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7/09/01 23:41:01
Name 신불해
Subject 원말명초 이야기 (13) 그곳의 버드나무는, 예전처럼 봄바람에 무사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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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로부터 1100년 전, 이 땅에서 펼쳐졌던 전투



 원나라는 중국 전체의 농민 반란군을 일망타진할 수 있었던 최대 규모의 군단을 보유하고도 이를 허무하게 날려버렸고, 이후 다시는 그 정도의 병력을 보유하지 못했다. 도리어 패잔병들이 적에 투항해서 숫자만 불려주는 역할만 했을 뿐이다. 당초 중국 남부의 반란군을 격파하고자 했던 목적은 완전히 실패하여 이제는 오히려 하북이 적에게 공략 당할 우려에 놓이고 말았다.



 각지에서 봉기한 반란군 세력은 황하의 맹진(孟津) 나루터를 지나 끊임없이 북상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곧 수도의 바로 앞마당까지 위협 당할 찰나였건만, 위기의 순간엔 언제나 불세출의 영웅이 존재하는 법이다.



 누구의 도움도 기대하기 힘들었던 시점, 갑작스레 나타난 뜻밖의 지원군이 있었다. 심구(沈丘) 출신의 의용병 대장, 차간 테무르(察罕帖木兒)가 1만 장병과 정예 철기병 부대를 이끌고 제국을 구원하기 위해 바람처럼 달려왔던 것이다. 그는 곧바로 하북을 약탈하는 부대를 공격하여 모두 쫓아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런 전공도 그저 한숨 돌리는데 지나지 않았다. 지금 물리친 병력들은 몰려드는 반란군의 선두 부대였을 뿐이다. 이윽고 최대 30만에 달하는 반란군 본대가 황하 이남 중모(中牟) 지역으로 몰려들고 있다는 정보가 전해졌다. 중모는 옛날 삼국시대 원소와 조조의 관도대전(官渡之戰)이 펼쳐졌던 장소다. 이 지역이 돌파당한다면 황하 이북으로 군사가 몰려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소식을 들은 차간 테무르는 지체하지 않고 부대를 이끌고 하남으로 남하, 먼저 중모에 도착해 자리를 잡았다. 이 지역이 뚫리면, 하북이 돌파 당하고, 제국은 멸망한다. 절대로 물러설 수 없는 결사적인 싸움이었다. 의용병이 진을 짜 포진하고, 정예 철기병대가 싸울 준비를 마친 그 순간에 수십만 반군이 도착했다. 흡사 넘실거리는 파도처럼 끝이 없는 숫자의 물결이었다.



 숫적으로는 상대조차 되지 않는 양 부대였지만, 오다가다 모인 농꾼들이 쟁기 하나 들고일어났던 반란군에 비해 차간 테무르의 의용병은 천하대란 이후 최소 3년 이상 전투를 경험하며 싸움에 익숙했던 정예병이었다. 더구나 그들은 용기백배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士卒賈勇決死戰), 차간 테무르라는 신뢰할 수 있는 장군을 모시고 있었다.



일당백(一當百)



 원사 차간 테무르 열전에서는 이 싸움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차간 테무르의 군사들은 한 사람이 적군 백 명을 감당하는 영웅적인 싸움을 벌이며 파도처럼 몰려오는 반군을 물리쳤다. 그동안 수십만 반군을 힐끗 보기만 해도 꼬리가 빠져라 달아나던 오합지졸 관군만을 상대하던 반란군으로서는 정말로 당혹스러운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때마침 하늘까지 그들을 도왔다. 전투가 이어지던 와중 큰 바람이 반군을 향해 불었고. 바닥의 흙을 쓸고 모래폭풍이 된 바람은 그들의 눈을 따끔거려 제대로 뜨지 못하게 했다. 전쟁의 천재였던 차간 테무르는 자신에게 찾아온 절호의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았다. 대군을 상대로 수비전을 벌이던 그는 이 시점에서 휘하 용사를 이끌고 오히려 적의 중심을 향해 역공을 가했다.



 그리고 이 역습의 부대를 지휘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차간 테무르 본인이었다. 사령관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적의 중심을 향해 돌진하는 모습을 본 장병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북소리와 함성 소리는 천지를 뒤흔드는 듯 했고, 그 맹렬한 공격을 정면으로 당한 반군은 고꾸라지듯 무너지기 시작했다.



 한번 무너진 반군은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더 이상 위협적인 전력이 아니었다. 모든 반군이 무기를 내던지고 필사적으로 살기 위해 도망쳤고, 그런 그들의 등 뒤를 의용병은 10리에 걸쳐 맹추격하며 정신없이 찔러댔다. 셀 수도 없는 숫자의 반군이 목 달아난 귀신이 되었다.



 단 한 번의 싸움으로 하북 전체가, 그리고 제국이 구원되었다. 이 기적 같은 전투로 차간 테무르의 명성은 전중국에 울려 퍼지게 된다. (1)



 차간 테무르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 더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하북을 지켜낸 그의 활약은 분명 고무적이긴 했지만, 잘 생각해보면 애당초 하북이 위협 당했다는 자체가 문제다. 제국의 중심부에서 먼 남부 지역 위주로 전개되었던 반란이 이제 직접적인 위협을 북방에 가하고 있는 셈이었으니 안심할 상황은 전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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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복통



 고우성 앞에서 탈탈이 군권을 빼앗기고, 각지에서 관군이 지리멸렬하게 패퇴하며 위협받는 동안, ‘원조 홍건군’ 의 유복통은 오랜 시간 동안 한 사람을 찾는데 몰두하고 있었다. 찾고 있는 사람은 바로 한산동의 아들 한림아. 이 시점에서 한산동은 죽은 지 벌써 4년이 지났건만, 송나라 황실의 후손을 자처한 그의 명분은 아직도 살아남아 있었다.



  유복통은 영리한 사람이었다. 최소한 아무런 기반도 없는 채 스스로 왕을 자처하지 않을 정도의 분별력은 가지고 있었다. 유복통 자신에게는 재물도, 명성도, 다른 어떤 기반도 없었다. 다만 송나라 황실 부흥을 돕는 최측근이라는 명분이 그에게는 있었다. 지금 전중국 내에서 들고일어나는 반란군 집단은 셀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감히 이쪽에서 먼저 선점한 ‘송나라 황족의 후예’ 라는 명분을 자칭할 정도로 배짱 좋은 사람은 있지 못했다. 유복통의 집단이 송 황실의 후손을 자처하는 한, 그들은 여타 반란군들 사이에서도 가장 독보적인 명분을 가질 수 있었다.



 때문에 그 핏줄이 필요했다. 필사적인 수색 끝에, 마침내 탕산(碭山) 협하(夾河)에서 한림아와 그 모친인 양 씨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째서 그동안 이들 모자는 유복통을 찾아가 의탁하지 않고, 여태껏 이 산 속에 계속 숨어 있었을까? 워낙 벽지에 몰래 숨어 사느라 중원의 소식을 듣지 못했을 수 있고, 혹은 세력을 잡은 유복통에 의탁하려 해도 그가 자신들을 죽이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고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유복통은 그들을 해칠 생각은 없었다. 유복통은 데려온 한림아에게 소명왕(小明王)이라는 호칭을 붙였다. 죽은 한산동이 명왕이었으니, 그 아들은 작은 명왕이라는 것이다. 양씨 역시 황태후가 되었다. 이렇게 세워진 나라의 국호는 당연히 ‘송’ 이었다. 이 송나라의 연호는 용봉(龍鳳)이었는데, 이 몇 년간의 단명 왕조를 옛 송나라와 구분하여 ‘용봉 정권’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글에서도 편의상 앞으로 이들을 용봉 정권으로 부르기로 하겠다.



 이 용봉 정권은 지금 전중국을 흔드는 반군들 중에서도 가장 선두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당연히 그 강력함이나 세력 역시 압도적인 수준이었다. 이들을 물리치기 위해 하남평장 타식파토로(答失八都鲁)가 일군을 이끌고 달려와 맞서 싸웠으나 오히려 허주(许州) 장갈(长葛)에서 펼쳐진 일대 전투에서 대패하여 많은 병사를 잃고 말았다.



