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시판
:: 이전 게시판
|
- PGR21 관련된 질문 및 건의는 [건의 게시판]을 이용바랍니다.
- (2013년 3월 이전) 오래된 질문글은 [이전 질문 게시판]에 있습니다. 통합 규정을 준수해 주십시오. (2015.12.25.)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8/03/30 23:19
부족하나마 아는대로 말씀드리면....매장 풍습이나 기타 문화들을 봤을 때 고구려와 백제는 어느 정도 문화권을 공유하고 있었고 신라는 좀 이질적이었습니다. 셋 다 같은 민족이란 개념은 오랜 기간 없었고요. 신라가 통일한 후에 나당 전쟁 하면서 고구려 유민들과 백제 유민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민족 의식 비스무리한 것을 조장했다고 보시면 될 겁니다.
18/03/30 23:30
근대의 민족주의와 민족문화의 형성 및 추동력은 '표준어'가 근간이 됩니다. 근대국가가 관료제와 산업혁명을 바탕으로 점점 국력의 기반을 형성하는 과정에 더하여 비료의 등장과 의학의 발달로 인해 폭증하는 '인민'들에게 '국민'이라는 사상을 주입시킨거죠.
근대 이전까지는 국가, 민족, 문화라는 개념보다 어느 왕조의 신민인가가 더 중요하던 시절입니다. 고구려, 백제 부흥운동이 있었다한들 몰락 직전의 지배층의 마지막 발악같은 것이고 땅을 파던 백성들은 바뀐 왕 밑에서 계속 땅을 파면 되는거죠. 그저 전쟁터에 끌려가지 않은것에 감사를 느끼면서요. 요약하자면 1. 언어, 문화적으로 고대국가의 강역과 현대의 연속성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2. 한 중 일 나름대로의 내셔널리즘이 중세와 근세를 걸쳐 형성된 것은 사실이지만 삼국시대까지 가서 따지는건 쪼까 거시기하다. 3. 팩트 - 그냥 삼국시대의 자료는 너무나 부족해서 알 길이 없다...정도가 되겠습니다.
18/03/30 23:54
고구려 백제는 서로 부여의 후예임을 자처했으니 민족적 동질감보다는 우리가 더 위대해 하는 경쟁의식이 있었던 것 같아요.
서로 같은 뿌리인 것은 인지했겠지만 동질감을 갖지는 않았고요.
18/03/31 00:18
현대의 민족개념과 규모의 차이가 있는 거지 당시 민족개념이 없었을 리 없죠. 당장 우리가 삼국시대일 때 중국은 오호십육국시대였는데, 왜 나라가(큰 나라만) 16개인데 5호인지 생각하면 뭐. 일반 백성들에게 국가의 개념이 어떠했는가는 모르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건 현시점에서 중요하지 않죠. 우리가 궁금해하는 역사의 토대는 귀족들이었을테니까요.
각자의 문화권에서 500년 넘게 고유의 영토와 문화를 유지했다기엔, 신라와 백제의 강역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 강역이었던 기간은 그리 길지 않죠. 고구려는 분명 그 전부터 연맹체든 뭐든 간에 일찌감치 '국가'였지만, 백제와 신라는 그 수준에 상당히 늦게 이르렀으니까요. 문화적 동질성을 얼마나 느꼈는지는 당연히 알 수 없지만, 그렇다고 백제와 신라가 서로보다 중국을 더 가깝게 여겼을 거라고 생각되진 않습니다. 상대적으로 더 '동질'하다고는 생각했겠죠. 보다 명확해진 건 삼국통일 이후겠습니다만, 그 전에도 상대적인 차이는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18/03/31 01:57
5호16국은 좀 다른 게 진나라와 한나라의 통일 왕조를 겪었다가 다시 쪼개진 것에 가까워서 비교 대상은 아니라고 봅니다.
춘추전국시대조차도 주나라의 의한 봉건제의 형태를 띄고 시작했기 때문에 비교가 어려울 거 같지만 굳이 비교한다면 이쪽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18/03/31 02:06
시대를 말하는 게 아니라 이름을 말하는 것입니다.
큰 나라가 16개지만, 민족을 기준으로 5호라 부르니까요. 나라당 하나의 정체성이라고 본다면 5호라는 건 이상하죠. 첫줄은 그 당시에도 민족개념은 있었고, 그 증거가 5호16국이다. 라는 말입니다.
18/03/31 02:52
(수정됨) 무슨 말씀인지 이해했습니다. 제가 글을 제대로 못 읽었네요.
그런데 당시 5호라는 개념은 이민족이라 불리는 개채들이 스스로로 같은 민족이라 여겨 스스로를 칭한 명칭이 아닌, 중국 한족이 본인과 이민족을 구분하기 위해 편의상 구분한 것에 가깝다고 봅니다. 중국 입장에서야 우리쪽을 편의상 동이로 불렀지만 당시 동이에 속한 모든 국가들이 서로를 같은 민족체로 인식했을 가능성은 의외로 낮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에서 5호라고 불렀다고 당사자들도 정말 그들끼리 민족체라 여겼다면 중국에서 같은 동이족으로 여긴 한반도내 부족국가와 왜, 읍루와 같은 전혀 이질적인 국가들도 같은 민족체적 동질성이 있었다는 말이니까요. 후대에, 그리고 외부에서의 시각과 내부에서 느끼는 생각은 전혀 다를 수 있다고 봅니다.
18/03/31 02:57
네. 그래서 저도 현대의 개념과 규모가 다르다고 말 한 겁니다.
다만 보다 가깝게 여겼을 가능성은 농후하다고 봅니다. 우리의 경우도 어쨌든 중국인이나 일본인이 유럽인보다도 멀다고 느끼진 않으니까요. 본문에선 '신라', '백제'를 고유문화라 했습니다만, 사실 그 내부에서도 동질성은 지금보다 적었다고 추측하고요. 내부의 동질성이 적었던 만큼 '더 가깝냐 덜 가깝냐'는 지금보다 더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18/03/31 19:19
백제하고 고구려는 서로 형제로 인식하고 있었고, 광개토대왕에게 신라가 왜구를 쫓아달라고 요청을 보낼때 보면, 고구려와의 동질성을 강조합니다. 신라는 지배계층이 유목(스키타이족)+남방계 인도, 아랍민족+부여계가 혼합되어 있다고 말이 나오니, 백제 고구려와는 약간 거리가 있죠. 그래도 서로 말이 통했다는 걸 보면, 동질감이 없다고 볼 순 없죠. 산하나 건너도 사투리가 생기는데, 말이 통할 정도면 혈연이 섞여있는 거겠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