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21/10/04 22:18:50
Name onDemand
Subject 난제군 난제야. 이걸 어떻게 푼담. (수정됨)
1.
담배불에 불을 붙인다. '칙' 라이터에서 나는 소리가 좋다. 눈을 살짝 감고. 크게 한모금 삼킨다. 하. 나쁘지 않다. 살랑살랑 움직이는 담배연기를 멍하니 쳐다봤다. 일렁이는 담배연기는 계속 봐도 질리지가 않는다.
옆에서 같이 담배를 피우던 형이 나를 부른다.

'야, 우리가 물리해석을 평생 하면서 이런 담배연기 하나 제대로 풀어 낼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냐'

스쳐가는 질문에 깊게 생각에 잠긴다. 담배연기를 유동해석으로 풀어낸는 것은 난제다. 어려운 문제다. 담배연기는 연소 화학반응식이 들어간다. 고온 반응이고 또한, 난류성 기체다. 또 연기와 기체가 모두 들어가니 다상유동이다. 이중 하나만 들어가있어도 풀기가 어렵다. 그런데 세개나 들어간다.
그래서 내가 답한다.

'아니요. 못풀거같은데요.'
'그렇지? 그럼 이런 연구는 피해야 졸업 하겠지'

생각에 잠긴다.

'어려운거 하나만 들어가있는거 해요. 형'

졸업은 해야 할 것 같다. 그러면 어려운 건 피해야겠지.
또 연기를 한모금을 들이킨다.



2.
담배를 처음 핀 순간을 추억한다. 대학생. 뭐랄까. 복잡한 심정이었다. 뭔가 억울한 날이었다. 울고는 싶은데 변명거리가 없는 날이랄까. 우산을 안가져 온 날에 빗속에서 새똥을 맞았다. 그것도 아껴 입던 옷을 입고왔는데. 양말은 이미 젖어서 축축했다. 짧은 연애도 끝났고, 헤어지느라 과제는 제출기한을 맞추지 못했다. 사소한 것 하나 제대로 풀리는 일 없는 날이었다. 하지만 이런건 사소한 거니까. 넘어가야지. 사소한 것이 쌓여 가슴은 아려오는데 눈물은 나오지 않는 그런 날에 담배를 처음 물었다. 얇은 담배로 시작했다. 물론 입담배로.

그 날,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은 쉬운일이고, '눈물을 흘리는 것'은 난제라고 생각했다. 어려운 일이다. 가슴은 아려오는데 변명거리가 없는 날. 난 어찌 할 바를 찾지 못한다. 그저 담배에 불을 붙이고, 담배연기로 최면을 걸면서 생각을 멈췄다. 변명거리를 찾는 것 보다. '칙'소리를 내며 타들어가는 것을 보는 것이 더 좋았다. 사소한 것들이 모두 다 타들어 갔다.



3.
대학생활은 부족했다. 모든게 조금씩 부족했다. 받은 용돈을 나름 한푼한푼을 아꼈다. 부모님께 용돈을 달라고 하는 내가 부끄러웠다. 대학교 다닐 때 이따금 형이 내 자취방에 놀러온 적이 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수업이 있다고 했다. 학교랑 가까운 우리집에서 자고 대학원 수업을 들으러 간다고 했다. 신기했다. 아침수업도 다 듣고. 역시 대단한 사람이다. 직장도 있는데 학교도 다니고. 학점도 높고. 정말 공부 할 사람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저녁은 먹었으니 집에서 맥주나 한잔 하자고 한다. 편의점에 들어갔다. 형이 바구니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맥주코너로 갔다. 화려하다. 언제부터 이렇게 다양한 맥주가 한국에 들어왔을까. 입맛을 다신다.

'이 형이 말야. 상여 탔거든. 먹고싶은 거 다 담아. 빨리.'
허세 가득한 말이 멋있어 보였다.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말처럼 들렸다. 나는 쭈뼜거렸다. 익숙한 맥주로 두캔정도 집어들었다.
그러자 형이 답답한 눈초리로 날 쳐다봤다. 그리고 날 재촉했다.

'야, 더 담아. 그러면 여기서 부터 여기까지 종류별로 하나씩 담자'
그러면서 맥주코너 한쪽 끝부터 다른쪽 끝까지 가리켰다.

편의점 바구니에 열캔이 좀 넘는 맥주가 담겼다. 신기했다. 그 순간 난 왜 눈물이 났을까. 슬프지도 않은데 말이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나온 눈물을 몰래 훔쳤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같이 집에 갔다. 그리고 어려운 일을 쉽게 해냈다고 생각했다.
비어있던 냉장고가 가득 찼다.