 타식파토로의 명예를 위해서 덧붙이자면, 그는 결코 무능한 장수라고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원말의 여타 몽고 지휘관 중에서는 매우 유능한 축에 속했던 명장으로, 일전에는 형양(荊襄)의 도적 무리 10만을 물리치고 양양을 평정했던 큰 전공을 세운 적도 있었다. 용봉 정권과의 싸움에서도 1355년에서 1357년까지 그들의 준동을 최대한 묶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의 노력 덕택이었다. 그런 명장도 이들 '홍건군 본대' 와의 싸움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장갈의 야전에서 대패했던 타식파토로는 차간 테무르가 전중국을 놀래켰던 그 장소, 중모로 이동해 세력을 수습하려 했다. 하지만 적의 매서운 공격이 그곳까지 이어지자 또다시 패배하여 많은 군수물자를 잃어버렸으며, 아들이었던 볼로드 테무르(孛羅帖木兒) 역시 적의 포로가 되어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때 타식파토로를 돕기 위해 하남행성 평장 류카락부카(劉哈剌不花)가 일군을 이끌로 달려오고 있었다. 장갈에서 패배한 타식파토로가 사방에 구원 요청을 보냈고, 대다수 장군들은 겁에 질려 움직이지도 못했지만 평소 의기가 높았던 류카락부카만은 아군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출병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본진이 도착하기에 앞서 먼저 보냈던 정탐 부대로부터, 적군이 대대적으로 진영을 비우고 이동했는데 그 행방을 알 수 없다는 연락이 왔다. 잠시 생각하던 류카락부카는 전후 사정을 파악하고 이렇게 말했다.



 "아마도 적이 중모의 타식파토로 군 진영을 습격하러 간 모양이다. 이제 와서 우리가 그곳으로 가도 이미 전투가 끝난 뒤겠구나. 기왕지사 이렇게 되었으니 차라리 매복하여 적의 퇴각로를 급습하는 게 낫겠다." (是必襲答失八都魯營耳。我行已緩,不及事,不若以精銳斷賊歸路,覆之必矣) (2)



 형세판단을 내린 류카락부카가 구원하러 가는 대신 매복을 선택함으로써, 타식파토로군은 앞서 언급했던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 다만 예측대로 승리를 거둔 적은 다시 자신들의 진영으로 회군하였고, 그 길목에 매복해 있던 류카락부카는 이들을 급습,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수많은 포로를 잡았으며, 그들이 사로잡아 가던 볼로드 테무르 역시 구해낼 수 있었다.



  이 타식파토로의 아들 볼로드 테무르라는 인물은 향후 원말의 역사에서 꽤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따라서 이 싸움은 어쩌면 역사의 큰 분기점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겠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언급하기로 하고, 일단 류카락부카의 지원 부대가 합류하며 한숨을 돌린 타식파토로는 몇 달 동안 추가로 병사를 징집하여 힘을 기르고는 그 해 12월, 재차 역공을 가해 태강(太康)을 공략했다. 이 싸움에서 타식파토로는 전날 패배의 패배를 되갚아줄 수 있었다. 패전한 유복통과 한림아는 기존의 근거지를 버리고 달아나야만 했다.



 용봉 정권이 이때 패전해 위기를 맞이했던 까닭은 타식파토로라는 외부적 요인도 있었지만, 그들 자신의 내부적 문제도 없지 않았다. 한림아를 옹립한 유복통은 당연하게도 자신이 정권의 일등 공신이며 실력자가 돼야 한다고 여겼다. 그런데 소명왕 한림아는 두준도(杜遵道)라는 인물을 총애했고, 벼슬 역시 두준도가 승상이 되고 유복통은 평장정사, 유복통의 아우 유륙(劉六)은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에 머물렀을 뿐이었다. 정권 창출의 최대 공신이었던 유복통의 눈이 돌아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유복통은 수하를 시켜 두준도를 암살하고는, 한림아의 눈치 따위를 보지 않고 스스로 승상이 되고 여기에 태보(太保) 직위를 더했다. 그리고 정권의 구석구석에 자신의 영향력을 넒혀 사실상 헌제를 모시는 조조와 같은 위치가 되려고 했다. 타식파토로의 역습이 펼쳐진 시기가 바로 이 시기였다. 내분과 외환이 모두 겹친 것이 강성했던 용봉 정권이 잠깐이나마 주춤 거렸던 이유였다. (3)



 행운이 겹치며 기대하지도 못했던 반격의 찬스를 만들어낸 타식파토로는 1356년 꼬박 1년 동안 적과의 전투에 전념해 적지 않은 성과를 이루었다. 3월에 펼쳐진 큰 싸움에서 타식파토로와 유복통은 오전부터 초저녁에 이르기까지 격렬한 전투를 멈추지 않고 계속했다. 어찌나 싸움이 급박했는지, 사령관이었던 타식파토로가 말위에서 떨어져 적병에 노출되는 위기가 찾아왔을 정도였다.



 이때 다른 누구보다 그 아들 볼로드 테무르가 나서 황급히 아버지를 말위에 태워 진영으로 돌려보내고, 본인이 직접 활을 잡고 적을 쏘아 죽이며 싸움을 독려하다가 어두컴컴한 저녁이 돼서야 겨우 군을 물렸다. 이렇게 문자 그대로 생사를 돌보지 않고 분전한 그들 부자의 활약 속에 마침내 12월, 원나라 군은 태강에서 적 수만 명을 격파하고 적장 나문소(羅文素)를 참살했으며 태강 지역을 완전히 평정하는 결정적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는 아들을 도성에 보내 이 승리를 보고했고, 크게 기뻐한 순제에게 하남행성 좌승상 겸 추밀원지사 직을 받아 천하에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총애도 잠시였다. 1357년 10월, 조정에서 파견 나온 장군 타리마시리(达理麻失理)와 연합 작전을 펼칠 계획이던 타식파토로였지만, 유복통 군의 역습으로 타리마시리군이 참패하고 지휘관 본인도 전사하자 그는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잠시 후퇴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순제는 어째서 타식파토로가 머뭇거리냐며, 그가 우물쭈물 움직이지 않았기에 패전한 것이 아니냐고 질책했다. 홍건군은 결코 가볍게 볼 상대가 아니었건만, 그런 적을 몇 번 물리치자 순제는 오히려 승리를 당연하게 여겨 왜 더 잘 싸우지 않느냐고 따지기만 했던 것이었다.



 조정에서는 끊임없이 싸움을 독촉하는데, 정작 현지에서는 함부로 속전을 펼칠 상황은 전혀 아니었다. 전전긍긍하며 분만 삭이고 있는 중, 그런 타식파토로의 곤란한 상황이 입소문을 타고 유복통의 귀에까지 전해졌다. 지략이 비상하던 유복통은 그런 상황 속에서 한 가지 교묘한 계략을 떠올렸다.



 그날 이후 타식파토로와 홍건군의 진영 근처를 비롯해 군대가 조정과 통하는 길목 사이사이에, 어쩐 일인지 정체불명의 밀서들이 여기저기에 퍼뜨러져 있는 일이 왕왕 발생했다. 사람들은 그 밀서를 주어 내용을 보고는 저마다 고개를 갸웃거렸는데, 타식파토로를 닦달하기 위해 나섰던 조정의 사신이 그 중 하나를 입수하여 수도에 가져오게 되었다.



 그 내용은 타식파토로가 유복통과 몰래 밀서를 주고받으며 둘이 짜고 음모를 꾸미는 등의 이야기였다. 어린아이 수작 같은 짓이었지만, 순제라는 사람의 수준엔 그 정도 수준이면 차고도 넘쳤다. 조정은 타식파토로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는 적과 내통하기 때문이 아니겠냐며 더욱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평생 나라를 위해 분골쇄신하고, 음모는 알지도 못하며 지난 몇 년간 대적을 정면에서 맞상대하면서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았던 타식파토로는 이런 순제의 너무한 처사에 울분을 참지 못했다. 분노와 억울함, 실망감에 빠져 시름하던 그는 결국 제 화를 참지 못하고 군중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어려운 시기에 대들보 같았던 한 명장을 어처구니 없이 잃어버린, 아니 '놓쳐버린' 순제와 원나라였다. (4)



 그 이후의 전개는 한편의 블랙 코미디다. 타식파토로가 죽은 지 채 2년이 지나지 않아 관중과 산동, 곧 중국의 동서가 모두 홍건군에게 유린되었으며 제국의 이중 수도인 상도(上都)와 대도 중 상도는 아예 함락 당했고 대도는 순제가 천도하여 도망갈 것을 의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실로 자업자득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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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북방과 중부가 모두 대 전란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있을 때, 이 사태를 여기까지 오게 만든 결정적 인물인 장사성은 또 다른 꿍꿍이를 품고 있었다.



