성'이 분명히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2000년대 중후반은 '투 머치(Too Much)'의 시대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IMF 경제 위기와 새로운 천 년이 온다는 두려움이 겹쳐 암울함과 음침함이 가득했던 '세기말 감성'이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을 지배합니다. 이후 시간이 흐르며 경제 위기의 여파가 어느정도 해소되고, 2002년 월드컵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며 전 국민에게 긍정적인 기운이 다시 샘솟기 시작합니다. 인터넷의 대중화가 완료되고, '싸이월드'로 대표되는 초창기 소셜 미디어의 시대가 열리면서 사람들이 자신만의 감정과 개성을 마구 표출합니다.




KWF4Yr2Slx55L0FxeUPK6hMP78o
도대체 노래방이 왜 저렇게 생겼는지 의아한 세기말 노래방





세기말 감성이 워낙 암울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작용 탓인지, 2000년대 중후반은 뭐든지 '과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패션에서는 심플함이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남자가 멋을 부릴 때는 지금 기준으로는 하나만 착용해도 상당히 부담스러운 페도라와 선글라스부터 이니셜 목걸이, 귀걸이, 부츠컷 청바지, 정장 구두 등을 모두 조합하여 입습니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외출 시 옷의 색상은 무조건 화려한 원색 계열을 레이어드해서 입습니다.




이른바 '싸이 감성'이라 불렸던 감성들도 비범합니다. 힙합 프로듀서 코드 쿤스트가 말했던 것 처럼 이 시절은 '모두가 예술가이자, 시인' 이었던 시절이었습니다. 미니홈피에는 지금 기준으로는 눈 뜨고 볼 수 없는 허세 가득한 문구들이 가득합니다. 가요계에선 감정을 쥐어 짜내는 소몰이 창법이 유행하고, 드라마식 뮤직 비디오에는 항상 애절한 비극이 연출되어 있습니다. 남성은 거칠고 불친절한 면이 있어도 내 여자에게는 한없이 따뜻하면서 한 여자밖에 모르는 허세 가득한 마초적인 이미지가, 여성은 엉뚱한 귀여움과 대비되는 섹시함까지 갖춘 사차원적인 이미지가 유행하였습니다.





tbxmmLTmAg3OJdyKC66n5ssGM6A.jpg
'마눌', '남푠'이 넘쳐났던 이 세대가 훗날 저출산 시대의 주역이 될 줄이야...






이러한 당시의 감성들은 2010년대가 되면서 '중2병', '관심 종자'로 공격을 받으면서 점차 잊혀진 트렌드의 길을 걷습니다. 또한 대세 SNS가 자신만의 '감정 표현'에 최적화되어 있는 싸이월드에서 자신만의 '경험 표현'에 최적화된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으로 바뀐 점도 2000년대 중후반 감성 소멸에 큰 역할을 합니다. 짤을 즐기는 유행도 지나치게 무겁고 오그라드는 '감성짤' 보다는 가볍게 즐기고 금방 잊혀지는 밈을 소비하는 트렌드로 바뀝니다.




구독자 수 157만 명의 개그 유튜브 채널인 『피식대학Psick Univ』의 '05학번이즈백' 컨텐츠는 당시의 2000년대 중후반의 감성과 유행을 충실히 표현하여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 시절 20대를 보냈던 세대에겐 추억 팔이와 공감을, 그보다 더 젊은 세대에게는 당혹스러운 당시의 촌스러움과 홀로 2020년대를 살고 있는 '민수'와 냉동된 듯한 캐릭터들의 괴리감에서 웃을을 얻습니다.




WUee76fXHpOr31aP7lzy5ZVLMdE.jpeg
'05학번이즈백'의 주인공들. 좌측부터 정구, 재혁, 용남. 패션이 비범합니다.