4.
가면의 고백이라는 책을 읽다가 비애(悲哀)라는 단어를 한자로 접했다. 처음으로. 슬플 비(悲)에 슬플 애(哀). 한 글자도 슬픈데 두 글자가 모두 슬프면 도대체 얼마나 슬픈 단어란 말인가. 슬플 비(悲)는 아닐 비(非)에, 마음 심(心)으로 이루어졌다. 非는 어긋난다는 뜻이다. 心은 몸의 중심으로 마음이 머무는 곳이다. 마음이 어긋남으로 인해서 슬픈 것. 자신의 감정에 조금 더 솔직해 지는 것 만으로도 마음의 어긋남을 줄여준다고 한다.되는대로 가면을 쓰고 있는 일상을 보내는데, 솔직한 내면을 들여다 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조금 더 내 마음에 소리를 기울이며 솔직해지는 것은 연습이 필요한 일이다.

담배를 처음 피던 순간을 추억한다. 풀지 못하고 태워버렸던 일들. 사소하다고 생각했던 일들. 이런 사소한 것들을 모아서, 조금은 덜 사소한 것들로 만드는 방법을 찾는, 이런 어려운 일은 연습이 필요한 일이다.

* 손금불산입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3-09-22 01:20)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 게시글로 선정되셨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21/10/04 22:25
수정 아이콘
제가 참 좋아하는 스타일의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onDemand
21/10/05 09:10
수정 아이콘
누군가가 좋아할만한 글을 쓸 수 있는건 고마운 일 같습니다.
AaronJudge99
21/10/04 23:30
수정 아이콘
대학원은...안가는걸로....



농담이고요..잘 읽었습니다
도라곤타이가
21/10/05 00:00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표현하기 쉽지 않은 삶의 토막을 이렇게 술술 목구멍에 넘어가게 좋게 써주시는 글 참 맛있습니다.
onDemand
21/10/05 22:13
수정 아이콘
최근들어 주변에 힘들어 하는 지인들이 많은데, 사실 들어보면 큰 이유가 아니라 사소한 것이 쌓여서, 쌓인 것을 털어놓을 곳이 없어서 그런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쓴 글이고 씁쓸하지 않게 쓰려 했는데, 맛있게 드셔주시니 감사합니다.
아비니시오
21/10/05 09:15
수정 아이콘
물리해석이면 FEM쪽이려나요. 현실세계를 돌리는 컴퓨터가 있다면 엄청난 성능이겠죠..
onDemand
21/10/05 13:00
수정 아이콘
FEM 맞습니다. 아직은 조그만 현실도 어렵네요.
21/10/05 11:15
수정 아이콘
[이풍당당]
감성터지는 글 감사합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3395 가볍게 쓰려다가 살짝 길어진 MCU 타임라인 풀어쓰기 [44] 은하관제4399 21/12/07 4399
3394 고인물들이 봉인구를 해제하면 무슨일이 벌어지는가? [66] 캬라10286 21/12/06 10286
3393 [역사] 북촌한옥마을은 100년도 안되었다?! / 한옥의 역사 [9] Fig.14285 21/12/06 4285
3392 굳건함. [9] 가브라멜렉3587 21/12/02 3587
3391 로마군의 아프가니스탄: 게르마니아 원정 [57] Farce4399 21/12/01 4399
3390 올해 국립공원 스탬프 마무리 [20] 영혼의공원4071 21/11/29 4071
3389 꽤 행복한 일요일 오후였다. [15] Red Key3797 21/11/23 3797
3388 [도시이야기] 경기도 수원시 - (3) [12] 라울리스타3310 21/11/16 3310
3387 신파영화로 보는 기성세대의 '한'과 젊은세대의 '자괴감' [23] 알콜프리4992 21/11/15 4992
3386 <1984 최동원> 감상 후기 [23] 일신5265 21/11/14 5265
3385 김밥 먹고 싶다는데 고구마 사온 남편 [69] 담담11322 21/11/11 11322
3384 [스포] "남부군" (1990), 당황스럽고 처절한 영화 [55] Farce4097 21/11/10 4097
3383 나의 면심(麵心) - 막국수 이야기 [24] singularian3356 21/11/05 3356
3382 신해철, '해'에게서 '소년'에게 (1) [26] 글곰3979 21/11/03 3979
3381 일본 중의원 선거에 관련된 몇 가지 이야기들 [78] 이그나티우스6785 21/11/03 6785
3380 [NBA] 영광의 시대는? 난 지금입니다 [28] 라울리스타6561 21/10/22 6561
3379 [도로 여행기]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이 올라가는 도로, 만항재와 두문동재 [19] giants4766 21/10/30 4766
3378 [역사] 이게 티셔츠의 역사야? 속옷의 역사야? / 티셔츠의 역사 [15] Fig.13761 21/10/27 3761
3377 우리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우리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우리가 [12] Farce3575 21/10/24 3575
3376 누리호 1차 발사에서 확인 된 기술적 성취 [29] 가라한7490 21/10/21 7490
3375 [도시이야기] 인천광역시 서구 [41] 라울리스타5899 21/10/19 5899
3374 [ADEX 기념] 혁신적인 변화의 시기를 맞고 있는 헬리콥터 이야기 [22] 가라한5536 21/10/18 5536
3373 [역사]청바지가 500년이나 됐다구?! [15] Fig.16292 21/10/18 6292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