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8/03/04 17:39:34
Name 헥스밤
Subject 더 늦기 전에, 이미 늦어버린 은혜를 갚아야지. (수정됨)
책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간간히 책장을 정리하는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사두고 읽지 않은 책들이 태산이었다. 나는 왜 읽지도 않을 책을 이리도 샀을까. 이제라도 읽게 되었으니 상관없는 일이다. 책 한 권을 골라 펼친다. 익숙하지 않은 유명하지 않은 작가다. 작가 소개를 흘낏 본다. 익숙하고 유명한, 하지만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 그럼에도 제법 잘 쓴다고 생각하는 작가의 핏줄이었다. 아마 그런 이유로 이 책을 샀을 것이다. 그렇게 조금은 필요 이상의 기대감을 가지고 읽기 시작한다. 소설은 기대 이상이었다. 피의 힘일까. 이내 나는 소설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다 읽고 작가에 대해 이것저것 찾아보았다. 그는 몇 년 전에 타계했다. 아쉬운 일이다. 물론 작가가 살아있다고 해서 내 삶이 변할 것도 없고, 나와 작가 사이의 관계가 변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어딘가 아쉬운 일이다. 나는 미래를, 차기작을 기대할 수 없다. 데뷔한 지 20년 된, 당장 내일 은퇴 선언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아티스트의 팬으로 살아간다는 건, 혹은 몇몇 요절한 아티스트들의 팬으로 살아왔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좋아할 수 있을 때 좋아하고, 기대할 수 있을 때 기대하고, 갚을 수 있을 때 갚아야 한다.

작가와 나를 이어준 사람을 확인한다. 번역이 좋거나 나쁠 때 번역자를 확인하는 습관이 있는데, 이번에는 전자였다. 물론 나는 소설의 원문을 읽어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어로 번역된 문장으로부터 추론되는 원문 문장의 정서는 굉장히 까다롭고 미묘한 느낌이었다. 이야. 대단한데. 누가 번역했지. 앗.

그렇게 나는 십 몇 년 전의 부채와 마주하게 되었다.

십 몇 년 전 이맘때쯤, 그러니까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하기 전 사이의 짧은 시간, 해외여행을 가게 되었다. 일종의 대입 축하 여행 같은 것이었다. 첫 해외여행이었다. 그리고 여행지에는 핏줄과 친분이 복잡하게 얽힌-그러니까 친척의 친구나 친구의 친척이라고 해 두자-한 분 살고 계셨다. 어찌저찌 일주일 간 그 집에서 머물게 되었다. 그 무렵의 일들이 그렇듯, 자세한 내막은 기억나지 않는다.

내 친구의 조카가 서울에 놀러오며 내게 몸을 의탁하려 한다면? 물론 그럴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밤에 출근하고 새벽에 들어와서 대낮에 일어나는 바텐더에게 사람을 맡길 얼간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여러모로 그다지 품행이 단정하다거나, 타인에게 신뢰를 주는 타입의 인간이 아니니까. 그래도 만약에 만약에, 친구 중 누군가가 조카랍시고 스무 살짜리 코찔찔이를 들이밀며 내게 잠시 맡겨두려 한다면? 받아주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적절하게 아침을 챙겨준다거나, 본인의 애인과 함께 근사한 곳에 데려가 저녁을 사 준다거나 하는 호의를 베풀지는 않을 것이다. 설령 그게 실제로 내 피와 이어진 조카라 할지라도, 아마도. 하지만 나는 그런 호의를 받았다. 그리고 잊고 있었다. 까맣게. 후에 몇 번 뵈었다. 거기서 감사의 인사 정도는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 나는 내가 진 신세의 무게를 몰랐고, 이제 나는 당시 그분의 나이 정도가 되어 좀 더 무엇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래서 나는, 민망해졌다.