'05학번이즈히어'는 '05학번이즈백'의 후속작 입니다. 주인공인 용남, 재혁, 정구는 2000년대 중후반 당시 껄렁껄렁하면서 나름 잘 나갔던 20대 청년에서, '신도시 아재들'로 진화합니다. 새로운 시리즈에서도 고증은 완벽합니다. '05학번이즈백'에서 당시 기준으로 최첨단 패션 아이템들만 골라 장착했던 이들은 현재는 2010년대 초반에 유행했던 스냅백과 깃을 세운 피케티, 그리고 조거 팬츠와 색동 나이키 운동화의 조합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05학번이즈백'에서 이들에게 최신 트렌드의 곡과 춤들은 자연스럽게 체화되는 것이었다면, 지금은 뒤쳐지지 않기 위해 '에스파'를 안다고 말은 하지만 딱히 취향은 아닌 듯한 어색함이 묻어 나옵니다. 예전엔 서울 한복판의 핫 플레이스들을 밤새 누비며 새로 생긴 가게들에만 갔었지만, 지금은 서울 교외의 '신도시'로 밀려나 언제든지 집에 빠르게 귀가할 수 있는 동네 호프집과 대형 아울렛 매장이 이들의 주요 스팟입니다. 과거엔 거침 없고 겁 없었던 청춘이었지만, 지금은 현실의 쓴 맛을 이리저리 맛보며 다들 묘하게 기가 죽은 듯한 모습입니다.




이처럼 '05학번이즈백'과 '05학번이즈히어' 모두 과거와 현재에 주변 어딘가에서 본 듯 한 인물들의 정확한 묘사가 공통점 입니다. 개인적으로 느끼는 두 시리즈의 다른 결을 꼽자면 '05학번이즈백'은 감성 추억 팔이에 비중을 둔 개그물이라면, '05학번이즈히어'는 특히 현재의 30대 후반~40대 정도라면 공감할 수 있는 공감 다큐의 면모를 더 갖추고 있다는 점입니다.




'05학번이즈백'에서 젊은 20대 청춘이었던 이들은 '간지'와 '최신 유행'이라는 공통된 관심사가 있었습니다. 서로 사소한 이야기 만으로도 웃음이 끊이질 않았으며, 과한 감정 표출로 때로는 거칠게 싸우기도 하지만 또 금새 화해하기도 합니다. '신도시 아재들'이 된 이들은 '자영업자', '월급쟁이', '정체모를 사업가'로 각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주요한 관심사는 각자의 먹고 사는 생계로 바뀌었으며, 당연히 직종이 달라 서로의 밥벌이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에 중간에 대화가 뚝뚝 끊기며 서로 자신의 폰만 바라볼 때가 많습니다. 대화의 주제에 따라 관심이 없는 사람은 겉도는 모습을 보입니다. 자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돌싱'인 정구가 겉돌며, 골프나 사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용남과 재혁은 큰 관심이 없습니다.




이처럼 공통된 관심사가 거의 없다보니 이야기는 결국 주식, 부동산 이야기로 귀결됩니다. 과거엔 주제에 대해 의견이 다르면 피 터지게 싸웠을 테지만, 이제는 뭐하러 굳이 서로 불편한 부분들을 건드리나 싶습니다. 용남과 재혁이 정치 이야기로 과열되자 정구가 '정치 얘기는 하지 말자'라고 다그치니 금새 화제가 전환됩니다. 이처럼 '05학번이즈히어'는 현실 30대 중후반~40대 들이라면 친구들을 만났을 때 20대 때와는 묘하게 다른 어색함을 제대로 묘사한 것이 특징입니다.




Wi5IZYhTUOJsFS_zvj7MsuUzK30.png
만나서 대화보다는 자신의 관심사가 나오는 폰 화면을 쳐다보는 용남과 재혁





'05학번이즈백'과 '05학번이즈히어'가 결합하면 비로소 청춘의 빛이 완벽하게 표현됩니다. 불안했던 20대 시절을 보내고, 내 밥벌이와 안락한 가정, 각종 소유물들을 가진 연령대로 넘어왔지만 20대의 반짝임은 점차 희미해져 갑니다. 작은 것에도 재미와 감동을 느꼈던 20대를 벗어나니 웬만한 일에도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큰 감흥이 더 이상 없는 칙칙한 상태가 됩니다. 이처럼 금새 식상해질 수 있는 한계가 있었던 추억 팔이 개그물에서 30대 이상의 세대들의 삶에 대한 애환과 길지도 짧지도 않는 지나간 세월에 대한 뭉클함을 아우르는 현실 다큐 컨텐츠로 새롭게 생명력을 불어넣은 점이 인상적입니다. 이와 같이 두 시리즈의 성격이 크게 다르기 때문에 '05학번이즈백'을 시청하지 않은 분들이라도 '05학번이즈히어'를 무난하게 즐길 수 있습니다.




