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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26 17:39
이론적으로 통계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 유일하게 우상향하는 지표가 노력 딱 하나인거 아시나요?
나머지는 다 평균값과 운에 수렴해버렸는데 유일하게 노력하나만이 시간이 지날수록 우상향이었습니다. 그러니깐 위험은 없고 운은 노력의 여부와 상관없지만 노력은 최대한 많이 그리고 시간을 많이 들이면 무조건 이득이죠 그 양이 점점 줄어들고 있긴 하지만
21/03/26 17:42
노력의 당위는 없습니다. 자유의지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요.
스스로 생각하기에 노력할 필요가 있으면 하는거고 없으면 안하는거죠. 모두에게 일괄 적용되는 노력할 이유 같은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21/03/26 17:43
자유의지가 없는 결정론적 세계관이라고 해도 글쓴분의 능력으로는 그 결과(혹은 초기상태)를 알 수 없습니다.
또, 후회라는 감정이 헛된 것이라고 해도 그 후회를 다음 의사결정에 참고하실 수 있기에 님의 제한된 사고능력 하에서 의미가 있죠. 님은 과거의 경험과 지식을 종합해서 노력을 하실지 안 하실지 미리 정해진 결단을 내리실 겁니다. 님이 절대로 알 수 없는 요인들에 의해 미리 정해져 있는 결단을요. 가령 제가 지금 스마트폰을 두들겨서 이런 댓글을 다는 것도 미리 정해져 있었을 터인데 님은 모르셨듯이요. ‘인간은 우주의 먼지인데 왜 노력해야하냐’ 보다는 훨씬 논파가 쉬운 세계관입니다. 노력으로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말은 모순이죠. 노력도 운명의 일부니까요. 여기서 노력 안 해도 되겠네 라고 단정지으시면 그럴 운명이셨던 거죠.
21/03/26 17:44
이 주제는 과학적 사실에서 출발하더라도 결국 철학적 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점은 감안하시고, 순수한 결정론의 관점에서 볼 때 저나 글쓴분의 죽음은 필연적이며 결코 피할 수 없습니다. 그게 언제인지는 몰라도 반드시 닥쳐온다는 건 100퍼센트 확실하죠. 하지만 그렇다 해서 지금의 삶이 무가치한가요? 저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결정론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글쓴분이 이렇게 고민하는 것도 이미 정해진 일이고, 앞으로 어떤 식으로 결정을 내리게 될지도 이미 정해진 일이겠지요. 그럼 고민을 할 필요도 없지 않나요? 물론 그 고민 자체도 이미 예정되어 있는 것이겠지만 말입니다.
21/03/26 18:02
노력을 하든 안하든 흥선대원군님의 자유의지가 아님을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자유의지가 없음을 받아들이신다면 애초에 '내가~' 라는 생각이 틀린 생각이잖아요.
21/03/26 18:13
라고 생각해서 노력을 포기하든 노력하든
그게 흥선대원군님께 결정된 미래입니다 지금 고민하시는 것도 결정됐어요 가 결정론적 세계관 아닌가요?
