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와 처음 만난 것은 OT보다도 빨랐던 대학교 새내기 만남 때였다. 2월에 공식 OT가 예정되어 있었지만 합격의 기쁨을 누리고 싶었던 새내기들은 자체적으로 인터넷 카페를 만들어 만남을 주선했는데 집합 장소는 대학교 인근의 한 고깃집이었다. 음식점에 들어가자마자 설레는 대학교 새내기 복장 치고는 어울리지 않은 시커먼 패딩을 뒤집어 쓴 순박한 인상의 남자애가 멀거니 앉아있었는데 그것이 C와의 첫 만남이었다. C 못지 않게 순박한(?) 인상을 가진 나는 끌리듯이 C의 옆에 자연스럽게 앉게 되었고 OT 장소로 향하는 버스에서도 내 옆자리는 C였다. 그 시작이 CC도 못하고 졸업한 우리 인연의 시발점이었다고나 할까.
순박한 인상과 달리 C는 강남의 명문고교를 졸업한 강남 키즈로 출신과는 다르게 매우 평범하고 어찌보면 없어보이는 패션으로 캠퍼스를 활보하고 다녔다. 다만 내 성격과는 큰 차이점이 있었는데 사람 대하는 것을 꺼리던 나와 달리 C는 여러 동아리를 비롯하여 종횡무진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태생이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으며 술자리를 만들거나 모임을 만들어 사람을 모으는 것에 익숙했다. 그 때 C의 권유로 다양한 사람들도 만나보고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도 참여하곤 했는데 그 점이 시간이 흐르며 서로의 미묘한 엇갈림을 만들어냈다.
그래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변변찮은 친구 하나 없었던 나에게 C는 나름대로 인생 최고의 절친이었다. 나의 아웃사이더형 성격 때문에 C는 간간히 불만을 토로하곤 했다. 개강 중에는 그렇게 친하던 사람이 방학이 되면 연락이 끊기고, 절친 같으면서도 마음을 다 열지 않는 것 같다며 서운함을 표시하기도 했다. 그래도 우리는 나름 잘 지냈다. 어느 정도였냐면 C가 먼저 군입대를 했을 때 나도 C와 복학 후 같이 학교를 다니기 위해 예정에 없던 입대를 급하게 준비해 군대에 갔다.
나는 C의 수많은 친구 및 지인 중에 하나였겠지만 나에게 있어 C는 그래도 고맙고 나와 아주 친한 존재였다. C를 매개점으로 복학 후 다른 후배들과도 어울릴 수 있었고 C가 빠진 자리에서 나 혼자 말을 할 때면 무언가 어색해지곤 했다. 그리고 약속이나 한 듯 우리 둘은 나란히 졸업 첫 해에 취직에 실패했다.
졸업 후에 서서히 서로의 길을 향해 가면서 조금씩 멀어짐이 시작됐다. 졸업 이후 가을 쯤 C가 학교에서 같이 공부를 하자고 제안해왔지만 취직 준비를 제대로 안하고 있던 나에게 그것은 오히려 부끄러운 선택이었다. 난 그 이후로 4년여를 더 방황했고 졸업 2년차에 번듯한 직장에 합격한 C는 독립한 성인으로서 자신의 생활을 잘 조직하여 만들어나갔다.
C가 선택한 것은 뮤지컬이었다. 직장인들을 중심으로 뮤지컬 동호회를 만들었고 실력 있는 성악 전공자도 단원으로 가입시켰다. 활동비를 걷어 근사한 연출가에게 무대 조언을 들었고 정식 공연도 여러 번 올렸다. 취직을 아직 하지 못한 나에게 직장 생활을 병행하며 동호회 활동까지 멋지게 해내는 C는 나에게 있어 동경과 동시에 시기의 대상이었다. 그렇게 내 마음 속에 잠재되어있던 열등감은 그 이후 C와의 관계에 영향을 많이 미쳤다.