 탈탈이 이끌고 왔던 수십만 대군과, 그 부대가 모조리 흩어지며 여기저기로 난립하고 난 이후의 회동 지역은 전쟁과 약탈의 여파로 이듬해 엄청난 가뭄에 시달렸다. 제대로 농사를 짓지 못하고, 가진 비축분과 종자마저 약탈을 당해 털렸으니 수확이 잘 되었을 리 없었다. 굶주림은 고우에 머물던 장사성의 부대에도 찾아왔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



 여기서 장사성은 중국 장강 이북에서 싸우던 모든 반란군 지도자들 중 가장 현명하고 또한 가장 탁월한 결정을 내렸다. 지금 수십만에 달하는 반군들이 모두 불나방이나 되는 것처럼 북상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막는 차간 테무르나 타식파토로 등 제국 최후의 방벽이라 할 수 있는 장수들과 얽히고 설키며 지리한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럴 필요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너희들은 얼마든지 북방으로 가라. 우리는, 나는 남으로 갈 것이다.



 한산동은 하북 난성이 그 집안의 본래 집성촌이었고, 유복통의 주 활동 범위는 하남과 안휘 북부 지역이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북방인이었으며,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도 중국 북방의 그것이었다.



 장사성은 그렇지 않았다. 그가 살았던 염성은 동으로 바다, 아마 유복통이나 한산동이 평생 보지도 못했을 드넒은 바다를 접하고 있었으며 이 광대한 중국을 북과 남으로 가르는 거대한 양자강이 그 바다로부터 이어져 있었다. 태생이 상인이었던 그는 평생 동안 대운하를 거슬러 오르며 장사를 했다. 강남, 그 세상에서 가장 부유하고도 아름다운 지상낙원에 대한 소문은 그가 평생에 걸쳐 갈망하던 무엇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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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성, 장강을 건너다




 장사성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을 남으로 잡았다. 그의 동생 장사덕이 총대장이 되어 일군을 이끌고 장강을 건너 먼저 창주(常熟)를 점령했다. 장강 이남에 전진기지를 마련한 부대는 계속된 전투 끝에 평강(平江), 즉 소주를 점령했다. 과거 송나라 사람들이 '지상의 천국' 이라고 찬양하고 유럽의 마르코 폴로가 감탄했던 그 땅 위의 천당이, 태주의 소금쟁이 장사성의 것이 되었다.



 장사성의 아우 장사덕은 명장이었다. 최소한 장사성 부대 내에서는 그보다 나은 장수가 없었다. 장사성 역시 군사 지휘관으로서 동생을 적극 신임했는데, 형의 신뢰를 받으며 부대를 이끈 장사덕은 소주에 이어 호주까지 함락하는 기염을 터뜨렸다. 일찍이 그 두 도시만 풍작이면 그것만으로도 천하를 배부르게 할 수 있다는 두 위대한 도시가 장 씨 형제의 손에 들어온 순간이었다. 장사덕은 그 이후로도 송강(松江) 및 상주(常州) 역시 함락시켰다.



 동생의 분전 끝에 강남에 기반이 마련되자 장사성은 고우에 약간의 미련도 남겨놓지 않은 채 소주로 살림을 옮겼다. 그리고 이 지역의 이름을 고쳐 융평부(隆平府)라 부르고, 승천사(承天寺)를 새로운 정권의 관사로 정했다. 그곳에 궁전을 차린 장사성은 화살 세 개를 용마루에 쏘았다. 자신이 이 도시를 점령했다는 일종의 표식이자 퍼포먼스였다. (5)



 장사성의 소주 점령은 여러 가지 큰 의미가 있다. 제국을 먹여 살리는 젖줄이었던 강남이 적에게 점령되었다는 정치적, 지형적 의미야 당연히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다만 또 다른 측면에서도 큰 의미가 있었는데, 이 지역이 바로 당대 중국 문화를 이끌어가던 선진지역, 중국 문화와 유행의 일번지였다는 측면에서도 눈여겨볼만하다.



 한참 전쟁 이야기가 나오던 중에 김이 샐지 모르는 일이긴 하지만, 이 시점에서 잠깐 문화 사(史) 적인 측면으로 이야기를 돌려 보려고 한다. 문화, 문학, 미술이야말로 어쩌면 당시를 가장 잘 보여주는 시대의 돋보기라고 할 수 있다. 원대의 문화를 한 마디로 말하자면 대중문화의 전성기였다.



 원나라에서 한인 지식인 계층은 여러모로 차별받는 위치였다. 극단적인 경우에 원대 유학자는 창녀, 거지의 사이에 속해 있는 존재에 불과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6) 이런 극단적인 주장에 반발하여 그런 이야기는 터무니없고, 차별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는 시각도 있다. (7) 일단 확실한 것은, 한인은 원나라 정부 조직의 최고직에는 거의 오르지 못했다. 어차피 최고직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의 숫자는 그 많고 많은 중국인 중 극소수에 불과하니 이는 큰 문제까진 아닐지도 모른다. 또 다른 문제이자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과거시험이었다.



 원나라는 과거시험을 거의 실시하지 않았다. 애당초 원나라가 처음으로 과거 시험을 실시한 것이 인종이 즉위한 이후부터였고, 연도로 따지면 1315년이 원나라 역사상 첫 과거시험이 실시된 시기였다. 지금 이 글은 원나라 말기를 다루고 있는 글인데, 인종은 글의 첫 부분에서 이름을 언급한 바 있는 황제다. 그가 약속을 어기고 형의 아들 대신 자신의 아들을 황위에 올렸고, 이를 권신 엘 테무르가 문제 삼아 반란을 일으켰다는 내용 말이다. 말하자면 황혼기의 문턱에 서 있는 임금인데, 나라가 거의 말기에 접어들고 나서야 처음으로 과거 시험이 열렸다는 소리다.



 과거 시험의 절대적 횟수 자체도 적고, 그만큼 경쟁도 천문학적 수준으로 치열했다. 거기다가 한인 지식인만을 위한 일종의 TO는 더욱 좁아 흡사 바늘구멍 수준이었다. 그 좁디좁은 바늘구멍에 비해 중국이라는 나라는 오죽 넒으며, 중국인의 숫자 역시 오죽 많은가. 대다수 사람들에게 있어서 과거 시험은 있으나 마나 한 수준이었다. 그나마도 바얀처럼 과거 시험 자체를 아예 폐지하려는 사람도 있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충분한 배움을 갖추고도 허송세월하며 시간만 보내야 했다. 삼대의 역사에 통달하고 경전을 달달 외우며 고매한 정신과 높은 미의식을 가졌다 자부하고도 이 세상에 아무런 공헌도 하지 못하고 초야만 지켜야 했던 것이다.



 흔히 옛 시대의 소위 '먹물' 을 조롱하는 표현으로 '공자왈, 맹자왈' 이라는 말이 있다. 이른바 '실생활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 만 달달 외우고 공부하며 뻗댄다는 심리가 이 표현에는 숨어 있다. 옛 사(士)들이 필사적으로 갈구한 학문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내가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확실한 것은, 그렇게 '공자왈, 맹자왈' 했던 사람들 중 집에서 놀고 먹으려 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들 자신들은 언제나 실천적인 의미에서 학문을 배웠다. 내가 이렇게 성인의 학문을 공부하여, 조정에 출사해, 어지로운 세상을 바로잡을 것이다. 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럴 길이 막혔다. 머릿속에서는 세상을 구할 온갖 계책이 물 샘솟듯 꿈틀거리고, 가슴속의 의기는 천하를 뒤덮을 듯한데, 그들에게 주어진 역할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이 느꼈을 좌절감은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



 그리고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먹고사는 문제도 있었다. 굶어 죽지 않으려면 뭐라도 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해서 말단 관청의 서리 따위를 하긴 싫었다. 행정 조직에 몸을 담은 사람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관(管)이고, 또 하나는 현지에서 채용하는 이(吏) 였다.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관이 되고 싶지 이를 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원대에서 관이 될 수 있는 한인은 소수에 불과했다. 정말 아무런 방도가 없지 않은 이상 지식인들은 서리 따위가 되려고 하지 않았다. 봉급도 형편없고, 상관에게 모욕 당하는 것도 감내하기 힘들었다. 서리 중에서도 한몫 챙기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았다. 그들의 위에 있던 몽골인이나 색목인들이 한문도 제대로 알지 못할 때 술수를 부려 자신 몫을 그만큼 빼돌리는 것이다. 여하간에 볼썽 사납기는 매한가지였다.