21/03/26 18:20
니체의 '영원회귀/영겁회귀 (두 번역어가 혼용됩니다)'라는 개념을 참고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니체는, 들어보셨을수도 있었다시피, '신은 죽었다'라면서 신학 이후의 인간위주의 철학이 중요하다~ 라는 주제를 꺼내온 철학자여서, 당연히 '자유의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신이 죽음'이라고 했으면, '사람끼리는 막 살아도 된다~'라고 주장했을 법도 한데, 거꾸로 '영겁회귀'라는 주장을 꺼내서 자유의지에 대해서 상당히 이색적인 해석을 했습니다. 니체에게 있어, 신은 없습니다. 그건 역사의 영역이자, 사회가 만들어질때 발명품에 불과하다, 우리는 신을 극복하고, 넓게는 인간만의 도덕, 그러나 더 중요하게도 개인만의, 자신만의 도덕을 찾아야한다, 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자신의 시도 조차도 만물의 순서에 따라서 당연하게 등장한 것이라고 봤습니다. 냉장고에 어제 먹다 남은 음식이 있다고 칩시다. 어제 먹다남은 통닭이 있는데, 자유의지가 있다면 사실 우리는 이걸 한번은 아침에 먹을 수도, 점심에 먹을 수도, 저녁에 먹을 수도 있어야겠죠. 하지만 실제로는 어떠한 이유에 따라서 (단순한 끌림이든, 엄청난 생각이 있었든, 별 생각이 없었든) 어떤 특정한 개인은 아침에 그걸 먹고 치울 것입니다. 이걸 천번 반복해도 마찬가지이며, 만번 반복해도 그만입니다. 다시 말해, 대중매체에서 흥미롭게 다루는 평행세계에 대해서 니체는 '그런거 없다'라고 주장한 것이지요. 인생의 중요한 선택에서 '이 시점에서는 이거 말고는 방법이 없는데?'라고 할 뿐만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문제들, 우리가 무작위로, 생각없이 선택하는 것조차 이미 앞선 것들에 의해서 크게 영향을 받아서, 억만번을 반복해도 답이 정해져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니체의 우주에 있어서 인간은 그냥 배우에 불과합니다. 각본은 이미 과거로부터 쓰여졌습니다. 신이라는 존재가 써준 각본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상황, 과거의 역사, 그리고 미립적으로는 분자/원자들의 이미 배치된 위치에 따라서요. 그렇다면 흥선대원군님의 질문과 같은 질문이 등장하게 됩니다. "왜 노력해야하는가? 왜 살아야하는가?" 이미 정해진 역할을 다만 수행할 뿐이라면? 여기서 '힘에의 의지 (다른 번역어로는 권력에의 의지)'가 등장합니다. 니체의 세계에서 무언가가 일어나는 것은 오직 인간에 의해서만 일어납니다. 돌은 자신이 원해서 다이아몬드가 되지 않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실존하게 만들기 위해서 힘을 씁니다. 어젯밤에 치킨이 남아있는 이유는 어제 치킨을 시켰기 때문이고, 오늘 아침에 먹는 이유는 치킨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신이 죽은 니체의 세계관에서 남아있는 유일한 행위자는 인간입니다. 인간 없이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몇만번을 반복해도 우직하게 자기가 원하는 것을 향해서 달려가는 골때리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일억번 우주가 순환해도 어떤 인간은 민트초코를 원합니다. 물론 이러한 이유로, 니체의 철학이 나중에 전체주의와 파시즘에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니체는 세상이란 복잡하고, 서로 다른 의지가 충돌하는 곳이기에 어떤 "초인(Ubermensch)"이야말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낼 능력=운명(운명인 이유는 앞서 말한 결정론적인 세계관 때문)이 있다고 생각했죠. 물론 처음에는 아주 개인적인 의미로 시작했습니다. 누군가는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건네주려다도 물을 흘리지만, 초인은 다른 사람이 물을 건내주려고해도 한번도 쏟지않게 만드는 이론적인 존재이지요. 이들은 결과물이 있는 현자입니다. 해결책을 말해주는 수준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 자체가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입니다. 행복해야지! 하면 행복하고, 먹고 싶은게 있어! 하면 먹습니다. 우울해야지! 하면 누구보다 순수하게 우울해질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걸 지역적으로, 국가적으로 확대하면 어떻게 될까요? 독일인이 빵을 원할때, 빵을 줄 수 있는 존재,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히틀러와 추종자들이 해석한 파시즘이었습니다. 세상은 투쟁으로 가득하며, 강한 투사는 원하는것은 뭐든지 얻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결과 독일이 전쟁에서 박살이 나셨다는걸 아시다시피 좀 결론이 이상해집니다만, 니체의 결정론적인 세계는 투사들의 승리가 결정되있는 세계입니다. 다윈의 진화론이 잘못 이해되듯이 '무조건 강하다면 끝이야! 약육강식!'은 아니지만 (파시스트의 최후만 봐도 그렇죠. 강하면 끝이야!의 결말은 국토초토화 및 핵 투하!), 그래도 결국 어떤 투사는 지고 어떤 투사는 승리해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합니다. 그리고 그래야 세계가 흘러갑니다. 결정당했다고 그냥 밍숭생숭 아무것도 없다~ 가 아니라 아주 그냥 복마전인것입니다. 이런 모델은 어떠신가요?