이 모든 호의와 민망함을 어떻게든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쩌지. 상황이 좋지 않다. 뭐, 복잡한 건 아니다. 그저 돈이 없다. 뭐, 벌이는 최악을 간신히 면하고 있지만 치워야 할 빚이 너무 많다. 그런 것이다. 이십대가 삼십대에게 할 수 있는 보은이라면 감사의 말이나 가벼운 선물 정도면 될 것이다. 일 년 정도 연체한 보은이라면 괜찮은 식사나 적절한 선물 정도면 될 것이다. 하지만 삼십대가 오십대에게, 십 몇 년을 묵힌 보은이라면, 그만한 무게를 지녀야 할 게 아닌가. 이건 마음이나 말 따위로 갚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갚을 수가 없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당장 갚아야 할 돈들이 신세들이 태산이다. 당장 나는 내 곁에 있는 일상적으로 만나는 소중한 사람들에게도 폐를 많이 끼치고 있다. 자원이 있다면 일상적으로 접하는 그들에게 먼저 감사와 삶을 돌려야 할 것이다. 효도라거나 하는 것도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오래 된 은혜의 이자는 계속 쌓여갈 것이고 내 마음은 그걸 감당할 자신이 없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상황 자체도 그다지 유쾌한 건 아니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다 나와 그분을 이어주는 사람에게 연락을 했다. 그렇게 그분의 안부를 묻고, 연락처를 받았다. 이런. 그분은 내가 다음 출장을 생각하는 곳 근처에 살고 계셨다.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이거, 다음 출장 때 반드시 처리해야 할 문제가 되었군. 이걸 처리하지 못하면, 출장을 갈 수 없을 것 같아.

천우신조, 그분께서 곧 짧게 방한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좋아. 내 홈그라운드에서 처리하자. 나는 그렇게 나쁜 바텐더는 아니고, 내 바도 어찌저찌 코리아 베스트 바 100의 말석에 이름을 올렸으니까. 좋은 술을 멋지게 대접해야지. 그렇게 손쉽게 십 몇 년 묵은 보은을 해치워버리자. 조금 양심의 가책이 있지만, 역시 양심보다는 실재가 우선하는 것 아닌가.

대충 고민을 그렇게 정리하고 오늘에서야, 방금 전에, 인사를 드렸다. 선생님. 저는 누구누구입니다. 어쩌고 저쩌고. 하여 감사합니다. 하는 카톡을 보냈다. 그리고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민망함을 떨쳐내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동안 카카오톡에 1이 없어졌다. 그분에게 답이 온 것이다. 그분께서는 아쉽게도 이번 방한 일정은 스케쥴이 가득 차 있으니, 이쪽 올 일 있을 때 한번 보자고 이야기하셨다. 그래, 차라리 이 편이 홀가분하고 확실할 것이다. 나는 다음 출장에서-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근시일 내에-신세를 진 그 분께, 그리고 이제는 남편이 된 그분의 애인에게, 아주 멋진 저녁 식사를 대접할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이미 늦어버린 은혜를 갚아야지.

* 라벤더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8-07-13 17:19)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호풍자
18/03/04 17:41
수정 아이콘
(수정됨) 아... 은혜를 잊고 사는 적이 많은데..가슴 먹먹하네요. 저도 그런분들 찾아봬야 할텐데요.
글쓴이 분께서는 은혜 받은 분과 만나서 좋은 시간 가지시길 빕니다.
루체시
18/03/04 17:49
수정 아이콘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사과든 감사든 참 하기가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좋은 글 감사합니다.
Jon Snow
18/03/04 17:50
수정 아이콘
좋은 마음 본받고 싶네요
나중에 꼭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라겠습니다
18/03/04 17:52
수정 아이콘
글 읽고 나니 저도 옛 추억이 떠오르네요ㅠ 더 늦기 전에 저도 감사 인사 드려야겠습니다...
18/03/04 17:53
수정 아이콘
글쓴이의 좋은 마음이 저에게도 나눠지는것 같네요

저도 한번 돌아보게 됬습니다. 감사합니다
호놀롤루쿠키
18/03/04 18:45
수정 아이콘
매번느끼지만 글이 정말 좋고 글쓴 분도 좋은 분인게 느껴집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보로미어
18/03/04 21:34
수정 아이콘
글을 너무 잘 쓰셔서 글쓰는 일과 관련된 일을 하시는 줄 알았는데 아니였군요.