 때문에 당대 지식인들은 어지간히 가난해도 이는 하고 싶지 않고, 이를 경멸하는 풍조가 있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일반적으로 동아시아 문명의 지식인에게 있어 가장 고차원적인 저술은 역사 서술이었다. 옛 시대의 역사를 기록하고, 평하고, 교훈을 찾는다. 어디까지나 과거에 일어났던 현실의 일을 주 텍스트로 삼아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개했다. 당연한 소리지만 돈 벌려고 하는 저술 활동은 아니었다. 옛 춘추전국시대 제나라의 재상 최저가 주군을 살해하자 그 기록관은 죽간에 '최저가 주군을 살해했다' 고 썼기에 처형당했다. 기록관의 동생은 다시 '최저가 주군을 살해했다' 고 작성했고, 그러자 최저는 그 사람을 죽였다. 기록관의 막냇동생이 '최저가 주군을 살해했다'고 또 다시 작성하였으니, 최저도 결국 손을 놓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중국 역사저술 활동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야기는 분명 후대에 큰 울림을 줄 수는 있지만, 당장 오늘 먹고살기 위해선 필요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어떻게든 먹고살아야 한다. 무엇을 해서 먹고 살 것인가? 아니 그전에,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일생 동안 책을 보며 공부한 선비가 잘 하는 게 무엇이겠는가. 그야 당연히 글을 쓰는 것이다. 그럼 먹고살기 위해 무엇을 하면 되는가? 글을 쓰면 된다. 그렇다. 그들은 먹고살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것이 원대 문학이다.



 본래 이전까지의 중국 문학에서 소설(小説)이 차지하는 영역은 매우 협소했다. 역사가 짦았다는 것은 아니다. 육조 시대에 이미 세설신어(世說新語) 같은 지괴소설(志怪小説) 장르가 있었고, 더 이전으로 보면 거의 수천년 전에 쓰인 산해경(山海經)도 여기에 속하는 장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지괴소설들이 신비하고 기괴한 이야기의 간략한 뼈대를 묘사했다면 당나라 시기의 전기(傳奇) 장르는 그런 뼈대에 살을 붙여 내용을 풍부하게 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픽션을 배제하고, 신비주의적 이야기에 대해 되려 사람을 미혹하는 요사스러운 일로 치부하던 지식인들의 입장에서 이런 글들은 그저 황당무계할 뿐이었다. 당나라 전기 소설의 전성기에 이르면 꼭 괴기나 신비를 다루지 않고 현실을 반영하는 이야기들도 없지 않았으나, 한계가 있었다.



 그런 소설이라는 장르는 원대에 걸쳐 일대 대변혁을 맞이했다. 굳이 긴 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그 유명한 '삼국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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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말 명초 시기 나관중(羅貫中)의 손에 의해 저술되어 시대를 막론한 불후의 역작이 된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이 시대가 남긴 걸출한 문화유산 중에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삼국지라는 소재 자체는 이미 나관중이 손을 대기 이전에도 민간에서 인기 있던 이야깃거리였다. 송나라 시대 소동파의 글에서,



 "유현덕의 패함을 듣고는 미간을 찡그리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었고, 조조의 패함을 듣고는 기뻐하고 쾌재를 불렀다.(至說三國事, 聞劉玄德敗, 輒蹙眉, 有出涕者, 聞曹操敗, 卽喜, 唱快.)" (8)



 라는 구절이 있었다는 것이 유명하다. 나관중은 이 누구나 좋아하던 이야깃거리를 하나의 장편 소설로 엮었다.



  재미있는 것은, 나관중 이전부터 각지의 민담 등으로 인기 있는 소재였던 삼국지였지만 실제 삼국지연의는 그런 민담보다도 역사적 기록에 좀 더 가깝다는 것이다. 보통 소설 삼국지에 대해 가장 자주 나오는 말이 '거짓말' 과 '과장' 이다. 소설 삼국지가 역사 그 자체로 믿었던 사람이 이후에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자, 소설에 허풍이 많다고 비난하는 셈이다. 그러나 삼국지연의 이전의 삼국지물에 비할시 삼국지연의는 가장 역사적인 요소를 잘 살린 삼국지이며,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실제를 잘 반영된 삼국지이다.



 삼국지연의의 가장 기초적인 참조 자료는 말할 것도 없이 정사 삼국지다. 그런데 삼국지연의 이전의 각종 삼국지물은 그렇지 않았다. 시장 거리의 이야깃꾼들이 정사 삼국지의 각종 내용을 달달 외웠을리 만무하다. 그들에게 가장 일차적인 소스는 각지의 민담이며, 둘째가 삼국지평화(三國志平話) 같은 화본(畵本), 즉 일종의 대본이다. 여기에 비해 삼국지연의는 정사 삼국지, 자치통감, 배송지 주 등 역사적 기록에 먼저 근거하여 작가 자신의 상상력으로 살을 붙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인터넷의 발달로 방대한 분량의 사서 속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내용을 쉽게 찾아 검색할 수 있다. 혹시 존재가 궁금한 기록이 있다면 데이터베이스에서 검색하기만 해도 그 기록에 바로 닿을 수 있다. 때문에 수백여 인물의 열전이 나누어져 있고, 그 인물들에 대해 여러 주석들이 어지럽게 붙어 있는 와중에도 어렵지 않게 큰 틀을 파악할 수 있다. 반면에 그 시대에는 그럴 수 없었다. 하나의 이야기를 서술하기 위해 각 인물들의 기록에서 상충되거나, 이 사람의 기록에 없는 게 저 사람의 기록에 있다면 엄청난 분량의 텍스트 속에서 그걸 '물리적'으로 찾아야만 한다. 방대한 분량의 서책을 옆에 두고 파악해야 하는 일이니 검색만 하면 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삼국지연의 같은 소설이 나왔다는 것은, 나관중이라는 사람 자체가 상당한 지식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예전이라면 그는 그만한 공력을 들여 120화나 되는 소설을 창작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바뀐 시대가 이 정도의 인물에게 소설을 쓰게 강요했고, 그로 인해 역사에 남을 불후의 명작이 탄생했다.



 원대 소설의 발전으로 이후에도 명대의 서유기(西遊記), 청대의 홍루몽(紅樓夢) 같은 역작들이 탄생했다. 소설이 원대부터 점진적으로 발전했다면, 반대로 중국 희곡(戱曲)은 현대의 서구극 도입을 제외한다면 이 시대가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였다. 중국의 희곡은 그 이전에도 원나라 시대의 잡극(雜劇)의 영역에 미치지 못했고, 이 후에도 이 수준은 회복하지 못했다. 오히려 점차 퇴보하여 청대의 지방화와 경희에 이르면 내용이 옛 연극을 재생시킨 정도에 머물러 중국문학자들도 다루기를 꺼려할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원잡극이야말로 중국문학 사상 중국의 고전 희곡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9)



 원잡극은 원말 명초의 부조리한 세계가 발전시킨 문학 장르다. 잡극을 쓴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먹고살기 위해 썼기 때문에 그 내용은 지극히 통송적이었다. 통속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글을 쓰던 사람들이 동시에 중국 최고의 문학가들이었기 때문에 수준은 대단히 높았다. 또한 이들 중 일부는 돈이 많은 부자, 귀족들에게 극을 선보여 돈을 벌었기 때문에 대단히 귀족적이기도 했으며, 그렇게 봉사하는 지배층이 몽골 이민족이었기 때문에 내용 역시 이국적인 요소가 섞였다.



  통속적이며, 귀족적이고, 중국적이며, 이국적이었다. 권력을 증오하며 권력에 아부했다. 세상이 더할 나위 없이 부조리했기에, 그 부조리함은 하나의 예술이 되었다. 중국 희곡사를 정립한 왕국유(王國維)는 원잡극을 이렇게 평했다.



  "진정한 희곡." (10)



 이보다 더한 칭찬도 달리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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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상기(西廂記)




 그런 원잡극 작가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을 한 사람만 꼽자면 왕실보(王實甫)이며, 그런 왕실보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을 하나만 꼽자면 바로 서상기다.