21/03/26 19:28
니체가 결정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다고 봅니다. 유고 KGW VIII 3 14[79]와 14[81]을 보면 니체는 기계론을 명시적으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운동의 예측이 가능한 것은 의지가 언제나 '힘 소비의 극대-경제'에 따라서, 즉 매 순간 자신의 힘을 하나도 남김 없이 쏟아붓기 때문입니다. 자연과학에서 상정하는 기계론적-결정론적 세계관은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는 힘에의 의지를 표현하지 못합니다. "원인과 결과에 대한 믿음은 핵심 사항을 언제나 망각한다 : 생기 자체를." "힘에의 의지는 존재도 아니고 생성도 아니다. 오히려 파토스이며, 생성과 작용이 그 안에서 비로소 생겨나는 가장 원초적 사실이다."
21/03/26 19:57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기독교철학에 대한 비판을 염두만 하면서 말을 하다보니, 기계론과 자연과학에 대해서 니체가 비판적이었다는 요소를 제가 완전히 빼먹고 글을 적게 되었군요... 이건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Leef님께서는 니체를 전공하신 것 같으시니 (제 주전공은 문학비평이라서.. 이런 기회에 좀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이런 질문이 어떻게 받아들여지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쓸 때없이 강한 표현 죄송합니다)', 니체의 세계관에 있어서 힘에의 의지는 절대적인 힘이며, 동시에 영겁회귀로도 보여지듯이 앞으로 올 것을 결정하지 않습니까? 니체가 비판하고자 한 쇼펜하우어의 생의 의지처럼, 세상 자체를 구성하는 요소이며 힘이고 또한 그 외의 변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런 니체의 생철학 역시 결정론적인 요소가 없다고 하기에는" 힘들지 않을까 여쭈워봅니다.
아니면 여기서 '결정론'은 '자유 의지론'과 대조되는 어떤 철학에서 정해진 특정 계보에만 제한적으로 쓰일 수 있는 표현인가요?
21/03/26 21:46
전공자는 아닙니다 ^^; 사실 문외한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겠네요. 제 관련 지식은 니체 학회에 계신 백승영 선생님의 강의와 <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에 기반합니다. 이 점 감안하여 주시고, 오히려 제가 더 배울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백 선생님에 의하면 니체의 영원회귀는 1) 생기존재론의 완성, 2) 순간의 영원성 확보, 3) 실존적 결단의 촉구라는 세 가지 기능을 가집니다. 영원회귀는 돌이나 탁자 같은 어떤 동일한 사물의 회귀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물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KGW VIII 3 14[79])기 때문입니다. 존재하는 것은 매 순간 변화하는 힘에의 의지뿐이며, 그러므로 영원회귀는 힘에의 의지의 영원회귀일 것입니다. 백 선생님은 이것을 앞서 말한 힘 소비의 극대-경제와 연결시킵니다. 힘에의 의지는 매번 모든 힘을 남김 없이 발휘하면서도 평형을 이루지 않고 무한한 시간 속에서 자신의 활동을 이어간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힘에의 의지가 매 순간 자신의 목적에 도달함으로써, 순간은 영원과 같은 필연성과 의미를 얻게 됩니다. "무한히 작은 순간이 더 높은 실재이며 진리이고, 영원한 흐름으로부터 나오는 섬광에 대한 상이다."(KGW V 2 11[156]) 이것이 영원회귀의 첫 번째와 두 번재 기능입니다. 그런데 차라투스트라에서는 니체가 마치 동일한 사물의 회귀를 이야기하는 듯한 대목이 있습니다. 성문, 거미, 달빛 등이 영원히 반복되고, 그러한 것들은 굉장히 고통스러운, 극복해야 할 어떤 것으로 묘사되죠.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이냐? 