--------------------------------------------------------



링크의 브런치에 오시면 더욱 많은 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 손금불산입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4-03-26 10:50)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 게시글로 선정되셨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교자만두
22/08/08 20:25
수정 아이콘
헐..!
이 두개 엄청열심히 봤습니다. 딱 그시대이기도 하고.. 또 딱 그시대이기도 하고. 요새 매주 기다립니다. 이거 보면서 20대의 왁자지껄함이 그립긴해요.
라울리스타
22/08/08 20:26
수정 아이콘
사실은 피지알에 가장 최적화된 컨텐츠가 아닐까 합니다.....흐흐
22/08/08 20:36
수정 아이콘
미쳤습니다
처음에 05학번은 그냥 옛 아이템들만 사용하던 재미요소였는데
05 이즈 백 부터 스토리에 아이템을 녹이니까 옛생각이 너무 나고 제 예전의 열정들이 그리워졌는데
05 히어가 되니 진짜 재밌게 보고 아련해집니다 삶이 녹아있어요
휘황형 이라도 자기 길을 걷고 있기를 기원합니다 크크
소환사의협곡
22/08/08 20:45
수정 아이콘
(수정됨) 응답하라 1997이 2012년 작품으로 15년 전 감성을 담아내 성공했었거든요.

지금 우리도 17년 전 2005년이 그립고 아련해질 수 밖에 없는 거 같아요.
22/08/08 20:56
수정 아이콘
17년 전...
소환사의협곡
22/08/08 20:58
수정 아이콘
어 그러네요 크크 수정했습니다
노래하는몽상가
22/08/08 20:54
수정 아이콘
신도시 아재들도 디테일이 살아있어서 놀랐네요
그리고 피식대학이 잠깐 바짝하고 훅 사라질줄 알았는데
노력하는게 보이고 그덕에 계속 롱런하고 있는거같습니다
오늘처럼만
22/08/08 21:12
수정 아이콘
도요다부장님 보면 진짜 눈썰미 끝내준다는 생각을...크크
이혜리
22/08/08 21:19
수정 아이콘
낄낄, 05학번은 웃습니다.
밀로세비치
22/08/08 21:20
수정 아이콘
요즘 가장 재미있게 보고있습니다 너무 즐겁게 보고있지만 한편으로는 좀 쓸쓸하기도 하더라구요
jjohny=쿠마
22/08/08 21:25
수정 아이콘
06학번인데, 당시 일반적인 대학가/패션/술자리 문화에 워낙에 무지했던 터라 (정말 교회만 다녔긔...)

05학번이즈백은 사실 공감포인트가 거의 없었습니다. (연기자들의 연기와 설정놀음이 재밌어서 보기는 했지만)

05학번이즈히어: 신도시 아재들 파트로 넘어오면서 저에게는 훨씬 와닿는다는 느낌입니다. 멀티버스 접근방식도 마음에 들고요.
22/08/08 21:26
수정 아이콘
동대문편으로 입문했다가 어느새 구독하고 다 챙겨보고있는...
22/08/08 21:31
수정 아이콘
07학번인데 재미있네요. 확실히 그때는 패션들이 투머치였죠.
일본 스트릿패션에서 강하게 영향을 받은 듯한 날렵하면서도 화려한 선이나 색깔들, 헤어스타일도 샤기컷에 바람머리에 펌까지...게다가 스키니도 유행해서 다들 바지 줄이고 다니고 크크크