아 저도 최소한 남들에게 베풀고 살지는 못할지언정 받은 은혜는 다 갚으면서 살아야 할텐데
부모님 생각이 많이 나네요.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WhenyouinRome...
18/03/04 22:17
수정 아이콘
저도 그렇네요.. 이제야 은혜들을 조금씩 갚고 있습니다.. 잊지않는다는것. 그리고 꼭 갚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것. 그리고 실천하는것... 정밀 중요한 것 깉이요..
Quantum21
18/03/05 03:49
수정 아이콘
피지알에 들어오는 가장 큰 이유가 간간히 글빨 좋은 분들을 만나기 때문이죠. 눈팅이라도 꾸준히 하면 어깨 넘어로라도 좀 배우지 않을까 싶은데 세월만 유수와 같네요.
18/03/05 22:30
수정 아이콘
글쓴 분에게 반할 것 같습니다. 언제 같이 석양이나... 는 농담이고 글도 좋고 내용도 좋네요. 잘 읽었습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3780 최고의 스마트폰 자판은 무엇인가? [158] 반대칭고양이16615 23/09/23 16615
3779 [2023여름] 여름에는 사진을 찍지 않는 사람의 사진 [8] 시무룩11790 23/09/13 11790
3778 [PC] [발게이 3] 발게이 세계관에서 불멸자나 신이 되는 방법 [21] 통피12137 23/09/08 12137
3777 [2023여름] 그냥 사진들 [15] 뿌루빵11280 23/09/12 11280
3775 [2023여름] 여름나라 사진사의 여름사진 모음 [15] 스타슈터11371 23/09/12 11371
3774 [2023여름] 플립 5와 함께한 여름 [31] 及時雨11410 23/09/08 11410
3773 9개월의 이야기 [12] 요슈아12837 23/09/09 12837
3772 애플망고주스와 아인슈페너 [27] ItTakesTwo12809 23/09/06 12809
3771 [역사] 치커리 커피를 아시나요? / 커피의 역사 [22] Fig.112473 23/09/06 12473
3770 조금만 관대하게 [29] 밥과글12544 23/09/01 12544
3769 내 아이가 학교폭력을 당했을 때 대처법 [37] 르깝15133 23/08/29 15133
3768 일본의 MRJ 제트 여객기 개발의 교훈 [26] singularian15433 23/08/26 15433
3767 디즈니 좋아하세요? [28] 무무보리둥둥아빠14707 23/08/26 14707
3766 [역사] 산타마리아노벨라 - 이탈리아의 역사 800년이 담긴 향 [23] Fig.114336 23/08/23 14336
3765 오랜만에 함께해요 음식여행.jpg [23] 이러다가는다죽어14558 23/08/23 14558
3764 좋았던 그 때, 그들만의 [13] 상록일기12211 23/08/16 12211
3763 [풀스포] 차라리 신파였으면 나았을 갈팡질팡: 콘크리트 유토피아 [67] Farce16592 23/08/12 16592
3762 세계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는 농작물들 [35] VictoryFood16008 23/08/11 16008
3761 그녀가 울면서 말했다. [28] ItTakesTwo15365 23/08/10 15365
3760 [LOL] 52세 할재(?) 플레 찍기 도전 성공 [45] 티터15114 23/08/10 15114
3759 [기타] e스포츠 명예의 전당 일반인 1호 기증자가 되었습니다 [6] Periodista15999 23/08/03 15999
3758 [역사] 산업혁명이 만든 기네스, 과학혁명이 만든 필스너우르켈 [27] Fig.115316 23/08/10 15316
3757 오래 준비해온 대답 [17] 레몬트위스트15099 23/08/08 15099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