스스로를 허무로부터 구제하기 위한 일종의 사고실험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장 극단적인 허무적 상태를 긍정함으로써 비로소 인간이 위버멘쉬가 된다는 것이죠. 우리가 잘 아는 <즐거운 학문>에서의 악마의 속삭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됩니다. 마지막으로 결정론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만, 저는 외부의 어떤 법칙(특히 인과법칙)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계론에 대한 니체의 비판이 맥을 같이 한다고 생각합니다. 살아 있는 힘에의 의지는 외부의 법칙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내생적(endogen) 운동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하셨다시피 니체에게 자유의지란 없습니다. 그것은 근대 인식론에서 전제하는 독립적인 주체에게나 가능한 것이니까요. 모든 것은 힘에의 의지의 본성을 따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로 힘에의 의지인 것입니다. 이상이 니체 사상에 대한 백 선생님의 설명입니다. 제게는 꽤 설득력 있었습니다만, 다른 분들께는 어떨지 모르겠네요 ^^; 꺼림칙한 면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영원회귀의 앞의 두 기능과 세 번째 기능이 따로 노는 감이 없잖아 있죠. 아시는 것처럼 니체가 워낙 체계성을 거부하고 모호하게 글을 썼던 터라, 이상은 명백한 니체 본인의 이론이라기보다는 백 선생님이 유고를 뒤져가면서 재구성한 것에 가까울 겁니다. 특히나 영원회귀는 논쟁적인 면이 많은 개념이라, Farce님의 생각도 틀렸다고 보기는 어렵겠지요.
21/03/26 22:17
"내생적 운동"이라니 진짜 멋있는 표현 배우고 갑니다. 문과 학자(?)인 니체는 기계론적인 '법칙'으로 자신의 생철학이 해석되는걸 경계하고 싶었나보군요!
저도 최대한 다양하게 학교에서 기회를 제공해주는 이런 저런 강의를 들으면서 제가 대충 이해했다고 생각했으나 또 그걸 표현하기에는 부끄러워서 묻어둔 것도 많은데, 그런걸 자유게시판 같은 곳에라도 더 올려봐야겠다고 다시 다짐을 해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거기서 뵐 수 있으면 좋겠네요. 저도 지금 가르침을 주시는 교수님께서 니체를 워낙 좋아하셔서, 제가 왜 어문과를 와서도 이런 고생을 하고 있나... 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그래도 배울려면 잘 배워보려고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이런 덧글을 만나서 참 좋았습니다.
21/03/26 18:38
슈뢰딩거 고양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뚜껑을 열어봐야 아는 겁니다.
미래가 정해져 있더라도 내가 어려운 시험에 합격하는지 못하는지는 열공해서 그 시험쳐봐야 알 수 있습니다. 합격할 미래인데 떨어질 것으로 생각하고 지레 공부를 안하는 것은 랜덤박스를 가챠를 안 열어보는 것과 같습니다. 운영진의 농간으로 그 가챠는 100% 꽝으로 설계됐다고 해도 우린 그 농간을 모르는데 랜덤박스를 안 열어보실 겁니까?
21/03/26 21:14
뭐 그런 거창한 거 빼고 봐도 노력해야할 이유는 많지요.
자유의지가 있든 없든 사람은 감각과 감정을 느낍니다. 노력은 아무 의미가 없어, 무쓸모야! 라고 주저앉을 수도 있지만 그러면 본인 스스로가 제일 비참해질 걸요. 그런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할 건 하고 쟁취해내야죠.
21/03/26 21:40
예전 뉴턴역학이 주 였던 시기는 모든 운동량이 정해져있고 미래가 정해져 있던 완전 결정세계관이었지만 요즘은 아닙니다.
양자역학과 카오스이론등에 의하면 미래의 완전한 결정및 예측이란건 없습니다. 인간의 정신이 뭔지, 거기서 파생되는 자유의지비스무리한 것의 정체는 뭔지는 저도 모르겠지만, 정확한 미래가 정해진게 아니라면 오늘 저녁 짜장면을 먹을 건지 볶음밥을 먹을건지 내 맘대로 고민하는 것 정도는 즐길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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