대학교 앞에 노래방이 하나 있었는데 1:1 등신대 에일리언 오브젝트가 전시된 위에서 언급하신 세기말 노래방과 거의 흡사했습니다. 갑자기 그립네요... 정말로 대학이 그리운게 아니라 그 말랑말랑했던 시절이 그리워요.
돌아온탕아
22/08/08 21:32
수정 아이콘
피식대학은 특정 시대,연령대의 인물상들 캐치해서 패러디하면서도 비웃음거리로만 소비하지 않고 캐릭터들 정감가게 만드는 데 도가 튼거 같습니다.
05학번 이즈 히어도 처음엔 마블스냅백,불독방향제 보고 낄낄거리다가 에피소드 진행될수록 짠해지더라고요.
모든 시리즈 통틀어서 유일하게 대놓고 비호감 포지션을 담당하고 있는게 김민수 크크
diamondprox
22/08/08 21:38
수정 아이콘
b대면데이트 최준과 임플란티드키드가 그렇게 리터럴리 사랑받을줄은... 진짜 대박이죠
22/08/08 22:01
수정 아이콘
구박받던 김민수가 유명인이 되어 형누나들에게 무례하게 해도 쿠사리를 안먹는중 크크
及時雨
22/08/09 00:19
수정 아이콘
김민수!
파쿠만사
22/08/08 22:10
수정 아이콘
이채널에 다른 컨텐츠인 한사랑 산악회에 뒤늦게 빠져서 그거 정주행 중인데 이것도 한번 봐야겠네요 흐흐
及時雨
22/08/09 00:18
수정 아이콘
이제 쿨제이라는 이름도 다 까먹고 모두들 조정구라고 부르게 되는 귀신 같은 연기력...
Miles Davis
22/08/09 00:30
수정 아이콘
저 세대는 아니라서 플스방 에피소드에서 옛날 축구 선수 말하는 거 말고는 공감이 그렇게 가지 않았는데 확실히 재미있으면서 쓸쓸함을 느끼게 만들더군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3587 다 함께 영차영차 [31] 초모완11422 22/09/14 11422
3586 '내가 제국을 무너트려줄게': 아즈텍 멸망사 상편 [36] Farce11887 22/09/13 11887
3585 구글 검색이 별로인 이유 (feat.정보를 검색하는 법) [63] Fig.112065 22/08/31 12065
3584 아즈텍 창조신들의 조별과제 수준 [29] Farce16268 19/04/10 16268
3583 (약스포)<수리남> - 윤종빈의 힘 [96] 마스터충달15631 22/09/10 15631
3582 구축아파트 반셀프 인테리어 후기 (장문주의) [63] 김용민15519 22/08/29 15519
3581 여러분은 어떤 목적으로 책을 읽으시나요? (feat.인사이트를 얻는 방법) [23] Fig.115117 22/08/27 15117
3580 너는 마땅히 부러워하라 [29] 노익장14979 22/08/27 14979
3579 혼자 엉뚱한 상상 했던 일들 [39] 종이컵13052 22/08/26 13052
3578 롯데샌드 [25] aura13862 22/08/26 13862
3577 헌혈 후기 [37] 겨울삼각형12970 22/08/24 12970
3576 [사회?] 1968년 어느 한 엘리트 노인의 아파트 피살 [21] comet2112626 22/08/24 12626
3575 댓글잠금 추천게시판 운영위원 신규모집(~4/30) jjohny=쿠마21005 24/04/17 21005
3574 무지의 합리성 [23] 구텐베르크14324 22/08/24 14324
3573 [테크히스토리] 회오리 오븐 vs 레이더레인지 [16] Fig.113259 22/08/22 13259
3572 교회의 쓸모(feat. 불법주정차) [163] 활자중독자14324 22/08/21 14324
3571 국가 기밀 자료급인 홍수 위험 지도 [45] 굄성14758 22/08/19 14758
3570 스티브 유 - 그냥 문득 떠오른 그날의 기억 [29] 겨울삼각형4304 22/08/18 4304
3569 정권의 성향과 공무원 선발 - 일제 패망 전후의 고등문관시험 시험문제 [19] comet2113090 22/08/18 13090
3568 부모님과 대화를 시작해보자! [31] 저글링앞다리12880 22/08/17 12880
3567 "그래서 누가 칼들고 협박했냐" [158] 노익장14027 22/08/16 14027
3566 방콕에서 자고 먹고 [43] chilling12888 22/08/16 12888
3565 광복절맞이 뻘글: 8월 15일이 정말 "그 날"일까요? [41] Nacht12083 22/08/15 12083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