난 오랜 동안의 백수와 취업 준비 시간을 지낸 끝에 오랜 서울생활을 뒤로 하고 지방행을 선택했고 C와의 거리는 심리적일뿐만 아니라 물리적으로도 많이 멀어져버렸다. 그런 C와 다시 가까워질 계기가 있었으니 나의 취직 2년차에 C가 나를 자신이 준비하는 공연의 단원으로 초청한 것이었다. 명분은 남자 단원이 부족하고 자신과 연연이 있었던 사람들과 공연을 준비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난 망설임과 열등감을 뒤로 하고 주말을 투자하여 뮤지컬이라는 세계에 잠깐이나마 뛰어들었다.
뮤지컬 활동은 재미있을 때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부담스럽고 불편했다. 가뜩이나 낮은 자존감으로 빌빌거리던 내가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공연을 한다는 것은 뭔가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불편했고 연습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피드백을 해주어도 나 자체를 비난하는 느낌이 들었다. 겨우 공연은 마쳤지만 그런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왜 이렇게 인싸들이 많은지. 공연 이후로도 술자리를 만들고 단톡방에서 활발하게 소통하는 단원들을 보면서 하루 빨리 단톡에서 나가고픈 마음만 가득했다.
이를 계기로 나 자신에 대한 깊은 이해는 모든 선택에 있어 필수적인 선결 과정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뮤지컬은 나와 맞지 않았다. 난 혼자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토론을 하는 쪽이 오히려 어울렸다. 나 자신을 속이는 연기는 할 수 있어도, 주어진 배역에 맞추어 공개적으로 연기하는 것은 힘이 들었다. 나름대로 즐거우면서도 항상 부담된다는 양가 감정을 마음 속에 싣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뮤지컬 활동이 안 좋은 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활발한 사람들 속에 계속 부대끼다 보니 그 기간만큼은 나도 더 에너지를 내어 직장 생활을 했다. 논리적으로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사람은 분명히 사람 속에서 받는 에너지가 있다. 다만 난 그런 에너지를 받기 전에 나 스스로에 대해서 자꾸 생각하느라 그런 기회를 자꾸 놓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전체적인 일상 생활이 낮은 에너지 속에서 소모되는 일이 반복된다. 나쁜 것이 아니라, 나와 맞지 않을 뿐이다.
다시 C 얘기로 돌아오면 이 뮤지컬 활동을 계기로 C와는 더 멀어지게 되었다. C는 동호회 회장으로서 동호회를 관리하기에 바빴다. 둘이 마주 앉아 맥주라도 한 잔 걸치기에는 C의 관심사는 너무 넓었다. C는 대학시절만큼 나를 여유있게 대하지 못하게 되었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서로의 간극을 키운 일이 더 있다. 결혼을 하게 된 나는 10명이 넘었던 뮤지컬 단원 중 3명에게만 개인톡을 보내 결혼식에 초대했다. 나도 내 행동이 조금 이상해보인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냥 아는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청첩장을 보내기보다는 내가 의미있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내 결혼식장을 채워주길 바랬다. 하지만 단원들은 그런 나의 행동을 이상하고 서운하게 생각했고 C 역시 마찬가지였다. C는 내 결혼식에 오긴 했지만 식을 올린 이후에는 거의 연락할 일이 없게 되었다.
결혼 이후 육아를 시작하며 바빠지면서 나는 더욱더 (원래도 없었던) C와 연락할 계기가 없어져버렸다. C는 아직 결혼은 하지 않고 살고 있다고 한다. 코로나19가 번지면서 뮤지컬 활동은 접었을텐데 어떻게 사나 가끔씩 궁금하기는 하다. 그러나 따로 연락은 하고 살지는 않는다. 시간이 흐르며 확인했던 서로의 간극을 둘 다 부인할 수는 없으니까. 지금으로서는 C가 나중에 혹 결혼을 하더라도 연락이나 될련지 모르겠다. 그래도 대학교 생활 동안 나름의 추억을 선사해준 C가 앞으로도 잘 살길 빈다. 오늘, 이유 없이, 그 친구가 생각난다.
* 손금불산입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3-08-11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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