 서상기는 왕실보의 완전 창작는 아니다. 그 이야기엔 당나라 시대 전기 소설인 앵앵전(鶯鶯傳)이라는 원본이 있다. 앵앵전의 이야기를 재미없을 정도로 최대한 간략하게 줄여보면 다음과 같다. 장생과 앵앵이라는 두 남녀가 서로 사랑을 나누고, 앵앵은 결혼을 원한다. 하지만 장생은 머뭇거리더니 과거에 급제하여 더 좋은 혼처를 찾아보기 위해 머뭇거리고, 결국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 장생은 이후 자신이 '불장난' 에 빠지지 않았다고 친구들에게 자랑한다.



 최대한 줄여 내용 전달이 너무 간략해진 탓도 없지는 않겠지만, 이래서는 소설 속의 장생이라는 남자는 쓰레기라도 불려도 할 말이 없다. 더구나 장생은 의기양양하여 나중에 자신의 행적을 자랑하지만, 반면에 앵앵은 "가슴이 찢어질듯한 오열" 속에서도 어쩔 수 없어서 사랑은 포기할 뿐이다. 하나의 사랑을 나누며 장생은 한 번의 불장난을 즐긴 셈이지만, 사회적 약자인 앵앵은 일방적으로 희생해야만 했다.



 도무지 공감하기 어려운 감정선이지만, 애당초 이 소설 자체가 1,000년도 훨씬 이전 시기에 족벌, 문벌이 극도로 강조되던 당나라의 귀족 남성이 쓴 이야기라는 것을 고려해야만 한다. 그 시절의 귀족 남성에게 있어 이런 '불장난'은 남성으로서의 판타지였고, 동시에 그런 한순간의 '일탈'에 빠지지 않고 '요물' 에 홀리지 않음은 자랑할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500년의 세월이 지나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귀족들이나 즐기던 문화였던 '문학' 은 부유한 서민들에게도 개방되었다. 서민 대중들이 보고 싶은 것은 귀족 남성의 불장난 따위가 아니었다. 그런 시류를 포착하여, 왕실보는 이 짦은 전기 소설을 절묘하게 내용을 바꿔 희곡으로 리메이크했다. 바뀐 내용을 최대한 짦게 언급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서생 장공이 보구사에 살던 작고한 전 승상의 딸 최앵앵과 만나 사랑을 나눈다. 그들은 앵앵의 하녀 홍랑의 도움을 받아 평생을 기약하지만, 앵앵의 모친은 "우리 가문은 평민 사위는 두지 않는다." 고 딱 잘라 거절한다. 그러자 장공은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돌아와 앵앵과 결혼식을 올린다.



 원본 앵앵전에서는 앵앵 본인은 물론이고 그 모친도 딸을 장생과 이어주려고 안달이었지만, 정작 장생이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이다가 과거에 급제해 앵앵을 버렸다. 새로 바뀐 이야기에서는 평민에 불과한 남성인 장공이 승상의 딸과 로맨스를 나누고, 그 집안의 반대를 이겨가며 결국 사랑을 쟁취한다. 그 과정에서 대가문의 규수인 앵앵은 자유, 그리고 사랑을 추구하며 자신을 가로막는 여러 신분의 장벽과 고난을 극복한다. 사랑하는 두 정인이 그 사랑 하나를 믿고 지극히 봉건적인 옛 규습과 맞서 싸우는 것이다. 한 번의 불장난을 즐긴 후 여자를 버리고 본인은 출세하여 좋은 집안과 결혼한 뒤, 이를 거들먹거리며 친구들에게 자랑하는 원본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 둘의 사랑도 사랑이지만, 왕실보가 이 리메이크 버전 앵앵전인 '서상기' 에서 공을 들인 인물은 따로 있다. 바로 시녀인 홍랑이다. 원본 앵앵전에도 홍랑의 존재는 있지만, 서상기에서 그녀는 오히려 진짜 주인공과 같은 모습을 보인다.



 그 시대의 지체 높은 명문 대가의 규수는 언제나 삼엄한 감시를 받아, 자유연애는 꿈도 꾸지 못했다. 핍박받는 시녀인 홍랑은 노부인의 명령을 받고 당초 앵앵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지만, 이후 노부인의 허위와 가식, 그리고 장생과 앵앵의 '진정한 사랑' 을 확인하고 깊은 감동을 받는다. 그리고 온갖 지혜와 열정을 동원하여 두 명의 사랑을 이어주기 위해 노력한다.



 왕실보는 홍랑에게 그런 스토리를 부여함과 동시에 소탈함, 낙관적, 총명, 용감함을 부여했다. 노부인과 귀족 청년 '정항' 이 두 사람의 사랑을 방해하려고 하면 그때마다 나서 그들의 허위와 위선을 지적하며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주었다. 이야기의 절정부에 두 사람은 홍랑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하는데, 이에 장공이 금과 비단으로 사례하려고 하자 오히려 화를 내며 이를 질책한다.



 귀족 청년의 '불장난' 이었던 이야기는, 왕실보의 손에서 반봉건적 성격의 자유연애와 끊어지지 않는 사랑 이야기로 변모했을 뿐만 아니라, 원본 이야기에서는 조연에 불과했던 일개 하녀, 홍랑이라는 등장인물이 오히려 주인공들보다 더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운 인물로 보이도록 탈바꿈 되었다. 현대의 중국인들조차도 남의 사랑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사람을 '홍랑' 이라고 일반명사화 해서 부를 정도이니, 그 영향을 짐작 해 볼 수 있다.  



 나는 이러한 변화에서 어떠한 종류의 깊은 감동을 느낀다. 현대인의 기준에서 보자면, 2,000년 전의 사람들이나 1,000년 전의 사람들이나 500년 전의 사람들이나 비슷비슷한 종류의 사람들처럼 느껴지는 기분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런 과거의 시대에서도, 시간이 지나며 사람들의 의식은 꾸준히 개화 되고 새로운 이상의 가치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1300년 전의 당나라 소설에서는 한 남성이 여성의 마음을 가지고 놀고 자신의 급제를 기뻐하며 친구들에게 자랑한다. 그러나 500년이 지난 원나라의 한 잡극에서, 같은 남성은 사랑을 위해 신분의 차이마저 극복하며, 이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일개 하녀의 용기와 헌신이었다. 시대가 이를 그렇게 만들었다.



 그런 이야기를 쓴 왕실보는 문학적으로 높은 경지를 가졌다. 그리고 그래야만 했다.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서양식 연극이 배우가 행동과 동작으로 이야기를 재현한다면, 원잡극은 별다른 도구나 장치 없이 텅 빈 무대에서 이야기를 표현했다. 말하자면 차라리 '보는 것' 이라기 보다는 '듣는다' 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왕실보는 듣는 이가 심상을 떠올릴 수 있는 노래를 극의 중간중간에 계속해서 집어넣는데 집중했다



 "푸른 하늘이 낀 하늘, 노란 꽃이 깔린 방, 가을 바람은 세찬데 북녘 기러기는 남으로 향하네. 누가 머리를 희개 하고 술에 취하도록 했던가. 언제나 떠나는 사람은 눈물뿐이라네."



 심지어 그는 서상기 내에 베드신도 노래로서 묘사했다.



꽃신은 겨우 반 뼘,
버들허리는 딱 한 줌.
부끄러워 머리 들지 못한 채,
원앙침으로 막는구나.

쪽에는 금비녀 떨어질 듯,
삐뚜름한 머리 더욱 멋지구나.

단추를 풀고,
허리띠 끌렀더니,
고운 향이 글방에 가득.

얄미운 사람 나를 괴롭히네!
허! 어찌 아니 얼굴을 돌리는가?
부드러운 옥, 따뜻한 향내가 가슴 가득.

아, 무릉도원이 따로 없네!

춘정이 밀려드니 꽃빛이 변하누나!
버들허리 천천히 흔들리더니,
꽃술이 가벼이 터지고,
이슬 방울방울 모란꽃이 피어난다.




 보통의 잡극은 1본(本) 4절(折)의 분량의 형식을 지키고 있다. 반면에 서상기는 5본 20절의 파격적인 장편이다. 여기에 그 반봉건적 내용과 남녀 간의 자유분방한 연애라는 내용에 있어 당대부터 "『서상기』는 음란함을 가르치고, 『수호전』은 도둑질을 가르친다." 는 비판도 있을 정도로 문제작이었다. 물론 인기는 대단했다.



 그 외에 관한경(關漢卿) 같은 작가는 어부의 아내나 기녀를 주인공으로 다루기도 했으며, "땅이여. 좋고 나쁨도 구분하지 못하면서 어찌 땅이라 하는가? 하늘이여, 선량한 자와 나쁜 자를 구분하지 못하니 하늘로서 부끄럽지 않은가?" 같은 대사를 통해 지배층을 대놓고 비난하기도 했다. 심지어 관한경은 직접 화장을 하고 무대에 올라가 연기를 하기도 했기 때문에, 그 작품에서는 장면 안배와 시선 처리가 다른 작가들의 잡극보다 돋보였다.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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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극이 원대에 접어들어 절정으로 치달았다면, 도자기에 있어서 이미 중국 문명은 전대인 송자(宋磁)에서 완벽함을 발견했다. 최소한 중국인의 관점에서 송나라의 도자기는 이미 완벽이라는 영역에 도달해 있었다. 매사가 그런 법이지만, 완벽할수록 간결하고 산뜻해진다.



 하지만 원나라 시대에 접어들며 절대적이었던 송자의 위치 역시 흔들렸다. 송자의 완벽함은 최소한 중국 내에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문제는 이를 구입하는 사람들의 입장이다. 당시 중국의 도자기는 이슬람을 넘어 유럽에까지 수출되었고, 신비로운 동방 문명의 보물을 구하던 그들은 송자 특유의 단아한 완벽함보다는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 느껴지는 화려함을 원했다. 장사하는 입장이니 파는 쪽의 취향에 맞춰 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채색 원료는 충분했다. 저 멀리 중앙아시아 바다흐샨(Badakhshān) 지대의 훌륭한 청색 연료가 몽골의 교통로를 통해 중국 내에 충분히 전파되었던 것이다. 이 연료로 백자에 그림을 그렸고, 선명한 청색이 도자기 면에 떠오르면 멋들어진 청화 백자가 탄생하게 된다.



 진순신은 원나라 시기의 문화를 설명하며 초속(超俗)과 속(俗)이라는 멋들어진 비유를 사용했다. 그 말대로, 원나라의 문화는 이 초속의 문화와 속의 문화가 양극단에서 치열하게 겨루고 있었다. 송자의 완벽함을 사랑한 중국 도공들은 완벽한 여백의 미에 화려한 그림 따위를 더하는 일에 저항을 느꼈을지 모른다. 돈을 벌기 위해선 그렇게 해야만 했지만, 완벽하다고 여긴 작품에 쓸데없이 무언가를 더하는 게 지극히 속되게 여겨졌을 수 있다.



 그렇다고 속물스럽다고만 생각하며 가만히 있는 것은 장인의 정신에서 용납하기 힘든 일이다. 그들은 어떻게든 그 속됨 속에서 속됨을 넘는 것을 추구했다. 이것이 초속(超俗)이다. 그리고 이를 뛰어넘은 작품은, 시대를 지나고도 살아남았다.



 원말 시기에 나왔던 소설이나 잡곡은 무궁무진했을 것이다. 그 중 절대다수는 일단 당장 팔고 보자는 식의 속(俗)을 극도로 추구했을 테고, 그런 풍속 소설은 시대의 폭풍을 지나지 못하고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반면에 그 바닥까지 떨어진 속됨 속에서도 끝까지 나름의 초속을 추구한 작품들은 세월을 지나고도 여전히 살아남아 그 명성을 떨치고 있다. 도자기의 이야기로 되돌아가자면, 원대 도자기의 채색은 중국 도자의 전통을 단절시키지 않았다. 그 시대의 위대한 도자기 장인들은 오히려 이를 정면 돌파하여 살아남았고, 또 다른 전통을 후대에 남겼다.



 원대에는 야만스러운 폭력의 힘이 모든 문화의 방면으로 꿈틀거렸다. 이는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지극히 야성적인 그 힘마저도 용광로 같은 이 문명의 문화를 꺼뜨리지 못했고, 오히려 그 속으로 파고 들어가 거센 자극을 주면서 점진적인 발전에 기여했다. 원나라를 이은 명나라는 한족 왕조의 부활이라는 측면에서는 송을 표방했지만, 문화적인 면에서는 오히려 섬세한 송나라보다는 거칠면서도 명료한 원나라를 이어받았다. 명나라는 원나라의 후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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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찬(倪瓚), 우후공림(雨後空林)




 이 시대의 예술인 중 가장 유명한 이름들이 있다. 그림으로는 원말사대가(元末四大家), 시문으로는 오중사걸(吳中四桀)이 바로 그 이름들이다. 사대가는 황공망(黃公望), 예찬(倪瓚), 오진(吳鎭), 왕몽(王蒙)이며, 오중사걸은 고계(高啓), 양기(楊基), 장우(張羽), 서분(徐賁)를 일컫는 말이다.



 황공망과 오진은 1354년, 탈탈이 고우성 앞에서 순제에게 탄핵 당하던 그 시점에 세상을 떠났다. 둘의 나이가 당시 86세, 75세였으니 당시로선 장수했던 셈이다. 말년에 이르러 혼란한 세상을 보긴 했지만, 정말로 끔찍한 천하 대란까지는 보지 않았던 그들이다. 예찬과 왕몽은 그보다 나이가 어렸다.



  이 중 황공망, 예찬, 왕몽은 그들 생전부터 큰 명성을 있고 서로 교류했으나, 오진만은 생전에 명성이 그들만 못했고 다른 삼대가와 교류도 없었다. 그의 그림이 팔리지 않는데 비해 옆집에 살던 화가 성무(盛懋)의 그림은 늘 잘 팔렸기에, 아내가 둘을 비교하며 푸념하자 오진은 이렇게 대꾸했다고 한다.



 "지금은 그렇지만, 20년 뒤에는 거꾸로 될 거요."



 과연 오진은 죽은 뒤에 대가로 인정받아 그 그림은 큰 가치를 지니게 된다. 그렇다고 해도 성무가 실력 없는 화가는 아니다. 그 역시 상당한 기교를 지닌 대화가였다. 일설로는 중국인이 그림을 볼 때, 오른쪽에서 시작해 왼쪽을 보는 습관을 교묘하게 계산하여 그림을 그렸다고도 한다.



 다만 그는 장인 정신보다는, '기술자' 로서 그 자신의 프로의식에 충실했다. 명나라의 서예가이자 화가였던 동기창(董其昌)은 성무의 그림을 보고 "교묘하기는 하나 그 그림에 법칙이 있다." 고 평했다. 훌륭한 기교를 구사하지만 일종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틀을 벗어나면 그림이 팔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 차이가 성무와 오진의 평가를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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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무의 그림




 오진으로서는 다행히도, 말년에 이르러 그의 화풍은 재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그 속을 싫어하는 성격은 그림뿐만 아니라 생활에도 배어있어, 졸부들이 찾아와 자랑하기 위해 그림을 사려고 하면 벼락같이 화를 내며 내쫓아 버렸다고 한다. 그의 그림은 단순함을 추구했다. 튀어나온 것이 있으면 깎고, 깎고, 또 깎아 기어코 간결함을 추구했다. 그렇게 개성을 숨기는 것이야말로 그의 개성이었을지 모른다.



 사대가 중 황공망의 작풍도 그와 비슷했다. 속됨은 최대한 걸러냈다. 그림에는 분명 산이 있고 물이 있지만, 결코 강조되지 않는다. 잘 그려보자던가 이렇게 그려서 보는 사람의 눈을 한번 현혹해보자던가 하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중국 회화사에서 황공망의 위치는 서예의 왕희지 같은 위치라고 할 수도 있다. 최소한 황공망 이후의 화가들은 모두 한 번씩 그를 흉내 내었다고 봐도 좋을 정도다. 놀라운 것은 황공망이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 그의 나이 50세가 가까워서 였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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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공망의 그림





 예찬은 보통 예운림(倪雲林)으로 불렸다. 그는 젊은 날 그림이 팔리지 않아 부인에게 꾸중을 받았던 오진이나, 그림을 그리지 전까지만 해도 말단 관리로 지냈던 황공망과 달리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자랐다. 부족함 없이 자라 어려움도 없었고, 싫은 것을 해야 할 필요도 없던 그의 그림은 지독하게 깔끔하기 그지없다. 쓸데없다고 생각하는 건 절대 그리지 않았다.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예운림의 그림을 보며 재미없다는 평을 내렸다. 당연하다. 오직 예운림 본인만을 위한 그림이니, 타인을 위한 배려가 있을 리 없었다. 그의 그림에는 일종의 법칙이 있는데, 예운림은 절대 그림에 사람을 그려넣지 않았다. 그의 많은 그림 중에 사람이 그려진 것은 오직 단 하나의 그림 뿐이다. 주위 사람들이 어째서 인물을 그리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세상에 사람 따위가 있었던가?"



 예운림은 지독한 결벽증이 있었다. 손님이 오고 가며 마당의 나무에 가래를 뱉자 그 나무를 베어버렸다. 당대의 유명한 시인이었던 양유정(楊維楨)이 신발에 술을 담아 장난삼아 마시며 예운림에게 이를 권하자, 그 자리에서 왈칵 쏟아버리고는 바로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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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몽, 구구임옥도




 왕몽은 다른 사대가들과는 또 달랐다. 초속을 추구하며 필요 없는 것은 모조리 배제했던 다른 화가들에 비해, 그는 숨이 막힐 정도로 압도적인 그림을 그렸다. (한산동과는 달리 진짜로)송나라 황족이자 예술가였던 조맹부(趙孟頫)의 외손자였던 왕몽은 먹을 듬뿍 사용해 생략이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정도의 그림을 그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결과로 인해 그는 쓸데없는 것을 모두 배제했던 예운림과 같은 결과를 만들었다. 이 세상에는 없는 풍경. 사람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는 그림을 말이다.



 그런 왕몽은 행적 역시 다른 사대가들과 달랐다. 작품 속에서뿐만 아니라 실생활에서도 초속을 추구했던 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왕몽은 적극적으로 조정에 들어가 관직을 차지하고 사람들과 교류했다. 그러다가 조정이 혼란하여 가망이 없어 보이자 전략적으로 이를 박차고 나왔다.



 마침내 태주의 소금장수 장사성이 호주, 소주를 장악하게 되자 이들 사대가 역시 선택을 해야만 했다. 황공망과 오진은 그 당시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신발에 술을 담아 마셨던 양유정은 끊임없이 장사성의 초빙을 받았다가 끈덕지게 거절했다. 예운림은 초빙에 응하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고, 장사성의 동생 장사신이 그림을 청하자 화를 내며 거절하다 사자에게 두들겨 맞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왕몽은 장사성 정권에 들어가 일했다. 예운림은 두들겨 맞기는 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왕몽 역시 거절하려면 거절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는 건 본인에게 어느 정도 욕심이 있었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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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계




 소설과 희곡, 도자기와 그림을 지나 이제 시문에 이르렀다. 시문의 대표였던 오중사걸은 앞서 말한 대로 고계, 영기, 장우, 서분 네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뒤의 세 사람의 명성을 모두 합쳐도 맨 첫 번째인 고계 한 사람만 못하다. 그들의 수준이 크게 떨어진다기보다는, 고계의 명성이 너무 높기 때문이었다.



 고계는 원말 명초는 물론이거니와, 명나라 역사를 통틀어서도 가장 훌륭한 시인으로 손꼽힌다. 정작 그가 명나라가 개국한 이후로 고작 6년을 더 살았을 뿐이라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말이다. 이후 300년을 더 이어진 명나라는, 그러나 결국 그 나라에서 6년을 살았을 뿐인 고계보다 위대한 시인을 결국 더 배출하지 못했다.



 앞서 오중사걸이라고 했지만, 당대엔 또 유명한 시인들을 일컬어 북곽십우(北郭十友)라고도 했다. 십우는 4걸 가운데 양기를 제외한 나머지 3명과 왕행(王行), 고손지(高遜志), 당숙(唐肅), 송극(宋克), 여요신(余堯臣), 여민(呂敏), 진칙(陳則) 등을 일컫는다.



 사대가니, 사걸이니, 십우니 무협지에서나 볼법한 표현이 난무하는 것은 그만큼 소주 근처에 훌륭한 예술가들이 많고, 그런 예술가들을 동경하는 풍조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저 십우 중 본래부터 소주 출신이었던 사람은 왕행과 고계 밖에 없다. 나머지는 타지에서 소주로 몰려온 사람들이었다. 그만큼 소주는 중국 전역의 뛰어난 예술가들을 끌어모으는 장소였다.



 고계는 1336년에 태어났고, 홍건적의 난이 처음 발발했을 때 16살이었다. 집안은 명문 대가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유복한 환경으로, 어렸을 때는 구김살을 모르고 살았다. 18살의 나이에 결혼했고, 이때가 장사성이 처음 거병했던 시기였다.



 마침내 장사성이 이 지역에 당도하여 소주와 호주를 장악하고, 계속해서 정복 활동을 펼치던 그 혼란한 시기에 난데없이 고계는 여행을 떠났다.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시문을 보면 젊었던 고계는 어지로운 세상을 만나 여러모로 혼란해 하고 있었다. 동시에 자신의 무력함 역시 여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고계의 그 대단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문을 읽다 보면 묘한 친숙감이 느껴진다. 그 이유는 고계의 시문에서 젊은 그의 심정이 절절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보통 역사를 주름 잡았던 인물들은 크건 작건 인간성이 느껴지지 않는 부분이 있다. 아마 그것이 이른바 영웅적인 면모일 것이다. 반면에 고계에서는 언제나 소시민적인 감성이 있었다.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전전긍긍하고, 무언가 해야 할 것 같은데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알 수 없고, 세상을 구하고 싶은데 구할 방법은 알지 못했다. 그러면서 아예 그런 속세와 담을 쌓고 나 자신만 알자고 생각하려고 해보기도 하지만, 본성이 착해 빠진 그는 그러지도 못해 마음이 무거웠다.



 고계의 그런 행적에 대해서는 차후에 더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아무튼 왕몽, 예운림, 양유정 등에게 추파를 보내던 장사성 정권은 당연히 고계에게도 관직에 오르라는 제안을 했다. 고계 자신은 이를 거절했지만, 장사성 정권에는 자신의 지인들이 있어 애매모호한 관계는 유지하고 있었다.



 하루는 그런 고계가 주(周)라는 검교(檢校 : 관직명)에게 초대받았다. 장사성 정권 아래서 일하던 주검교는 술을 대접하던 중, 춤추고 노려하는 고려 여자아이가 자신의 집에 둘 있다고 말하며 그들을 데려왔다.



 그리하여 눈 앞에 나타난 두 명의 고려 여자아이를 고계는 이채롭게 바라보았다. 그는 이 날의 경험을 기억하며 조선아가(朝鮮兒歌)라는 시를 지었다.




朝鮮兒髮綠
조선에서 온 아이 머리 색깔 검푸른데
初剪齊雙眉
두 눈썹과 나란하게 머리카락 잘랐네
芳筵夜出對歌舞
잔치 자리 밤에 나와 노래하며 춤추는데
木綿裘軟銅鐶垂
부드러운 무명옷에 구리 고리 드리웠네
輕身回旋細喉囀
가볍게 몸을 돌려 가녀리게 노래하니
蕩月搖花醉中見
달빛 속에 떨리는 꽃 취한 중에 보이누나
夷語何須問譯人
이국의 말이라고 통역에게 물을 필요가 있을까?
深情知訴離鄕
그 깊은 정은 고향 떠난 원망인 줄 내 알겠건만






 검푸른 머리카락의 두 고려여자 아이가 밤중의 연회 자리에서 춤을 춘다. 부드러운 무명옷에 구리 고리가 드리우고, 몸을 사뿐히 움직이며 가녀린 목소리로 노래한다. 달빛 속에서 꽃이 취한 듯 간드러지는 그 목소리는, 본래라면 알 수 없는 이국의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



 하지만 통역 따위가 없어도, 고계는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건만 같았다. 원망의 말. 슬픔의 말. 고향을 그리워하는 말.




曲終拳足拜客前
곡 마치자 발 모으고 손님들께 절하네
烏啼井樹蠟燈然
나무 위선 밤새 울고 촛불은 가물대네
共訝玄菟隔雲海
모두들 현도 땅은 구름바다에 막혀 있는 곳이라 놀라는데
兒今到此是何緣
아이들은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을까?
主人爲言曾遠使
주인은 말하기를, "내 일찍이 사신 갈 때"
萬里好風三日至
"만리 길을 순풍 타고 삼 일 만에 도착했소."
鹿走荒宮亂寇過
"사슴 노는 궁궐에는 도적 떼가 지나갔고"
鷄鳴廢館行人次
"닭이 우는 폐관에서 사신 행차 묵었다오."
四月王城麥熟稀
"사월인데 왕성에는 보리 아니 익은 탓에"
兒行道路兩啼饑
아이들이 길가에서 배고프다 함께 울었소"
黃金擲買傾裝得
"가지고 간 황금으로 그 아이들 사서"
白飯分餐趁舶歸
"쌀밥 먹여 배 태워서 돌아왔소."





 고려는 이역만리 먼 곳이다. 그곳의 아이들이 어떤 인연으로 이곳까지 왔단 말인가? 모두들 놀라워하자 주인이 나서 대답했다. 장사성 정권은 고려에도 사신을 보냈다. 그 역할을 맡고 고려에 간 주검교였지만, 당시의 고려 역시 나라가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전국토를 유린하고 있었던 왜구 때문에 백성들의 삶은 지옥 그 자체였고, 궁궐 근처에서는 도적떼가 들끓고 있었다.



 당장 오늘조차 버티기 힘든 지옥이 된 고려에선 농사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거둘 수확물도 없었고, 굶주린 아이들은 지나가는 어른을 붙잡고 배고프다 울었다. 그런 아이를 본 주검교는 딱하게 여겨 황금을 주고 아이들을 사 왔다. 그리고 돌아가는 배에 태워 쌀밥을 먹이고, 자신의 집에 데려와 사용인으로 쓰고 있는 참이다.




我憶東藩內臣日
생각건대 동번이 신하 나라였던 그때
納女椒房被褘翟
초방에다 바친 미녀 궁중 옷을 입히었지
敎坊此曲亦應傳
교방에 이 곡 응당 전해졌을 것이니
特奉宸遊樂朝夕
황제 곁서 잔치하며 조석으로 즐겼으리
中國年來亂未鋤
중국에는 근래 들어 난리가 계속되어
頓令貢使入朝無
조공 오는 사신 전혀 들어오지 않누나
儲皇尙說居靈武
황태자는 영무 땅에 있다고 말하는데
丞相方謀卜許都
승상은 허도에다 자리 잡을 생각하네





 고계는 술잔을 들고 그 아이들을 보며, 깊은 상념에 잠겼다. 동번, 즉 고려 출신의 황후 기 씨는 순제와 결혼해 황태자를 낳았다. 지난날 고려는 두 번의 일본 원정 부담 등으로 큰 고난을 받았다. 그리고 지금 고려의 기 씨가 낳은 황태자는,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조정에서 파벌 다툼의 한 축이 되어 안 그래도 흔들리는 나라를 망치고 있었다.



 어쩌면 이것은 고려의 복수일까. 그들이 원나라에게 당한 고통스러운 세월이 고스란히 되돌아온, 소리 없는 아우성일까.



 고려 아이들의 춤을 본 고계의 상상력은 황태자와, 그의 적이었던 볼로드 테무르의 파벌 다툼에까지 미쳤다. 이 일의 자세한 정황은 이후에 설명할 일이 있을 것이다. 옛날 안록산의 난 당시 당현종의 황태자는 영무 땅으로 달아나 나라의 부흥을 꿰했다. 이 당시 황태자는 볼로드 테무르의 반대 세력인 코케 테무르의 부대에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허도에 자리를 잡은 승상이란 말할 것도 없이 조조다. 여기서 고계는 볼로드 테무르를 조조에 비유했다. 이 시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이 난다.




金水河邊幾株柳
금수하 시냇가의 버드나무 몇 그루
依舊春風無恙否
예전처럼 춘풍 속에 그대로 잘 있는가
小臣撫事憶升平
못난 신하 태평했던 지난날을 생각하며
尊前淚瀉多於酒
술병 앞에 쏟는 눈물 술보다도 더 많다네






 금수하는 원나라 대도의 궁전 앞을 흐르는 강이다. 그곳의 버드나무는, 옛날처럼 봄바람에 무사한가. 나는 지금의 시간을 어루만지듯 음미하면서 천하가 태평했던 옛 시절을 회상한다.



 그러자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손에 든 술잔이, 흐르는 눈물로 넘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1) 원사 권 141 차칸 테무르 열전
(2) 원사 권 188 류카락부카 열전
(3) 명사 권 122 유복통 열전
(4) 원사 권 142 타식파토로 열전
(5) 명사 권 123 장사성 열전
(6) 정사초(鄭思肖), 대의략서
(7)『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김호동 저 pp. 158 ~ 163
(8) 소식,『동파지림(東坡志林)』
(9) 김학주, 원잡극선
(10) 위와 같다
(11) 중국문명대시야, 베이징대학교 중국전통문화연구중심
(12) 원말사대가에 대해서는 진순신 이야기 중국사의 서술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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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블빠
17/09/01 23:58
수정 아이콘
원나라는 한족들 잘 받아들이고 인재 기용만 잘했어도 좀 오래 나라가 굴러 갔을거 같군요...
류지나
17/09/01 23:59
수정 아이콘
이런 고퀄리티의 글을 공짜로 봐도 되는지 황송스러울 정도네요...
유스티스
17/09/02 00:00
수정 아이콘
와... 감사한 글입니다. 두고두고 잘 읽겠습니다.
펠릭스
17/09/02 00:28
수정 아이콘
이야...... 진짜 이야... 라는 말 밖에 안나옵니다.
Liberalist
17/09/02 00:35
수정 아이콘
이 글을 보면 순제는 정말 망국의 군주다운 아둔한 인사였다는 느낌이 듭니다.
탈탈을 그 모양 그 꼴로 쳐낸 뒤에 일이 그 지경이 되었으면 그걸 반면교사로 삼기라도 하던가요.
자유감성
17/09/02 01:34
수정 아이콘
햐 이런글을 공짜로 봐돞되나 싶을정도로 고퀼이네요
cluefake
17/09/02 01:39
수정 아이콘
순제 트롤러...어마어마한 트롤러..
엄청난 고퀄의 글, 감사히 읽겠습니다.
17/09/02 02:04
수정 아이콘
너무나도 감동적입니다.
17/09/02 02:13
수정 아이콘
정말정말 잘읽었습니다
루크레티아
17/09/02 03:36
수정 아이콘
나관중이 여기 있군요..
BibGourmand
17/09/02 04:56
수정 아이콘
아.. 기가 막힙니다. 감사히 보고 갑니다.
sen vastaan
17/09/02 05:49
수정 아이콘
역시 대마는 망하려면 안에서 썩어야...
독수리가아니라닭
17/09/02 06:14
수정 아이콘
제가 출판없자라면 책으로 내자고 할 텐데...
김보노
17/09/02 08:07
수정 아이콘
이 글을 무료로 본다는게 황송할 지경입니다.. 매번 감탄하고 감사하며 읽고 있습니다.
Neanderthal
17/09/02 08:29
수정 아이콘
진짜 단행본으로 책을 내도 될 것 같아요...
스웨이드
17/09/02 10:04
수정 아이콘
아니 이거 정말 감사합니다!!!
에인셀
17/09/02 10:31
수정 아이콘
압도적인 글이네요. 푹 빠져서 정신없이 읽었습니다.
17/09/02 10:40
수정 아이콘
요즘은 2주에 한번이나 집에 와서, 댓글 달거나 추천을 거의 못합니다.
그래도 신불해님 글은 꼭 보면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글에서 20대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어느 길로 가서 무슨 일을 하시더라도 글은 놓지 마십시오.
신불해님 같은 분이 20~30년 내공을 더 쌓아 책을 내놓으면 정말 고전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웃겨요
17/09/02 11:15
수정 아이콘
이거 결제해드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너무 고퀄입니다.
임나영
17/09/02 14:29
수정 아이콘
감사하다는 말밖엔 드릴게 없네요
17/09/02 15:35
수정 아이콘
오늘은 원말의 문화이야기네요 부제가 필요할것만같네요 크크크 좋은 글 읽었습니다
칼라미티
17/09/02 23:05
수정 아이콘
읽다가 너무 좋아서 소름이 돋네요...고계 이야기는 예전에 올려주신 다른 글에서 흥미롭게 읽었습니다만 이렇게 다시 보니 또 새롭군요.
8년째도피중
17/09/03 13:16
수정 아이콘
신불해 님 글에서 '나' 라는 존재를 언급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처음 보는 일이군요.
글을 쓰면서 어떤 느낌이랄까 자부심이랄까 그런게 느껴지는 것 같아 부럽기만 합니다. 글 정말 잘 쓰십니다.
역사 서술에 뜻을 둔 많은 이들이 부러워(혹은 시기)하고 있습니다. 크크
미움미움
17/09/04 22:29
수정 아이콘
제가 피지알에서 유머 게시판 말고 댓글 다는거 거의 처음인것 같은데 진짜 감탄 밖에 안나옵니다. 책 쓰시면 꼭 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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